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은 예수가족교회(백금산 목사 담임)의 매주 토요일 오전 예수대학 강사들 모임에서 나누어진 내용입니다. 아래는 그중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5장에 대한 나눔 부분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되도록 현장성을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문장의 흐름이 항상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웰스의 책을 읽고 토론과 나눔을 하실 분들을 위해 하나의 샘플정도로 생각하시면 도움 되실 겁니다. - 편집자
위대하신 그리스도
5장 허무주의와 그리스도
일시 : 2008년 12월 13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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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이번 5장 허무주의와 그리스도 부분은 다른 장에 비해 내용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 장을 읽고 각자 새롭게 깨달은 점이나 느낀 점등이 있으면 먼저 나누고 발제자의 발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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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전도사 : |
허무주의에 대해 잘 몰랐는데 조금이라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웰스가 현대의 허무주의를 사회학적인 측면보다는 구원론적으로 봐야한다고 강조하였는데요, 결국 현재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많이하게 되었습니다. 또, 웰스가 현대 허무주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이 결국 종말론이나 칭의 교리 등과 같이 중요한 성경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력이 참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이런 교리에 대해 충분히 강조하거나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데 앞으로 이런 진리를 더 심도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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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진 집사 : |
저는 종말론과 칭의론 같은 교리들이 개인의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변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이 변혁을 강조하지 않고 개인의 체험에 머무르고,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교리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변혁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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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네, 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장의 특징은 종말론, 기독론, 칭의론과 같은 중요한 교리들이 허무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요, 상당히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물론 이 세 가지 교리들이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교리들로서 일반 조직신학책에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교리를 현대의 허무주의 상황이라는 문맥 속에서 고찰하고 적용될 때, 이 교리의 중요성과 의미가 훨씬 더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양집사님은 5장을 어떻게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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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원 집사 : |
저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허무주의는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상인데, 이것이 사회학적인 문제라기보다 결국 사람이 자기 내부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의 삶속에 하나님이없으니까 무엇을 어떻게 하든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현대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도서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시대의 공통된 문제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계몽주의 시대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주의보다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성에 대해 절망하는 허무주의가 인간의 죄인된 실상에 더 가깝게 다가간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는 절망하고 또 절망해야 보아야 무언가 구원을 요청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오늘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대에 말씀을 잘 선포하면 오히려 지금이 더 선교적인 기회를 많이 얻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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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잘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현대인들이 허무주의를 느끼게 되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소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때문입니다. 허무주의는 서양에서는 실존주의 철학과 관련이 있고, 동양에서는 불교 같은 종교와 관련있습니다. 허무주의라는 주제는 성경에서는 좀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전도서에서 제일 많이 드러납니다. 웰스가 이번 장에서 허무주의를 성경의 중요 교리와 많이 연결시켜 설명하는 데요, 그 동안 이런 교리들을 따로따로 생각할 때 보다, 이렇게 서로 연결시켜서 보니까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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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중 간사 : |
카뮈와 사무엘 베케트, 쿤데라 등의 문학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유럽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끝까지 다 가보고, 허무가 참 무섭고 상대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그것을 끝까지 성실하게 대면하려고 했기에 실존주의로 드러난 것 같고, 그것을 이 책에서는 철학적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허무한 것들을 직시하게 되면 너무 괴로우니까 그 공허한 내면을 갖고 소비나 다른 활동 등을 통해 내면을 채워나가려는 경향을 문화적 허무주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꽤 적절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허무의 문제는 단순히 문화적 산물, 또 현대의 산물만이 아니라 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결국 역사상 항상 반복되어 왔던 이야기라는 것, 전도서와도 연결이 되고요, 어쨌든 결국 허무는 구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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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그렇지요. 웰스를 보면 허무주의를 상당히 거시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그냥 허무주의 하면 철학적인 허무주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유럽적 허무주의와 미국적 허무주의 즉 철학적 허무주의와 문화적 허무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유럽적 허무주의 즉 철학적 허무주의에는 우수가 깊게 배어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허무주의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가장 잘 드러났는데요, 실존주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실존적인 존재이며, 인간은 독특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를 얻는 대신에 인간은 무의미하고 공허한 존재라는 것을 대가로 지불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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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중 간사 : |
<고도를 기다리며> 등과 같은 책들은 존재의 무의미성, 즉 존재가 궁극적인 의미도 없고 거기서 그런 의미를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방랑자 두 사람이 나와서 너무나 단조로운 대화를 나누는데요, 그 첫 대사가 원서에 보면 ‘nothing to be done’, 그러니까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보면 다섯 명 정도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들이 거기서 서로 간에 아무런 의미 없이 서로 성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거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나 사회나 이런 데서 어떤 의미를 추출하려는 생각이나 노력 등을 보여주지 않으며, 존재라는 것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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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허무주의의 핵심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인데요, 유럽식 철학적 허무주의 즉 실존주의 철학은 ‘공포’, ‘불안’ 등을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대한 개념을 많이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불안과 공포의 차이는 무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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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중 간사 : |
공포는 대상이 분명히 있는 것이고 불안은 대상은 불분명하지만 존재의 무의미성 때문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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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그렇죠. 공포는 대상이 분명하고, 불안은 대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서운 개를 마주쳤을 때 혹은 사람이 강도을 만났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은 공포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 ,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 등은 대상자체가 막연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바탕에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자기의 삶에 대한 불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감이 기본적으로는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될 때, 이러한 근본적인 불안감에서 해방됩니다. 물론 예수 믿는다고 해서 100%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 미래와 죽음이후에 무엇이 있을까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인간실존의 근본적인 불안감'으로부터는 해방됩니다. 하나님의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주관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생기는 '평화'라는 것도 이런 맥락속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 집사님은 이번 장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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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섭 집사: |
예, 웰스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종말론, 기독론, 이신칭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교리 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에서 새로움을 느꼈습니다. 특히 이신칭의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그동안 이신칭의를 법정적인 모델로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이신칭의 교리를 '허무주의'와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신칭의에 대해서 좀 더 다른 각도로 공부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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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좀 더 공부할 정도가 아니죠? (다같이 웃음) 이신칭의 교리는 요즘 잘 말 안하는 주제이지만 종교개혁 때는 가장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종말론, 기독론, 칭의론 등은 조직신학책의 순서로 보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서 논의되는 주제들인데, 이게 어떻게 상호 연결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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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섭 집사 : |
그리스도가 공통 분모라고 파악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모두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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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철 목사 : |
저도 그게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종말론이라는 것은 시대를 바라보는 인식을 주는 것 같고, 기독론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같고, 고. 또한 이러한 인식과 의미를 만나게 하는 것이 ‘칭의론’같고, 어쨋던 잘 연결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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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이번 장을 잘 읽었을 때 우리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종말론, 기독론, 칭의론의 기독교 교리가 어떻게 허무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종말론, 기독론, 칭의론 이 세 교리가 어떻게 연결된다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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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진 집사 : |
종말론, 기독론, 칭의론이 모두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어떻게 침투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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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원 집사 : |
저도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이해를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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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문제는 종말론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공간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바울 서신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 , 요한복음의 '영생'이라는 개념과 동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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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전도사 : |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허무주의가 일종의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면에서 종말론과 이신칭의와 기독론이 서로 관계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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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허무가 하나님의 일종의 심판이라는 것은 어디에 주로 속해있는 문제일까요? 그것은 구원론에 관련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신칭의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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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중 간사 : |
이 세 가지가 다 계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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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계시는 맞는데 (다같이 웃음) 이 세 가지가 같은 틀 속에 있기 때문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와 '아직 아니'라고 하는 틀입니다. '이미'라고 하는 현재성과 '아직 아니'라고 하는 미래성의 이 양면성의 시간 개념이 종말론, 기독론, 칭의론의 공통분모입니다. 종말론의 경우를 봅시다. 종말론 하면 보통 '미래'만 생각합니다. 구약 시대적인 의미의 종말론은 항상 역사의 끝이라고 하는, 미래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적인 의미의 종말론은 종말이 미래에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현재 이미 일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종말은 '이미'라고 하는 현재성과 '아직 아니'라고 하는 미래성이 있는 것입니다. 즉 신약 성경에서는 종말을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일로도 생각하고 미래의 일로도 생각을 하죠. 그래서 종말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침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왜 침투라고 말하는가 하면 원래 미래에 일어나야 하는데 현재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서신식으로 말하면 저 세상에 일어날 일이 이 세상에 침투되어 들어온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도 할 때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죽고난 다음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어야 하는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미래에 얻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현재 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영생이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와 ‘아직 아니’의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처럼 현재와 미래와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종말론이 왜 이런 구조를 띠게 될까요? 기독론 때문입니다. 사실 종말은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은 초림과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예수님오심도 시간적으로 '이미' (초림)와 '아직 아니'(재림)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기독론은 칭의론(구원론)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는 것인데, 그러면 구원도 2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이루어졌지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임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칭의론'입니다. 칭의는 기본적으로 법정에서 '무죄'로 선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최후의 심판을 하실 때 '무죄선언'을 받게 되는 것이 '칭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칭의'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칭의도 '이미'와 '아직 아니'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와 '아직 아니' 영어로 'already'와 'not yet'은 신약 성경을 보는 우리의 눈을 열어줍니다. 삼위일체라는 말도 성경에 없지만,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에 대한 구절들 특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를 삼위일체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면 바르게 이해가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양면성의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종말론, 기독론, 구원론 등의 내용들 중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구절들이 갑자기 이해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말론, 기독론, 칭의론이 허무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허무라는 것은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온전한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하니까 무의미성즉 허무가 생깁니다. 그러면 종말론이 왜 허무에 대한 해답이 되는 것일까요? ‘종말은 죽어봐야 아는거지.’ 이렇게 하면 현재에 확실한 어떤 것을 붙잡을 수가 없어서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종말은 미래의 일 만이아니라 현재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현재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맛보기 때문에 현재에세서도 미래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은 현대인의 무의미성에 대한 치료제가 되는 것이죠. 즉 종말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예수님도 이미 오셨습니다. 구원도 이미 받았습니다. 이러한 종말과 예수님의 오심과 구원의 현재적 체험들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아직 충만히 삶의 의미가 다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우리가 이미 경험한 이러한 경험들은 미래에 더 충만히 경험할 종말과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맛보기임으로 우리의 현재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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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섭 집사 : |
약에도 초림, 재림에 대한 개념이나 내용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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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물론 구약에도 예수님의 초림때 일어날 내용이나 재림 때 일어날 내용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초림'과 '재림'의 두 번에 걸쳐 강림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언급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메시야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수가 정복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메시야의 오심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면 메시야가 초림해서 고난을 받고, 메시야가 재림하실 때 원수를 정복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자, 다음으로 주일 형제는 이번 5장을 읽고 어떤 생각이나 나눌 것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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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 형제 : |
저는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현대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절망을 경험하는 방식이 매우 가볍다는 것입니다. 아까 언급됐던 유럽식 실존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상당히 절망을 깊이 경험해야 하고 허무주의의 결론을 얻어야 할 텐데, 미국은 그런 깊은 절망의 경험을 문화적인 소비의 형태로 바꾸어서 상당히 가볍게 바꿔버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또한 미국적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망을 깊이 있게 경험하기보다 소비문화, 엔터테인먼트문화 등을 통해 매우 가볍게 해소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문제는 이것이 성도들, 신자들에게도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깊이 근거함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허무함을 극복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다가 느끼는 허무함을 소비의 문화로 해소해 버리는 것이 실제 대다수의 신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둘째는 카뮈에 대한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실존주의자들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허무주의의 논리의 결론은 무의미성인데, 실존주의자인 카뮈는 논리적이고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윤리성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자들의 모습이고, 현대인들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책의 마지막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자에서 영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명제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포기하고 상대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문자나 언어 중심에서 이미지, 즉 영상 중심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객관적이고 명제적인 진리를 강조하잖아요? 따라서 교회가 현대성에 휩쓸려 설교나 성경공부, 독서 등의 고전적인 방법에서 영상, 연극, 드라마 등의 중심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경을 파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방식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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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세 가지 다 잘 말해주었지만 무엇보다 마지막 결론이 매우 중요한데요, 의미는 무엇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을까요? 계시입니다. 계시를 우리가 받을 때만 우리의 삶의 의미가 비추어집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말론이고 기독론이고 구원론 등입니다. 기독교인이 무의미를 극복하는 방법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하니까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계시를 통해 구주가 누구이며, 내가 누군가를 알고 있으니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이렇게 성경계시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것 자체가 현대의 허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해독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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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중 간사 : |
좀 전에 주일 형제가 현대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포스트모던적인 분위기에 포로가 되어서 반성경적이고, 반진리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진리를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왜곡된 형태로 소비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허무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보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허무를 느끼는 것 같고, 또 그런 것에 대한 답변을 못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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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무의미를 느끼는 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을 해석할 때도 전체 문맥 속에서 보지 않으면 의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살면서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은 진리를 통합적으로 알지 못하고 조각조각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조각조각으로만 배우면 성경의 전체 의미를 잘 알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체계 전체 즉 교리 전체를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공부해야합니다. 다음으로 이심주 목사님은 이번 5장을 어떻게 읽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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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주 목사 : |
뒤로 갈수록(앞에서 발표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말할 것이 많이 떨어져서... (다같이 웃음) 허무주의인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어떤 공백이나 허무를 인정 하고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간다는 인상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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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누가 적극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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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주 목사 : |
사르트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실존주의가 나오길래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진도가 잘 안나서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한 번 조사해보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사르트르가 나오는데, 사르트르는 의식하지 않는 나라는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것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순간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실존한다고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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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그게 무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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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주 목사 : |
저도 알쏭달쏭합니다. 사실 말이 어려워서 무슨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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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실존주의라는 말이 나오는데, 웰스는 기초개념은 다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초 개념들을 알고 읽으면 바로바로 이해가 되는데, 사실은 기초 개념을 모르고 읽으면 상당히 모호하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실존주의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인데, 실존주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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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철 목사 : |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책임있는 존재로서 존재한다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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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그보다 더 실존주의라는 사상의 핵심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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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중 간사 : |
존재의 무의미성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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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산 목사 : |
그렇습니다.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 허무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감명깊게 본 영화 중 하나가 <포레스트 검프>인데요, 실존주의를 우리 시대에 잘 대변하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깃털은 실존주의적 인간의 아이콘입니다. 깃털이 얼마나 가볍습니까? 그 가벼운 깃털이 실존주의 인간상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깃털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아이큐가 75밖에 안 되는 검프입니다. 깃털은 목적과 의미도 없이 바람부는 대로 날라다닙니다.검프는 인생의 거창한 목적과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검프의 인생도 계속적으로 우연과 해프닝으로 점철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즐겨라’라는 말은 실존주의자들의 중요한 '표어'중의 하나입니다. '현재를 즐겨라' 왜 일까요?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자들도 윤리적으로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척 고상하게 들리지만 그 바탕은 굉장히 허무한 것입니다.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현재의 충실한 삶이란 순간순간 자기 선택에 충실한 것입니다. 자시의 선택이 옳은 것이냐 잘못되 것이냐에 대한 관심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냥 순간순간 선택자체에 충실한 것이 실존주의적 인생관에 충실하게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즉 실존주의적 윤리관에 의하면 히틀러같은 독재자에 대해, 히틀러를 죽이는 선택을 하던, 히틀러에게 충성하는 선택을 하건 둘 다 자신의 선택에 충실하기만 하면 실존적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상대주의적인 윤리관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인간의 의미는 매 순간 순간에 선택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에 궁극적인 선악 개념은 없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고상한 것 같아도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철학적으로 심오한 사상은 허무주의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실존주의가 고상한 것 같아도 그것의 가장 기초는 허무주의입니다. 즉 철학적인 허무주의의 대명사가 실존주의입니다. 실존주의라는 게 인간의 허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가 되면 제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자살’입니다. 허무주의가 팽배할 때, 철학적인 허무주의가 팽배할 때, 철학적인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밀고나가는 사람은 ‘자살’로 허무주의를 실천한 사람입니다. 이제 윤집사님 말씀하실 차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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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찬 집사 : |
나올 만한 얘기는 다 나온 것 같네요. 저는 현재 허무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웰스가 이번 장에서 말한 내용을 설명해주는 것 자체가 훌륭한 변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리는 다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까?’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교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웰스가 기독교의 중요 교리를 가지고 허무주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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