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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한 회복 - 박재연
이 책 표지에는 ‘삶의 균열 앞에서 나를 돌보는 연습’이란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가 붙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균열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균열을 어떻게 슬기롭게 봉합하고 메워갈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스스로는 균열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균열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형제들과의 균열, 부모 자식간의 균열, 친구와 사회생활에서의 균열까지 수많은 균열 속에서 살아간다.
저자 박재연 선생은 아직 젊은 분이라 인생을 통달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도 ‘죽음교육 상담전문가’면서, ‘수련 감독’이다. 리플러스 인간교육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며, 죽음교육상담 전문교수기도 하다.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한국비폭력대화센터(NVC) 강사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엄마의 말하기 연습》이란 책은 오랫동안 부모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화 훈련과 맘스라디오 방송을 중심으로 쓴 그녀의 저서다. 그녀는 〈연결의 대화〉워크숍 프로그램을 개발해 갈등 중재와 집단대화, 대화 상담을 진행하면서 인간의 내면세계와 상호관계에 관한 《죽음학 교본》, 《죽음교육 교과서》등 심리적인 책을 내기도 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인생의 고비마다 찾아오는 상실 사건으로 흔들릴 때마다 온전한 나를 찾고 단단해져야 한다.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복잡한 사건들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 큰 상실로 상처를 입고 자주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한 무너짐 속에서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고 돌보면서 살아가야 한다. 상실은 대개 죽음과 이별을 떠올리지만 살면서 겪는 상실은 그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갑작스러운 이별, 죽음처럼 명료한 상실이 있는가 하면 학창 시절 겪은 지독한 소외감과 따돌림, 폭력의 두려움 같은 상징적 상실도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사고나 질병 등 외상적 상실, 부모의 이혼이나 실종 같은 예기치 않은 상실도 있다.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연락 단절과 같은 모호한 상실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결과를 통하여 상실을 하나의 ‘사건’으로 정의하고 결론 지으려 하지만, 상실은 복잡하고 모호하게 마음에 파고든다. 어린 시절에 가족 안에서 받은 상처와 그로 인한 상실부터 사랑하는 사람 혹은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 일터에서 알게 모르게 나타나는 상실의 형태들까지 - 가까운 이의 죽음과 다가올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애도까지 - 우리는 살면서 종종 이유 없는 허전함과 아픔의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까지 - 그것은 왜 찾아오는가?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지키며,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는 없는가?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은 저자가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이다.
“인생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상실은 우리에게 비탄이라는 깊은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비탄은 애도의 과정을 거치게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부러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아도 된다.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그날 소심한 한 아이의 놀이형태를 보고 놀이터에서도 울었다.”그러면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만난 다정한 아이 혹은 다정한 어른은 누구였나요? 그 만남이 당신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남겼나요?”
생각해 보면 나는 나름대로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 생각되지만(?), 주변에서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부모를 많이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과 다양한 만남을 통해서 아이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게 되는지 알게 되는데도 말이다. 아이의 허세와 지혜는 예쁘게 섞여 어른들에게 뉘우침과 깨달음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어느 정도 자기 인식 능력이 있는 어른들만이 이 깊은 가르침을 알아차린다. 아이들에게 배우지 못하는 부모나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는 부모는 결국 소중한 것을 잃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부모로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만큼, 아이도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행복과 성장을 위해 또 부모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을 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이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른, 아이의 진심을 받아들이는 어른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이다. 혹시 “당신은 어른으로서 체면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아이의 말을 무시하거나 억누르지는 않았나요?”또 한 번 묻는다. 바로 당신에게.
저자의 고백이 참으로 흥미롭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내 마음속에는 늘 ‘화목한 가정’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그 간절함 때문에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녹녹지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성숙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고, 큰 갈등을 두려워한 나머지 단 한 번의 부부싸움도 없이 갈라섰다.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나는 아들과 함께 싱글맘의 삶을 시작했다. 배우자의 습관적인 신체 폭력으로 이혼을 선택했던 지인이 나에게 “나는 네 남편처럼 돈도 벌어다 주고 너를 때리지도 않고 외도도 하지 않는다면, 절대 아이를 두고 이혼하지 않았을 거야”는 말을 했다. 그때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지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서로의 차이를 대화로 더 잘 풀어보지 못하고 서둘러 포기해 버린 대가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철없던 엄마인 나를 용서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혼이란 이별은 사랑의 종말이 아니다. 이별은 관계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며, 삶의 또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이어가는 일이다. 우리 모두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하고, 상실 이후에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길어야 하고, 아이에게도 그런 희망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상처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 사랑은 더 이상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존중하는 태도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처 내기도 하지만, 사랑만이 그 상처를 돌볼 수 있다.
사랑으로 상처받았지만, 사랑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 줌의 따뜻함, 하나의 온기, 한 줄기 빛으로 남게 되길.
그리고 오늘의 당신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엄마가 너무 바빠서 함께 시간을 못 보내서 미안해”라는 말 대신에 “오늘 하루 종일 네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지금 너랑 시간을 보내게 돼서 정말 기뻐”라고 말해 보자. 죄책감은 아이에게 죄의식이 아닌, 부모의 진심을 전하는 따뜻한 말로 바뀔 수 있다. 말하기 훈련은 내 마음도 다독여준다. 부모는 아이에게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죄책감에 잠기기도 하고 아이에게 좋은 존재가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감정의 기저에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사랑해서 미안하고, 미안해서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 그렇게 우리는 죄책감을 사랑의 언어로 바꿀 수 있다.
〈타이타닉〉호 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지며 전 세계를 강타했다. 1912년 실제 있었던 침몰사고를 배경으로 하는데, 가난한 화가 잭과 상류층 여성 로즈는 배에서 우연히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갑작스러운 배의 침몰이라는 사건으로 위기에 부딪힌다. 혼돈 속에 둘은 탈출을 시도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한 잭은 좁은 목재판 위에 로즈만 올려두고 자신은 차가운 바닷물에 잠긴다. 그녀에게 “살아서 우리가 약속한 삶을 살아 내라”고 말한다. 결국 구조된 로즈는 깊은 상실에도 불구하고 잭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잭을 기리고 느끼고 기억한다.
사랑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때로는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이타성과 용기를 꺼내게 한다. 보잘 것 없던 한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능력을 발휘하는 특출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랑? 다 부질없다. 언젠가 떠날 사람인데 뭘 그리 애쓰나? 적당히 상처받는 게 현명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너나 없이 너무 바쁘다. ‘바쁘다 보니 정신 없었어, 죽겠다. 하루가 왜 이리 짧아?’같은 말을 달고 살며 하루를 보낸다. 속도에 쫓기고 할 일에 떠밀려 가장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는 자꾸 뒤로 미뤄진다. 갑자기 엔진이 멈춘 차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멈춰 선다. 우리는 뒤늦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걸까?”
심리학자 ‘토마스 조이너’는 《왜 사람은 자살하는가》라는 책에서 외로움(고립감)이 죽음에 이르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외로운 감정을 경험하더라도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어떤 이에게는 외로움이 비록 견디기 힘든 고통일지라도 그것이 곧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잃는다는 뜻은 아니기 대문이다. 사람은 고독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직면하고, 그 삶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깊이 느끼고 또 사유한다. ‘연결되지 못한 삶’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되어서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때로 우리를 관계로 이끌지만, 어떤 외로움은 그저 외로움으로만 남기도 한다.
인간은 ‘꿈’이라는 단어를 가슴 속에 품고 산다. 상상은 인간이 가진 커다란 무기이면서 동시에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꿈이 있으면 지금 하는 사소하고 작은 일도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 새로운 꿈이 떠오르는지 호기심을 갖고 살펴보곤 한다. 일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그 일을 통해 나의 꿈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라. 우연히 찾고, 마주한 오늘의 작은 사건과 감정 속에 다음 길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듣기 불편한 말은 어떻게 들어야 할까? 그냥 부탁쯤으로 생각하고 ‘들어보자’고 하고 들으면 될까? 저자는 ‘대화훈련’은 논쟁을 통해 이기고 지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한다. 서로 비난하거나 싸워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내가 굴복당하는 것은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특히 대상이 부모나 자녀, 사랑하는 파트너라면 더욱 그렇다. 상대의 말이 부탁일까, 감사일까, 판단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상대의 말에 ‘예스’라고 할까 ‘노’라고 할까는 그 이후의 문제다. 대화는 겉으로 보면 단순한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 신경계의 작용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자율신경계는 크게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뉘는데, 부교감신경은 배쪽 미주신경과 동쪽 미주신경으로 나뉘고, 교감신경은 싸우거나 도망가기를 담당한다고 한다. 배쪽 미주신경은 사회적 연결, 안정적인 대화유지를, 동쪽 미주신경은 얼어붙거나 무기력해지기를 담당한다. 대인관계에서, 직장의 환경에서는 이런 신경계 반응이 그대로 드러난다.
공격하거나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 역시 신경계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성장 환경에서 대상 관계의 건강하지 못한 경험으로 인해 배쪽 미주신경이 발달하지 못한 탓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들을 나쁘게 간주하기보다, 안쓰러운 대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쯤되면 논쟁을 통해 싸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에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나는 왜 그렇게 품위를 지켜내고 싶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의 내면은 안다. 성숙한 품위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면서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해주고,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멈춤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화가 났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것을 쏟아내며 서로를 공격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잠시 멈춰서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은 그래서 무척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마음 불편한 사건들이 발생할 때 바로 욱하면서 반응하거나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내 판단과 생각을 바라보기 위해 잠시 멈춰서 숙고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품위다. 품위는 오로지 인간의 내면에서만 나오는 고귀한 에너지다.
우리는 세상의 모두가 아는 사람에게는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내 친구, 내 동료의 작은 성공에는 박수를 망설인다. 마음 불편한 감정이 오르기도 하고, 성공을 은근히 깎아내리거나 과소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슬픈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삶과 미래에 대한 조급함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한다. 자주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동료의 승진이나 성과표 같은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비교 판단하기도 한다. 멀리 보지 못하는 이런 근시안적인 터널 시야로 종종 눈앞의 것, 지금 당장 시급해 보이는 것, 내가 갖지 못한 것에만 시선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비행기 창문으로 풍경을 내려다보듯이 때로는 더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인생을 길게 보면 지금의 이직이나 승진이 결코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회사를 잠시 쉬는 것, 삶의 속도가 느리다고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인생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지금 내가 고군분투하는 시간도 아름다운 풍경의 한 장면일지 모른다.
하루를 살아가는 습관과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는 같지 않다. 가끔 높은 곳에 올라가 아주 멀리서 삶을 바라보자. 지금 당장 답을 내려야 할 것 같은 질문들이 어쩌면 그리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생의 에너지를 상실하고 그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희망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슬픔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이 붕괴되는 ‘존재의 공허’상태가 되는 것이다. 희망을 상실한 눈빛은 곧 생기의 부재이다, 죽음과 가까운 상태를 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경험한 빅터 프랭클린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렇게 말했다. “희망을 잃은 이들은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라고.
일하는 현장에서 미래가 아득하다고 말하는 이들, 죽고 싶지는 않지만 딱히 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는 청년들, 아이들을 먹이고 일하며 혼자 견뎌내느라 지친 엄마, 현재 가진 것으로는 더 이상 어떤 기쁨도 느낄 수 없다는 사업가, 지금의 인기가 무너질까 봐 눈치 보는 연예인과 방송인, 이들 줄 어떤 이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면서 가족을 떠올리면서 일터에 나가고, 어떤 이는 한강을 건널 때마다 고급 세단 뒷자리에 기대어 앉아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찾지 못해 멍한 눈빛으로 강물을 바라본다. 그들의 눈빛을 보면 연민이 생긴다. 이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저마다 처한 삶의 환경이 다르지만, 감히 생각컨데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희망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불빛이다. 빰을 후려갈기며 눈을 뜨라고 해도 뜨지 않는 눈, 그것이 바로 희망이 사라진 눈빛이다. 죽음은 단지 숨이 멎는 일이 아니라, 희망이란 빛이 꺼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희망이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음을 전제로 하지만, 희망이 없는 고통은 그 자체로 존재를 무너뜨리는 절망이 된다. 우리가 서로의 눈빛을 잘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잠시 멈춰서 심호흡을 하고, 차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대화의 순간을 천천히 경험하는 것, 그것이 ‘여유’를 되찾는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단순한 시간의 여유만이 아니다. ‘삶의 본질적인 충만함’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에, 나중에로 미루는 것은 낡은 표현이다. 오늘이 그 사람과 보낼 마지막 날이라면 어떤 말을 그에게 가장 먼저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면서 이만 줄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