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실口實
변종호
궁窮하면 내뱉는 약자의 변이다. 경우의 수에서 유리한 수를 선택한다. 쓸수록 대담한 수를 찾으면 그럴수록 관계망은 균열이 가고 삶의 기본바탕도 깨어지게 마련이다.
삼십여 년 전, 퇴근 무렵 후배가 찾아왔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퇴직 후 자동화 설비를 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빈 병이 두어 개로 늘어나자 입을 뗀다.
“형님, 직원 월급을 줘야 하는데 입금이 늦어 그러니 500만 원을 닷새만 빌려주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어쩌지, 나도 당장은 없는데.”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후배 얼굴을 보니 오죽하면 부탁하겠나 싶고 내일이 ‘근로자의 날’인데 월급을 못 받는 직원들 모습이 어른거려 마음이 약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적금을 해지해 줄 테니 우선 급한 불은 끄게나.”
집사람에게 의논도 없이 반년 남은 2년 만기 적금을 해지하여 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후배의 뜻대로 차용증도 썼다. 그 안에는 변제기일도 분명히 적혀 있었지만, 화장실 갈 때와 다녀와서가 다르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빌려준 지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넘어도 기척 없다. ‘바빠서 그렇겠지’라며 이해하다 두 달이 넘어서자 전화를 걸었다.
“잊은 것 같아 전화했네.”라고 하자
“형님, 죄송해요, 곧 입금이 되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라며 미안해했다.
전화를 거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간을 봐가며 받는 이의 구실이 조금씩 수위를 높여갔다. 닷새 만에 찾아오겠다던 사람이 다섯 달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전화를 하면 분명 본인인데 사장님은 외출 중이고 자신은 동생이라고 둘러댔다. 사정이야 있겠지만 이거는 아니었다. 부아가 났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남의 보증을 서주고 패가망신한 사례가 많았다. 삼십 오 년 전, 오백만 원은 큰돈이지만 못 받는 돈보다 갖은 구실을 붙이는 그 사람이 미웠다. 오죽하면 돈거래 하다 돈 잃고 사람 잃는다는 말이 나왔을까. 진즉에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그것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터득하는 게 세상 이치였다.
적금 만기일이 지나자 은행에 근무하던 꼼꼼한 아내의 채근이 매서웠다.
“당신 신협에 가입한 적금 만기 지났잖아요. 얼른 찾아와요.”
초가을 밤인데 어쩌자고 땀은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지. 잠시 궁리 끝에 입을 열었지만, 구실로 포장된 언어는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찾아와야지 요즘 일이 워낙 바빠 자꾸 잊어버리네, 알았어.”
푹 잘 수 없었던 새벽에 편지를 썼다. 돈을 받는 것보다 관계 속에 살면서 지켜야 할 도리와 신의에 대해 구구절절 마음을 울리는 문장으로 편지지 한 장을 빼곡 채웠다.
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후배였다. 집앞이니 나오란다. 굴러온 낙엽이 쌓인 가로등 아래 그가 서 있었다. 일하다 씻지도 못하고 왔는지 헝클어진 머리에 군데군데 기름이 묻은 얼굴은 핼쑥했다. 짤막한 키에 다부지던 예전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걸 느꼈다. 온갖 구실을 붙일 때는 그리도 얄밉더니 마주 대하니 안쓰러운 생각만 들었다.
구운 갈비와 술을 연신 그에게 권했다. 우선 허기진 배라도 채워주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려 들면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다. 말없이 술잔을 연거푸 비우던 후배가 벌떡 일어서더니 누런 봉투를 내밀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형님 편지 읽고 많이 느꼈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목울대가 뻐근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후배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였다.
만약 돈을 갚으라고 다그쳤다면 지금도 불편한 관계로 남아있었을 텐데 그 사람 마음을 움직인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진솔한 한 통의 편지였다.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인간본성”을 들추지 않아도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다. 잠시 위기를 모면하는데 구실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하지만 그 구실은 또 다른 구실을 만들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결국 그런 사람은 사회적 존재감을 느끼지 못해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먼 길을 함께 오래 가려면 줄여야 하는 구실口實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