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경험적인 얘기지만, 나라가 태평스러울 때 설사 영웅의 재질과 기질을 갖춘 사람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렇게들 말하는 것일 터이다.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 역사상 가장 걸출한 영웅 중의(가운데 – 옮긴이) 하나로 꼽히는 이세민, 곧 당 태종도 바로 그랬다.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고구려(고구리/전기 고리[高麗] - 옮긴이)와 벌인 한판 승부에서 완패한 수나라는 통일 왕조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40년을 채우지 못하고 북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망한다. 반란군의 지휘자는 군벌 출신의 이연(원래는 ‘대야[大野]’라는 성을 쓰던 탁발선비[타브가치]족 집안 출신이었고, 이 집안은 한[漢]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이[李]로 성을 바꾸었다 – 옮긴이)이었다. 장안을 접수한 반란군은 곧 정부군이 되어 쿠데타의 공식에 따라 왕위에 오른다. (그들은 – 옮긴이) 수 양제(양광 – 옮긴이)의 손자를 왕(실제로는 황제 – 옮긴이)으로 옹립했다가 얼마 안 가 폐위하고 나라 이름을 ‘당’으로 바꿔 이연이 (새 황제로 – 옮긴이) 즉위하니 그가 당 고조다.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쿠데타를 건의하고 실행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아들은 둘째인 이세민이었다. 맏아들 위주의 엄격한 중국 질서에서 그에게 왕권이 돌아올 리 없다. 하지만 그 맏아들이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세민은 이 간단한 추리를 현실로 만든다. 태자로 책봉된 형 건성(이건성 – 옮긴이)과 아우 원길(이원길 – 옮긴이)마저 죽이고 왕위(황위 – 옮긴이)에 오른 것이다.
큰 쿠데타(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세운 일 – 옮긴이)와 작은 쿠데타(형과 아우를 죽이고 태자가 된 일 – 옮긴이)를 모두 성공한 그는 군인으로서도 탁월했지만 정치가로서도 뛰어났으며, ‘문민정부’에도 어울리는 팔방미인이었다.
이세민이 집권한 23년간 당은 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의 치(다스림이라는 뜻 – 옮긴이)’라 불리는 시절이다. 특히 그는 전대의 역사서를 편찬하게 하여 인류 역사에 큰 공헌을 하는데, 그 가운데『 진서(晉書) 』는 직접 서술하기도 했으니, 여러 가지 면에서 영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그는 돌궐(괵튀르크 제국 – 옮긴이)과 고창국을 복속시켜 명실상부한 동양의 패자가 되었지만, 유독 정벌하지 못한 나라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고구려다. 패배를 모르던 그에게 쓴 맛을 안겨 준 사나이는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이 등장할 당시 고구려는 살수대첩의 두 영웅 건무(고건무 – 옮긴이)와 을지문덕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고 있었다.
영류왕 건무는 일찍이 장수왕 때처럼 북수남진(北守南進. 북쪽은 경계선을 넘지 말고 지키되, 남쪽으로 밀고 나가자는 정책 – 옮긴이)을 외친 데 반해 을지문덕은 수나라 말기 쇠약해진 중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북진(제하[諸夏]가 고구리의 서쪽에 있으니, ‘서진’이라는 말을 써야 하지 않는가? - 옮긴이)할 것을 주장했다. 젊고 패기에 찬 연개소문은 당연히 을지문덕을 좇아 북진을 주장했는데, 이 때문에 영류왕과 군신들의 눈 밖에 나게 된다.
마침 지방에 대가(大加, 고구려의 관직)로 있던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단 몸을 피신한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왕(고구리의 태왕 – 옮긴이)과 군신들이 끝내 그를 죽이려 하자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쳐들어가 영류왕과 반대파 중신들을 죽이고 허수아비 보장왕(본명 고보장. 이 태왕 때 고구리가 망해서, 따로 받은 시호가 없다 – 옮긴이)을 세운다.
집권 방식도 닮은꼴이고 나이도 엇비슷한(연개소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맏아들인 남생이 633년생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598년생인 이세민보다 약간 아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민과 연개소문은 당과 고구려 간의 전운이 무르익으면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어차피 맞붙어야 할 적수로 점차 떠오른다.
수나라의 원한을 갚고 동양을 천하통일하려는 당의 낌새를 눈치 챈 연개소문은 먼저 백제 의자왕(본명 부여의자. 이 대왕 때 남부여가 망해서 시호를 따로 받지 못했다 – 옮긴이)과 동맹을 체결하여 전쟁이 벌어질 경우 고구려는 당을, 백제는 신라를 담당하기로 역할 분담을 한다. 그러나 이세민은 15년간의 치적을 통해 나라의 발전을 이루고 정권을 안정시킨 데 반해 연개소문은 이제 막 집권한 처지였다.
전쟁의 계기는 묘하게도 연개소문의 집권이었다. 644년 이세민은 자신도 쿠데타로 집권했으면서 “연개소문이 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백성을 탄압하며 내 명령을 받들지 않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직접(몸소 – 옮긴이) 인솔하여(이끌고 – 옮긴이) 고구려를 침략한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이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세민은 수나라의 패인(진 까닭 – 옮긴이)을 분석하고 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준비해 왔으면서도 연개소문의 게릴라전(유격전 – 옮긴이)에 휘말려 결국 패하고 만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불세출의 명장 양만춘(그러나 정사인『 삼국사기 』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 옮긴이)이 지키는 요동(오늘날의 요동반도가 아니라 요서지역이다 – 옮긴이)의 안시성이다.
연개소문은 요충지인 안시성을 양만춘에게 맡겨 철저히 수비하고만 있으라고 명해 놓고,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즈음 정병(精兵. 우수하고 강한 군사 – 옮긴이)을 이끌고 후방의 임유관을 기습하여 주의를 분산시킨다. 후방을 기습당하고 부랴부랴 회군하는 당군은 다시 연개소문에게 결정타를 맞는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이세민은 원정(침략전쟁 – 옮긴이)을 극구 말리던 당 제일의 장군 ‘이정’과 (뛰어난 신하였던 – 옮긴이) ‘위징’의 충언에 따르지 않은 걸 몹시 후회하면서도, 화살에 맞아 왼쪽 눈마저 잃고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고구려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수나라처럼 ‘고구려 콤플렉스’에 걸려 재차 원정을 계획하지만 한번 싸움에 혼이 난 군신(群臣. 많은 신하들 – 옮긴이)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화살에 묻은 독이 발병의 원인이 되어 5년 만에 사망한다. 다시는 요동(고구리를 비롯한 제하[諸夏]의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오늘날로 치면 ‘극동’과 비슷한 뜻을 지닌 말이다 – 옮긴이)을 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이로써 연개소문은 홀로 남은 외로운 영웅이 되었지만, 그도 역시(또한 – 옮긴이) 늘 염두에 두어 오던 중국 원정(제하[諸夏] 정복 – 옮긴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얼마 안 가 죽고 만다.
이렇게 해서 동아시아 고대 사상 최대 전쟁이었던 수와 고구려, 당과 고구려 싸움(고수전쟁과 고당전쟁 – 옮긴이)에서 고구려는 모두 승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간의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로 나라가 흔들렸고, 게다가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권력 다툼으로 내분마저 심각해졌다. 결국 당 고종(이름은 ‘이치’ - 옮긴이)은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아버지 이세민의 유지를 묘하게 해석하여(풀이하여 – 옮긴이), 신라와 결탁하고 먼저 백제(남부여 – 옮긴이)부터 치고 들어와 멸망시킨다. 고립무원에다 연개소문의 사후 아들들 간에 권력 다툼이 극심해져 고구려는 (연남생이 고구리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한 뒤 앞잡이가 되어 당군과 함께 쳐들어 온 나머지 – 옮긴이) 거의 자멸하다시피 멸망하고 만다.
연개소문과 이세민은 둘이 다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지만, 역사적인 평판은 정반대다. 이세민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형제들까지 살육했는데도 중국뿐 아니라 우리 역사학자들에게도 ‘희대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반면, 연개소문은 왕을 살해한 사건만이 부각되어『 삼국사기 』에는 ‘흉악하고 잔폭하며 무도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아마도 연개소문이 백제와 동맹을 맺은 사실이 더욱 김부식의 심기를 건드렸으리라). 더구나 연개소문은 그 이름의 뜻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으며, 출생년도는 물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사망년도도 불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어,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임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어법/문법에 맞는 문장이 된다 – 옮긴이) 그에 마땅한 평가를 얻지 못하고 있다.
- 『 상식 밖의 한국사 』 ( ‘남경태’ 지음, ‘(주)새길’ 펴냄, 1995년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