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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낙(樂)을 누리기 원합니다.
금강산 관광 실현을 앞두고 "금강산에 위락단지(慰樂團地)를 만드는 것이 좋으냐? 만들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가 벌써 검토되고 있는데 "위락"이라는 말은 "위로하고 낙을 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낙 가운데는 건전하지 못한 낙도 많습니다. 건전하지 못한 낙을 제공하는 장소들이 가정이나 특히 학교 가까이에 파고드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낙입니까? 어떤 것이 수준 높은 낙이고 깊고 오랜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까?
맹자는 인생삼락(人生三樂)을 이야기합니다. 집안이 무고한 것, 남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좋은 말들이기는 한데 추상적이고 또 범위가 좁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전도서는 히브리 말로 "코할레트"라고 하는 전도자, 설교자가 한 말을 모은 것인데 전통적으로는 이 전도자가 솔로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도자는 "심령의 낙이 제일이다"라고 가르칩니다. 24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나니".
심령의 낙이 무엇입니까?
우선 육신의 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육신의 낙보다 심령의 낙이 더 근본적입니다.
육신의 낙을 추구하는 일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육신의 낙을 얻기 위해 애쓰는 일에 절제가 없으면 좋지 않은 결과가 오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술과 담배도 그렇고 취미생활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 즐길 때 유익한 것입니다.
육신의 낙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마약에 빠져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약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마약중독이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것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전도서의 주제와 내용을 요약하면 "내가 육신의 낙은 누릴대로 다 누려 보았다. 세상에 나만큼 육신의 낙을 크게 누린 사람 없다. 술, 사업, 좋은 집, 포도원, 정원, 연못, 노예, 소유, 보배, 처첩(妻妾) 다 누려 보았다. 그런데 헛 것이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는 것이 전도서의 결론이지요.
본문이 말하는 심령의 낙은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수고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은 전도서 25절을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처서(處暑)인데요 올해 첫 번째 벼수확을 하는 행사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농부가 벼를 수확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흐뭇합니까? 농사 짓는 것은 힘든 일이지요. 그래서 농사들을 짓지 않으려고 해서 이농인구(離農人口)가 날로 늘어갑니다. 그렇지만 벼를 수확하는 농부의 기쁨, 보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허리를 굽혀 낫으로 벼를 벨 때는 더 힘들었지요. 그런데 그 때 육신적으로는 아주 힘들어도 마음은 지금 기계를 사용해서 다소 편하게 수확할 때보다 훨씬 기뻤다고들 합니다. 잘든 낫 끝에 벼포기가 슥슥 베어지는 그 감촉은 낚시하는 사람에게 월척이 걸렸을 때의 그 손맛보다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추수하는 농부가 누리는 즐거움, 그것이 바로 심령의 낙입니다.
여러분, 먼저 심령의 낙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사업을 하십니까? 직장을 섬깁니까? 가사를 돌봅니까?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그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봉사하는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짜증을 내고 직장에 대해서 불평을 하다가 요즘 경제형편 때문에 그만 둔 분들은 내가 그 때 왜 내 직업에 대해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했던가 후회를 합니다. 그런 분들 지금의 처지를 또한 짜증스러워 하지 말고 실의에만 잠겨있지 말고, 지금의 처지에서 어떤 교훈과 유익함을 으려고 애 쓸 때 하나님께서 새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나는 죽지 못해 이 일을 한다("이 일"도 아니지요, "이 짓"이지요)"하지 마세요.
"먹고 살기 위해 이 일을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 짓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좋은 일 하는데 나는 왜 이런 일이야?" 하지 마세요.
교회에서 "저 사람은 어째서 권사이고 나는 왜 집사야?" 하지 마세요.
자기 일에서 즐거움을 으세요. 자기 일, 자기 처지를 귀하게 여기세요.
우리나라 어떤 대기업의 간부를 지낸 분이 호텔의 종업원, 웨이터가 되어 기쁘게 일하는 모습이 매스컴에 자주 소개됩니다.
영국에서 장관을 하던 분이 우유를 배달하는데 우유배달하는 일이 그렇게 즐겁다고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문앞에 우유병을 놓는 모습과 함께 소개된 일이 있습니다.
'장관까지 해 보았으니까 배물러서 하는 소리이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장관까지 하고서 그런 것을 깨닫는 것보다 장관 안하고 자기가 하는 일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 더 지혜로운 사랍입니다.
직업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소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해서는 비굴해집니다. 권태에 빠집니다. 직업은 자아실현의 수단이며 나가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 내게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기능 올림픽이 있는데 어느 해 기능 올림픽에서 여자 한복 부분에서 금 메달을 받은 사람이 남자 총각이었습니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는데 "남자가 왜 하필이면 여자 한복 짓는 일을 합니까?"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 기자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여자 한복 짓는 일이 즐거우니까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다보면 금 메달도 받게 됩니다.
어느 대학에 가서 전체 학생들을 모아 놓고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좀 긴장이 되지요. 그런데 그 대학의 경우 마음에 기댈 곳이 있었습니다.
그 대학의 교무처장이 동창이고 아주 친합니다.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조직신학 공부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입니다. 그래서 "강연을 시작할 때 '여러분이 존경하는 이 학교의 교무처장 아무개 박사가 내 친구입니다' 이렇게 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뜻이죠. 그가 사귀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강연을 할 때는 처음 시작 부분에서 사람을 끌어야합니다. "내가 그렇게 시작하면 학생들이 내 강연에 주목을 하게 되리라"
학생들이 강당에 다 모이고 그 친구가 강사를 소개하는데 이 사람하는 것 좀 보십시오.
"오늘 강사로 온 유 아무개 목사님은 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무슨 책을 썼고 어떤 분야에서는 권위자이고…"
이렇게 좋은 말로 저를 소개한 다음에"
그런데 제일 중요한 사실은 내가 바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유 목사님의 친구라는 사실입니다", 그 친구가 제가 준비한 강연의 머리말을 뺏어 가 버리는 바람에 아주 당황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부러워합니까?
그 사람이 여러분을 부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같은 매스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도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신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방송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 공중에 날라가 버리고 남는 것이 없다. 평생해도 남는 것은 허망함 뿐이다.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심하다. 신문이나 책은 남지 않으냐?"
그랬더니 신문에 종사하는 친구의 대답이 "방송은 신문보다 영향력이 크지 않느냐? 요즘 사람들은 텔레비젼 프로그램 알아 보려고 신문 보지 뭐 다른 일로 신문 보느냐?"
이렇게 서로 부러워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교회는 뭐하러 나가느냐고 하지만 사실은 속으로는 매우 부러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도해서 예수 믿게 만들어 놓으면 '야, 내가 교회에 안 나갈 때 말이야, 너 비만 많이하고 들볶았는데 사실은 그 때 네가 부러웠어!'
이렇게 고백하는 일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받은 종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 두 달란트 받은 종, 한 달란트 받은 종,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것을 믿천으로 해서 열심히 일해 이익을 남겨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내어 쫓김을 당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왜 그 것을 땅에 묻어 두었을까?
'다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도 주고, 두 달란트도 주면서 내게는 왜 한 달란트만 주는 거야!' 하는 불만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때 이 종이 해야할 바람직한 태도는 한 달란트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가지고 한 달란트의 이익을 남겨 두 달란트 만들면 주인은 두 달란트를 맡겼을 것이고 나중에는 열 달란트도 맡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을 칭찬하면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저 사람은 왜 다섯 달란트고 나는 고작 두 달란트야!' 하면서 두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면 그도 마찬가지로 꾸지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 달란트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는 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으며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심령의 낙을 풍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한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교회봉사하는 일에서 특별히 심령의 낙을 넘치도록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낙입니다.
그 다음에 심령의 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24절 하반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 심령의 낙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입니다.
25절이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정확한 뜻은 "그 이유는 누가 하나님을 떠나서 먹으며 또 즐길 수 있을까?"입니다.「표준 새번역」은 25절을 "그 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심령의 낙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습니다.
친구나 스승도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낙은 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주기 어렵습니다.
내가 나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도를 통해서, 인격의 수양을 통해서 심령의 낙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에는 평온지심(平穩之心). 안빈낙도(安貧樂道), 이런 말들이 있고 서양에는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스피노자 같은 사람들이 내면의 흔들리지 않는 즐거움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은 되어도 우리가 직접 소유하기는 어렵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참된 심령의 낙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습니다.
공병우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글 타자기로 유명한 분이지요. 저도 이 분이 만든 공병우 속도 타자기를 오랫동안 잘 사용했습니다. 사무실 옮기거나 이사할 때 예전에 쓰던 것들은 많이 버리게 되는데 이 공 속도 타자기는 워낙 오랫동안 정이 들어서 버리지 않고 지금 담임목사실 책장 위에 놓여 있습니다.
공병우 박사는 원래는 안과의사입니다. 세종로 부근에 있는 공 안과는 이 분이 1938년 9월에 개원한 것입니다. 이극로라는 한글학자가 안질 치료 받기 위해서 병원에 왔을 때 이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한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고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고 한글 기계화 운동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기인(奇人)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일화를 남긴 분입니다. 나이 일흔두 살인 1977년부터 사진연구를 시작해서 사진에도 대가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내가 죽거든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신앙을 가진 분은 아니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한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해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적인 믿음을 갖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주 안타깝지요. 무더운 여름에 바다를 바라보며 "저 바다에 들어가면 시원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바다에 들어가지는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세상 떠나기 6년 전인 1989년, 여든네 살이 되었을 때 "미리 써둔 나의 유서"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이 목숨이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오늘까지 삶을 허락해 주시는 까닭으로 나에게 맡겨진 일을 다 하고 떠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아직도 미진한 한글기계화의 일과 맹인들의 재활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판정을 받게 될 것인가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사는 동안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이라도 하느님이 뜻에 맞게 잘 사는 것이 되는건지가 두려울 뿐이다"
하나님을 알기는 했으나 믿지는 않은 분이 "오늘까지 하나님이 내 삶을 허락해 주셨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할 때 많은 자취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심령의 낙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더 철저하게 고백해야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원종수 권사라고 깊은 신앙을 가진 암 전문의가 있습니다. 많은 간증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신앙인입니다. 이 분은 환자를 대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한다고합니다.
"하나님, 이 환자가 오게 된 이유는 저에게 돈을 벌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제가 의사로서 의무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며 환자를 한 번 볼 때마다 삼십 분, 혹은 한 시간이 걸릴지라도 제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복음을 증거하겠나이다"
'돈 벌기 위해서 치료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도하라고 보내 주셨기 때문에 제가 이 환자를 치료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정성껏 치료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도우심이 함께 하지요. 의사로서의 명성이 높아지지요. 또 병원은 아주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곳입니다. 병 앞에서는 누구나 약햐지고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평상시에는 앞을 바라보지만 병원에 가서는 병상에 누워 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면 복음을 얼마나 잘 받아 들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전도하라고 이 환자를 내게 보내 주셨다"고 생각하며 치료하는 의사는 그 일에서 얼마나 보람을 느께겠습니까?
"하나님이 전도하라고 이 학생들을 내게 보내 주셨다"고 생각하며 가르치는 선생님의 교실에는 활기가 넘칠 것입니다.
지난 8월 10일부터 13일 까지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 캠퍼스에서 전국에 있는 크리스천 교사 900여 명이 모여 전국기독교사대회가 열렸는데 대회를 끝내면서 기독교사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기독교사 선언문은 여덟 개 선언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가 "학교가 부름 받은 선교지임을 깨닫고 늘 자신을 점검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어 있는다"였습니다.
어떤 크리스천 목수는 "나에게 있어서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을 위하여 망치질 하는 것이며 정확하게 톱질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 분이 만든 가구는 아마도 틀림 없이 명품이 될 것입니다.
심령의 낙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큰 일을 합니다.
심령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스물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심령의 낙을 누리는 사람은 스물네 시간을 부릴 수 있습니다.
심령의 낙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성실성과 진실성을 가질 수 있고 적극성을 지닙니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심령의 낙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매일 신선함을 누립니다. 같은 길거리로 매일 출퇴근해도 그 풍경이 매일 새롭게 느껴집니다. 모든 것에서 새로운 맛과 깊은 의미를 게 됩니다.
어느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판기획을 세우는데 인물중심의 출판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룰 것인가, 어떤 사람에게 원고를 청탁할 것인가, 제일 손쉬운 것은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성공한 사람의 원고를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출판사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모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승리의 면류관을 머리에 쓴 우승자들의 과거를 비춰주는 것보다 골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는 선수들의 현재를 비춰주기로 했습니다. 모험이지요. 그러다가 그 선수가 넘어지는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길이 독자들에게 보다 큰 도전과 용기를 주는 길이라고 믿고 주로 40대 목회자들의 이야기, 40대 목회자들의 원고를 중심으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규장문화사의 "젊은 개척자 시리즈"라는 책들이 이렇게 해서 출판되고 있는데요 첫 번째로 나온 것이 새안산감리교회 김학중 목사님의 「희망을 캐는 개척자」라는 책입니다. 이 기획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뤄지는 분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거의 빠짐 없이 심령의 낙을 누리며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목회 또는 그 밖의 일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이라고 믿으며 이 일에서 무한한 기쁨과 보람을 는 사람들입니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 가운데 어느 젊은 목사님이 쓴 「날마다 기막힌 새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인도하면서 받은 은혜를 기록한 책인데, 새벽기도회, 사실 목사님들에게 큰 부담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지긋지긋한 새벽」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심령의 낙을 누리면서 새벽 기도회 인도할 때, 이 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다, 이렇게 믿고서 일할 때 날마다 기가 막힌 새벽이 됩니다.
사랑하는 목양의 성도 여러분!
심령의 낙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이 일을 내게 주셨다고 믿으면서 지금하고 있는 일을 더 정성껏 하고, 지금 섬기고 있는 직장을 더 정성껏 섬기고, 지금의 처지에 최선을 다하고 가사를 돌보고 공부 하십시오. 그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솔로몬은 말합니다.
누가 "인생은 헛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20대 청년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말하는 것과 산전수전 다 겪은 지혜로운 사람이 "인생은 헛된 것이다" 하는 것은 다릅니다. 20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점잖지 못한 말로 개똥철학이라고 하지요. 후자가 호소력이 훨씬 큽니다.
솔로몬이 "심령의 낙이 제일이다"하는 것은 뒤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심령의 낙이 제일입니다.
그 심령의 낙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 그 심령의 낙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과 저, 컴퓨터를 통해 이 설교를 대하시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에 의지해서 축원합니다.펴온 글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