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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 히2:1-4
2010년 10월, 칠레광부 33명이 땅 밑 700미터에서 갱이 무너지는 바람에 갇혔던 그들은 620미터의 장소로 옮겨 69일, 마지막에 구조된 이들은 70일을 채웠습니다. 과연 살아나올 수 있을까? 염려반기대반이었는데 가족 품에 안기는 대 감동드라마를 전세계인들은 보았습니다.
신문은 “각본이 없는 지상최고의 인간드라마”라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래 맞다!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위대한 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생각했지만 나는 이보다 더 엄청난 구원드라마가 일찍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해 내기 위한 십자가의 복음드라마이다. 히브리기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큰 구원이라 합니다(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은 어느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큰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이기에 가장 큰 구원입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성자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서 나시고 복음을 전하신 후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하면서 이루어 내신 구원이기에 큰 구원입니다 이렇게 큰 구원이기에 성령께서 성경으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 만물 창조는 창세기 1장으로 끝납니다. 성경 신구약 1189장으로 되어 있는데 나머지 1188장은 인간 구원을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나머지 부분을 할애할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천군천사들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총동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구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큰 구원을 실감하고 있습니까? 큰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늘 기뻐하며 찬송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큰 구원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간증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큰 구원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소홀(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등한’(等閑)이란 말은 관심이 없거나 소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이다지도 큰 구원인데 복권당첨의 감동만큼도 못하고, 아이들 생일만큼도 못하고,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오는 일이 극장에 가는 것만도 못하고… 주님을 위해 헌금하는 일이 아이들 세뱃돈만큼도 못하다면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구원을 등한시 하는 일입니다.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는 것이 비신자들, 교회 밖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들어온 유대인들입니다. 침례도 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할 사람들!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할 신자들이 구원을 무시하고 등한(소홀)히 하면서 세상 즐거움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큰 구원이 얼마나 큰지를 잘 모르지 않나 싶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거저 받게 하셨기에 이것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인들에게 이 구원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구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이 우리들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것이기에 감사밖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소홀히 여기면 징벌을 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딱 네 절 읽었는데 세 절이 경고의 말씀입니다.
(히2:1-4) 1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지금까지 들은 것들에 더 열심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 천사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 확고하였고 모든 범법과 불순종이 정당한 대가를 받았거늘 3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인데 4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들과 이적들과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님의 선물들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셨느니라.
그러면 히브리서는 왜 경고로 시작하는가 하면, 히브리서의 첫 번째 수신자는 초대교회 당시 박해를 받으며 예수님을 믿고 있던 히브리인(유대인) 성도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히브리인 성도 중에는 계속된 핍박과 유대교의 회유와 선동에 마음이 흔들려 다시 유대교(Judaism)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을 믿지만 너무 힘드니 다시 유대교 전통 따라 살면 안 될까? 어차피 유대교나 예수님의 도나 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니까”생각하면서 기독교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시는 신자들이 꽤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속으로만 예수님 믿고, 살멸서 예수님 믿는 티 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 안 될까?” 성도 여러분! 타협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배교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해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로 치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경고하십니다.
3절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하십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구원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하는 것인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받은 구원은 시시한 구원이 아닙니다. ‘이같이 큰’으로 번역된 ‘텔리카우테스’는 ‘그토록 크고도 큰’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구원을 받았는데 1장 2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만유의 상속자이시며, 모든 세계를 지으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또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하려고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대제사장 이셨습니다! 우리가 이 얼마나 큰 구원을 받았는지 아시나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확고하였고 모든 범죄함과 불순종이 정당한 대가를 받았거늘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위의 말씀은 분명 “큰 구원을 소홀(등한)히” 여기고 죄를 지을 때 구원받은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심판을 받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생각하고,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거나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누구냐하면 쓴 뿌리가 돋아나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하나님의 은혜를 경솔히 여기는 것)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5-17)
사실 아무리 완벽한 것이라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주신 영적인 원리는 더욱 그럴 것이다.
1. 저들은 왜 이렇게 큰 구원을 등한시 하는가?
히브리서 독자들은 구원을 체험했던 유대인입니다. 율법에 매여 버거운 종교생활을 해왔던 사람들, 정기적으로 예루살렘 제사의식에 참석하였던 그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받아 들였다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거기에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며 상부상조를 하니 세상에 이렇게 큰 구원, 큰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를 씻어 천국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율법을 제대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구원의 요구 앞에 혼합을 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이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교인들이 겪었던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갔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에는 온전히 율법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었고 지금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의 길에 들어섰으니 이제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는 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로 오는 큰 구원을 등한시 여기게 된 것입니다.
(1)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부부가 처음 가정을 꾸렸을 때 얼마나 큰 사랑이며 기쁨입니까? 갓 결혼한 부부들은 그 신혼이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이며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영원한 사랑은 흔치 않습니다. 그 좋았던 기쁨들이 이러저런 일로 갈등하다보면, 나이가 들어가다 보면 서로에 대해 등한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사랑이 식어지고 서로에게서 오는 기쁨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부부가 100세 까지 함께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황혼이혼이 급증하기 때문입니다. 황혼이혼이란 자식들 키워 결혼시켜 내 보내고 난 후 이제 둘이서 살다보면 젊었을 때의 그 사랑이 식어지면서 65세 이후 이혼하는 것을 보통 황혼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경우 2022년 경우 65세 이상 이혼 하거나 재혼하는 경우가 약 5300건이라고 합니다. 이 수치는 지난 20년 동안 9배나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부부가 끝까지 함께 한다는 것이 보통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도 출애굽기를 통해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홍해를 건너서 출애굽하면서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얻은 대(大)구원은 광야생활에서 줄어들고 작아지고…나중에는 구원의 기쁨보다는 원망과 불평으로 점철된 광야생활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 지경이 아닐까요? 구원을 받은 이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구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구원의 믿음에서 자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은혜의 생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기 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큰 구원을 주신 주님을 더욱 찬양하며 구원을 널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은혜 안에서 구원의 기쁨이 계속 자라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한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구원보다 세상 소유에 더 눈독 들이느라 큰 구원을 등한시합니다. 지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 하더라고 구원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에는 오직 암에서 고침 받으면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수술이 잘 되거나, 아니면 신앙의 힘으로 고침 받으면 눈물범벅이 되도록 감사하며 그 구원을 찬양하며 감동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감동이 식어지고 더 많이 소유하지 않음을 불평합니다. 세상의 기쁨과 영광에 눈이 트이고 마음을 주면 영생구원이라는 대(大)구원은 훗날에 되어 질 이야기요 지금 당장은 눈앞에 보이는 기쁨에 큰 구원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등한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구원을 등한히 하지 말라! 공짜 구원이라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구원을 싸구려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광야 이스라엘이 그랬고 초대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이 그랬고 우리가 똑같이 구원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2) 큰 구원을 소중히 여기려면
큰 구원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존하고 키워나가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구원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몸이 크고 생각이 크고 기쁨과 감격이 커졌다 줄어졌다, 하는 것처럼 구원도 그렇습니다. 큰 구원을 받았다하지만 작은 구원으로 전락합니다. 큰 구원이 작아지면 감동도 감격도 감사도 기쁨도 작아지면서 그런 믿음은 세상 시류(時流)에 흘러가게 됩니다. 말세에는 인본주의, 세속주의, 정체불명의 이단들, 번영신학들… 그러기에 죄에 대해 무심하거나 신앙생활에 열정이 없으면 우리가 받은 구원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나왔지만 영생의 나라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큰 구원을 유지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1절에서 경고합니다. “
1절,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큰 구원이 우리 인생에서 왜 빠져버리고 작은 구원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나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취하다보니 큰 구원이 유실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큰 구원을 등한시하면 큰 인격을, 큰 성품을 유실(流失) 당하게 됩니다. 오래 믿었다고, 왕년에 교회에서 일을 많이 했다고, 교회직분이 뭐라고 자랑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큰 구원은 모두 빠져나가버려서 지금 남아있는 구원은 하찮으면서 자랑만 한다면 믿음에서도 가벼운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큰 구원이 유실되지 않으려면 구원받은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큰 구원이 어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 큰 구원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협동사역을 하셨는지 항상 마음 중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구원을 놓쳐버리면 겨우 구원을 이룰 간당간당한 믿음이 되어버리면 큰 기쁨도 없고 큰 능력, 큰 은사, 큰 역사도 덩달아 사라지게 되면서 세속화된 신자가 되는 것이지요. 세속화된 신자라 하면,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요 빛을 잃어버린 촛대입니다. 이런 신자들에게 큰 구원이 큰 역사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보통 선물이 아니라 큰 구원의 선물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어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어떻게 감히 영생을 꿈이나 꿀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선물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갈고닦아 큰 구원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기위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큰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는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이같이 큰 구원은 헬라어로 '텔리큐코스 ' 즉 그토록 크고도 엄청난 구원이란 뜻으로 전했다. 무엇이 그토록 크고도 엄청난 구원의 복음인가?
메시야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오리라고 예고한대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는 일 즉 대 속죄일에 하시던 대제자장이 하던 일을 마치시고 이제 하늘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즉 자기 백성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라고 강조한다.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왕께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사 지금은 지극히 크신 이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한다.
히브리서 1장 13절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다시 강조한다.
" 내(성부 하나님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너 독생자 예수)는 내 우편에 앉아 있거라" 하신다. 할렐루야! 내주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해 보라고 히3장1절은 권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경고하는 말씀들을 살펴보자.
2. 주신 구원을 위해 힘써 지켜야 한다(1)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최고의 희생과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값없이 선물로 거저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은 오늘 권면도 그런 논지의 경고이다.
노력없이 거저 받았기 때문에 더욱 귀하고 그것을 지키고 이루어 가는데 온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하겠는데 오히려 대가없이 주시는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너무나 안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모습이라서 이 히브리서 기자는 안타까움으로 이런 경계를 주고 있다고 본다면 오늘 우리 또한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다른 성경보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계를 더 자주 거론하는 것도 사실 이 히브리서의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외치는 확신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받을 때와 받은 것을 관리하고 누리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도 알아야 한다.
예를들면 사람들도 귀한 선물을 주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잘못 관리하는 것을 보면 왜, 줬을까 후회하는 일이 더러 있다. 우리는 거저 받았지만 그것이 주어지기까지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희생과 아픔이 있었는가를 생각한다면 결코 안일할 수 없는 것이 그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구원이 마치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을 묘사하듯이 더욱 경계되는 교훈이다. 이것은 진흙탕물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을 잃을 수도 있음을 전제로 하는 교훈이다.
전반절에서는 “들은 것들에 더 열심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니 라는 말씀은 오히려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라는 표현이 더욱 호소력 있게 들리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하다는 호소이다. 힘겨워도 노를 저어 상류를 오르는 것은 생명 있는 모습이지만 생명 없는 것이 떠내려 내려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마치 다음 세대를 지속하기 위하여 강을 거스르는 연어와 상류에서부터 물결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나무토막과 같이 비교될 수 있다. 오늘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섬겼던 다른 일반적인 우상과 다른 분으로 듣고 믿고 섬기게 되었다면 더 이상 힘없이 세상 흐르는 대로 맡겨 두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세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생명 있음을 나타낼 때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이미 역사 속에 확증된 것이다(2~3)
과거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율법조차도 순종하지 않아서 그 율법에 명령하신형벌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루시고 그를 따르던 사도들을 통하여 확실이 증거하신 복음을 가볍게 여긴다면 구약성경의육신에 그치는 형벌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인용한 말씀처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법들로 인해 더하여진 것이라,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갈3:19)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주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확고하였고 모든 범법함과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2) 이라는 교훈이 과거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기에 비교되는 복음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피할 수 없다는 경고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3) 라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는 것이기도 하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확고하였고…”(2f)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도 거역하는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스데반을 통해서도 같은 경계를 주신 바 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3) 다만 여기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율법[νόμος]” 이라는 표현 대신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λαληθεις λογος]”이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모든 범법함과 불순종이 정당한 대가를 받았거늘”(2b)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그 율법은 영원한 법이 아니라 임시조치법이라고까지 표현한 바 있다.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이라…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하여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유효 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여 무게(권위)와 기간을 분명히 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법이었음에도 그것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분명히 하셨다는 사실을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2b)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거를 추억하거나 협박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한 생명의 법을 받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천사를 통해서 임시적으로 주셨던 법을 어김으로 받게 되는 형벌을 피하지 못하였다면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따르는 표현이 “소홀(등한)히 여기면”이라는 경계이다. 하나님께서 온 갖 부정적인 것을 다 참으시고 허락하신 구원이 자신의 자존심까지 다 내놓으신 구원을 멸시하는 정도의 태도는 용서하실 수 없으신 것이다.
바라건 데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구원의 가치를 인생 최고로 여길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3b) 여기에서도 적어도 세가지 경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 첫째가 “주로 말씀하신 바요” 앞의 v2이나 갈라디아서3:19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율법과는 다르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는 출처에 더욱 무게가 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인데
우리가 보는 대로 사도들은 세상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대부분 목숨을 바쳤던 것은 즉 확실치 않은 것에 목숨을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도들을 통한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는 증언 역시 권위가 있는 증거이다.
세번째로는 이러한 사도들을 통한 증언이 기록되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어두움의 하수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살시키려는 시도가 수없이 있어왔지만 그런 수천년의 역사를 뚫고 오늘 우리 각자의 손에 성경이 들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도 우리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일면이다. 천사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통해서 증거된 복음을 수 없이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그의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서 증거하고 조금도 가감되지 않고 우리 손에까지 전달된 복음은 오늘 우리가 생명 바쳐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과연 이 엄청난 확신과 감사의 과제인 복음을 혹시라도 세상의 어떤 좋은 것들보다 가볍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반드시 회개하고 가장 귀중한 인생의 과제로 회복해야 할 것이다.
4. 표적들과 기사들로 증거 된 것이다(4)
앞에서도 이미 새롭게 주어진 구원의 진리를 외면하면 안 될 이유를 세가지 정도로 증거하였지만 거기에 덧붙여 여기의 내용은 더욱 분명해짐을 확인할수 있다. 어떤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말에 따라 나타나는 증거들이 있을 때 인정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는 물론 사도들도 목숨 바쳐 증거하였지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단순한 말보다는 증거들을 요구하는 표적의 역사를 살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서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두 곳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16:1)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6:30)라는 요구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요구를 주님께서 거절하신 이유는 진정으로 믿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저들의 간교함을 주님께서 이미 아셨기 때문이지만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표적들, 기사들, 여러 가지 능력,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들이라고 사실을 낱낱이 나열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주신 계시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서임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여러가지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확신시키셨던 사실이 제자들을 통해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불림을 받은 사도들 외에도 바울과 바나바의 이고니온에서의 말씀 증거를 확증하시는 사실을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역사들은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한 것처럼 구원의 복음의 확산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은사들로 통하여 그들이 증거하는 말씀을 확증하는 역할로 있어졌던 하나님의 인류사랑의 또 다른 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런 역사로 말씀을 확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능력을 보이시고 역사하실 수는 있으시지만 이미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는 확인은 우리 손에 기록된 말씀이 확증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들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
특히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하나님 사랑의 확증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요일5:7~8)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분은 하나이시니라. 8 땅에 증언하는 이가 셋이 있으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는 요한 사도의 기록에서 함께 볼 수 있다.
지금도 증거하는 복음이 인정받기 위하여 표적, 기사, 능력 같은 것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은 모든 증거를 통하여 구원의 계시를 확증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순종만 하면 구원받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완벽하게 검증된 생명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복음을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것보다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과거 천사들의 손을 빌어서 주셨던 율법도 지키지 않음으로 모든 두려운 보응을 그대로 받았다면 이 놀라운 엄청난 구원을 가볍게 여긴다면 복음을 불순종함으로 받게 될 무서운 형벌을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 손에 주어진 이 언약과 생명의 복음은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들과 성령의 은사로 나눠 주신 것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확증하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메시지는 예수가 어떤 위대한 일을 실행하시고 지금도 진행하고 계신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흐려져서 일 것이다. 복음은 자기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0절은 "예수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사역에 작업에 ..이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작업을 평가절하 한다. 하잘 것 없는 것으로, 흔해빠진 것으로 치부한다. 예수 믿게 된 것이 그 얼마나 큰 영광인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 구원, 이 복음에 내가 합류하게 되었다니!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름인가!
이사야는 예고한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토록 그 땅을 상속받으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영광을 받으려고 내 손으로 만든 작품이니라. 어린 자 하나가 천 명이 되고 작은 자가 강한 민족이 되리라. 나 주가 자신의 때에 그 일을 속히 이루리라."(사60:21,22)
내가 심은 것, 내가 창조한 것이라고 하신다. 새 창조이다. 첫번 창조 때에는 타락하여서 에덴동산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었다. 이젠 다시는 타락하지 아니하는 인간을 창조하신다. 의의 나무요. 의로운 가지이다. 의의 나무란 의로운 공동체이다. 타락한 아담의 본성을 유전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가린다. 세상에게 비난당한다. 개독들..혐오스런 유대인들..하고 비난을 당한다.
하지만 이제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도록 유도한다. 참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교회는 그것을 보는이마다 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7절에서 참 교회는 오는 각 시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서와 이사야서와 다니엘서와 에베소서를 종합해서 인식하면...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현재 예수와 연합하여 보좌 우편에 앉아있다. 는 것은 그들은 주 예수의 지시만 따른다. 그 분 앞에 앉아서 "주여 지시하옵소서 명령을 따를 만반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한다.
예수따로, 자기 따로 행동하는 크리스찬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인이 아니다. 예수와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사야 60장 22절 때가 되면 나 주가 이 일을 속히 이 이루리라 하신다.
이 일이 무엇인가?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이같이 큰 구원이다. 복음 사역이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함께 그리스도 예수, 메시야로 오신 예수와 함께 하는 사역"이다. 이 사역을 깨우치기 위해 히브리서는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마치시고 이제는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고 알려준다.
히브리서 4장 14절 우리에게 대 제사장이 계시니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그를 믿는 우리들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굳게 붙잡을지어다.
당신은 예수가 당신의 대제사장인가? 예수가 내 대제사장이 되시려면 난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고 촉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대제사장으로 모시려면 난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제사장다운 거룩한 행동을 하는 사람.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자. 세속과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제사장의 인생이 그렇다.
세속적인 것에서 따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 그들이 제사장이다.
세상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과 성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고후6:17-18) 17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주 곧 전능자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우리들을 불러들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사역하신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대제사장의 직무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서 히브리서는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케 하신 뒤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하며 베드로는 "믿음의 결말은 곧 프슈케(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예수는 우리를 망해가는 현세에서 우리를 호출하신 날부터 정결케 씻어내신다. 온갖 더러운 생각을 씻어내신다. 오염된 것을 피와 말씀과 성령으로 씻어내신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자기 백성의 죄를 씻으려고 하였듯이 예수 내 주님도 그 일을 하신다. 말라기는 이 사실을 예고하고 있다.
말3장 1절 홀연히(갑자기) 임하리라....2절 그가 임하는 날 금을 제련하는 자와 같이 정결케 하는 일을 할 것이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으리니 세탁소 주인처럼 널 깨끗하게 세탁할 것이라..하신다.
예수가 내 속에 오시면..날 세속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에 데려가시려고 작정하셨다면. 씻기는 작업을 내 영혼 속에서 하신다. 온통 세상 정신에 찌든 내 영혼을 씻기신다. 죄로 물든 내 마음, 내 정신을 씻기신다.
세상 사람은 땅의 일에 정신이 팔려있다. 현실의 상황에 매몰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연합된 사람은 정신세계가 하늘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와 거기에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기 때문이다.
시끌시끌한 세상 정신에 매물된 지성은 항상 세상 일에 골몰한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늘 일에만 관심한다.
우리의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시다. we have a High Priest..이다.
자기 백성을 세속에 물든 상태에서 씻기신다. 앞으로 거룩한 천국에 데려갈 자들을 준비시키신다. 더러운 자는 거룩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하기에 나의 사상을. 더러운 생각을..더러운 세계관을 ..종교관을...가치관을 ..정체성을 씻기신다.
피와 말씀과 성령으로 씻기시는 이런 작업을 하고 계신다.
베드로는 "이 구원을 너희에게 임할 은혜"(벧전1:10)라고 한다.
선지자들이 신약시대에 이 구원, 이 은혜를 받은 것을 보고 찬양하였다.
보좌 우편에 앉으사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신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직무"를(히2:10) 하신다.
그 얼마나 큰 일인가? 예수가 나를 씻기사 거룩하게 하신다. 또 앞으로 제사장을 만들 사람들을 불러모으신다. 우리 함께 또 처음 믿은 신자를 거룩케 하는 작업을 하자꾸나...하신다.
다니엘서 9장 24절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법을 그치고 죄들을 끝내며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 26절에는 육십이 이레 뒤에 메시야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임할 기한을 정하셨다. 허물이 그치며..죄가 끝나며..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아멘.
예수가 기한을 정하시고 일하십니다. 허물이 그치며, 죄악이 끝나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
인간세상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죄악이다. 그런데 죄짓는 일이 끝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오시면 죄가 끝난다.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면전)에 이르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롬3:23).
그런데 신자가 된 후 다시 범죄하면 그분의 얼굴을 뵐 수가 없다. 그분의 얼굴을 떠나 방황하게 되며, 흑암에 뻐지게 된다. 그러면 구원자이신 예수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다시는 나를 떠나 방황하지 않게 하신다. 내 생각 속에 죄된 사고방식, 사유세계를 완전히 씻으신다. 말씀과 피와 성령으로 씻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구원이다...라고 베드로와 바울은 외친다.
항상 죄를 지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었던 나를 변화시키신다. 이제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는 인간으로 나를 변화시키신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이는 주의 영이 작용한 결과니라."
"나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고, 나의 살을 먹지 아니하는 자는 그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아멘 이 엄청난 구원의 복음을 기획하셨다.
늘 범죄함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운명을 바꾸신다, 이제 늘 하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영원토록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하신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를 성취하신다..할렐루야
디모데후서 3:16 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것은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쓰게 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다 이루어진 것 같이 신약 성경의 말씀도 사도들이 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기록된 대로(약속하신 것도, 경고하신 것도) 다 이루어집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우상숭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그러나 때가 차면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
(겔11:16-17)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후 약 600년 정도가 되어 이스라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상에서 나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나라가 없어진 후 거의 1900년이 지난, 1948년에 다시 나라가 세워집니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가 없어지고 천수 백 년이 지났는데 사라진 나라가 다시 세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 자체가 사라진 지 1900년이 되었는데 옛날 선조들이 살던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세운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의 말씀도 사도들이 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기록된 대로 약속하신 것도, 경고하신 것도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내게 하시는 말씀, 내게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공로로 죄 사함 받았을 뿐만 아니라, 천국을 상속으로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녀 된 자부심으로 살지 않는 것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귀가 소소하고, 쩨쩨한 죄를 가지고 유혹할 때 마음이 동하거나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영원히 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전전긍긍하며 살면 부활을 믿는 것입니까? 안 믿는 것입니까? 부활을 약속하셨는데 부활 못 할 것 같이 죽음에 매여 살면 그런 것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면 모든 문제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시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는데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못 미더워하며 사는 것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사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