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치 : 서울 강북구 수유1동 487번지
홈페이지 : www.hwagyesa.org
문의전화 : 종무소 02-902-2663
개 요 : 화계사는 원래 부허동이라는 곳에 보덕암이라는 암자였으며, 현재 화계사 자리로
이전하여 조선 중종 17년(1523년)에 신월대사가 창건하였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도월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水踰洞)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523년(중종 17)에 신월(信月)이 창건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듬해 도월(道月)이 흥덕대군(興德大君)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고,
1866년(고종 3)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수하였다.
대지 2,970㎡의 경내에 당우(堂宇)로는 초기 건물인 팔작지붕 다포계(多包系)의 대웅전 외에
명부전(冥府殿)·삼성각(三聖閣)·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범종각·보화루·학서루(鶴棲樓) 등이 있다.
화계사 일주문
절에 들어서는 첫 관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어서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일주’라는 명칭에는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끊고
오로지 성불하겠다는 한 가지 마음으로 진리의 세계를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문에 사찰의 현판을 걸어 절의 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화계사에는 ‘삼각산 화계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998년에 조성되었다.
화계사 대적광전
화계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며,
송원당 설정 큰스님을 회주 스님으로 모시고 모든 사부 대중이 열심히 정진하고있다.
1. 화계사 역사
1522년(중종 17)에 보덕암의 신월스님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협의하여
보덕암이 있던 부허동 남쪽의 화계동으로
법당 3처와 스님들의 요사 50칸을 옮겨 짓고 화계사라고 고쳐 불렀다.
창건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은 1618년(광해군 10) 9월에 화재로 인하여
불전과 요사가 모두 전소되었다.
그러나 도월(道月)스님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창 불사를
하여 이듬해인 1619년 3월에 낙성을 보았다.
그로부터 2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건물이 쇠락하여 1866년 (고종 3)에
용선도해(龍船渡海)스님과 범운취견(梵雲就堅)스님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하였으니 화계사의 삼창(三創)이라 할만하다.
그때 지어진 것이 현재의 대웅전과 큰방채이다.
1870년(고종 7)에 용선스님과 초암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물로
1986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
2. 대원군과 화계사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 여흥민씨는 외가의 원찰인 화계사를 자신의 원찰인 것처럼 자유롭게
출입을 하고 있었던 터라 대원군도 자연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화계사와 깊은 인연을 맺어
장차 왕업을 이루려는 꿈을 꾸게 되었으니 그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졌다.
어느 여름날 흥선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게 되었다.
서울에서 십리 길이라 화계동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갈증이 몹시 심하였다.
그런데 절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웬 동자승이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꿀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기이하게 여긴 대원군은 그 연유를 물었고, 동자승은 그 일을 시킨 만인(萬印)스님에게 안내하였다.
만나서 차차 심금을 터놓게 되었는데 만인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야심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라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로부터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다.
만인스님은 인연의 도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탄식하고 자신이 불가(佛家)의 중죄인이 되어
업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나 시운(時運)이라 하며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리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대원군이 많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 곳 주지를 매수하여 가야사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탑을 허물고 여러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곳으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 갔다.
그 후에 아들 고종이 탄생하였으니, 스님의 말이 꼭 들어맞는 셈이었다.
사실여부야 따질 일이 아니지만 어떻든 이런 전설과 부합되는
흔적을 사적기나 현존 건물 및 대원군 친필의 여러 현판 글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최현배와 화계사
1933년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위해
이희승·최현배 등의 국문학자 9명이 기거하며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출처: 화계사 홈피
화계사 대적광전 전경
화계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왼편을 바라보게 되면, 웅장한 4층 건물이 보인다.
이는 1991년 정수 스님이 조성한 대적광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현대식 불전이다.
근래에 절에서도 기능성을 중시하면서 복합건물을 세우는 경우가 흔한데,
이 건물 역시 여러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다.
1층은 공양간, 2층은 제일선원과 스님들이 지내시는 요사,
3층은 법당으로 사용하며, 4층은 국제선원 선방이 들어서 있다.
언덕 바로 옆에 자리한 건물이라 언덕 위 경내에서 바라보면 단층으로도 보인다.
건물 내 3층 법당은 그 규모가 수백 명이 한꺼번에 불공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내부가 넓어 매월 마지막 주에 진행되는 삼천 배 수행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화계사 대웅전
화계사 중심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절 창건 당시 신월 선사가 법당 3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때에도 대웅전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왕실의 도움으로 세워진 것으로,
1870년에 용선(龍善)과 초암(草庵)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 시주는 흥선대원군이 하였다.
화계사 천불오백성전
대웅전의 서쪽에 자리잡은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은 오백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자체가 높은 단 위에 설치된 데다가
내부에 많은 상(像)을 봉안하고 있어 건물 높이가 상당하다.
그래서 정면에서 보면 다소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문에는 촘촘한 격자무늬에 엷은 청색이 주된 색상을 이루고 있다.
화계사 보화루
대웅전 앞마당에 공자형工字形의 큰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현재 요사와 종무소로 쓰이고 있는 보화루寶華樓이다.
이 건물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불상이 보인다.
곧 마루에서 바로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건물은 서울 근교의 왕실 원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통 대방大房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큰방이라는 뜻이다.
화계사 범종각
화계사에서 가장 멋진 건물이다.
우선 2층 6각형이라는 점이 특이해서 여느 정자 못지않은 운치가 느껴진다.
1972년에 조성된 것으로 아래에는 대종이 걸려있고,
위에는 대형 법고를 가운데 안치하고 동종과 목어, 운판을 동쪽에 치우쳐 달았다.
종각에 걸어두는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 이 네 가지를 보통 불구사물이라고 부르는데,
사찰에서 치르는 의식을 알리거나 공양 또는 함께 일할 때
군중을 모으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다 특별한 의미들을 지닌다.
범종은 땅 속, 특히 지옥에 있는 중생들에게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법고는 가축과 짐승에게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목어는 수중생물, 운판은 날아다니는 짐승에게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불구사물을 모두 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의 음성을 전해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새벽에 28번을 치고 저녁에는 33번을 친다.
화계사 범종각
이러한 불구사물을 한 곳에 모아두는 곳이 범종각인데,
본래부터 이렇게 한 곳에 모아둔 것은 아니다.
제법 규모가 큰 절에서는 종은 종각에, 법고는 법고각에 걸어 주었고,
운판은 식당입구에, 목어는 법당에 걸어두고 사용했다.
종각도 없고 법고각도 없던 소규모 절에는 법당이나 요사 등 적당한 곳에 걸어두기도 하였다.
절의 규모가 커지면서 불구사물이 따로 봉안하는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화계사 삼성각
불교의 여러 신(神)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믿어오는 신들도 꽤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산신과 칠성신, 독성신이다.
산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신으로
나이 든 도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다.
독성은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도인으로 오른 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세 신은 본래 별도의 건물에 모셔졌다.
산신은 산신각에, 칠성은 칠성각에, 독성은 독성각에 각각 모셨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세 신을 한꺼번에 모시고 건물 이름도 삼성각이라고 부른다.
화계사 삼성각 불단
화계사의 삼성각은 경내 좌측 언덕에 세워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5년 진암(眞菴)스님이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기와는 동기와를 얹었다.
본래 화계사에는 산신각이 있었는데,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산신각이 너무 낡아서 1975년에 고쳐 지은 것이 바로 현재의 삼성각 이다.
내부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 전경
1층은 공양간, 2층은 제일선원과 스님들이 지내시는 요사,
3층은 법당으로 사용하며, 4층은 국제선원 선방이 들어서 있다.
외국의 수행자들이 국제선원 개원 이전 보화루 큰방에서 참선수행을 하였으나
낮 시간에 여러 가지 행사로 인한 어려움이 있어
수덕사나 신원사에서 동안거, 하안거를 지냈다.
그러나 1992년 화계사 국제선원의 개원 이후 많은 외국 수행자들이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동안거, 하안거 결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에서 외국스님들이 예불을 보고 참선을 하며
아래층 대적광전 법당에서는 한국스님이 예불을 본다
대적광전 건물의 가장 위층에 지어진 국제선원은 입구에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방이 있고
가운데는 스님들이 참선 정진하는 선방이 있으며
끝 쪽으로는 스님들이 잠시 쉴 수 있는 다실이 있다.
이곳에서 선우회 회원들이 토요일 저녁에 참선을 하기도 한다.
국제선원 사무실은 1층 공양간의 첫 번 째 방에 위치하고 있다.
화계사 조실당 대문 인왕상 3
숭산 행원 큰스님께서 조석으로 거처했던 곳이다.
화계사 명부전
저승의 명부를 상징하는 불전을 말한다.
죽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고자 대원력을 세우신 보살로
알려진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곳이며,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을 모신 곳이라고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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