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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8-32
동편 땅의 확정과 레위인의 기업 / 박길현
오늘 본문은 동편 땅을 각 지파에게 기업으로 확정지어 주는 성격이 강합니다. 이 동편 땅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모세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목축하기 좋은 조건을 보고 그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에 그 땅을 이 지파들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32장에 보면 요단 동편 땅을 그들에게 주는 데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지파의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서 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다 얻기까지 싸우는 한 동편 땅을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도록 하였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그렇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단 동편의 땅을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으로 확정하는 것은 이들 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온 가나안을 얻도록 온 이스라엘을 위해서 끝까지 싸워 전쟁을 끝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은 이제 이스라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쪽의 두 지파 반은 이 전쟁에 끝까지 참여한 자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쪽 땅은 모세가 말한 대로 이 지파들의 것으로 확정되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한 지파도 빠지지 않고 기업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겠습니까? 하지만 동편의 지파가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말을 따라 참여하였고 마침내 기업을 자기의 것으로 차지하였습니다.
천국은 온 이스라엘이 얻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주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서 얻게 되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에 참여하는 자는 천국 좋은 줄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부름 받은 자는 천국이 좋은 줄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싸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자기의 기업으로 얻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하는 중에 빠뜨릴 수 없는 사건으로서 밝히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2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라고 합니다. 발람은 민수기에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기는 하지만 제법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언하는 자 같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여기서 그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말은 냉혹하고 무섭습니다. '술사'라는 말이나 '칼날로 죽였었더라'라는 말이 그러한 표현들입니다. 술사라는 말은 '점쟁이'를 말하고 칼날로 죽였더라는 말도 살해의 잔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는 말이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발람에 대하여 이를 갈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발람은 잡아서 칼로 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범죄에 빠뜨린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던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보여주는 것은 가족대로 땅을 나누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수를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말입니다. 가족의 수가 많은 집에는 많이 나누어주고 적은 집에는 적게 나누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이 다 같이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취한 조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취해졌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자면 누구나 똑같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평등한 구원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받은 똑 같은 구원이기 때문에 천국에는 신분의 등급이 없고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상급의 차이도 없습니다. 금면류관 받는 자가 있고 개털모자 받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금면류관 같이 존귀한 구원을 받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이 마련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등이 없습니다.
차등이 없다고 적당히 살아가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천국의 귀함을 모르는 자의 생각입니다. 소중한 천국이 자기 것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것을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체가 천국을 상급으로 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천국이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고로 여기에는 적당하게라는 생각은 사랑을 모르는 생각이요 천국을 모르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레위 지파의 유업에 대하여 좀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4절에 레위인들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3절에도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과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정녕 복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이러한 레위인이 불안해 보이고 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으므로 안정을 보장해 주는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의 것은 안정되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불안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업으로 하고 그 화제물을 먹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제사를 성실하게 드릴 때는 레위인들은 잘 먹고 생활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제사를 폐할 때는 그들은 굶을 수밖에 없고 먹을 것을 구하여서 방황하여야 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땅의 기업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불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레위인이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불신앙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신앙의 심판자요 하나님의 진노와 또는 이스라엘을 받으심의 증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측량하는 척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레위인의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레위인은 땅에서 고난받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인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레위인이 세상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과 동고동락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레위의 삶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축복을 레위인은 처음부터 누리게 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의 조상 레위는 처음에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49:5-7에는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레위가 저주를 받아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보여주셨던 계시를 알지 못하고 계시와 반대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저주가 주어졌습니다. 계시를 모르는 것이 곧 저주였습니다. 이것이 저주를 불러오는 근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레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주가 축복으로 바뀝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라고 하면서 섬겼을 때 레위는 여호와의 편에 서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칼로서 도륙했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레위가 여호와께 헌신하였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것을 알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심판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였기 때문에 모세는 레위의 행위를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레위는 축복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축복이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계시가 곧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제단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전달하였고 또 백성의 허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광야의 행진을 할 때에 레위인을 이런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 역할을 계속하도록 레위인을 위하여 48 성읍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성전에서의 은혜를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문제를 하나님께 전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민수기의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이상에서 레위인은 창세기의 저주처럼 흩어지는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땅에서 힘을 모으지 못하고 흩어져서 사는 자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저주가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그 계시를 따르므로 도리어 복이 되었습니다. 땅의 기반을 가지지 못하는 대신 하나님을 기반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계시를 모를 때의 저주는 계시를 앎으로써 축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다 알았기 때문에 계시를 모를 때의 저주가 하나님을 기업으로 가짐으로써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는 세상의 소유를 기업으로 삼았었지만 그리스도를 알고부터는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는 자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기업으로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신다고 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계시면 다른 모든 것을 갖지 않아도 가져야 할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더 가져야 할 다른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먹지 않습니까? 입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기 때문에 먹고 입고 사는 것이지 하나님 외에 더 모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주권에 의해서 우리가 살지 우리가 하나님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구함으로써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잘 구별하십시오. 똑같은 말 같지만 다릅니다. 하나님이 전부라고 할 때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다른 무엇이 됩니다. 혼합주의 종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만을 전부라고 하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과 혼합종교와의 차이입니다. 사랑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요. 그러나 하나님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사랑이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으로 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때문에 방황하지 않게 되며 사랑 때문에 입은 아픔도 치유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요. 그러나 하나님만 있으면 됩니다. 돈을 믿지 않고 하나님만을 믿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돈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 기죽지 않으며 돈으로 받은 상처가 치료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을 믿지 않고 유일하게 하나님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들이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치료가 된다기보다 초월하여 좀 초연해진다고 해야 옳겠지요. 왜냐하면 그런 문제들이 반복될 때마다 그것들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을 되새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초연하게 넘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연약성은 여전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초연한 힘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넘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힘이 있을 때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날의 레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