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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6:1-3 새 노래로 여호와께 : 칼빈
본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아니라 만민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권면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계시될 때까지 유다 외에 어느 곳에서도 불려질 수 없었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부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온 땅을 그의 영광으로 충만히 채우게 될 시대가 이를 때까지 성령께서 율법 아래 있던 성도들을 감동하사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도록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1. 본문 1-2절은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입니다.
본 시편을 여는 이 첫 절은 시편 기자가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 아니라 온 세계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방편인 복음이 온 세계에 편만히 전파되기 전에는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는 사도의 말이 참으로 사실입니다.
사도는 ‘너희 이방인들아, 그의 백성으로 더불어 주를 찬양하라’는 말씀을 인용함으로서 이방인들을 부르신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 안에서의 교제는 찬양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롬15:11).
그 외에도 시편 기자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이전에 불리던 노래가 아닌 “새 노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여느 때와 다른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낼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도 놀랍고도 엄청난 교회의 회복에 관하여 언급할 때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라”(사42:10)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96 편
따라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전혀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세상에 그의 나라를 세우실 때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또한 그의 시편을 진행해 나가면서 더욱 분명하게 만민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시편 기자는 세계 도처의 만민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되 그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날마다 세상에 나타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희미해지거나 잠시 후에 중단할 일이 아니요 영원히 계속될 일입니다.
2. 본문 3절은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중에 선포할지어다”입니다
추가된 말들은 언급된 구원을 수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영광’과 ‘그의 기이한 행적’들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이 ‘영광스럽고 기이하다’는 뜻으로도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명칭들로 시인은 이 구원을 이전에 베풀어졌던 여느 구원들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계의 구속자로 나타나실 때는 주께서 자비와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구원은 이전에 주께서 베푸신 적이 없었습니다.
저자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방 민족들이 만일 이 구원에서 제외된 채로 버려졌더라면 그들이 이 구원을 노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 구원에 대해 비길 데 없이 놀라운 면을 마음으로부터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구속을 바로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시편 96 편
시96:4-6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이 시편은 하나님이 땅에 오실 일, 곧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예언합니다(1-6).
여기서 거듭 말하는 것은 “노래하라”, “송축하라”, “선파하라” , “선포하라”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일에 큰 기쁨의 전파(복음전파)를 말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좋은 것이기에 신자들이 노래하듯이 기쁨으로 전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오심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啓示)하심이요, 구원을 가져오심이요(2절), 영광을 나타내심이요, 기이한 행적을 나타내심이요(3절), 여호와의 광대하신 은혜요(4절),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오심입니다(4하반 -6).
1. 본문 4-5절은 “(4)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입니다.
1) 시인은 특히 그가 사람들을 권하여 찬양을 돌리게 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이방민족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자칫 잘못을 범하기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세계는 그들이 나름대로 섬기던 모든 우상과 미신을 맹세코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유일한 참 종교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시인은 우주의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것은 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바로 받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경배드리고자 하는 시도가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욕을 돌리는 결과만 초래할 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또 자기 나름의 고안에 따라 신들을 만들어 내는 불신자들 가운데 들지 않고자 한다면 세상의 헛된 모든 신들을 버리고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할 것입니다.
본 절에 ‘신들’은 시편 95:3절 말씀과 같이 천사들이나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말이 어느 것으로도 혹은 신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견해를 취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 온 세계에 자신의 빛을 보내시므로 이 빛은 그의 신성의 광채를 반영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 때 나름대로 고안해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의 모양을 떠냅니다.
시편 기자는 저희에게 참되신 한분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여 천사들이나 우상들에게 돌리는 것이 큰 잘못임을 인식시키려 합니다.
시인은 이방 민족들에게 저희 신들이 헛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시편 96 편
이는 אלילים (엘릴림) 의미가 헛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그 말이 우상들에게 모욕적으로 적용됩니다.
시편기자의 주된 목적은 참 하나님은 진실로 세계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조물주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므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참 예배를 부패시키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헛것이며 멸시받아 마땅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천사들을 신들로 속아 생각해 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헛것으로 간주되겠는가?’ 하고 물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가 천사들에게 마땅히 하나님 한분에게만 돌려야 할 존귀를 돌릴 때 그들에게 손상을 입히게 된다고 답하겠습니다.
우리가 천사들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떠한 상상적인 영광이 돌려진다 할지라도 그 영광을 돌리는 일 자체는 전혀 헛된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방인들의 큰 잘못을 보고 있습니다.
저희는 사악하게 저희 자신의 모습으로 신들을 만들었습니다.
2) 저희의 터무니없는 관념들을 논박하기에 앞서 시편 기자는 매우 적절히 하나님에 관하여 ‘그는 크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것이라’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저희가 망상 중에 저희 우상들에게 돌리는 것보다도 월등히 뛰어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가 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주장한 자신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의 자신감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당시에 온 세계에 가득 차 있던 수많은 우상들과 미신들의 대하여 싸우도록 요구받고 있었습니다.
참 하나님은 눈에 띄지 않는 유대의 한 구석에 제한된 분으로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주피터는 제한 지역이 없어 어디서나 받아들여지는 신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주피터는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온 지역에서 경배를 받았습니다.
각 나라는 그 나라 고유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들이 다른 지역에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속한 영광을 도적맞으신 이는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온 세계는 하나의 거짓을 믿기 위하여 작당하였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인간들의 헛된 망상이 한 분 하나님의 영광에서 아무것도 훼손할 수 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인간의 일반적인 의견과 생각들을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결론은 분명한데, 곧 우리가 다수의 동의를 얻어 종교가 반드시 참 종교인 것으로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96 편
그 이유는 만일 종교가 사람들의 다수 의견에 의해서 결정되고 그 예배가 저희의 변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라면 시편 기자가 내린 판단은 하루 아침에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그 같은 잘못을 범하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해도 우리는 성령을 좇아서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취할 수 없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그 자체가 헛것이요,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믿을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주장하고 난 시인은 세계 창조를 언급하여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반영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며 자충자족(自充自足) 하십니다.
이 사실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은 모든 신들이 헛됨을 보여줍니다.
“하늘”은 창조된 세계의 일부로 언급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 주로 하늘에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의 아름다움과 그 신비한 장식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권능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 본문 6절은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입니다.
저자는 히브리어 דוד (호드)를 ‘힘’으로 번역합니다.
그 말을 ‘영광’으로 번역한 주석가들은 문맥을 충분히 고려 못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은 반복으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권능과 영광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위엄이 있으신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그 여호와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하나님의 권능과 힘을 지적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권능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므로 시인은 그의 백성의 생각을 성소로 돌리고 있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희미하다는 말을 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 이유는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들인 제사와 언약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언급할 때는 하나님 앞에 빛나는 이 영광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할 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시편 96 편
시96:7-9 만방의 족속들아
시인은 세계만민더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라고 외칩니다(7-9). 이것은 실상 신자가 실제 생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 바치며 거룩되이 살며 두려워해야 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현될 것을 내다보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너무 귀한 것이기에 믿음으로 이 복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 제물이 되어야 되고 또한 다시는 범죄하지 않기 위해 떨며 조심해야 됩니다(히2:3).
1. 본문 7-8절은 “(7)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힘 - 칼빈)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 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 갈지어다” 입니다.
찬송이 시온에서 하나님을 기다렸고(시65:1), 시온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구별된 처소였으며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제사장의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가 여기서 그리스도의 강림에 따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될 큰 변화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옛 백성과 이방족속들 사이에 하나의 반대 혹은 구분이 의도되어 있습니다.
이방족속들은 후에 동일한 교제 안으로 받아들여질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힘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힘의 영광을’ 선포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거부함으로서 하나님에게서 그의 정당한 영예를 탈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를 덧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외부로부터 무엇을 빌어 오시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방민족들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할 때 했던 것과 똑같이 수많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요구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이제 율법 아래 서술되어 있는 외적인 의식에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들이 따라야 할 종교의 규칙과 형식은 하나가 될 것을 뜻합니다.
시편 96 편
이제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성소의 뜰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방인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예언 하나를 대합니다.
이방인들이 거룩한 집회에 들어오려면 먼저 그들의 부정을 벗어야 했습니다.
예물은 단 한가지 제물이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전체 예배를 뜻합니다.
이는 그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시행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 절과 및 다른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자들이 저희가 살던 시대의 일반적인 상징들 아래서 하나님께 대한 내적 예배를 서술하고 있는 사실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짐승을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사용한 말은 한때 닫혔던 성전의 문들이 이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열리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우리에게 이제 하나님이 받으실 제사가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곧 찬미의 제사입니다(히13:15).
그러므로 그러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미사와 그밖에 어리석은 교리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교황주의자들은 우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구절들로부터 매우 정확하게 우리가 빈손으로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고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도록 분부 받기 때문입니다(롬12:1, 벧전2:5).
2. 본뮨 9절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같은 취지로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자기 백성의 예물을 요구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의 예배를 필요로 하시는 분으로 간주될 것이 아니라 저희에게 저희 신앙을 고백할 기회를 주시는 분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예물을 명하신 참 이유가 언급됩니다.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이 그의 면전에 엎드리고 저희와 저희에게 속한 모든 것이 그의 것임을 인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 절에는 ‘성전의 아름다움’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과 한 몸을 이루게 됨으로서 새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편 96 편
본 시편이 기록될 당시에 이방민족들이 아브라함의 거룩한 자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당시에 그처럼 믿을 수 없고 있을 수 없었던 일로 보였던 우리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욱더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실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아름다움’ 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간다는 생각이 없이 경망스럽게 뛰어들지 않고 겸손히 두려운 마음으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전에 대한 경건한 마음자세를 갖게 하려는 표현입니다.
하반절도 역시 같은 목적으로 덧붙여졌습니다.
“그 앞에서 떨지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두려운 위험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겸손히 간구하는 자들로서 엎드려야 할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이 경배하는 자들을 금하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오지 못하게 하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그들의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시인은 우리로 하나님께 대한 바르고 진실된 예배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게 합니다.
성소의 아름다움 혹은 영광은 금이나 은 같은 그 성전을 짓는 건축자재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요, 다듬은 돌들에 있는 것도 아니요, 이러한 것들의 어떤 광채나 그 장식에 있는 것도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하늘의 식양(式樣)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출25:9).
시편 96 편
시96:10-13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특별히 신약 시대는 그리스도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는” 시대입니다(10).
곧 여호와께서 친히 오셔서 믿는 자들의 심령을 다스리시는 시대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일, 곧 그리스도께서 오심이 천지만물까지도 찬송할 정도로 기쁜 사건임을 내다보고 예언합니다(11, 12).
첫째 아담이 범죄하므로 만물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그리스도는 승리하시므로 만물까지 새로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贖罪事業) 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음에 따라서 만물도 새로워지게 되나니(롬8:19-22, 계21:5), 그리스도의 오심을 만물도 기뻐할 만합니다.
특별히 13절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신다” 함은 죄악에 포로(捕虜)된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그의 속죄(贖罪)하시는 의(義)를 의미하고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신다” 함은 그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이루시므로 그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심을 의미합니다.
1. 본문 10절은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의 말은 다시금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관장하시는 곳에서 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단지 유대의 한 모퉁이에 있는 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이 온 세계에 그의 나라를 확장시키실 것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나뉘어지고 흩어져 있던 이방인들을 그에게로 하나 같이 모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 중에 말하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교리를 통해서 그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시키실 것을 뜻합니다.
자연의 질서에 관한 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처음부터 고정시키셨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계속하여 하늘에서 빛나고 악인과 불신자들이 의인들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시편 96 편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세계가 비록 이제 어둠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하나 혼란과 무서운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에 돌입한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안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상태에 들어갈 때 비로소 세계가 굳게 서게 되고 요동치 않게 되리라는 사실이 여기에 매우 적절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 절에서 비록 모든 피조물들이 각기 나름의 다양한 직책을 맡게 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를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을 통치하시기 전에는 세계에 어떤 질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창조주가 인정되지 않는 곳에서보다 더 엄청난 무질서가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인과 불신자들은 저희 자신의 상태에 만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안전하지 못하고 가장 요동하기 쉬운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나님 안에 아무런 기초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저희 생명은 한 가닥 실에 매달려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시46:5) 라는 말씀을 상기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율법 아래의 미완성적이며 불완전한 상태에 대한 암시가 있을지 모릅니다.
또 그리스도 아래서 얻는 것들의 완전한 상태와 이전 시대 아래서의 예표적인 것들의 불완전한 상태 사이의 대조가 의도되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다음에 시편기자는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의의 -칼빈) 홀이니이다”(시45:6)라는 말씀에 따라 이제 소개될 나라는 의로 구별이 될 사실을 예언합니다.
히브리어에서 “판단”이라는 용어는 모든 유의 통치를 포함합니다.
사람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저희의 삶을 의에 이르게 하는 것일진대 우리는 사람들이 아무리 안이하게 스스로 만족한다 해도 저희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다 어쩔 수 없이 저들에게 잘못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언급하는 이 의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로 말미암은 새 마음을 포함합니다.
이로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됩니다.
2. 본문 11-13절은 “(1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12)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 할지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시편 96 편
(13)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사 모든 사람들을 그의 통치하에 두시고자 하는 데서 나타나는 그의 선하심에 관한 보다 고상한 개념을 인식시켜 주기 위해 시인은 이성없는 사물들, 곧 나무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에게 일반적인 기쁨에 참여토록 요구합니다.
우리는 ‘하늘’을 ‘천사들’로 이해하면 안 되며 ‘땅’을 ‘사람들’로 해석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바닷속 말 못하는 고기들에게도 기뻐 외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복된가 라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된 하나의 과장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폭력으로 통치하거나 폭군처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능은 사람으로 시행되며 그리하여 그의 백성들 가운데 기쁨이 일게 한다는 뜻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두려워할 것입니다.
또 그 나라가 굳게 서는 것은 오직 간접적으로 저희 두려움의 원인이 될 뿐입니다.
여기 채택된 과장법이 문학적인 유의 기초를 결여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선포(롬8:22)에 의하면 창조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와 함께 탄식하며 고통 중에 있으므로 저희는 저희의 진지한 열망에 따라 만물이 회복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그 기쁨이 얼마나 열광적인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이 기쁨을 방자하게 즐깁니다.
본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96편 13절에서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한 진정한 기쁨은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96편 13절도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라, 그가 임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바다와 땅이 통곡할진대 마땅히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아야 할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믿을 수 없어 보일는지도 모르는 사건에 관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주장을 반복하는 동시에 그가 앞서 언급한 진리가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96편 13절 끝에서는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사악함과 위선이 제거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와 진실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