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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거제 장목면 거민(居民)과 연해 6군(郡) 어민 청원서(請願書)2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대한제국 말기 거제군 장목면(長木)의 주민들과 경남 연근해 6군의 어민들의 청원서 2건을 소개하겠다. 먼저 ①「1907년 10월 거제군 장목면(長木) 훈둔 거민(訓屯居民) 청원서(請願書)」는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문건으로, '둔(屯)'자가 들어간 이름 때문에 장부 속에 섞여 들어가 도세(賭稅, 소작료)라는 이름으로 과도하게 늘어난 둔토(屯土) 세금 부담을 줄여달라는 청원과 함께 러일전쟁 및 일본군 점령으로 인해 훈둔 9개 마을(약 50여 결)이 일본 방비대(군부대) 점령지로 편입되었고 또 남은 5개 마을은 40여 결에 불과한데, 일본군에게 땅을 뺏긴 부분에 대한 고려 없이 과중한 세금이 계속 부과되어 견딜 수 없는 처지라, 뺏긴 땅의 세금은 제외해 주어 백성들이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할 수 있도록 완문(完文, 증명서)을 내려달라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구한말 국가 기관(내장원·경리원)의 가혹한 수탈과 러일전쟁기 일본군의 토지 강점이 서민들의 삶에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료다.
다음으로 ②「1907년 8월 경남 연해 6군(六郡) 어민(漁民) 청원서(請願書)」는 1905년 황실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민간 어장을 수탈하자, 어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사유 재산권'을 주장했던 문서다. 1905년 1차로 영친왕궁 재산이라고 하여 연안 6개 군의 사유 어장 400여 곳을 강제로 빼앗았으나, 이내 연안 백성들의 성토 끝에 고종 황제가 궁내부 대신이 관리를 파견하여 다시 되돌려 받았다. 그러나 1906년 2차로, 서울 사는 김봉수(金鳳洙)라는 인물이 중앙 관청(본원)의 훈령을 내세워 다시 어장을 강제 매각을 강행하고 있어, 수천 명의 어민이 살길을 찾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 문건이다. 이 사료는 구한말 황실의 재산 수탈에 맞서 민간의 사유 재산권을 지키려 했던 어민들의 끈질긴 투쟁 기록이다.
1) 「1907년 10월 거제군 장목면(長木) 훈둔 거민(訓屯居民) 청원서(請願書)」
다음 청원서(請願書)는 1907년(융희 원년) 10월,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의 주민 김두세, 강평집 등이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문건이다. 당시 일본군의 토지 점령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고통받던 지역 민초들의 절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주요 내용은 과도하게 늘어난 둔토(屯土) 세금 부담을 줄여달라는 호소이며, 당시 거제도 주민들이 겪은 이중고(가혹한 세금 + 일본군 부지 점령)를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다. 이 땅은 임진왜란 이후 갑오개혁까지 주민들이 직접 개간하여 사고팔던 사유지 성격의 땅이었다. 과거 훈련도감(훈국)에 속했을 때는 매 결(結)당 11냥의 대전(代錢)을 거두어, 일부는 훈련도감에 보내고 나머지는 장목진의 장졸들 월급으로 썼다. 그래서 이 땅의 지역 이름도 훈둔(訓屯, 훈련도감+둔전)으로 불렸다. 그런데 갑오개혁(1894년) 이후 이 땅이 일반 민결(民結)처럼 취급되어 세금이 이전보다 7배나 뛰었다. 병신년(1896년)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둔(屯)'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는 이유로 공토(公土)로 간주하고 도세(賭稅, 일종의 소작료)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이에 내장원(內藏院)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1898년부터 도세 600냥을 납부하기로 약속받았으나, 이듬해 사검위원 권유해가 내려와 이를 무시하고 다시 높은 세금을 매겨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현재에는 러일전쟁 및 일본군 점령으로 인해 훈둔 9개 마을 중 저도(猪島), 이목(梨木), 명상(明上), 명하(明下) 4개 마을(약 50여 결)이 일본 방비대(군부대) 점령지로 편입되었다. 남은 5개 마을은 40여 결에 불과한데, 일본군에게 땅을 뺏긴 부분에 대한 고려 없이 과중한 세금이 계속 부과되어 견딜 수 없는 처지다.
그래서 청원서를 올린다.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세금을 제외해 달라." 또 "이전처럼 도세 600냥 한도 내에서 주민들이 직접 경리원에 납부할 수 있게 해달라." 이를 통해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이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할 수 있도록 완문(完文, 증명서)을 내려달라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구한말 국가 기관(내장원·경리원)의 가혹한 수탈과 러일전쟁기 일본군의 토지 강점이 서민들의 삶에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료다.
◯ 결국 국가 기관 경리원경(經理院卿)에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주민들이 주장하는 '600냥'이라는 액수가 너무 적다고 판단했다. 과거의 낮은 세금 기준을 계속 적용해달라는 요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다만, 일본군이 점령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땅에 대해서는 억울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도록 조사하여 시정하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남겼다. 이 사건은 10월에 청원을 올리고 11월에 바로 답변이 내려온 신속한 행정 절차를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 세금 부담 자체를 획기적으로 줄여주지는 않은 냉정한 국가의 입장도 엿보인다.
* 덧붙여 「1907년 거제군 장목면(長木) 거민(居民) 청원서(請願書)」는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김두세(金斗世), 강평집(姜平執)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7년 10월 거제군 장목면(長木) 훈둔 거민(訓屯居民) 청원서(請願書)」**
융희 원년(1907년) 10월 일. 청원서.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훈둔(長木訓屯) 주민 김두세(金斗世), 강평집(姜平執) 등.
엎드려 고하나이다. 본토(이 땅)는 임진왜란 이후로 백성들이 스스로 개간하여 사사로이 서로 사고팔았으니, 다른 공둔(나라 땅)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전에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결(結)마다 대전(代錢) 11냥씩을 경작자에게서 거두었습니다. 그중 검은 무명(玄木) 값인 301냥 9전은 해당 국(훈련도감)에 상납하고, 남은 돈은 장목진(長木鎭) 장졸들의 월급으로 나누어 준 지 이미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 이 땅이 민간의 땅(民結) 예법에 따라 총액이 올라가 결(結)마다 엽전 8전씩을 도지부(度支部)에 상납하게 되니, 이전보다 7배나 무거워졌습니다. 백성들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워 울부짖었으나 하소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병신년(1896년)에 서울에서 파견된 관리(京派員)가 내려와 각 둔(屯)·역(驛)의 공토(公土)를 조사하여 거둘 때, 본토 또한 '둔(屯)'자가 들어간 이름 때문에 장부 속에 섞여 들어가 도세(賭稅, 소작료)라는 이름으로 독촉하여 거두게 되었습니다.
정유년(1897년)에 주민들이 내장원(內藏院)에 와서 호소하니, 판결문(完定成文)을 내려주기를 "무술년(1898년)부터 시작하여 도세 대전 600냥을 본원(내장원)으로 백성들이 직접 상납하라"고 하셨기에, 그해에 백성들이 상납하고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기해년(1899년)에 조사위원 권유해(權遊海)가 내려와 내장원의 판결문과 이전의 소장들을 모두 무효로 돌려버리고, 백성들에게 조사하지도 않은 결보(結簿, 토지대장)를 본원에 올려 보고했습니다. 논밭과 집터를 가리지 않고 결(結)마다 조(租) 5승(升)씩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듬해 경상남도 봉세관이 내려와 독촉하여 거두니, 백성들이 비록 원통하고 억울하나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매년 억지로 납부해 온 것이 병오년(1906년)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주민의 절반 이상이 흩어지고 버려진 밭이 매우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훈둔(訓屯) 9개 마을'의 전체 결수가 겨우 100여 결에 불과한데, 그중 저도(猪島), 이목(梨木), 명상(明上), 명하(明下) 4개 마을 50여 결은 일본 방비대(군부대)의 점령지가 되었습니다. 남은 5개 마을의 결수는 40여 결에 지나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나는 것으로 7배나 늘어난 세금을 낼 길이 없사오니, 특별히 이 불쌍한 백성들의 실상을 가엾게 여기시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 리 길을 걸어와 죽음을 무릅쓰고 눈물로 호소하오니, 본군 장목면 훈둔의 도세를 이전처럼 600냥으로 정해주시고, 일본군이 점령한 땅의 세금은 제외해 주십시오. 남은 결수의 세금은 백성들이 직접 본원(경리원)에 상납할 수 있도록 판결문(完文)을 써주셔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융희 원년(1907년) 10월 일. 경리원경(經理院卿) 각하.
*거제군(巨濟郡) 김두세(金斗世) 등이 올린 건에 대하여.
본군(거제군)의 훈둔(訓屯)은 본래 백성들이 스스로 개간한 사유지이니, 예전 훈련도감(訓局)에 납부하던 도세(賭稅) 600냥 중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도세를 제외하고 백성들이 직접 납부하게 해달라는 일.
*[지령] 이전에 정했던 도세(賭稅)는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면(爽實)이 있어 실정에 맞게 다시 정해야 할 처지이다. 그런데 단지 예전의 가벼운 세액(歇略)만을 근거로 삼아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것은 이치에 부당하다. 다만, 병대(일본군)가 주둔한 땅에 대해서는 마땅히 조사하여 바로잡을(歸正) 일이 있을 것이다. 융희 원년(1907년) 11월 4일.
[隆熙元年十月 日. 請願書. 慶尙南道巨濟郡長木訓屯居民金斗世, 姜平執等.
伏以, 本土가 自壬燹後로 民自私墾야 私相買賣, 則與他公屯으로 迥殊也라 曾前訓鍊局에 屬付야 每結代錢十一兩式收捧于作民處야 玄木代錢三百一兩九戔은 上納于該局고 餘錢은 長木鎭將卒月料를 劃給이 已經數百年之久矣러니, 甲午更張後로 同土가 與民結例陞摠야 結每負에 葉錢八戔式度支部에 上納오니 比前七倍에 加지라 民實難支에 鳴呼無路이옵더니, 忽自丙申年에 京派員이 下來야 各屯驛公土收捧時에 本土도 以屯字之名으로 渾入文簿中고 賭稅爲名을 督捧이옵기 丁酉年에 居民等이 內藏院에 來訴온즉, 完定成文內辭에 自戊戌爲始야 賭稅代錢六百兩을 本院으로 民自上納이다옵기 同年에 民이 上納受尺이옵더니, 翌年己亥에 査檢委員權遊海下來야 內藏院完文與前後訴狀을 勿施樣으로 却之고 民으게 調査치아니 結簿를 本院에 陞摠와 田與畓家基勿論고 結每負에 租五升式輸納云故로 翌年에 慶南捧稅官이 下來督捧오 民雖冤枉이오나 不敢低仰고 隨年冤納이 至于丙午이오 居民之渙散이 太半이오 田畝之陳廢가 許多할더러 所謂訓屯九洞摠結이 只爲百結餘, 而猪島梨木明上明下四洞五十餘結은 日本防備隊占駐地에 入고 五洞所存結이 不過四十餘結이온바, 以薄土劣結之所出노 無路七倍之加稅이오니 特念哀此殘氓之實狀와 陰崖陽春의 德化를 共被코자와 裹足千里고 冒死泣訴오니, 本郡長木訓屯賭稅를 以前六百兩式中에 日兵占駐結除之옵고 在結賭錢은 民自上納本院之意, 完文成給시와 使此塡壑之氓으로 安堵作業을 千萬伏祝홈. 隆熙元年十月 日. 經理院卿閣下.
巨濟郡金斗世, 本郡訓屯, 本是民自私墾, 依前日訓局所納賭稅六百兩中, 除日兵駐占地該賭稅, 自民直納事.
指令, 前所定賭가 未免爽實야 從實更定之地에 但憑前日歇略야 有此所訴가 理所不當이오 至於兵隊駐地 當有調査歸正 事. 隆熙元年十一月四日.]
2) 「1907년 8월 경남 연해 6군(六郡) 어민(漁民) 청원서(請願書)」
이 청원서(請願書)는 당시 황실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민간 어장을 수탈하자, 어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사유 재산권'을 주장했던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광무 10년(1906년) 8월, 경상도 지역 연안 6개 군(칠원, 진남, 고성, 웅천, 진해, 거제)의 어민들이 자신들의 생계 수단인 어장을 지키기 위해 공동으로 제출한 청원서다. 당시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궁내부와 권력층이 어민들의 삶의 터전인 어장(어조, 漁條)을 강탈하려 하자, 이에 저항하며 생존권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 주요 내용 요약하면, 어민들에게 '어조(어장)'는 농민의 '전답(논밭)'과 같고, 대대로 내려온 '사조(사적 어업권)'는 '사답(개인 논)'과 같다고 강조한다. 1차로, 7년 전 잡배들이 영친왕궁에 부속된 재산이라고 속여 연안 6개 군의 사유 어장 400여 곳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어민이 실업자가 되어 굶주리고 부모 장례나 자녀 혼사도 치르지 못하는 참상을 겪었다. 1905년 어민들의 억울한 사정이 조정에 알려져, 고종 황제의 뜻에 따라 궁내부 대신이 관리를 파견했다. 조사 결과 옛 문서(공안)와 대조하여 실제 사유지임이 증명된 어장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 어민들이 다시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다음 2차로 1906년 기쁨도 잠시, 서울 사는 김봉수(金鳳洙)라는 인물이 중앙 관청(본원)의 훈령을 내세워 다시 어장을 강제로 팔아치우려 하고 있다. 관찰부(도청)에서는 "황명으로 돌려준 것이니 침범하지 말라"고 판결했으나, 파견된 관리가 이를 무시하고 강제 매각을 강행하고 있다. 이에 어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며, 해당 관리에게 엄중히 지시하여 사유 어장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수천 명의 어민이 살 길을 찾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2) 당시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보면, 대한제국 말기 황실 재정 확충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 재산 침탈과 그에 따른 민초들의 저항을 잘 보여준다. 당시 내장원(황실 재산 관리 기관)은 재정 마련을 위해 민간이 관습적으로 소유하던 어장과 토지를 황실 소유로 편입(역둔토 및 어장 수탈)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영친왕궁의 궁방 재산을 늘리는 과정에서 지방의 이권이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민들이 단순히 당하고만 있지 않고, 문서를 대조하고 관청에 집단 청원을 넣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인 '사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3) 문서의 명단과 주요 내용의 대표자들은, 칠원의 추성유·방처중(45명), 진남의 이의겸·박유서(156명), 고성의 정학주·최종원(102명) 등 총 348명에 달하는 대규모로 연명하였다. 청원의 핵심은 "우리 어민들에게 어장(私條)은 개인의 논(私畓)과 같다. 그런데 파견원 김봉수가 이를 강제로 빼앗으려 한다. 이미 관찰부(도청)에서 침범하지 말라는 판결(제사)을 받았으니, 경리원에서도 파견원에게 엄중히 지시하여 우리 어장을 침범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4) 경리원에서 보낸 지령(指令, 정부의 공식 답변)은 "마땅히 해당 도(경상도)와 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사실을 조사하고 적절히 조치하게 할 것이니, 번거롭게 굴지 말고 물러가 기다려라." (광무 10년 8월 10일)
(5) 청원서의 의미와 결어, 단순히 몇 명의 호소가 아니라, 6개 군 수백 명의 어민이 이름을 걸고 중앙 정부(경리원)에 조직적으로 직접 압력을 넣었음을 보여준다. 어민들이 지방 관청(관찰부)의 판결문을 증거로 첨부(제사점정)하여 중앙 관청에 항의하는 등 매우 치밀한 법적 대응을 했다. 그러나 정부의 경리원은 어민들의 주장을 즉시 수용하기보다는, 일단 해당 지역 관찰부에 "사실 확인 후 처리하라"며 공을 넘기는 신중하면서도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결국 이 사료는 구한말 황실의 재산 수탈에 맞서 민간의 사유 재산권을 지키려 했던 어민들의 끈질긴 투쟁 기록이다.
* 덧붙여 「1907년 8월 경남 연해 6군(六郡) 어민(漁民) 청원서(請願書)」는 발신자가 경남 연해 6군(六郡) 어민(漁民) 추성유(秋性有), 이의겸(李義兼), 정학주(鄭學柱)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7년 8월 경남 연해 6군(六郡) 어민(漁民) 청원서(請願書)」**
청원서. 광무 10년(1906년) 8월 일. 칠원, 진남, 고성, 웅천, 진해, 거제 등 6개 군 어민 일동.
삼가 아룁니다. 바닷가 백성에게 어장(漁條)은 농민의 전답과 같고, 개인 소유의 어장은 곧 개인의 논(私畓)과 같습니다. 저희는 이 어장에 의지해 삶을 꾸려왔습니다. 그런데 7년 전, 간악한 무리들이 영친왕궁에 부속된 재산이라고 핑계 대고, 연안 각 군의 민간 소유 어장 400여 곳을 아무런 근거 없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어민이 갑자기 직업을 잃었습니다. 춥고 배고플 때마다 우리 어장을 생각하고, 부모님 장례를 못 치르고 모시지 못할 때도 우리 어장을 생각했으며, 자식들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지 못할 때도 우리 어장을 생각했습니다.
이에 군청과 관찰부, 내장원과 내부(內部) 등에 호소하며 원통한 기운이 구름이 되고 눈물 피가 바다를 이룰 지경이었으며, 얼마 안 되는 남은 재산마저 길바닥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대궐은 깊고 멀어 백성의 사정이 막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백성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아 성군(고종 황제)께서 밝게 살피셨습니다. 지난 을사년(1905년)에 궁내부 대신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특별 관리(별정파원)를 파견하여, "각 군 백성의 사유 어장을 일일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셨습니다.
파견된 관리가 처음에는 각 개인이 대대로 물려받은 문서를 검토하고, 다시 옛 통제영의 병선 공안(장부)을 대조하여, 일치하는 것은 모두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어 다시 생업에 종사하게 했습니다. 기쁜 목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성군의 덕을 노래하며, 비로소 개명한 세상을 깨달아 다시는 예전 같은 핍박을 보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이 복이 없는지, 문서의 먹흔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올해 1월 서울 사는 김봉수(金鳳洙)라는 자가 본원(중앙 관청)의 훈령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백성의 어장을 팔아넘긴다는 말이 없더니, 탐욕이 치솟고 지각이 막혀 다시 백성의 어장을 강제로 빼앗으려 합니다.
지금 이 백성들은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죽게 된다면 반드시 끝까지 다툴 것이고, 막다른 곳에 이른 뒤에야 죽을 것입니다. 이에 관찰부에 호소하니, 판결문에 이르기를 "백성의 사유 어장은 황명을 받들어 돌려준 것이니, 비록 서울의 훈령이 있더라도 다시 침범해서는 안 된다. 일절 간섭하지 말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관청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관리(파원)는 이를 예사로 여기고 강제로 백성의 어장을 팔아넘기려 합니다. 이에 천 리 먼 길을 걸어와 대중의 피로 먹을 갈아 간곡히 읍소합니다. 부디 수천 명 어민의 절박한 사정을 굽어살피시어, 해당 관리에게 엄히 지시하여 백성의 사유 어장을 일절 침범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빕니다. 광무 10년 8월 일.
*경리원(經理院)의 공식 답변(지령), *명단 및 지령문
칠원군(柒原郡) : 추성유(秋性有), 방처중(方處仲) 등 45명
진남군(鎭南郡) : 이의겸(李義兼), 박유서(朴攸西) 등 156명
고성군(固城郡) : 정학주(鄭學柱), 최종원(崔宗元) 등 102명
웅천군(熊川郡) : 김익순(金益淳), 양자정(梁子定) 등 35명
진해군(鎭海郡) : 최형숙(崔亨淑), 임예단(林禮丹) 등 7명
거제군(巨濟郡) : 박인수(朴仁秀), 이성규(李性圭) 등 3명
*경리원경(經理院卿) 각하께 칠원 등 6개 군 어민들이 올립니다. 개인 소유의 어장(私條漁基)은 백성들의 개인 논(私畓)과 같습니다. 그런데 파견원 김봉수(金鳳洙)가 이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기에, 이미 관찰부(경상도청)에 소송을 제기하여 받은 판결문(題辭)을 첨부하여 제출합니다. 부디 파견원에게 엄히 지시하여 우리 어장을 침범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지령(指令)] 마땅히 본도(경상도)와 관찰부에 지시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적절히 처치하게 할 것이니, 번거롭게 굴지 말고 물러가 결과를 기다려라. 광무 10년(1906년) 8월 10일
[光武十年八月 日. 請願書. 柒原鎭南固城熊川鎭海巨濟六郡漁民等.
伏以, 海民之漁條가 猶野民之田土也요 私條 是私畓也라 矣身等이 賴以漁條資活이압더니 七年前에 被挾雜輩, 藉托付屬于英親王宮고 沿海各郡民私條四百餘處를 白地勒奪故로 數千漁民이 卒然失業야 衣寒肚飢則思我漁條고 父未葬母未養則思我漁條고 子不娶女不嫁則思我漁條야 呈郡呈府고 訴院訴部하야 呵恨氣而成雲고 潗冤血而爲海야 如干殘産이 沒入於道路之間이오되 九重이 深邃야 下情이 隔滯矣러니, 民聲이 聞天에 聖鑑이 孔照사 去年乙巳에 宮內府大臣이 旨意를 奉承시고 命遣別定派員야 各郡民私條를 一一還歸本主라시니 別定代辦이 初考各人傳來之私券고 再閱前統營兵船公案야 符合者 底底還歸本主야 使之復業케니 歡聲이 震天, 歌誦聖德고 始悟開明야 意不復見往年之凌迫이러니, 斯民이 無福야 墨痕이 未乾고 紙瘢이 未生야 今年正月日에 京居金鳳洙爲名人이 持本院訓令而來야 初無民私條放賣之說矣러니 慾炎이 盛熾고 靈竅가 閉塞야勒奪民條니 此時此民이 永死乃已오 旣至永死에 必爭乃止오 旣爲必爭에 至絶地而後에 死矣故로 等訴于觀察府이온즉, 題內에 民私條 奉勅還出給者也니 雖有京訓이나 不可還侵이니 一一勿侵야 俾爲安業에 勿擾府庭事이오되 該派員이 視若尋常고 勒賣民私條이압기 千里裹足에 以衆血노 磨墨야 玆敢泣訴오니, 洞燭此數千漁民之邱壑情境사 訓飭於該派員야 民私條 一一勿侵케시와 使衆民으로 安業資生을 千萬伏祝. 光武十年八月 日.
柒原郡秋性有, 方處仲等四十五人, 鎭南郡李義兼, 朴攸西等一百五十六人, 固城郡鄭學柱, 崔宗元等一百二人, 熊川郡金益淳, 梁子定等三十五人, 鎭海郡崔亨淑, 林禮丹等七人, 巨濟郡朴仁秀, 李性圭等三人. 經理院卿閣下, 柒原等七郡漁民等, 私條漁基, 猶民私畓也, 而派員金鳳洙, 勒奪私條, 故呈訴觀察府, 題辭粘呈, 訓飭派員勿侵事.
指令, 第當訓飭本道府야 使之査實措處지니 勿煩退俟 事. 光武十年八月十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