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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글/이원익
덴버가 75 마일 남았다. 아니 덴버 대학교가 75 마일, 아니 몇 초 전에 찰칵 74 마일로 줄어들었다. 속도 제한이 있지만 한 시간 남짓이면 이제 그 대학교의 교정에 다다르리라. 이 53 피트짜리 짐칸인 드라이 밴을 달고 가는 550 마력의 대형 트럭을 끌고서도 말이다. 그 교정으로 바퀴 열여덟 개가 달린 이 긴 차량을 함부로 몰고 들어가긴 어렵겠지만 정 안 되면 아무데나 차를 세워 놓고서라도 나는 그 졸업식장으로 달려가리라. 이 70번 고속도로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밤낮으로 서쪽으로 달려오다가 오늘 아침 캔자스 주 토피카를 지날 때 주유소 어귀에서 산 저 붉은 장미 꽃다발을 제니퍼, 아니 내 딸 순영이에게 전해 주려면 말이다.
실로 얼마만인가, 순영이의 목소리를 들어 본 것이! 처음에는 무슨 환청인가 했었다. 롱비치에서부터 대륙을 가로질러 달고 온 트레일러를 어제 아침 볼티모어에 떼어 주고 달랑 앞대가리만 남은 밥테일 상태로 날아가듯 달려 피츠버그 교외에 있는 어느 군부대를 찾는데 막상 다 가서 길은 왜 그리 헷갈리는지, 물어물어 찾아가 운송 주문서를 넘기니 줄지어 기다리란다. 달고 갈 트레일러가 준비되기를 적재장 앞마당에서 기다리다 핸들에 이마를 얹고 잠깐 조는데 천장에 설치 된 무선 통신이 울었다. 무슨 일이지? 비몽사몽간에 손을 올려 뻗어 스위치를 누르는데 문자가 아니고 좀처럼 쓰지 않는 음성 메시지다. 비상사태인가? 뚜~ 뚜~, 킁킁, 삑삑, 무슨 소리가 몇 초나 이어지고 별 말이 없기에 잘못 됐나 하고 끄려던 찰나,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대~ㄷ, 아빠! 디스 이즈 …… 뚜뚜뚜.
이게 무슨 소리지? 아빠라니? 한국여잔가? 잘못 걸려온 통신? 뭐야! 급히 오더가 바뀌었나? 근데 이게 누구야! 화들짝 손을 뻗어 볼륨을 한껏 올렸다.
- 헬로우! 여보세요! 후 이즈 디스?
- 디스 이즈 제니퍼! 아빠~, 나 제니퍼! 나 그래주에잇, 초… 럽? 유니버시티, 투마로우…….
- 홧? 뭐라고? 제니퍼? 순영? 순영아! 그래 아빠다! 졸업한다고? 뭐? 내일이라고?
이때 트럭 옆문을 쿵쿵 치는 소리가 났다. 눈을 돌리니 등판이 떡치는 안반처럼 딱 벌어진 백인 군바리 하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올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 퍼큐! 빨리 네 빌어먹을 달구지를 돌려서 엉덩이를 저기 갖다 대란 말이야! 귀가 먹었나 제기럴! 두 유 언더스탠!?
- 쏘리 쏘리! 원 미니츠 플리~즈. 그래, 순영아 잠깐만 기다려! 웨이더 미닛. 오케 오케이…….
- 갓 댐! 일단 저 쪽으로 빼! 일분 내로 문제 해결 안 되면 오더 취소다. 헤이! 다음 차 들여보내!
이리하여 일단 뒤차에 양보하고 내 밥테일을 돌려 옆으로 비켜나는데 아차! 무선이 끊겼다. 몇 번이나 다이얼을 돌리며 진땀을 빼는데 어느 순간 꿈속에서처럼 다시 연결이 되었다. 순영이였다! 맞아, 내 딸 순영이가 실로 일고여덟 해 만에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그리고 한 이삼 분 이어진 순영이와의 통화는 수신 상태도 안 좋았는데다 거의 영어로, 간혹 서툰 한국말 몇 마디를 버무렸지만 내가 알아들은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랬다. 지금 양부모 몰래 전화하는 거라고, 내일 대학 졸업식을 하는데 가족이 함께 덴버에 와 있다고, 아빠는 나를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생각이 나서 전화하는 거라고, 덴버대학에서 아트, 뭐라고 해야 하나? 미술? 예술? 아무튼 그런 걸 전공했다고.
- 그래! 내일 갈게! 거기가 어디지? 덴버?
- 오심 안 돼요! 사람들이 화내고, 문제…… 커질 거에요. 체포될 수 있어요.
- 아무튼 갈게. 한 번 보자꾸나! 가 있을 테니까 꼭 다시 연락 줘! 내 전화는 어떻게?
- 아빠 찍은 사진 봤어요. 사진 공부, 미 투. 날아가는 새. 아빠가 찍은 것, 웹사이트에서. 지평선 위로 줄지어. 기러기 떼, 구석에 트럭 옆거울 조금 있어, 사진 모서리 글자 조그맣게 챙 리 라고…….
- 동호회에 출품했던 건데 아직 온라인에 돌아다니나 보다. 이젠 나도 안 한다.
- 혹시 아직 운전, 룩 라이크 아직 엘에이? 몇 군데 트럭 캄퍼니 텔레폰 했어요, 챙 리 있어요? 거짓말 같이 세 번째 만에 그 여자, 챙 리 알아, 전에 일했다고…… 정말 미러클…….
- 그래, 고맙다, 순영아! 내가 꼭 갈게. 아빠 한 번만 보자, 응?
- 안 되는데…… 아빠 보고 싶…, 쉿, 이제 끊어요. 빠이. 뚜뚜뚜…….
- 헬로! 순영아! 제니퍼! 제니퍼!
더 이상 통화는 되지 않았다. 여기서 덴버가 어디지? 밤낮으로 꼬박 스물네 시간? 천오백 마일? 아무튼 간다. 그런데 순영아, 왜 이제야 목소리를 들려주니?
다시 줄을 서서 물건을 실은 새 트레일러를 기다렸다 연결하고 출발을 하는 데는 거의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이것들은 준비도 안 해 놓고 사람을 불렀나? 민간 트럭이 군용물품을 싣는 일은 드문데 이제야 짐칸 속으로 짐이 들어가는 걸 보니 위장 페인트를 칠한 무슨 특수 장비들인 것 같다. 뭐가 실리든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고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장소에까지 실어다주기만 하면 된다. 많이 싣든 적게 싣든 나는 그저 마일당 40 센트의 돈을 받으니까, 회사에서 계산한 그 길을 따라 정확히 거리가 나오고 나는 그 길을 탈 없이 시간 내에 달리면 그만이다. 주마다 법령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무리해서 달리면 안 된다. 날마다 꼬박꼬박 일지를 적어 제출에 대비해야 한다. 위반하면? 벌금이다. 시간이 돈인데 타지의 법정을 찾아서 기한 안에 출두해야 한다. 사소한 것은 몇 백불이지만 천불이 넘기도 한다. 돈보다 점수가 나빠지면 어디 일거리를 잡기도 어렵고 심하면 면허가 취소되어 밥줄이 끊어진다.
왜 이리 가혹하게 다루나? 그만큼 안전이 중요하고 자칫 과로하거나 과속하다 보면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죽일 수도 있다. 그렇지,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좀 시간이 걸려도 안전하고 확실하게! 그래서 이 오만잡종이 모인 큰 나라가 그나마 제대로 돌아가는 거야. 혼자서 방방 뛸 것 없어! 미국 온지 해가 쌓이면서 차례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항들이었다. 대국이 그저 대국이 된 게 아니란 말씀이야!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몇 십년 전으로 홱 돌아가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몰 때처럼 니미럴! 쌍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나는 일각이 여삼추인데 어찌나 꾸물대는지! 천천히 짐칸으로 밀고 들어가 멈추고, 걸고, 살피고, 하나하나 받치고, 묶고, 엮고, 조이고, 다시 확인하고…, 종이에 서명하고, 다시 훑어보고, 건네받고, 건네주고…, 천천히 걸어가고…, 입안이 다 타들어 간다. 이것들은 애고 어른이고 민간이고 군바리고 도무지 바쁘고 서두르는 게 없어! 저리 느려 터지고 게을러 자빠져도 웬만하면 세계제일로 밥 먹고 사는 것 보면 복도 많은 피플이야. 그런데 지금이 몇 시야? 아침 열시 오십칠 분, 졸업식이 내일 6월 18일 토요일 오전 열한 시? 좋다, 간다! 기다려라 순영아 아빠가 간다.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 자지도 먹지도 않으련다. 부대 영내를 휘돌아 차단기를 지나 빠져나오는데 시계가 정확히 오전 열한 시를 가리켰다.
그런데 순영이가 지금 몇 살이야? 우리 나이로 스무 살, 9월생이니까 만 열아홉이구나. 생각난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칠년 전, 걔가 열두 살 때였구나. 네 살도 되기 전에 포틀랜드의 마음씨 좋은 백인 노부부, 6.25 참전용사 카슨씨 가정에 입양을 준 뒤 나는 철마다 아이를 방문하였고 심지어는 그 집에서 하루 데리고 잔 적도 있었다. 노부부는 그만큼 너그러웠고 한국과 동양을 알았으며 예외적이었다. 이웃에 마침 한국사람이 살아서 순영이는 크면서 그 집 사람들과 어울리며 한국말도 곧잘 했고 노부부는 그 점도 흐뭇해하며 부추기고 귀여워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할머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할아버지도 가산을 정리하여 요양시설로 들어갈 준비를 하자 시애틀 근처의 시골에 사는 그 집 조카 내외가 나서서 순영이를 다시 입양하여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그 젊은 부부는 내가 아이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더니 오래지 않아 대면은 물론 통화마저 막아 버렸다. 들리는 소문에 그 집에서는 입양아들을 수시로 받아서 열 명 가까이나 된다 하고 그 중에서도 순영이는 더 심한 학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안달이 나서 더 자주 연락을 꾀하니까 아예 법으로 걸어 버렸다. 걱정 되고 보고 싶어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 굶어 죽더라도 같이 죽는 건데…, 그때 정말 조금만 더 참고 데리고 있어 볼 걸. 아니지, 순영이를 지금이라도 내 눈으로 한 번만 더 보자.
그땐 법도 잘 몰랐을 때지만, 그래서 걔가 다니는 중학교 근처에 무리하게 잠복을 했었다. 이틀 만에 대여섯 명의 애들과 무리지어 나오는 순영이를 미행하였는데 얘들은 집으로 가지 않고 근처의 백화점 몰로 가는 것이었다. 깔깔거리며 이곳저곳을 다니는 애들을 멀찌감치 따르며 한참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순영이가 혼자 화장실을 가는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서 어정거리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순영이를 뒤에서 조용히 불렀다.
- 순영아, 아빠다.
몇 걸음을 더 떼던 순영이가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영어로 말했다.
- 나 순영 아냐! 제니퍼야! 가! 미워! 아이 헤이트 유!
- 순영아, 아빠다. 순영아!
그때 다른 아이 몇이 이리로 다가오자 순영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 헬프 미! 헬프 미! 이 사람이 나를 납치해욧!
이리하여 소동이 나고 경비원이 달려오고 나에게는 바로 수갑이 채워졌다. 적의인지 연민인지 나를 노려보는 순영이의 어린 두 눈엔 핏발이 서고 물기가 번득였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저 미니애폴리스의 대평원, 지평선 위 검게 덮인 구름의 틈사이로 붉게 내비치는 저녁놀의 빛깔처럼…. 그러고보니 피츠버그에서부터 정신없이 내쳐 여섯 시간을 달려왔다. 곧바로 인디애나 주를 지나 일리노이 주로 들어선다. 하늘은 검게 덮여 오고 가랑비가 조금 뿌리다 걷히다 한다. 저 멀리에는 땅으로 내리꽂히는 몇 가닥의 가는 번개 줄기와 함께 은은한 우레소리, 간격을 두고 울리는 그 떨림은 무엇을 경고하는 걸까?
망연자실, 경찰차의 뒤칸에 떠밀려 태워지는 나를 노려보며 그 아이는 두 주먹을 쥔 채 경고를 했었지. 어금니를 앙다물고, 내 깊은 바닥이 시리고 울리도록, 이번엔 예상치 못한 한국말로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었지…….
- 오! 지! 마! 오! 지! 마!
70번 고속도로는 약간 남서쪽, 해지는 방향으로 끝없이 뻗어 있다. 오지마! 오지마! 하지만 나는 저 천둥치는 지평선 끝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순리대로 하자면 두 시간 반쯤 더 달려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트럭 휴게소에서 쉬고 잠을 자야 한다. 물론 저녁도 먹고.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일 순영이를 볼 수 없다. 기름이 떨어져 가니 할 수 없이 경사로를 돌아 내려 주유소로 갔다. 그 시간도 아깝다. 이런 큰 차는 한꺼번에 200 갈론 이상, 무려 천 불어치나 들어간다. 주유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날씨를 체크해 본다. 인터넷이 된다. 밤길을 쌩쌩 달리자면 날씨가 도와줘야지.
그런데 앞길이 별로 좋지는 않다. 캔자스시티를 지나서 덴버까지 서쪽으로 이어지는 거의 전 지역에 오늘밤 구름이 잔뜩 끼고 곳에 따라 비도 간간이 뿌리고 바람이 분단다. 더 남쪽, 아칸소, 오클라호마와 텍사스 북부에 걸쳐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이 만나 난기류를 형성하며 요동칠 조짐이 있단다. 아주 좋지도 않지만 적어도 현재까진 아주 나쁘지도 않다. 달리 생각할 것 없다. 쓴 커피 한 컵만 받아서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과속하다 짭새에게 걸리거나 무리 하다 사고가 나면? 그야 운명이다.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이렇듯 절박하게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키로 하고 무조건 찢고 들어간 적이 전에도 있었나? 하기야 내 쉰여섯의 인생이 온통 크고 작은 찢김이요 찢어나감 아니었나! 하지만 엄청나게 크게, 마치 큰 천을 날카로운 가위로 한 칼에 주욱 자르듯, 새로운 국면을 펼치며 위험하고도 미지인 세계를 갈라 나간 것은 내 나이 서른하나, 인천에서 밀항객이 되어 배에 올라탔을 때였지. 어디로 가는 배인지도 모른 채 녹슨 벌크선의 기관실에 숨어들어 귀가 멍멍한 굉음과 탁한 공기 속에 몸을 숨기고는 제발 어서빨리 이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왜 그랬냐고? 다시 생각하기도 싫지만 이미 어두워지는 천지, 저 단조로운 길 위에서 졸지 않으려면 옛일을 되살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로구만. 홀짝, 쓴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목구멍에 넘기는데 무엇을 잡으러 가는지 경찰차 한 대가 나를 앞질러 쏜살같이 내닫는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저 놈의 백차, 아니 이곳에서는 흑차나 흑백차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군대에 있었을 때는 백바가지 쓴 헌병놈,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저 짭새 경찰놈들만 보이면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천적이다. 내가 어쩌다 저 민중의 지팡이들과 척을 지게 되었나? 내가 자란 저 강원도 골짜기의 작은 읍 횡성에서는 쫄따구 순사도 멋있게만 보였는데.
하지만 가난한 산골 아이인 내게 그보다 더 좋아 뵌 건 가끔 저 가로수 드문드문한 꼬부랑 흙길을 먼지 날리며 지나가던 버스와 트럭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어디서 잔뜩 자갈 같은 것을 싣고 와서는 자기 힘으로 우웅, 우웅, 짐칸 앞쪽을 밀어 올리면 마침내 와르르, 한 차 분의 짐이 한꺼번에 미끄러져 쏟아내려 마당에 부려지던 힘 좋은 지엠씨, 여섯 바퀴 육발이 도라꾸는 그 빛깔이며 휘발유 냄새며 검고 싱싱한 타이어의 탄력하며……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멋있고 부럽던지! 나도 저런 굉장하고 멋있는 차를 모는 운전수가 되어 저 아스라한 산모롱이를 넘어 새로운 세계, 드넓은 세상을 쏘다니고 싶다! 그런데 무슨 수로 운전수가 되나? 시외버스 조수부터 하겠다고 무조건 엉겨 붙어야 하나?
빤한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까스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쥐자마자 나는 가족에게 이별을 고하고는 내 밥벌이는 내가 하겠다면서 서울로 튀었다. 먼 친척이 일하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시다로 있다가 몇 달 후에 시내버스 조수로 들어갔다. 그리고 운전을 배우고 승용차 면허를 따고 다음엔 용달차 면허를 따서 이삿짐센터에 들어갔다. 버스 면허도 딴다면서 한참 실습을 하는데 영장이 나왔다. 대학물에라도 담그다 왔으면 어찌 연기라도 해봤을 텐데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집안 복은 못 타고 나고 먹고 자란 것도 시원찮았으나 쳐지지 않는 허우대에다가 그나마 자질구레한 인복은 덤이었나 보다. 아니면 나라가 너무 좁은 건가, 훈련소에서 대기하는 중에 또 다른 고향 선배를 만났다. 제대 말년을 보내는 행정병이었다. 어디로 보내 줄까? 그 형은 일개 병장 주제에 마치 뭐든 해 줄 수 있는 원스타 훈련소장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나 운전하고 싶은데요, 형?
이리하여 나는 곧 여산에 있는 운전병 학교에 배치되어 과정을 마치고 통과하자 철원에 있는 수송부대에 배치되어 군용트럭 운전병이 되었다. 수송대, 우리들은 자조적으로 달구지 부대라고 불렀는데 운행이 없을 때는 정비, 정비도 없을 때는 시시콜콜 점검, 그것도 할 게 없으면 시도 때도 없이 얼차려였다. 타이어에 윤이 나도록 구두약을 칠하고 홈의 모래알 하나까지 못으로 파내야 했으며 그래도 트집 잡을 것이 없으면 몽키 스패너를 입에 물려 2.5톤 트럭의 굴대와 쇠불알 밑으로 낮은 포복을 시켰다. 하루라도 뺑뺑이 돌리지 않아 군기가 빠지면 대형사고 낸다면서.
아무튼 이러면서 짠밥이 쌓여 강원도 경기도 전방 일대의 자갈길은 거의 다 익혀 가던 무렵에 병장 계급을 달았는데 무슨 조화인지 하루아침에 덜컥 그 여단의 별 하나짜리 여단장 1호차를 몰게 되었다. 앞뒤 범퍼에 빨간 별판이 달린 장군 찝차다. 운전병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자리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나도 이제 팔자가 좀 펴려나 보다 했더니 웬걸, 천하에 치사한 자리가 높은 분 운전수 자리였다. 덕분에 서울 구경도 심심찮게 하고 과분한 잡비도 생기고 했으나 스물네 시간 구두끈도 못 풀만큼 긴장하여 대기해야 하고…… 그것보다 그야말로 따까리 신세라 시키는 일은 무조건 다 해야 하고, 치사하든 대단하든 내가 보고 듣고 안 것은 장군 마누라에게도 입도 뻥긋 해서는 안 될 극비사항이었고……. 내가 운전을 잘해 차출된 게 아니라 입이 무겁고 절대 순종적이라 데려왔지 않나 싶어서 난생 처음으로 내가 이러려고 운전을 배웠나, 우주 끝에서부터 자괴감이 밀려왔었다. 어느 날 대문 밖 길가에 세워 둔 차에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겨워 올라가 본 북한산 기슭의 어느 요정. 에이잇, 지금도 그때 본 그 똥별들이랑 말똥 계급장들이 난장판으로 어울리던 그 영상이 떠오르면 퉤! 마른 침을 뱉으며 세차게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내게 남아 있다. 잠도 쫓는 이중효과다. 다시 머리를 흔드는데 이 저녁에 회사에서 통신이 온다. 생뚱맞게도 현재 위치를 보고하라는 문자다. 그리고 중남부 일대에 기상이 좋지 않다는 경고와 함께. 이런 게 다 회사의 배려라고 생각하자.
사실 본래 일정대로 피닉스로 가자면 세인트루이스에서 44번을 타고 남서쪽 스프링필드, 그리고 오클라호마의 털사 쪽으로 빠져야 한다. 그래서 세인트루이스를 지나면서 혹시라도 내 위치를 알아낼세라 내 항법장치를 꺼 버렸다. 나는 덴버로 가야 하니까. 곧장 캔자스시티를 향해 내쳐 70번 위를 달린다. 무슨 대단한 군수품인지는 몰라도 시간 안에만 배달하면 될 거 아냐. 내가 알아서 가는 거지 뭐. 근데 좀 피곤하네. 뒷목도 뻣뻣하고. 이럴 때 손날로 톡톡 목덜미를 쳐 주며 잠을 깨워 주고 말을 시키던 지니가 생각난다. 지니, 공지니 미친년! 못된 년! 또다시 욕이 나오지만 오늘은 그 생각을 말자. 하늘은 캄캄하고 천지는 적막한데 나홀로 또 그 에미나이를 생각하면 정말로 큰 사고 칠 것 같다. 차라리 아까 그 얘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옳지, 캔자스시티가 20 마일 남았구나. 밤 9시.
맞아, 그 때도 밤 아홉 시면 나는 꼬박꼬박, 그 세운상가 샹들리에 전구 수입상, 벼락부자 곽사장의 아들을 교수 집에서 태워 평창동 집으로 모셔와야 했다. 집에는 또 다른 과외선생이 기다리고 있었고. 제대하면서 따까리는 다시는 안 하겠노라던 군바리의 맹세도 저버리고 아쉽고 급한 김에 나는 다시 사장 가방모찌 겸 운전수가 되었다. 이번에는 민간인 사장님에다 군인정신으로 주단을 까니 사장님 입이 함지박이 되어 입막음 겸해서 심심찮게 돈봉투도 찔러 주고…, 이런 데 물들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정신이 번쩍 든 게 언젠가? 어느 날부터 사장 마누라까지 내게 선물공세를 한다거나, 그것도 남들에게 감추어 가며, 자기는 우직한 시골 출신이 좋다느니 미스터 리는 신의가 있어 보인다느니 참한 친정 조카딸이 있다느니 하며 괜히 일도 없이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곤 했지만 그 때 내가 갓 스물다섯이면서 눈치라면 영관급인데 도대체 할망구 나이가 몇인가! 나는 기회를 보다가 곧 짐싸들고 빠이빠이, 마침 자리가 난 버스 회사에 취직했다. 배차부 소속이지만 정비도 하고 잡무도 보고 급하면 운전도 하고…, 물론 버스를 몰 수 있는 면허증도 땄다.
마장동에 차부가 있는, 그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였다. 시내버스 80 여대의 대형 회사. 고물 트럭 조수에서부터 시작하여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천국운수 사장 천병우과 마누라 국순실은 웬일인지 별 볼일 없는 나 피라미 기쁨조 이창기를 마치 칠순노인 윗방아기 챙기듯 아끼고 좋아하였다. 좋아할 법도 하지, 나는 사장님 내외의 심기까지 경호하며 오로지 성실과 정직으로 일했으니까. 여기가 마치 내 마지막 꿈의 직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천사장 부부는 나를 저들이 다닌다는 큰 교회에 데리고 갔다. 거기서 마주친 아이가 영란이, 변영란이다. 영란이도 교회 다니나? 사장이 반가운 건지 의아한 건지 좀 뜨악하게 물었다. 예, 사장님. 마침 비번이라서요. 누굴 좀 뵈러…….
사모님은 내가 궁금해 하지도 않는데 쟤는 우리 회사 고참 차장이야, 눈여겨봐야 해 하고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 따로 한적한 자리에서 나를 데려온 본론이 나왔다.
- 알게 되겠지만 직원들 분위기가 뒤숭숭해. 장난치는 애들도 있고 말야. 운전수들은 덜한데 특히 차장애들은 철이 없어! 회사 사정도 나 몰라라 무턱대고 요구만 하면 어찌 버티겠나? 도산인가 뭔가, 그게 들어오면 도산이야! 쟤도 낌새가 이상해. 뭔가 불순세력이 부추기는 것 같아. 이 군, 아니 이 과장! 잘 좀 살펴보라고. 영란이 쟤, 심상찮아. 착실한 애였는데……. 자주 대하게 될 테니까 뭔 일 있으면 알려 주고. 내가 각별히 믿으니까, 하느님 다음으로 말이야, 하하.
나는 그날부로 어영부영 사장의 끄나풀이 되어 200명이 넘는 직원들 사이에 심어진 셈이었다. 어떡하나? 꿈의 직장인 줄 알았는데 사표 써 버릴까? 어딜가나 다 마찬가지일까? 하기야 온 나라가 계엄이다 뭐다 빨갱이 타령인데 숨죽이고 있어야지. 적당히 일러바치는 척 적당히 뭉개면서 시간 보내다 보면 비바람도 지나가고 좋은 시절이 오겠지.
스물두 살의 영란이는 이미 차장들은 물론이고 정비사와 운전사, 잡역부들 사이에서도 믿음 가는 지도자로서 도시산업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가며 비밀히 노조를 구축하고 있었다. 맹랑하군. 나도 처음엔 사장의 시각에서 백안시하며 실상을 살피다 어느 순간 정말 노조가 있긴 있어야겠다고 스스로 뒤통수를 쳤다. 점잖은 거액 기부자요 신앙심 깊은 교회 집사인 사장 부부인 줄 알았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 너무나 자린고비 구두쇠요 악랄한 탄압자에다 위선자, 착취자란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차부의 사무실에서 영란이와 둘만 남게 되었다. 모른 척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순간 내가 정말 잘못하고 있구나, 멀쩡한 사내놈이 이렇게 참하고 올곧은 아이를 감시하는 개가 되다니…… 그리하여 슬그머니 내 본색을 열어 보이다 진정을 토로했다. 알고 있었어요. 영란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그날 이후, 곁을 내어 주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고적한 이 밤, 내 곁 빈자리 조수석엔 지금 아무도 없지만…….
그런데 아무래도 저 한 이삼십 마일 앞쪽에 무슨 사단이 벌어졌나 보다. 깜깜한 벌판 한가운데에 가물가물 여러 불빛이 반짝인다. 속도를 좀 늦추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나는 별 소용없는 동태만 사장에게 일러바치고는 은밀히 영란이의 노조 결성을 도왔다. 말하자면 이중첩자였다. 노조는 백 명이 넘는 차장들을 위시하여 일부 잡역부들과 정비사, 운전사들도 가담하고 있었는데 특히 어린 차장들이 분노하고 있는 점은 일과가 끝날 때마다 당하는 센타, 곧 샅에서 샅으로의 알몸 훑기와 거침없는 욕지거리, 게다가 멍이 남는 꼬집기와 수틀리면 올라가는 손찌검이었다. 그 밖의 근로환경도 물론 지금의 한국이나 미국에 비추면 그야말로 살인적, 몬도가네였다. 한 번은 사장에게 은근히 이런 건 좀 봐 줘도 되지 않아요? 하고 떠봤더니 사장이 한참 도끼눈을 하고 나를 보다가 얼굴을 풀며 얘기했다.
-니가 몰라서 그러는구나. 사장 한 번 돼 봐라. 한여름 각다귀 떼처럼 뜯어 먹는 넘이 한둘인가? 세무서에 경찰서에 별 잡스런 기자넘들에, 시청에 구청에 심지어는 동사무소에다가 거지같은 향우회에다가 무슨 상이군경회, 어머니회…… 아이구 동네마다 깡패 새끼들에다가…… 백 원 벌어 십 원 남기기 힘들다. 그런데 얘들은 내가 무슨 떼돈 벌어 혼자 먹는 줄 알고, 저그들이 다 누구 덕에 삼시 세끼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설 보름 명절에 고향에다가 설탕 한 봉지, 라면 한 박스 생색이라도 내는 줄을 모르구, 다 때려치우구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못된 기집애들 같으니라구…. 삥땅도 웬만큼 해야지, 두둑년들!
저도 삥땅한 돈으로 천국운수 시작했으면서…… 하지만 이 말은 내가 목구멍으로 삼켰다.
아이고, 차들이 기어가네. 길게 스무 남은 대의 트럭들과 사이사이 끼인 승용차들이다. 무슨 일인가? 마침내 차를 멈추었다. 금방 풀릴 기미가 아니다. 그때도 그랬었다. 근처에서부터 길거리의 차량이 다 멈추어 섰었다. 날짜도 안 잊어버렸네, 1981년 8월 9일 일요일. 영란이를 비롯한 몇몇 핵심 인사들이 아침 6시, 차부에 모여 기습적으로 노조 결성을 선포했다. 사장은 급히 나를 찾았고 수많은 노조원들, 차장들은 벌집같은 기숙사에서 벌떼처럼 몰려나와 운전사, 잡역부, 정비공들과 함께 여왕벌을 부호하듯 둘러싸며 호응하고 곧이어 중무장한 경찰 기동대가 들이닥쳐 다시 이들을 겹겹이 에워쌌다. 나는 어제 사장이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지레짐작하고는 영란이가 주동이 맞은 것 같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며 엉성한 정보를 제공했었다.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는 듯 했다. 그런데 금방 전투경찰 부대가 나타난 걸 보면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역시 수가 한참 위였다 이 말이지.
들소 떼가 새끼를 에워싸듯, 노조원들은 영란이랑을 가운데에 두고 손뼉치며 노래를 부르다 옆 사람과 손을 잡고 소용돌이처럼, 겹겹이 팽이처럼 원을 그리며 뛰며 돌았다. 아, 나도 이때 뛰어 내려가 저들과 손잡고 원을 그리며 영란이를 지켰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건 정말 잘못됐다고 함께 외쳤어야 했다. 무엇이 나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했을까? 고향의 어머니? 내가 매달 부쳐 주는 몇 푼의 돈으로 학업을 이어가는 두 동생들? 옆을 지키는 사장의 또 다른 위엄? 아무튼 창 아래의 그림은 그 순간 무성영화처럼 돌아갔다. 다시 소리가 소생하자 아비규환 끝에 소용돌이는 깨어져 짓밟히고 하나하나 뜯어진 발버둥치는 살점들은 닭장차로 실려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사장과 함께 이층 유리창을 통해 석고상처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란이가 윗도리가 벗겨지며 복날 개처럼 몽둥이에 맞고 짓밟히며 끌려 나갈 때는 숨이 멎고 눈이 감겨졌다. 그때 사장이 뇌까렸다.
- 고얀 것, 맛 좀 봐야지!
이때 이 석고상은 갑자기 피가 돌아 쾅! 문을 박차고 아래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몸부림과 울부짖음도 허사, 나는 이쪽저쪽에서 다 불신 받는 개밥의 도토리가 되어 비웃음만 샀다. 끌려간 노조원들을 쥐어짜 사태를 파악한 당국이 나를 잡으러 왔다. 내가 중책으로 엮이고 노조원들이 적색분자들에 포섭 되었다고 신문에 크게 난 아침, 간발의 차이로 나는 추적자를 따돌리고 아무 시외버스나 잡아탔는데 종점에 내리니 가까이 긴 원목이 가득히 쌓인 인천의 어느 부둣가였다. 두리번거리며 피폐한 골목길을 걷는데 전신주에 내 얼굴을 비롯한 몇몇의 얼굴이 찍힌 수배전단이 펄럭이고 있었다. 잡히면 고스란히 간첩이 될 판이었다. 배고픔이고 뭐고 우선 숨어야겠다. 어스름 녘에 나는 원목더미 너머에 정박된 커다란 고물상선에 다가가 옆구리에 비스듬히 드리워진 뜬사다리를 타고 올라 갑판의 아래쪽으로 숨어들었다.
뒤에 알았지만 내가 탄 배는 태평양을 오가며 주로 원목을 실어 나르는 몇 만 톤급의 벌크선이었다. 따라서 사람은 별로 없고 녹이 쓴 괴물 같았다. 그래도 갑판 쪽에는 당직이며 항해사를 비롯한 선원들이 들락거리는데 합해서 여남은 명은 되는 것 같았고 계급이 높은 쪽은 한국사람, 나머지는 주로 동남아 사람들인 것 같았다. 미로 같은 아래층을 깊숙이 내려가 귀가 얼얼한 기관실 구석에 몸을 숨겼다. 거기도 기관사며 두어 사람이 자리를 지키며 번갈아 잠을 자거나 소리 질러 가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시끄러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과 갈증은 견딜 수가 없었는데 밤에 물을 찾으러 조심조심 기어 나오다 막다른 골목에서 딱 한사람의 선원과 마주쳤다. 다 글렀구나! 그런데 그 선원은 손전등을 내 얼굴에 비추더니 뜻밖에도 나를 알아봤다. 이 병장? 여기 웬일이야?
자대 배치 동기인 그는 장교식당 취사병의 하나였는데 장군을 모셔야 하는 나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장군이 밤중에 갑자기, 이를테면 팥빙수 없어? 하는데도 그는 내가 부탁하면 어떻든 금방 만들어 냈다. 그 행하로 장군이 옜다 너 가져라 하고 내게 던져 주곤 하는 갖가지 진상품 쪼가리들 중에서 내가 또다시 옜다 손 병장 해 하고 보답으로 건네준 게 상당수다. 아무튼 그는 이리저리 흘러들다 여기서 주방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내 사정을 듣고는 주방 뒤 은밀한 곳에 나를 숨겨 주었다. 뱃사람들이 살롱이라고 부르는 이 주방장은 자기도 여차하면 미국으로 새어서 엘에이나 뉴욕 같은 데서 근사한 식당이나 하고 싶단다. 그러고는 거기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비집어 갖다 주었다. 숨을 곳, 덮을 것, 먹고 마실 것, 읽을 것, 볼 것, 온갖 정보에다가 포르노 비디오까지. 지금 생각해 보니 무슨 거래를 해서 선장에게만은 은밀하게 보고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서로 눈감아 주며 한국에는 없는 희한한 물건들을 숨겨 들여오곤 했을 때니까.
아무튼 나는 두 주가 넘는 깜깜이 항해 끝에 어느 이른 아침, 바다같이 큰 강의 하구에 있는 아스토리아라는 항구에 다다랐다. 잡히면 어쩌나? 잔뜩 긴장하여 숨어 있는데 별표 뱃지를 달고 권총을 찬 거한이 통통배를 타고 다가와 배에 올랐다. 그 이민관이 일을 마치고 그 몸매에도 능숙하게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연거푸 두 사람이 올라왔는데 하나는 작달막하고 똥똥한 인디안 여자이고 하나는 머리칼을 잘 빗어 넘긴 중년의 한국인 남자로 알고 보니 그는 목사였다.
여자는 자질구레한 인디안 기념품을 파는 척하며 실제로는 선원실을 하나 잡아 문을 닫고는 간이 쇠침대에서 차례로 몸을 팔았다. 몸을 사고 나온 선원들에게 목사는 옆방에서 구구절절이 하느님을 팔았다. 그리고 그 사이, 어느 틈을 보아 나는 인디안 여자의 손지갑에서 지폐 여남은 장을 물어보지도 않고 외상으로 샀다. 나중에 열 배로 갚으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손 병장은 왜 다른 건 다 해 주면서 미국 돈은 한 푼도 안 쥐어 준 거지? 배에서 뭍으로 숨어들 기회는 지금 뿐이라면서, 택시비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때 다시 긴 차량의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 열 시.
그랬었지, 그 때도 이런 늦은 밤이었지. 아스토리아에 내려, 진목사가 남겨 놓은 주보를 보고 어찌어찌 그 개척 교회를 찾아 문을 두드렸을 때도, 그리고 그 동네에서 페인트 업을 하는 한국사람을 몇 달 따라다니다가 마침내 남가주의 엘에이 코리아타운에 스며든 날도.
이제야 좀 컴컴하고도 숨을 곳 많은 큰물에 섞이는구나. 날 잡아내긴 어렵겠지. 한인촌을 근거지로 온갖 잡일을 하며 어느 정도 경계심을 푼 채 살면서 푼돈을 모으다가 아무래도 신분확보부터 해야겠다, 언젠가 영란이도 데려와야 하는데 밀입국 신분으로 어떡하나? 차일피일하다 한 해가 지나서야 건너건너 어찌 소식이 닿았는데 영란이는 쇠창살 안에서 아기가 지워졌고 병보석으로 나왔다가 작년 8.15 특사 때 이름이 들었단다. 하지만 몸을 추스르고 나서는 옛 동료들에게 대놓고 나를 배신자, 밀고자로 저주하며 이제는 부위원장 정비공 방씨에게로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 버렸단다. 할 수 없지 뭐. 내가 비겁했어. 그때 허둥지둥 배를 탈 게 아니라 모든 걸 포기하고 너를 보러 동대문 구치소로 걸어 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잡히면 죽는 줄로 알고서는……. 어쨌거나 이곳에서 살려면, 다시 호적이라도 만들려면 이 방법 저 방법 다 해도 방법이 없는지라 나는 하숙방 동기의 소개로 위장결혼 전문 브로커를 찾았다.
그때 돈 팔천 불, 공지니는 내 피같은 돈으로 산 서류상 내 마누라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이혼녀란다. 딸린 자식도 없이, 카페에서 돈도 벌면서. 이러는 건 어디까지나 해 본 부업이고 동포끼리 구제 차원이니깐 더 이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선수들끼리 왜 이래? 이래봬도 나도 태평양을 혼자 헤엄쳐 오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니깐? 코웃음을 치고 쿨하게 거래한 결과가 일년 반 만에 나왔다. 이날만은 딜리버리고 뭐고 내 다 내려놓고 한 턱 쏘지! 오전에 한 탕 이삿짐 뛰다 마침 타운을 지나는 길이라 점심때 숙소에 들렀는데, 맙소사! 광고 나부랭이에 섞여 우편함에서 내 그린카드가 나왔다! 세상에! 이렇게 향기롭고 값진 증표딱지가 다 있다냐? 눈물이 핑 돈다. 남들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명함만한 그 영주권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래, 한 잔 해야지. 오후 일거리는 몽땅 취소를 하고 멕시칸이며 일꾼들 너댓이 저녁까지 거나하게 부어라 마셔라. 이창기 니 고생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꺼이꺼이 울어삐라 마! 이윽고 이들을 보내고 쓸쓸히 숙소로 걸어가다 문득 공중전화가 보였다. 미친 놈! 그냥 가지 공지니는 왜 불렀니? 오늘 뭐 줄 게 있는데 그리 가도 되겠어요 하고 없는 핑계도 만들면서. 동전은 왜 하필 똑 떨어지게 오른쪽 주머니에 남아 있었다냐!
이 밤중 통신망에 문자가 뜬다. 조금 남쪽에 기상이변의 조짐이 있나 보다. 폐색전선이 요동치니 돌풍에 각별 주의. 알았다. 알았고말고.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찜찜하고 떨린다. 폐색전선이라……. 반갑고도 좀 찜찜하다. 공지니는 왜 오지 말란 소릴 안 하지? 아무튼 그 밤을 나는 지니의 집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버릇처럼 더 자주, 헤어나지 못한 본능으로 서로 간에 얽혀 버린 애착이었다. 그리고 한 해쯤 뒤, 내가 롱비치의 트럭 운송회사에 취직이 되었을 무렵 해서는 아예 둘이서 새 아파트를 구해 함께 살았다. 다시 몇 해 후, 나는 이때까지의 모든 것, 한국에서건 이곳 미국에서건 지나온 땟국을 모두 씻고 거듭나고자 독수리 날개 달린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다시금 갈만한 교회를 찾아보았다. 아내는 이제는 피임을 풀었는지 비로소 배가 불러 오기 시작했다.
이즈음 나는 뱃속의 아이와 우리의 앞날을 위해 수입이 나은 장거리 트럭 운전수가 되었다. 시내 배달을 하면 한 달에 기껏 사오천 불쯤 번다. 그런데 엘에이에서 뉴욕을 한 탕 뛰면 적어도 삼사천 불은 떨어진다. 한 달에 두 번이면? 세 번이면? 아, 욕심이 비극의 자궁임을 그때야 어찌 알 수가 있었으랴? 더군다나 그 욕심이란 것이 시침을 떼고는 건전과 상식, 성실과 의무라는 포장지를 겹으로 덮고 있음을!
이 넓은 대륙, 갓난 순영이를 키우는 아내를 위해 나는 트럭 스탑마다에서 장거리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외롭거나 졸릴 때마다 아내와 아기의 사진을 보며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이곳저곳 광활한 풍경을 사진기에 담아 집에 갔을 때마다 내 기나긴 여정 얘기에 곁들여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새끈새끈 자는 순영이를 옆에 뉘어 놓고는. 그리고 이제 얼추 두 해만 더 뛰면 힘 좋고 쓸 만한 새 트럭을 사서 차주 운전사가 될 수 있을 거라며 어느 쉬는 날, 순영이를 유모차에 태워 아내와 함께 파운틴밸리에 있는 중고 트럭 딜러에게 갔다. 8만 불짜리. 꼭 마음에 드는 새차같은 중고차, 600 마력짜리 18 단 기어의 트럭을 점찍었다. 이정도 수준이라면! 그런데 금고에 쟁여 둔 현금이 아직 조금 모자라는구나. 이 내 분신과 같은 트럭만은 융자로 사기 싫다. 조금 넉넉하게 일 년만 더 모으자. 그런데 그 일 년이 영원이 되어 버렸다.
언제부턴가, 아마 순영이를 낳고 나서 몇 주 후부터였겠지. 아내는 부쩍 짜증이 늘었었다. 출산 후유증이겠지. 한 번은 집에 왔더니 아기는 클립 속에서 울고 있고 아내가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슬그머니 옷칸 속에서 걸어 나왔다. 우울증인가? 실성을 했나? 하지만 그런 증세는 얼마 뒤 사라지고 이젠 한껏 명랑부인, 명랑 공여사였다. 만사가 황금빛,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였다. 그리고 내가 너무 안됐다며 한사코 말리는데도 순영이를 굳이 돈까지 줘 가며 이웃에 맡겨 놓고는 내 장거리 트럭 옆칸에 올라탔다. 그리고 엘에이를 출발하여 마이애미를 다녀오는 긴 여정 동안, 곰살맞게 나를 보살피며 말벗이 되어 주었다.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주고 가녀린 손날로 목덜미를 두드려 주고, 귓바퀴를 당겨 주고 틈틈이 내 엄지를 바늘로 따서 혈당치를 재어 주고, 휴게소에서는 미리 내려 후진하는 긴 내 차를 손짓 몸짓으로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운전석의 여러 장치들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묻고 실제로 작동을 해 보았다. 자격증만 없었지 반은 운전수였다. 이런 동서남북 장거리 동승을 아내는 자청하여 한 해에 두어 차례나 했다. 그러면서 우리 순영이 좀 더 키워 놓고는 내가 운전해 줄게요. 당신 너무 불쌍해! 이렇게 몇 십 년 땡볕에 다니다 보니 당신 몸 왼편 반쪽이 햇볕에 다 타서 쭈글쭈글해져 버렸잖아! 이 반 쪽은 멀쩡한데. 내 팔뚝을 쓰다듬으며 안쓰러워했다.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있을까? 운전수 뒤편, 굵은 그물로 안전장치가 된 간이침대 선반 위에 잠든 아내의 얼굴을 가끔 카메라에 담는 외에 나는 바깥 경치나 새떼의 날아오름에도 눈이 안 가 사진 찍기 취미마저 놓아 버렸다. 대신 이제 석 달만 더 기다리면 새 차를 사리라, 아내를 위해 그 차 안에는 더 좋은 음향시설, 더 편안한 잠자리를 꾸려 주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이러한 달콤한 회상의 장막은 닫히고 내 잠은 달아났다. 조금 전 갑자기 길이 막혔었다. 가보니 앞쪽에 40 피트짜리 냉동트럭 하나가 물가에 버려진 잉어처럼 돌풍에 배를 옆으로 누이며 쓰러져 있다. 그 끄트머리에는 빨간 승용차 하나가 밟아 놓은 코카콜라 캔처럼 바닥에 끼어 있다. 내일 아침까지 더 이상 앞 구간은 진입금지란다. 되돌아가든지 이 자리에서 머물든지 하란다. 밤 열한시, 뒤따라온 차량들 때문에 차 돌리기도 힘들지만 아무튼 나는 덴버를 향해 앞으로 가야 하니까 우선 갓길에 차를 바짝 붙이고 뚫릴 때까지 기다리며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눈은 화경같이 밝아오고 잠은 사라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세상이 멈추어 선 듯 소스라치게 적막에 휩싸였다. 마치 그날, 내가 저녁 늦게 다우니의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섰을 때처럼.
그 항차는 유난히 길고 지그재그였다. 아내는 순영이 병원에도 데려가야 한다며 이번에는 쉬겠다고 했다. 첫 목적지는 시카고였는데 거기 가니 오더가 오기를 다시 애틀랜타로 가란다. 열나게 달려 애틀랜타를 찍었더니 다시 서북쪽으로 시애틀, 그리곤 아스토리아, 포틀랜드 – 아, 얼마나 추억 어린 곳들인가! 그리고 웬걸 다시 유타의 솔트레이크 시티, 멕시코 국경의 라레도, 달라스, 엘파소, 라스베가스, 새크라멘토, 다시 라스베가스를 거쳐 거의 한 달 만에 롱비치에 트럭을 대고 혼자서 승용차로 집으로 왔다. 이번에는 일주일쯤 쉬어야겠다.
엘파소에서부터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에도 가끔 전화 불통이 있었던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캘리포니아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집에 전화했더니 그저께 봤는데요? 한 열흘 뒤쯤 오신다면서요? 했다. 회사에 알아 봤나? 아내가 내 일정까지 정확히 꿰고 있구나. 아무튼 그때는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마른하늘에 날벼락! 한문으로 청천벽력이라던가? 집에 오니 아무도 없고, 여기 저기 밤늦게 다 연락할 수도 없고…, 한참 후 설마 하고 지하실에 있는 금고를 열다 얼어붙어 버렸다. 텅 비어 버렸다! 정신이 아뜩했다. 정신없이 뛰어 올라가 이층 아내의 옷장을 여니 여기도 텅텅, 방도 벽도 액자도 겉은 멀쩡한데 웬만한 귀중품은 다 텅텅. 이게 뭐야? 집털이 납치를 당했나? 119? 114? 망연자실 앉았는데 자동응답기에 불이 들어와 있다. 아내였다. 그리고 장난치듯, 로버트처럼 기계적으로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 우! 리! 이! 혼! 해! 요! 순! 영! 이! 옆! 집! 에! 있! 어! 요!
찰칵, 그리고 끝이었다. 장난도 이거 너무 심하잖아?
그런데 장난이 아니었다. 도대체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다가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무슨 전에 없던 병이 갑자기 도지기나 한 것일까? 도대체 왜 그래? 그건 그렇고 돈은 다 어디 갔어? 응? 나는 좁은 우리 안을 밤새도록 서성이는 표범이 되었다.
그날 밤을 안절부절 뜬눈으로 지샜듯이 지금 다시 이 허허벌판 일직선으로 뻗은 90번 고속도로의 갓길에서 보조 엔진을 공회전 시켜 놓은 채 나는 뜬눈으로 지샌다. 왜 그랬니? 왜 그랬니? 수천 번을 되뇌는데 다시 길이 뚫린다. 새벽 네 시다. 어쨌든 우리 달구지들은 거북이처럼 천천히든 다람쥐처럼 재빨리든 일단 움직여야 존재 가치가 있다니깐? 그렇지, 아무리 억장이 무너져도 시간이 좀 지나면 그 무너진 기와더미를 비집고 살아가려는 새싹이 고개를 내밀듯이 빛을 향해 길은 트이는 거야.
사연은 이랬다. 괴롭지만 복기를 하자. 역시 세월이 약이로구나. 아내는 조울증의 후유증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에 얽혀든 건지, 아니면 괜히 내가 어느 늦은 밤 실없이, 트럭 주차장에서 생일 축하해 준답시고, 아아 세상만사 가운뎃길이 좋은데 내가 선을 넘었던 걸까? 우리 달밤에 운동 삼아 춤 한 번 출까나? 생뚱맞게 춤은 무슨? 처음엔 빼던 아내가 서투른 나를 잡고 몇 스탭을 밟더니 지루박에다 차차차, 도롯또 탱고에서 부루스까지. 아이, 이러다 발 밟겠네, 나 내버려 둬. 그리곤 제 그림자와 어울려 한참 무아지경에 빠지는 모습을 비켜서 지켜보다 뭔가 야릇한 느낌이 오긴 했었다. 이러다 춤바람의 뇌관이 건드려졌는지 아내는 집에서 다시 밤마실을 되살리다 오래 전에 카페에서 알던 놈팡이 재칼과 나 없는 틈틈이 바람이 난 거다. 난 아직 이해가 안 가는 게, 저렇게 귀여운 아기를 낳아 놓고도 그럴 수가 있는가?
알고 보니 커뮤니티에서는 꽤 힘깨나 주는 사업가이면서 실은 조폭 두목인 그 놈에게 내 돈도 홀라당 갖다 주고 미리 변호사 사서 날 꼼짝 못하게 묶어 놓았다. 이혼사유라고는 내가 도리어 회사의 미국 여직원과 바람이 나서 가정을 안 돌보고 수입을 빼돌렸으며 자기가 거의 매번 아기까지 맡겨 놓고 내 조수가 되어 함께 모은 돈을 내가 다 탕진했다는 둥…….
아하, 그러니까 언제부턴가, 아마 내가 처음으로 지니의 침대에서 잤던 그날 밤부터?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차곡차곡 연출하고 챙겨 놓았던 건 아니고? 스무 명도 더 되게 좋은 조수를 운전수로 길러 준 나를 미덥게 봐서, 그 중 나은 일거리를 챙겨 주곤 했던 회사의 로라가 아닌가? 회사의 카운터에서 어깨동무하며 브이 자를 그리고 활짝 웃는 사진은 지난 봄 아내와 들렀을 때 아내가 찍어 준 건데 아내는 그걸 포토샵 하여 온갖 추잡한 사진으로 생산해 내었다. 그 모두가 내 못 말리는 외도의 결정적인 증거랍신다.
아무튼 허둥지둥하다 정신을 가다듬고 현실 타개에 착수했지만 결과는? 내가 졌다. 참패였다.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빳빳한 백 불짜리로 모아 두었던 현금 8만 불은 세금 보고가 안 된 지하경제의 자산이었기에 제대로 소명도 못하고 넘어갔다. 남은 것은 순영이와 내 옷 몇 벌. 나는 세상이 허무하여 몇 달을 폐인처럼 방구석에 쳐박혔었지만 순영이 때문에 매양 그럴 수도 없었다. 떨치고 일어나 아는 집 이 집 저 집, 교회를 찾아다니며 아이를 맡기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빌어먹을 년! 두고 봐라, 순영이는 내가 번듯하게 키운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었다. 마흔이 다 된 빈털터리 남자가 혼자서 직장과 육아를 겸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요즘처럼 무슨 온라인 재택근무가 성했던 때도 아니었고. 그리하여 아무리 달래도 엄마를 찾으며 우는 순영이를 붙잡고 함께 운 어느 날, 눈물을 머금고 순영이를 남의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했다. 그 때가 세살 반, 아빠가 까까 사 가지고 금방 올께~ 하고 속이고선 백인 노부부에게 아이를 넘기고 나는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지금도 허둥지둥 달린다. 이제 덴버가 150 마일 남았다. 아침 아홉시다. 식사도 물론 거르고 달려온 지 네 시간이 넘었다. 아침부터 비바람이 들이치다 볕이 나다 갑자기 도토리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등 변화무쌍이었다. 그런 속에서 한 시간 전쯤 오줌이 마려워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다시 전화가 울렸었다. 순영이였다.
- 아빠~, 와~?
- 순영아! 순영아! 뚜뚜뚜……
그리곤 무슨 영어 경고가 내 통신을 가로챘다.
- 경고! 토네이도! 경고! 남서쪽 75 마일 전방!! 올 스톱! 대피소로 피할 것! 올 스톱!! 올 스톱!!
젠장, 이 허허벌판에서 피할 데가 어디람!
반대 차선에서 앰뷸런스 한 대가 경고등을 번득이고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와 지나쳤다. 몇 대의 차량이 멈추더니 유턴을 하거나 나들목을 찾아 곧장 전진한다. 나도 천천히 따라간다. 저 앞쪽 낮은 하늘이 검은 파도의 무리처럼 넘실거린다. 다행히 머지않아 남북으로 뻗은 지방도로에 내릴 수 있었다. 이십 분 쯤 북쪽으로 달리는데 경찰이 막아선다. 대피 안내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그 사이 경고 해제가 되었는지 통과 시킨다. 조금 가다 동서로 난 길을 서쪽으로 달렸다. 아, 이젠 혼자다. 아무도 없는 들판이다.
- 기다려라 순영아, 아빠가 간다!
이제 토네이도 전선은 조금 더 남쪽으로 물러선 모양이다. 조금 여유가 생겨 옆자리를 훔쳐보았다. 금빛 포장지에 싸인 장미 꽃다발은 아직 그대로다. 다시 길을 돌아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90 마일이 남았다. 대지가 아까보단 덜 평평하고 조금 높아진 것 같다. 토네이도도 산간지역에서는 맥을 못 쓴다지? 그런데 갑자기 또 우박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다. 대추알만큼. 앞유리에 작은 금이 갔다. 제기럴!
그때도 그랬었지. 앞유리를 깨어 먹은 것이. 생각해 보면 새록새록, 너무 억울하고 죽고 싶어 주먹으로 앞유리를 쳤었지. 그렇게 내 손으로 내 유리를 깨어 먹은 것이 세 번째, 그리고 나는 결심했었지. 그만하자. 이럴수록 그 연놈들은 더욱 고소해 하겠지. 잊어 주자. 다시 시작하자. 순영이만 잘 크도록. 다행히 하느님이 보우하사 맘씨 좋은 노부부에게 맡겨졌다. 그나마 얼마나 큰 복인가! 그런데, 그랬던 그 아이가 조금 크더니 나를 노려보며 오지 말라고 했을 때는 또 얼마나 한 번 더 억장이 무너졌던가! 하지만 그것도 옛일, 이제 나는 넉넉잡아 두 시간 후면 순영이를 본다. 저 꽃다발을 어느 손에 쥐어 줄까? 선 채로 내 딸을 품에 한 번 안아 볼 수는 있을까? 애기 때처럼, 양 겨드랑이를 받쳐서 우리 딸 장하다! 둥개둥개 추어줄 수 있다면!
- 우리 순영이~ 이쁜 순영이~
- 응
- 말도 잘 듣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 응, 응
남의 밥을 얻어먹이고도 저녁에 찾아와 아빠와 잘 때면 나는 깜깜한 방, 침대에 누워 이렇게 순영이를 들어올리며 추어주었었다. 순영이는 금방 하품을 하며 잠에 겨워 꼬박이면서도 응, 응, 대꾸를 하다 내 가슴에 뺨을 대고서 잠들었었지.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나도 하품이 나온다. 어느덧 덴버에 거의 다 왔는데 주위가 이상하리만치 컴컴하다. 개기일식이 이런가? 덴버 대학이 30 마일 남았다. 돌풍에 차체가 부르르 떨며 흔들린다. 이제 20 마일, 혹시 저 산기슭에 보이는 희고 긴 건물이 그 캠퍼스? 조금 섬뜩하게도 아무 차량도 다니는 게 없다. 웬일이지? 나 혼자 길을 잘못 들었나? 물속 같다. 하늘 한 귀퉁이가 금방 터져 햇살이 잠깐 비치다 들킨 것처럼 자락을 감춘다. 이제 2마일만 가면 지방도로로 내릴 참이다. 그 때 갑자기 번쩍, 어디선가 번개가 가까운 곳에서 치더니 주위가 적막해졌다. 모든 통신이 한꺼번에 꺼졌다.
얼랄라? 피식피식 시동도 꺼진다. 가던 관성을 제어하여 가까스로 차를 멈추었다. 한길 한복판이다. 차에서 내려야 하나? 어깨로 밀어도 문짝이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금방 사방에 쐐앵~ 우두두두, 뭔가가 벽을 치며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왼쪽 언덕 너머에 피어나 말려 올라가는 한 줄기 기다란 구름기둥이 원폭 실험의 버섯기둥으로 부풀더니 거대한 공작기계의 꽈배기 날처럼 얕은 땅거죽을 짓씹어 돌리며 다가온다. 사오 마일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위기다!
옆 창문을 깨트리려도 안 되고 시동을 다시 걸어도 안 되고…… 그 몇 초간, 슬로우 비디오 속에서 넘실넘실 허둥대던 나는 이윽고 참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운전대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바로 눈앞에 수평으로 떠돌며 감겨 올라가는 큰 간판 부스러기며 문짝이며 타이어며 나무둥치며를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파묻고 눈을 감았다. 트럭이 움찔거린다. 앞머리가 들렸다 놓였다 하더니 이제 이륙하는 비행기처럼 내 트럭이 통째로 공중으로 떠오른다. 비스듬히 저 아래 대학 교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세차게 그 검은 소용돌이 속에 이내 빨려 들어갔다.
잠시 꿈속에서 꿈을 깬 양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나는 이미 터져나간 앞유리로 트럭을 벗어나 큰 소용돌이의 안쪽 벽에 붙어 공중을 돌고 있었다. 물레틀 위에 돌아가는 질그릇 사래처럼 세차게 돌아가는 그 벽에 붙어 있는 꼴이 무슨 유원지의 회전그네 같기도 하다. 점점 더 위로 올라가며 조금씩 도는 속도가 주는가 싶더니 내 주위가 조금씩 밝아지며 모습들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게 누구야? 마치 고공에서 뛰어내린 낙하산 대원들이 낙하산을 펼치기 전 한참 동안 손에 손을 잡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들 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쪽 벽에 붙어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다. 누구지? 그때 그 옷차림 그대로, 맞은편에는 영란이다! 영란이는 나를 보고 웃더니 빙 돌아 헤엄쳐 와서는 내 손을 잡았다가는 오지마! 배신자! 하고는 샐쭉거리며 멀어져 갔다. 그리곤 지경이, 소망이, 칠순이, 구희, 양옥이, 말숙이, 끝분이, 군자, 박기사, 최기사, 용씨 아저씨, 천병우, 국순실…… 그때 그 차부에서처럼 금방 이름이 떠오르네.
그들이 한 바퀴 순례를 마치자 이번엔 다른 바퀴가 돌면서 떠올랐다. 그 사이 아래를 힐끗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눈 덮인 산꼭대기가 지나간다. 이번엔 손병장이다. 그리고 권장군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그 동안 수고 했네……. 장군 마누라까지 나온다. 고생했어요, 너무 잡일을 많이 시켜서……. 이건 뭐야? 히히 웃으며 인디안 여자가 나온다. 내 돈 안 줘? 오케이 이젠 됐어. 염려 마! 진목사? 곽사장? 로라? 카슨씨? 순영이인가? 잠깐 보이는가 싶더니 등을 돌려 숨어 버린다. 공지니와 조폭 재칼은 끝내 안 보인다. 쟤들인가? 조금 아쉬우면서 뒤죽박죽이다. 빙글빙글 돌던 파노라마 여기저기서 방앗간의 묽은 떡가래처럼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또 비직비직 밀려 나온다. 학교 친구들? 동네 아이들? 그리고 저 멀리서 어머니가 손을 흔든다. 어머니~~. 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동생들도 물끄러미 보고 있다. 그 사이에 이 거대한 회오리는 남쪽으로 많이 미끄러져 간 것 같다. 평평한 벌판이 내려다보인다. 평화롭다. 백사장이 보인다. 그 때 머리 위에서 가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아빠~
순영이였다. 그런데 대학생 같아 보이지를 않고 앳된 모습이 마치 고등학생 같다.
- 학교에 안 있고? 졸업식 안 하고?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 안 와도 됐는데, 아빠 보구 싶어서. 나 대학 못 갔어…… 지금 시애틀에서 오는 거야. 아빠 데리러…….
- 그래? 난 졸업하는 줄 알구…… 이거 받아라.
생각이 나서 내 손을 보니 아까 그 꽃다발이 쥐어져 있다. 순영이는 그것을 받아 입으로 불었다. 붉은 꽃잎들이 한꺼번에 나비가 되어 흩어져 날아갔다.
- 우리 순영이~ 말도 잘 듣고~
- 응
- 착한 순영이~ 고운 순영이~
- 응
이제 우리 둘은 서로 한 손을 잡고 나란히 구름을 기대고 누웠다. 그리고 비스듬히,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갔다. 똬리를 틀던 겹겹의 회오리는 풀리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새 눈부시게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양탄자처럼 눈 아래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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