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본향
성경본문:계시록 21:1-8
○ 새 하늘과 새 땅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레26:11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긴 기다림 짧은 만남과 가슴 터지는 생이별! 조국이 울고 세계가 감동하는 3박 4일의 남북 8·15 상봉이었습니다. 섹스피어가 다시 태어나도 이 짧은 기간에 200편이 넘는 이 희비극을 이토록 표현 할 수는 없습니다. 남북 8·15 상봉자 200명과 그 가족 1000여명, 수행원 102명,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이 펼쳐간 3박 4일의 감격과 감동은 그 무엇으로도 다 표현할 길이 없고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저 찬란한 본향 천국이 없다면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이 비통함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참담한 현실의 강을 건너는 그 날 우리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이 예비되었고 암담함 삶 가운데서도 소망의 빛으로 격려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할 뿐입니다.
눈물이 없는 본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4절의 눈물은 죽음을 비롯한 사랑이기에 이 땅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불행이 가져오는 눈물입니다.
이는 근원적으로 아담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저주가 죽음이요 고통이니 그 어떠한 사람도 사람에게 몰아치는 불행의 눈물을 완전히 닦아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 땅과 천당에서 닦아 주십니다. 우리 민족은 눈물이 많고 또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이번에도 기쁨과 슬픔, 원통함의 눈물로 조국 강산을 적시고도 남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디 이번 뿐이었습니까?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비도 눈물에 비유했습니다. 칠석날 내리는 비는 견우 직녀가 오작교에서 헤어지는 눈물이라고도 했습니다.
옛글에 보면 눈물의 표현도 다양합니다.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누(淚)'요,
소리없이 주룩주룩 흘리는 눈물은 '체(涕)'요,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설(洩)'이요,
눈물이 방울져 흐르는 눈물은 '환( )'이요,
눈물이 흐르다 갈라져 내리는 눈물은 '사(泗)'요,
눈물이 콧물과 함께 흐르는 눈물은 이( )요,
눈물이 눈에 가득 괴어 흐르지 않는 눈물은 누( )라 했으니
한많은 세상살이에서 얻어진 표현입니다.
성도들은 땅위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웃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아주며 눈물없는 본향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죽음이 없는 본향
범죄의 결과는 죽음이므로 살아있는 사람은 피할 길이 없으며 죽음 때문에 사람은 피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을 얻으므로 성도는 이길 수 있으며 비록 육신의 죽음은 겪어야 하나 영생의 소망으로 눈물을 닦을 수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없는 죽음의 슬픔을 이번에 온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문학적 자질이 탁월함으로 김일성에게 처음으로 계관(桂冠) 시인이 된 오영재(64) 씨는 돌아가
신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바쳤습니다.
"가셨단 말입니까 /
정녕 가셨단 말입니까 /
…꼭 살아 있겠다고 하셨는데… /
아 약속도 믿음도 세월을 이겨낼 수는 없었단 말입니까" / (무정 중에서)
"한 해에 두 살 씩 어머니 나이까지 내가 먹겠으니 /
어머니는 더 늙지 마시라고… /
아들 몫까지 한 해에 두 살 씩 어머니 잡수시며 /
그리도 일찍 가셨습니까!" (사랑 중에서)
영혼과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주의자이지만 천륜의 정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없는 찬란한 본향 꿈에만 보아도 만족합니다.
슬픔이 없는 본향
땅위의 고향 그리운 가족과 만남의 기쁨이 크지만 헤어짐의 슬픔은 더욱 큼을 절감합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성자로 불리운 장기려 박사는 1950년 월남하여 북한의 아내를 사랑하여 독신으로 사랑의 의술을 베풀다 1995년 성탄절에 천당 가셨는데, 아내를 기다리며 1990년에 쓴 편지를 이번에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동행한 서울의대 교수 장가용(차남) 씨가 어머니 김봉숙(90) 씨에게 전했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건만 혹시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40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어쨌든 여보,
어느덧 40년이 흘렀소……"
땅위에는 수많은 슬픔이 언제나 있으나 우리의 본향에는 한 점의 슬픔도 없는데 그곳이 우리를 기다리니 그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김가용 교수도 50년 만에 90세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헤어질 때 어머니는 "꼭 가야하느냐?" "또 만날 수 있느냐?"는 애절한 목소리를 끊어지는 간장으로 뒤로 했습니다.
청상과부로 독자 조주경을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시켰으나 1950년 월북하고 김일성대학 교수가 되어 50년 만에 만났는데 헤어져야 하는 88세의 어머니 신재순 씨의 슬픔과 아들의 비통함은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입니다. 비록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지만 우리 가운데도 수많은 헤어짐의 슬픔이 있어 오늘도 눈물이 강을 이루고 한숨이 하늘에 사무치기도 하는 세상살이입니다.
울부짖음이 없는 본향
성도의 본향에는 '곡하는 것이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별의 안타까움으로 두손을 맞잡고 울며, 부둥켜 안고, 볼을 비비며, 땅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모두가 울었습니다. 이별의 울부짖음, 원통하여, 억울하여, 답답하여, 낙망하여 울부짖는 그 음성이 어디 한반도 뿐이겠습니까? 오늘도 전쟁 지역의 저 울부짖음을 들어 보세요. 범죄한 인간이 땅 위에 사는 동안은 언제 어디서나 있습니다. 이러한 불행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은 죽음을 이길 수 없기에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울부짖음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것을 줄이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민족과 인류의 범죄를 아파하며 중보기도 하고 복음 전파와 양육에 힘쓰는 것이 성도의 할 일입니다.
아픔이 없는 본향
마음의 아픔을 비롯하여 병으로 인한 고통은 형언키 어려우며 그 마침은 죽음으로 큰 슬픔을 안겨줍니다. 그리운 아들 동생이 50년만에 왔건만 병으로 만나지 못하는 이들, 한 편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도 즐거움은 잠깐이요 헤어짐의 아픔, 병으로 인한 아픔은 계속 인간을 괴롭히고 있지 않습니까? 눈물, 사망, 슬픔, 울부짖음, 아픔이 없는 성도의 찬란한 본향 천국이 성도에게 최대의 소망이요 힘입니다. 이 본향 있으므로 우리는 괴롬과 죄악뿐인 세상에서 오늘도 기뻐하며 담대하게 고통을 이기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습니다. 남북 8·15 상봉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거듭거듭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속과 다짐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더욱 느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 본향 있음에 감사하며 기뻐합시다.
육신의 가족 상봉이 악랄한 공산주의도 이기거늘
거룩한 성도들이 천당에서 만나는 기쁨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번 남북 8·15 상봉에서 북한은 남한 땅에 보내서는 안될 사람들을 많이 보냈으나 그래도 7,000만을 울렸거든 하나님이 이루실 통일의 그날 아니 영원한 통일인 천당을 그려보며 기뻐하고 기뻐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