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방송, 잘난 신문
언론학회 지적에 방송은 적반하장의 변명일관
신문은 보수-진보 갈라져 이전투구
2004-06-14 09:26:2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의 얼굴이 석양을 뒤로 받아 배광(背光)효과를 내도록 그려졌다고 한다. 반면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다 빈치는 두 얼굴의 대조를 통해서 작품을 걸작 중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다 빈치가 예수와 유다의 얼굴을 그리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다 빈치는 예수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마땅한 모델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피에트로라는 교회의 성가대원을 발견했다. 피에트로는 예수의 모델로 삼아도 좋을 만큼 고상한 인상이었다. 다 빈치는 예수의 얼굴을 간신히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배신자 유다의 모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신자의 상을 가진 모델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 빈치는 몇 년 동안 찾은 끝에 마침내 죄수 한 명을 발견했다. 어렵게 걸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다의 모델이 바로 예수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모델이었던 피에트로가 다시 유다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피에트로는 나쁜 친구를 만나 방탕한 생활에 빠지면서 타락한 얼굴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른 일화가 또 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오른쪽 뺨에 흉터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똑같이 그려야 하는데 흉터가 문제였다. 곧이곧대로 그렸다가는 경을 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가는 고민에 빠졌다. 잘못하면 다칠지도 모른다.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 알렉산더를 의자에 앉히고 팔꿈치를 탁자 위에 얹어 손으로 턱을 받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흉터를 가릴 수 있었다. 화가는 무사히 초상화를 마칠 수 있었다.
옛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에게도 초상화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스탈린은 키가 작은 데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화가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대로 그리면 스탈린이 화를 낼 것이 틀림없었다. 궁리 끝에 키를 크게 보이도록 스탈린을 높은 의자에 앉히고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그렸다고 한다.
다 빈치의 일화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얼굴이 정반대로 변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화가의 ´붓´에 따라 사실을 정반대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 알렉산더와 스탈린의 초상화도 마찬가지다. 같은 그림이지만 그리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화가가 마음먹은 대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림뿐 아니다. 글의 경우도 그렇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표현처럼 같은 글이라도 ´펜´의 놀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글보다 그림의 효과가 훨씬 크다. 순식간에 그림을 ´발사´하며 안방을 장악하는 ´TV의 위력´ 때문이다. 신문들도 굵직한 사건이 발생하면 사진을 크게 취급한다. 독자의 눈을 끌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생방송´을 하는 TV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다. TV의 위력이 이처럼 강하다보니 ´공정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언론학회가 TV 방송 3사의 대통령 탄핵소추 관련 보도에 ´상당한 편향성´이 있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경우 탄핵 반대 언급은 27건인 반면, 찬성 쪽은 1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방송의 ´공정성´ 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보고서가 나오자 야당이 칼을 뽑아들었다. 공정성을 무시한 편파보도 때문에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라며 방송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총선 결과 여당은 과반수의 표를 얻었으니 당연히 방송도 ´과반수´만큼씩 보도했어야 적당하고 공정한 보도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방송의 태도는 유유하다. 반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발끈하고 있다. 보고서가 ´탄핵 주도세력´의 주장과 유사한 것이라며 수긍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리발이고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무책임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신문은 어떤가. 신문은 때라도 만난 듯이 방송을 공격하고 있다.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보도할 기사가 많은데도 광활한 지면을 방송 공격에 할애하고 있다. ´너는 틀렸고 내가 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치 이번 기회에 방송이 없어져야 신문이 살 수 있는 것처럼 목청을 높이고 있다. 사생결단이라도 할 태세다.
방송을 공격하는 신문을 또 다른 신문이 헐뜯고 있다. 이른바 ´진보신문´이 ´보수신문´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언론끼리 서로 싸움질을 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온통 진흙탕 싸움이다.
과거에는 정부가 잘못하면 언론이 똘똘 뭉쳐서 한목소리를 냈었다. 그러면 정부의 잘못이 시정되기도 했었다. 정부는 똘똘 뭉치는 언론을 무서워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오늘의 언론에서는 뭉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습게 비치고 있을 뿐이다.
언론은 지나친 자사(自社) 이기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제 기능마저 소홀히 하고 있다. 남는 것은 국민 불신뿐이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언론이 갈 길은 뻔하다. 공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