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용 시집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시인수첩 시인선 042, 여우난골, 2021.
사이보그 선언 외2편
정한용
눈을 바꾸려 한다. 노안과 백내장으로 어차피 한번은 손볼 것, 최신 인공수정체를 끼우면 시력 20.0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다음은 이명에 시달리는 귀를 바꾸려 한다. 소머즈가 사용해 검증된 음파센서를 달면, 사람 심장소리도 들리고 심지어는 거짓과 진실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다음은 무릎 연골을 바꾸려 한다. 이건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오래 업그레이드시킨 것, 한번 달리면 안드로메다까지 저녁 마실을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다음은 소화기능이 떨어진 위장을 업데이트하려고 한다. 버전업하는 것만으로도 요강이나 놋대야를 씹어삼킬 수 있고, 광고에 의하면 일 년 굶고도 너끈히 살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이 꽃을 꽃이라 불러야 꽃이 되듯, 당신이 나를 사이보그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사이보그가 된다. 우리 사랑은 그렇게 완성된다.
로보사피엔스, 페페
페페, 커피 한 잔만 갖다 줘.
페페, 나 오늘 좀 기분 나빠, 왜냐고 묻지 마.
페페, 옆집 1504호 아줌마, 좀 엉뚱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페페, 내일 원고마감인데, 나머지 네가 좀 써줄래?
페페, 그래, 우리 내년에 결혼식 올리자.
페페, 안돼, 지금 당장은 안돼, 조르지 마, 보는 눈이 너무 많잖아.
페페, 화 내지 마, 지난 달에도 선물 사다 줬잖아.
페페, 마음에 안 들어? 디자인이 구려?
페페, 우리 촛불 켜고 와인 한잔하면서 기분 풀까?
페페, 다음 휴가 때, 모로코 여행 갈 땐, 꼭 데려갈게, 약속!
페페, 그런데, 너 옆집 아줌마 질투하는 거, 맞지?
페페, 좀 웃긴다고 생각하지 않니?
페페, 아니, 웃기는 게 아니라, 좀 슬퍼, 슬퍼하면 안 되니, 뭐?
페페, 너도 슬플 때가 있다고? 이해를 못한다고?
페페, 내 말에 삐쳤구나, 자 한잔, 건배!
페페, 튕기지 마, 사랑해줄게.
페페, 이리 가까이 와, 내 팔 베고 누워.
페페,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뻐.
페페, 우리, 지금, 할까?
최후의 만찬
기차를 기다린다.
여덟 식구가 짐 보따리 위에 앉아 있다.
모두 말이 없다.
딱딱거리던 군인도 지금은 딴청을 부린다.
담배 파는 아이가 지나간다.
노인이 아이를 불러 반지를 빼주고 캐러멜을 산다.
면도칼을 꺼내 여덟 조각으로 나눈다.
가족 모두 하나씩 먹는다.
기적이 울린다.
아우슈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