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편지에 충격 받았다” 이문열은 왜 작가가 됐을까
이문열, 시대를 쓰다
관심
9회. 나는 왜 작가가 됐나
무엇이 한 어린 영혼을 들쑤셔, 말과 글의 그 비실제적 효용에 대한 매혹을 기르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모방의 열정과 그 허망한 성취에 대한 동경으로 들뜨게 한 것일까.
스스로의 문학적인 재능에 대한 과장된 절망과 또 그만큼의 터무니없는 확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소중한 젊은 날을 탕진하게 한 뒤, 마침내는 별 가망 없는 언어의 장인(匠人)이 되어 남은 긴 세월 스스로를 물어 뜯으며 살아가게 만든 것일까.
서른 넘어 문단 말석에 이름을 얹은 후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 나는 숱하게 저 질문에 시달렸다.
당신은 어쩌다 말과 글을 평생의 도구로 선택하게 됐나. 왜 작가가 됐느냐는 질문인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막막함을 느끼곤 했다.
어쩌다 내 앞에 놓인 숱한 가능성 중에서, 투입과 산출의 균형이 현저하게 깨져 있는 감정적 생산을 나의 일로 결정하게 됐는지. 젊은 날 통과의례처럼 한 번은 대면하고 넘어갔어야 할 질문을 그냥 지나쳐버린 나는 작가가 된 후에도 그에 대한 답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작가가 된 원인을 물려받은 피나 기질, 환경, 사랑 같은 것들에서 찾아보려 한 적이 있다. 이 글 맨 앞의 인용문은 1991년 내 산문집 『사색』에 수록된 ‘피·기질·환경·사랑 그리고 소설’이라는 글의 첫머리다.
“북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 문학성 느껴져”
피나 기질은 아버지나 문중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생전 어머니(95년 작고)에 따르면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월북하기 전, 이념의 싸움이 잘 풀리면 잘 풀리는 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잘 풀리지 않는 대로 ‘나중에 세상이 좋아지면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더 해 글이나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혁명 투쟁에 관한 장엄한 서사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87년 조총련 출신 고향 친지를 통해 전해 받은, 북한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는 그런 문학에의 경사(傾斜)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글이었다.
“아직도 조국은 나에게 실존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듯한, 아버지 편지의 한 구절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이 아직도 기억난다.
직계 조상들이 남긴 부피 큰 문집(文集)들 역시 물려받은 기질의 영향을 따져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