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9. 06;09
일정상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날이다.
아침부터 머피의 법칙과 아홉수의 저주를 생각하다니,
공항에서부터 비상이 걸렸었지.
신 여권과 구 여권의 혼선으로 한 친구가 동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니
여행 첫날 지갑을 분실하는 사고도 발생하였고,
어젯밤에는 쑥뜸으로 생긴 연기로 소방관과 공안이 출동하는 일도 벌어졌다.
에둘러 아홉수의 저주라고 하지만 머피의 법칙처럼 피할 수 없는 불상사인지도
모르겠다.
옛속담에 죽을 사람은 접시물에도 빠져죽는다고 했다.
정녕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빨리 잊고 즐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비행기의 랜딩에서 불상사가 없었으니 천만다행 아닌가.
산비탈에서 작은 꽃 한송이가 행운을 주려는지 인사를 건넨다.
뜻밖에도 호텔 앞 산기슭에서 '졸방제비꽃'을 만난다.
한국은 제비꽃이 하고현상으로 이미 사라졌는데 위도가 높아 지금도 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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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은 이어진다.
사년 전 혼강(渾江)을 끼고 달리던 길,
주몽이 다녔고 광개토대왕이 달린 길을 나는 오늘도 달린다.
역사의 뒤안길을 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며 국가를 위대하게 만들고,
참된 지도자를 만나면 국가와 민족의 중흥의 길이 열린다.
그러나 우매(愚昧)한 지도자를 만나면 국가는 흔들리고 백성은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백두산은 통화에서 약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길가엔 박무(薄霧)가 끼어 시야가 좁다.
인원 50명이 멀고 먼 길에 있는 백두산을 향해 가는 대장정(大長程) 중 한순간도
놓칠 수없는 풍경이 이어진다.
차창으로 햇살은 쏟아져 들어오고, 미세먼지를 걱정하지 말라는 파란하늘은 오히려
자외선 걱정을 하게 한다.
저 산 이름은 무엇일까,
혼강(渾江)을 끼고 흐르는 산의 능선이 개이빨 같이 날카로워 재빨리 포커스를 맞추지만
순식간에 지나쳐 잡지를 못한다.
우리나라의 부드러운 노년기 산세와 대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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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강 푸른 강물은 스며든 햇볕으로 윤슬이 되어 반짝인다.
백두산에서 발원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3대강 중 송화강가를 달린다.
아!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안개 자욱한 길을 달려 어디로 가는가,
인생길에 종착역이 있듯이 백두산 가는 길에도 종착역이 있겠지.
나는 백두산을 만나러 광활한 대륙의 벌판을 달린다.
지금부터 약 두 시간을 더 달려야 만난다는데 천지를 오를 수 있으려나.
햇살 내리는 강의 모습을 보며 차는 과속하지 않고 정속주행을 하는데 예전에
엉망이었던 교통질서가 제대로 잡혀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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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백두산에 도착했지만 우려했던 대로 최악의 순간이다.
어제의 폭설과 지금 불어대는 강풍으로 천지에 오르는 길의 입산허가가 미뤄졌다고 한다.
10시 반이 되어야 승인여부가 나온다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13개월이나 걸려 준비를 했는데 친구들 얼굴 보기가 난감하다.
어제 내린 비로 나무가 살짝 젖었다.
살다보면 한번은 만나게 되는 휴식의 시간을 백두산 자락에서 가져야겠다.
백두산 자락은 사람도 풍경이 되는 곳이라 이곳에 잠시라도 머물면 또 하나의 산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상이며, 여행이란 모르는 것에 대한 접근이기도 하다.
둘러서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떠나온 사람들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며 바쁘게만
살아왔던 서로의 시간을 반추(反芻)한다.
나무들은 백두의 기세에 눌렸고 신비한 빛을 내는 봉우리가 마침내 나타났다.
백두산의 흰 봉우리와 흰 구름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나르고 멀리 또 한 마리의 새가
날아온다.
문득 한 마리 새처럼 높이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서 보는 거만으로는 억울한 풍경이라 입산통제를 하였어도 새가 되어 날아
올라 보고 싶다.
저곳에 오르지 못하면 그리움으로 남을 텐데 어떻게 감당하려나.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백두산의 위용을 보며,
인간은 누구나 높은 곳을 오르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참아야 하나.
눈앞에 다가온 백두산,
하늘 높이 두껍게 눈이 쌓인 산,
만년설은 아니라도 초록의 세상에서 눈을 만난다.
백두산은 겨울이 한창이다.
거대한 봉우리들은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려는데 입산통제가 풀렸으면
좋겠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쉬고 싶으면 쉬는 인생을 사람들은 복 받았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에서 시원한 바람이 쉼없이 내려오고 눈길 닿는 곳마다 싱그러운 풍경이
이어지니 일행들은 흥분으로 약간 상기된 목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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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백두산 천지의 입산이 강풍으로 인해 유보되었다고 통보가 온다.
바람에 의해 비행기가 회항하는 사태도 벌어졌고, 바람에 의해 스케줄이 변경되었고,
바람에 의해 천지행까지 막힐 수도 있으니 이번 여행은 바람으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나는 모양이다.
금강대협곡에 들어선다.
미국의 그랜드캐넌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만 중국은 과장이 심한 민족이라 5km 짜리
협곡에 대협곡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바람이 온몸을 씻어주고 풍경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여기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자연의 교향악이다.
나 스스로를 찾기 위해 떠나온 여행,
무섭게 아가리를 벌린 대협곡을 바라보며 나는 나를 얼마나 찾을 수 있으려나.
시간은 날카로운 협곡에 갇혔다.
여기서 시간은 무주(無住)의 시간이리라.
보이는 협곡은 날카롭고, 숨어 보이지 않는 빛바랜 풍경속에서 나는 4년전 과거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돌아간다.
거대한 협곡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 그냥
쉬어가라고 한다.
2012년 산불진화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금강대협곡의 길이는 5km요, 깊이는
100~200m이고 폭은 200~300m라고 한다.
협곡의 양쪽으로 화산재가 흘러나와 침식작용으로 기둥모양의 형상 등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협곡 양변은 수직 절벽을 이루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협곡을 걸으며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인사를 나눈다.
거대한 협곡에선 시간마저 느리다.
정해진 풍경도 없고 꼭 해야만 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조급함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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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해진 길을 벗어나 숨을 헐떡였다.
숨을 천천히 들여 마셨다가 허공을 향해 내뿜는다.
하얀 '두루미꽃'이 막 피려고 꽃망울을 세웠다.
이 순백의 꽃을 보려고 숱한 시간과 공간을 거쳐 여기에 올랐는가.
꽃에 포커스를 맞추며 나는 무한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불교신자가 아닌데도 나도 모르게 열반의 경지에 들었나 보다.
쉼 없이 셔터를 누르다보니 어느새 수분이란 시간이 흘렀다.
무념무상의 세계에서 잠시 무주(無住)의 시간이 되었다.
무념(無念)은 번뇌를 없애주고,
무상(無想)은 고정된 생각이 없이 행복감을 준다고 했다.
순식간에 흘러간 무주의 시간은 나를 머무름 없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게 했다.
백두산 일대에 자생하는 1,440여종의 식물 중에서 유일하게 반겨준 두루미꽃과
금강대협곡의 찬바람은 천지에 오르지 못한 서운함을 잊고 내려가라고 내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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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천지 오르는 길을 통제한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3일 연속 천지에 사람이 날아갈 정도의 강풍이 불고 폭설이 내렸다는 거다.
예전의 경험으로 보아 위험한 길이 없어 강풍을 무시하고 올라가도 될 텐데,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 공무원의 명령을 절대로 지켜야 한다고 하니 항의할 수도 없다.
입장료를 85元이나 지불했고 한국돈으로 약 15천원 정도인데 환불도 되지 않는다.
중국 당국은 손해볼 게 없으니 다른 나라에서 먼 길 달려온 사람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쉽게 결정을 한다.
백두산 바람으로 샤워를 하고 햇빛으로 충전을 했으니 그래도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거만 같다.
이 시간 천지의 파노라마 속에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하늘과 맛닿은 곳,
한민족의 발상지로, 개국(開國)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영산(靈山)에 올라
종심(從心)까지 잘살게 해준 고마움에 큰절을 올리고 싶었는데 저곳에 오르지 못하다니,
올라 잠시 쉬며 천지 하늘의 구름과 희롱하고 싶었는데,
천지의 강풍을 맞으며 37호 경계비를 쓰다듬고 싶었던 꿈은 사라졌다.
< 2014. 5. 27일 촬영분>
차창으로 스처 지나가는 한폭의 파노라마,
천상낙원이 지상으로 내려왔고 저기가 천국인데 오르지 못하고 차창으로 바라본다.
백두산을 떠난다.
내 남은 생애(生涯)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천지 하늘엔 뭉게구름 흘러간다.
13개월의 기다림도 외면하고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천지 풍경의 꿈,
다들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나이인데, 인생은 미완성이다 따라서 여행도 미완성이다.
우린 인생길을 제대로 가는 걸까, 잠시 길을 잃은 기분이 든다
사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꼬였다.
강풍으로 대련공항에 두 번씩이나 랜딩하지 못해 회항했다가 다시 출발해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고,
성해공원에서 친구의 지갑분실, 이번엔 폭설과 강풍우로 천지오름길이 폐쇄된 거다.
그동안 3회를 올라 100% 성공을 하였기에 이번에도 확신을 갖고 추진하였으나
오르지 못했구나.
금강대협곡을 돌아 나왔어도 목적을 이루지 못해 내내 서운하다
인간이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라, 자연에 순응해야만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겠지.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온 친구들이 뭉친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라
어떤 방식대로 살아왔는가를 생각해본다.
때로는 망설이고, 눈치 보고, 주저하느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둘 때도 있었겠지.
비를 맞으며 인천공항에서 떠났던 종심여행,
백두산의 바람을 가르며 올랐던 곳에서 한잔 술을 마시며 나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천지에 오르지 못한 관광객들이 식당으로 몰려들고, 식당안은 손님들과 종업원들의
고함소리로 아비규환이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을 겪고 한시간만에
음식점에서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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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산속 마을의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통화의 숙소까지 약 4시간이 걸린다는
설명을 듣는다.
그래도 백두산에서 활력의 에너지를 얻었다.
스치는 상념들 아쉬움을 달래려 이곳에 또 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나에게 또 다른 설렘을 준다.
15;00
통화로 나가는고속도로는 사고로 막혔다며 국도로 변경하여 달린다.
휴게소도 없는 시골길을 달리며 화장실이 없어 남의 집 담벼락에 일렬로 서서 볼일을
보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붉은 지붕의 전형적인 중국농촌의 풍경과 단조로운 길이 이어진다.
19;00
젊은 중국 아가씨가 발마사지를 한다.
기본은 발마사지인데 추가 옵션으로 전신마사지를 받는내내 아프고 간지럽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를 세족식(洗足式)이라 했다.
권위주의를 버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교도의 발을 닦아주는 세족식을 거행해
화제에 올랐었다.
예전 선비들은 발을 물에 담그면 탁족종식(濯足踵息)이라 하여
숨을 크게 들여 마셔서 기(氣)가 발뒤꿈치까지 내려가도록 하라고 했다.
한약 냄새 풍기는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근다.
며칠간 마음에 쌓였던 때가 슬그머니 씻겨나간다.
발끝에서 머리로 오르는 짜릿함은 동심(童心)이 흘러나오게 해 옆자리에서
마사지를 받는 친구에게 장난을 건다.
잠시 눈을 감아 명상에 잠긴다.
여행 중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들도 튀어 나오고,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사지가 풀리고 눈이 사르르 잠긴다.
30여분이 지나자
며칠간 쌓였던 걱정거리도 씻어졌다.
몸에서 특히 발을 돌보는 일은 정신을 돌보는 일과 같다.
족저근막염으로 고생 중인데, 족욕으로 일시적인 치유라도 경험을 하니
족욕 또한 마음을 씻는 세심(洗心)에 이어 몸을 씻는 세신(洗身)이리라.
백두산 천지에 오르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근육이 사르르 풀린다.
2019. 5. 31. 백두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