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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정체성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에 답으로는 한(恨)이라 한다면 억지주장은 아닐듯하다. 恨의은 기층의 저변을 축으로하는데 이러한 恨을
한마디로 함축한다면 그것은 아리랑이라고 표현한적이 있다. 그럼 아리랑은 무엇일까??
아리랑은 마치 시어머니의 구박스런 노여움에 비친 한탄의 恨스러움의 발산인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노래 부를때 여러가지
감정을 표출하지만 그래도 즐거울때나 기쁠때의 노래가 가장 많을텐데 아리랑은 오직 한가지 패턴으로 인생살이
속박에
대한 한탄스러운 탄식으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속에서 인간의 삶의 문화이기에 그 역사속 사건들을 인용해 본다.
아리랑은 민요의 한 장르이고 민요란 예술의 한 장으로서 아리랑의 구원성은 아마도 고대 삼한시대의 "동맹"과 같은
제천의식에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위한 詩적인 언어와 더블어 음악과 집단적인 춤에 어우러지지는 않았슬까
추론해본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를 보면 곡식을 파종하는 단오와 추수에 감사하는 기원제 추석은 그리스에서는
겨울철에 밀을 파종하고 봄에 수확하기에 겨울의 축제와 봄의 축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겨울의 축제에는 희극을
연출하고 봄의 축제에는 비극을 연출한다.
여기서 희극의 즐거운 유희는 그 순간의 즐거움이었고 봄의 축제에 비극의 공연이 더 인기를 끓었다 한다.
성기를 깍아들고 우머스럽게 노는 희극의 즐거움은 순간이었지만, 비극은 인간의 마음속에 파장의 여운을
남기기에 비극을 더 좋아했다, 그러면 왜 비극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라고 하였다.
이렇듯 아리랑속의 恨은 민중들의 한 풀이이다.
(원래 민중이란 용어는 좌파적 용어가 아니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서술함에 我와 非芽의 사이에 자신의 주체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는 민초들을 간파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민중이란 용어의시발인듯)
정선 아리랑의 긴 아라리를 아리랑의 시원으로 문화재로 엮자고 주장하는 김연갑 이 두사람은 서사적인 아리랑을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아리랑읜 모든게 자기중심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단 한줄의 서사적 이야기도 없다.
본인은 평창아라리 천여 수를 모두 읽으며 서사적인 사설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단 한줄의 가사도 없다.
만약 아라리가 서사적 가사였다면 아마도 영월의 단종의 비에에 대한 사설이 좀 많을듯 싶지만은 단종비애의 가사는
단 한줄도 없다.
모든 아라리 가사는 1인칭 단수 현재로 나에게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ego(내면의 자아)가 나의 슬픈 삶의 운명을 만날때 칼스타프 융(정신 분석학자)은 이를 운명의 악마적 의지라고 말합니다.
미덕(arete)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의지이지만 운명앞에서는 거역할 수 없기에 운명을 악마로 보고면서도 운명앞에
순종하는 이유가 비극이기에 민초들도 즐거울때보다 슬픈, 그 슬픔의 애틋한 마음이 운명앞에서 순종하면서 자신의
감정 정화를 통한 승화가 되어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가지는 가사의 틀로 발전하게 됩니다.
또한 이것이 영서지방 산간 아리랑이기에 일을 하면서 무료할때도 혼자 부르는 것이기에 아리랑은 잘 수련한 가창자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음치도 혼자 중얼거리며 독창조로 자신의 운명속에 애틋함을 노래가사로 카타르시스(정화
또는 의학적 측면에서 배설)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아리랑의 모든 사설은 자기중심적으로 재편하여 한탄을 내면의 세계에서
에고(ego-자아)를 통한 성찰로
그러기에 영서지방의 산의 아라리는 가락보다 가사에 치중한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인용의 의미가 없슬듯하지만 참 중요한 의미의 이해를 하나 인용해보면 지난주 동창생 만남에 70음악을 듣던
어느 동창녀왈 이젠 가락이 아니라 가사가 더 재미있다라고 한다.아마도 다수가 이러한 느낌이리라.
그다지 음악적 가락은 중요치 않으며 보다 많은 일상의 삽화에대한 사색적 삽화의 가사가 두드러지게 강조되는것이다.
음악적 장르에서 후렴은 반복되지만 이것은 사색엔 도움이 안되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결과 영서의 평,영,정(평창,
영월, 정선)의 아라리는 후렴이 없는게 특징이다.
* 정선아라리는 근자에 후렴이 붙어 있었으며 이는 정선인 연규한씨나 김연갑의 책에서도 기록되고 있다. 또한 과거 강원도
산간의 아라랑은 모두 후렴이 없었다는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이후 현재까지도 정선 아리랑은 후렴이 붙어가는 진행중이며 후렴은 돌아가며 소리할때(돌림창시) 가창자가 제목을
못 정하면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등이야기를 하지만 가락의 유희적 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성있는
것이다.
영서의 아라리는 돌림창 이전에 민요의 기능면에서 산의 소리로 혼자 나무할때. 나물뜯을때등의 일과 또힌 무료할때
혼자부르는 그리고 혼자듣는 唱者가 聽者인 것이다.
남에게 들려주기위해서는 선율에 후렴이 붙는것이 흡인본능설처럼 더욱 효과가 있지만 영서 산간 아라리는 스스로를
자위하는 창자가 청자가 되는 즉, 이것은 가락의 즐거움이 아니라 가사의 오묘함의 재미를 덧붙여나가는 노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창아리랑(아라리)도 천여 수의 가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선 아라리도 거의 같은 가사로 어느
지역에서 발생인지 알 수도 없을만큼 지역의 동일성 가사도 있지만 나물뜯는 아라리 가사는 평창군 미탄면 아라리로
일면 한치뒷산(청옥산) 아라리인 것이다.
정선 사람들은 정선 남면에도 한치가 있다 하지만 그곳은 일제강점시 금광이 자리하던 산으로 풓 한포기 나지 않는
곳으로 땀한(汗)자를 쓴다한다. 그러나 청옥산의 한치는 찰한(寒峙)를 쓴다.
영서 산간지방에 아리랑이 유행되었던 조선 말기의 사회상을 보자
여기서 본인은 전국적으로 아라랑이 확산, 유행된 시기를 말함이지 그 이전에 아리랑이 이 지역에 어떻게 흘러왔는가
하는 역사는 없고, 또한 시대상황등을 고려할때 이 지역 태백산맥 영서 산간지방에 아리랑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조선 중기에 평창군수(종 4품직)로 양사언이 부임하였는데 군민들을 보자 옷도 헤어져 가릴곳도 못가라는
화전민처럼 볼품이 말이아니엇기에 양사언은 눈물이 왈칵 쏱아졌다 한다.
당시 기의 기록에는 군 소재지 시내일원은 50여 가구이라는 점에서 보면 조선 중기사회의 문제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세의 형평성이다. 이미 양반들은 무소불위하지만 노비들은 부모가 사망하여도 부모의 조세를 물고있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 노비들은 따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래야 사망자의 세금은 없어질것이기에) 인구는 현저하게 작은점의
정책적 문제와 당시 시대상황은 서낭당 문화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사성황단 아래 각 부락, 각마을엔 고목나무,
돌 누적단등의 서냥단 문화가 팽배하고 있었던 점등의 모든 시대상황을 간과할 수 없다.
진용선의 뗏목 아라리의 한 부분엔 목상이 벌목공과 대화중에 무사안일을 위해 서낭당에 기원제를 드려자고 벌목공이
이야기하자 목상왈,,, 수전노처럼 벌받으면 내가 받을 것 아니오, 그러기에 일 없소이다 하는 당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당 시대의 사회상속에서 아리랑이 많이 전승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중기 이후 문화에서 헐버트의 기록으로 나타나는 고종황제의 왕실에서 전문 예인 집단이 아리랑을 매일 공연하고
장려하는등,,이때에 전국적으로 아리랑이 확산되고 유행되었던 점이다.
또 하나의 설은 구한말 뗏목경기로 정선아라리가 한양으로 내려가고 경복궁 중수공사시 군역자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확산시켰다는 이론은 신출나기 김창주의 아리랑 본문에서도 가능성 낮은 이야기로 분류되었건만,,
정선 아라리병 향수자들은 남의 글은 읽지도 않고 아직도 구물거리고 자기 논리만 펼치는 듯하다.
정선 아라리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문제나 시원설, 모든 문제들을 다음으로 충분히 OK될만큼 논해주리라만은
우선 이해로 정선 아리랑은 산간 아라리의 기능성면에서 후렴이 붙지 않았는데 이러한 사설이 전국으로 전파되었던가??
정선 아라리가 산의 아라리로 그 기능을 하기위한 템포에서 8/9박자의 긴 아라리가 처음부터 발생된 것은 아니다.
정선 아라리 향수자들중에 김연갑. 이보형, 고숙경은 그들의 논문에서 강원도 아리랑의 중앙에는 정선 아리랑이
존재하며 이 정선 아리랑이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와 팔도의 군역인부들이 전국으로 전파했다는데,,,
그럼 정선 아라리는 언제 산의 아라리의 기능성을 저버리고 외부의 영향으로 변색되었는가 묻고싶다.
그러기에 정선 아라리가 강원도 아리랑의 맥이라고 하는 것은 향수자들의 주관적인 견해이고 그들이 썼다고 다음에
그를 인용하여 하나의 정설화로 둔갑시키는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도 다음으로 한편씩 자세하게 인용하여 어떤 우를 범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기록할 것이다.
이렇게 정선 아라리는 후렴을 달기 위해서 산의 아라리의 템포를 잃어버리고 좀 더 느려지는 경향으로 개조되는
개산조의 아리랑이라면 평창아라리는 아직도 옛 원음 그대로 후렴도 없이 불리워지는 전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평창아라리는 위에서 언급한바. 하나의 유희적 가사가 아니라 일상의 삶 자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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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恨을 통하여 아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으며,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봄의 축제, 기쁨보다 비애의
향연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고 와디푸스왕의 공연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우리민족의 기저에도 기쁨보다 슬픔의 恨이 더 각인되어민중들에게 구전되는 민요 아리랑의 사설을 통하여
모든 이야기는 다시금 자기중심적으로 재편되어 내면의 세계 에고(ego.자아)를 통한 성찰로 자아극복의
삶의 승화를 보여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설을 가진 영서 아라리가 그 삶의 자아를 찾는 아리랑의 진원지이며 여기서 정선 아라리는
그 원형을 유지치 못하고 변종되었지만 평창아라리는 영서 아라리의 원형을 지금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평창아라리는 아직도 후렴이 없다.
이것은 본문에서 보듯, 영서 산간지방의 아라리는 원래 남에게 보여주는 유희본능적인 노래가 아니라 모든
사설이 자기중심적으로 쟆련되어 가사에 치중하는 아라리로 스스로에게 즉, 창자가 청자가 되는 가락으로
노래이전에 삶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리랑의 근원인 恨을 기조로 하는 아리랑의 기원으로 보아야 탁당할 것이며 여기에 아직도
각종 매스미디어나 문화발전에도 동화되지 않은체 오늘도 살아 숨쉬는 평창아리랑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더군다나 학자들까지도 평창아라리는 후렴도 없고 재미없다 촌평하지만 평창아라리는 남에게
즐겁게 들려주려는 유희의 아라랑이전에 삶에 있어서 그 바탕에 깔리는 恨을 기조로 사색의 창을 넓히는
공간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란 점이 윗 본문의 이야기이다.
학자들은 용역에만 움직이는 미물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후렴이 없는 아리랑은 왜 후렴이 없슬까 하는 연구서는
아직 없었다. 그리고 또한 삶의 한탄의 恨의 의미가 무엇인지 삶의 내면을 통하여 사유적 철학을 부여해 보려는
학자도 없었다.
하지만 본인은 평창아라리의 후렴이 없는 근저를 찾아보고 이것이 恨의 시초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엇다.
그러기에 옛 전통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진 평창아라리의 후렴이 없는 점을 밝혀봄으로 평창아라리는 유희의
아리랑이 아닌 민초들의 生의 밑바닥에 깔린 인생살이의 구질스런 비통하고 한탄스러음을 아리랑을 톨하여
자아의 내면세게에서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 순화)를 통해서 다시금 승화시키고 잇는 것이 아리랑이란
점을
밝히고저 합니다.
이로서 영서 산간아라리의 恨이 아리랑 전체로 확장되고 승화된 점을 이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