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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초천의 추억
배우리(1960년대)
1960년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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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는 분명히 팔자가 있다. 이 땅에도 저 땅에도 분명히 팔자가 있다. 그리고 땅은 자기의 팔자를 그 형상 이나 땅이름을 통해서 좋은 땅 나쁜 땅을 알아내는 지혜를 길러 왔다.
그리고, 또 땅은 그 옛날 사람들로부터 받은 어떤 기운을 다시 발하는 신비한 재주도 지녔다.
그 한 예로 서울 용산의 용산 전자 상가를 들 수가 있다.
용산 전자 상가의 정확한 행정상의 위치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일부이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의 남영역과 용산역 사이 철길 북서편에 있는 이 전자 상가 일대는 지금은 갖가지 전자 제품들을 판매하는 번화한 거리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한낱 냇줄기 한가닥이 지나가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이 곳을 지나는 내의 이름은 '욱천(旭川)'으로 바뀌어 있지만 옛날에는 덩굴풀이 많았던지 '덩굴풀내'의 뜻을 지닌 '만초천(蔓草川)'이었다. 이 내는 '무악천(毋岳川)' 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이 내가 '무악'에서 발원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무악은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쪽으로 넘는 고개인 무악재 바로 왼쪽(서쪽)에 있는 산으로 '무악재'란 이름도 원래 이 산이름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 곳에서 시작되는 이 내는 현저동과 서대문, 서소문 일대를 거쳐 용산구의 청파동을 지나 지금의 용산 전자상가 있는 곳을 거쳐 원효대교의 북단 근처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 일제 때 이름으로 바뀌어
'욱천' 이란 이름은 일정 때 일인들이 지은 이름으로 그들의 음으로는 '아사이카와' 라고 했다. 일인들은 일제 때에 자기 나라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지금의 원효로(당시 이름은 '원정') 일대의 땅이름들을 모두 자기들 식으로 지어 사용했는데, 이 곳을 지나는 내의 이름도 우리의 옛이름인 '만초천'에서 '욱천'이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욱천' 이란 이름은 일본 땅에도 여러 곳 있다.
이 내는 복개되어 지금은 지도에서조차 나타나 있지 않고 서울에 웬만큼 오래 산 사람들조차 이젠 이 내를 잘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복개된 땅 밑으로 흘러 이젠 그 물 모습도 볼 수 없고, 그 물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이 냇줄기 양옆으로 있던 옛날의 논밭들은 기차길이나 한강로, 청파로, 동호로 등의 길, 주택가로 변하고 전자상가로까지 되어 지금은 우리 기억에서 아주 멀어져 버렸다. 동호로 중 원효로 부근의 용산 전자상가도 이 내를 덮어 씌어 만든 터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가 않다.
□ 옛날 서부 서울의 좋은 젖줄
이제 우리 곁에서 아득히 멀어져 버린 내이지만, 욱천은 옛날에는 청ㅖ천과 함께 서울 사람들의 좋은 젖줄이었다. 즉, 청계천이 성 안 사람들의 젖줄이었다면 욱천은 서울 성 밖 사람들의 둘도 없는 훌륭한 젖줄이었다. 이 물로 논물을 댔고 이 물에서 빨래를 했으며 이 물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내에서 옛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할 것은 밤에 뻘에다 불을 켜 놓고 게를 잡았던 일이었을 것이다. 이 내에서 게잡이 불빛은 용산팔경(龍山八景)의 하나로도 꼽혀왔다.
고려 말의 학자인 목은 이색은 용산을 지나다가 그 산마루에 올라 강과 산이 잘 조화된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시를 엮고 용산팔경을 꼽았다.
청계조운(淸溪朝雲): 청계산의 아친 구름.
관악만하(冠岳晩霞): 관악산의 저녁 안개.
만천해화(蔓川蟹火): 만천의 게잡이 불빛.
동작귀범(銅雀歸帆): 동작나루의 드는 돛배.
율도낙조(栗島落照): 율도(밤섬)의 지는 해.
흑석귀승(黑石貴僧): 흑석동의 돌아오는 중.
노량행인(露梁行人): 노량(노들길)의 길손.
사촌모경(沙村暮景): 사촌(새남터)의 저녁경치.
이것이 용산팔경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땅이름이 나오는데, 현재의 땅이름과 일치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만천은 지금의 욱천이고, 율도는 지금은 없어져 버린 마포대교 옆의 밤섬이며, 사촌은 지금의 서부이촌동에 있었던 옛마을인 새남터이다.
'용산'이란 이름은 원래 산이름이었다. 지금 용산구 산천아파트와 마포구 도화동 우선아파트 사이에 있는 산이 그 산이다. 이 곳(용산)에서 바라본 8가지 좋은 경치 중에 7가지는 낮에 보이는 경치이고, 나머지 1가지인 '만천의 게잡이 불빛'은 밤에 보이는 경치이다.
게는 불빛을 보면 그것을 기엄나오는 버릇이 있어서 예부터 게잡이꾼들은 밤에 불빛을 이용해 게를 잡았다. 게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냇가 여기저기에 켜 놓은 불빛들이 용산 산마루에서 보았을 때 무척 볼 만했던 모양이다.
□ 이도령도 지나갔던 만천 냇가길
서울 서부 지역의 너른 들을 촉촉이 적셔 주었던 이 젖줄을 따라 옛날에도 제법 큰길이 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옛 지도를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문헌들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가 있다.
<춘향전>에도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서울에서 남원까지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울 남대문을 나와 우선 이 만천(욱천)을 따라 한강까지 간 것으로 돼 있다.
그 부분을 한번 보자.
'청파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
즉, 청파역(지금의 청파동에 있었던 옛 역)에 말을 부탁해서 준비해 타고, 숭례문(남대문)을 나와서 칠패팔패(지금의 염천교 칠패길 부근)를 거쳐 이문동(서울역 근처에 있던 마을)으로 해서 청파 배다리를 지난다. 그리고는 돌모루(지금 남영역 근처에 있었던 옛마을)를 지나 밥전거리('밥을 파는 음식점 거리'의 뜻: 지금의 삼각지 근처?)로 해서 동자기나루(지금의 동작대교)쪽으로 간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길이 만천 옆으로 난 옛 도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청파로와 용호로 일부 그대로가 된다.
만천은 인왕산에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긴 내여서 다리도 꽤 많았다. 서대문 바로 바깥쪽(서쪽) 에는 경교(옛날 경기 감영 창고 앞쪽이어서 이 이름이 붙음)라는 다리가 있었고 지금도 이름으로 남아 있는 서울역 뒤편의 염천교(옛이름은 염초교)라는 다리도 있었다. 그 하류쪽 지금의 청파동에 처음에 배를 띄어 다리를 놓았던 '배다리'라 했고, 이 곳에 큰 길(지금의 '청파로')도 예부터 '주교대교(舟橋大橋)'라 했다.
이 내는 지금의 남영역 근처에 와서는 다른 큰 물줄기를 합해 물의 양을 크게 불린다. 남산 서쪽 골짜기에서부터 시작해 후암동, 남영동 일대를 적시고 나온 한 냇줄기가 여기서 합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초천은 크게 말하면 인왕산과 물과 남산의 물이 다정히 합쳐져 흐르는 내라고 할 수가 있다.
□ 게잡이불빛 터에 전자상가 불빛 휘황
옛날의 만초천, 즉 지금의 욱천 하류는 밤이면 서울 그 어느 곳 보다도 불빛이 요란하다. 가히 국제적 규모라 할 수 있는 용산 전자 상가. 이 곳의 많은 가게들에서 내쏟는 불빛들이 밤이면 서로 다투기라도 하듯 빛의 잔치를 벌인다.
이 곳에 내를 복개한 이유는 원래 전자상가를 유치할 목적은 아니었었다. 큰 농산물시장을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이 시장이 여러 해 동안 운영해 가는 과정에서 도심의 교통난을 가증시킨다는 여론에 따라 송파구 가락동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대신 세운상가에 있던 전자상가를 옮겨 왔던 것이다.
상점들마다 휘황찬란하게 번득이는 조명 불빛, 야광 간판, 네온사인, ……거기에다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요란한 노래소리까지 끼어들어 서울의 '불빛거리'임을 마음껏 뽐낸다.
그 옛날 만초천의 게잡이 불빛이 이젠 전기의 불빛으로 되살아난 것일까? 옛날 갯벌이던 터에 가득 들어선 전기, 전자 관련의 각종 상점들은 게잡이 불빛으로 게를 끌어 모은 그 옛날을 흉내내듯 화려한 불빛을 쏟아내며 손님들의 눈을 홀려 놓고 있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우리가 붙인 땅이름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빛날욱(旭)'자가 들어간 '욱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뜻대로 '빛나는 내'가 되질 않았는가. 밤마다 내 위에서 빛의 향연이 벌어지니 말이다.
땅은 가끔 이처럼 옛날을 되살리고 그 이름처럼 돼 가는 묘한 속성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는 '땅이름에도 팔자'가 있다라는 말을 더러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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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426 서울00 땅기 25매 땅기 토요신문04 역사 속의 명소 순례 `용산
930900 서울00 기고 (12매) 땅기 주택저널01 그 시절 그 땅 얘기 `용산 `만초천
970900 서울00 기고 20매 땅기 토지공사 사보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09 `용산과 용산팔경
990522 서울00 방송 0935(12분) 땅방 교통방송 서울로미래로(임국희)26 `용산 ``용산팔경 `구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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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용산과 용산팔경
-경치가 뛰어나 시인들의 모임도 열려-
땅이름 중에는 '용(龍)'자를 달고 있는 것이 무척 많다. '용산(龍山)', '용문산(龍門山)', '용인(龍仁)', '구룡(九龍)' 등이 그것이다.
'용'의 옛말은 '미르' 또는 '미리'이다. 그러나, 그 모양이나 유래 등에선 용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상하리만치 '미르'라는 말을 그대로 쓴 땅이름이 별로 없다.
서울의 '용산'도 분명히 '용'과 관련 있어 붙여진 이름인 듯한데, 그 이름 그대로 '용산'으로만 불러 왔던지 이 이름은 문헌 등으로 잘 전해져 오면서도 이 이름의 바탕이 되었을 법한 '미르메'나 '미리뫼' 같은 이름으로 불러 왔다는 마땅한 근거가 없다.
□ 용산이란 이름
'용산'은 지금은 하나의 서울의 구(區)이름으로 자리잡아 광역지명으로 정착돼 있지만, 옛날에는 '절두산', '남산', '계룡산' 등과 같은 하나의 산(山) 이름이었다.
조선의 이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데는 이 곳이 위치, 지리, 교통, 방어 등 여러 면에서 그입지적 조건이 그 어느 곳보다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풍수적인 면을 매우 좋게 보았다.
뒤로 북악(北岳)과 삼각산(三角山)이 든든히 울타리를 쳐 주고 있고, 주산(主山)인 북악에서 ㅃ벋어나온 맥이 양쪽으로 감싸고 흘러나온 데다가 앞에는 안산(案山) 구실을 해주는 남산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는 땅. 어느 누가 보아도 길지(吉地) 중의 길지임에 틀림이 없는 곳이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은 이금은 대개 북악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흘러나온 ㅅ쪽의 맥이 우백호(右白虎)이고, 동족의 맥이 좌청룡(左靑龍)이다. 좌처룡은 동쪽의 성북동 방면으로 해서 낙산(駱山)(지금의 이화대학병원이 있는 곳)까지 그리 길게 뻗지 못했으나, 우백호는 마포쪽의 한강까지 매우 길게 뻗어 있다.
북악산 옆 인왕산의 산세를 무악재를 통해 이어받은 길마재[鞍山=안산]는 그 줄기를 계속 남쪽으로 뻗쳐 '둥그재'[圓峴=원현: 지금의 충정로2가 경기대학 근처], '애오개'[阿峴=아현], '큰고개[大峴=대현, 만리재] 등을 만들어 놓고, 한강 앞으로 다가와 용머리 모양의 등성이를 솟군 후, 강물 앞에서 그 기(氣)를 죽인다. 이 맥이 바로 한양 고을의 우백호가 된다. 이 우백호의 끝 부분이 꼭 용의 머리를 닮았는데, 마포강 앞에서 물을 만나 그것을 마시려고 푹 숙인 모습이다. 지금의 '용산(龍山)'이란 이름이 용이 물을 마시는 모습의 산이라 해서 붙은 것이다.
□ 용산 팔경(龍山八景)
용산은 그 앞으로 한강이 휘어돌아 경치가 무척 좋았다. 시인 묵객들의 좋은 놀이터였다는 이 곳엔 고려 시대에도 정자가 있었다고 문헌에 나와 있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이 곳의 정자에 묵으면서 지은 시 한 편을 보자.
두 물줄기 질펀히 흘러
갈라진 제비 꼬리 같고,
세 봉우리 산 아득히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만약에 다른 날
비둘기 단장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이 시에 붙인 서문이 있는데, 이를 보아도 당시의 이 곳 용산의 운치르 짐작할 수 있다.
'산봉우리들이 구비구비 서려서 그 형상이 이무기 같은데, 서재가 바로 그 이마턱에 있다.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되고, 강 건너로 먼 산이 있어 바라보노라면 묏산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용산을 지나다가 그 경치에 취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 감이 아쉽구나.…
절벽 아래로 푸른 강물이 흐르고, 그 건너로 '너벌섬'[仍火島=잉화도: 지금의 여의도]과 '밤섬'[栗島=율도]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관악산, 청계산 등이 보이는 산마루. 이 용산 마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옛날부터 한양 일대에서 잘 알려져 왔다.
□ 용의 옛말은 '미르'
용산은 이처럼 한강가에 솟은 하나의 산이름이었는데, 지금에 와선 '용산'하면 하나의 지역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도 용산이라고 불렸던 산 근처도 아니고 거리상으로 크게 떨어진, 용산역 앞 한강로 일대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한강로 일대를 정비하고 자기들의 주거지로 삼고, 근처에 기차 정거장과 다리(한강대교)를 만들어 놓고, '새 용산'이란 뜻의 신용산(新龍山)이라 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
정확히 말하면 '용산'은 지금의 원효로4가와 마포로 사이에 솟은 둥그스럼한 산봉우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택들과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산(山)'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용산이란 땅이름은 대개 그 산모양이 용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이러한 지명은 전국에 무수히 있다.
용의 옛말은 '미르'이다. 그러나, 용과 관련이 있는 산이라 해도 이 '미르'가 들어간 순 우리말 이름의 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 망가져 버린 용산
'용산'이란 산은 지금의 용산성당이 있는 곳을 말한다.
이 산은 지금은 아파트와 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낮아지고 건물들의 숲에 묻혀 어느 방향에서나 잘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한강가로 불쑥 나가 있는 이 산의 모습을 근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옛 한양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산이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 옆 인왕산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줄기를 이어 연화봉, 효창원, 용마루를 거쳐 한강쪽으로 뻗어 온 산줄기는 한양 고을의 우백호(右白虎)이다. 한강가까지 물을 먹으러 달려온 듯이 보이는 이 줄기가 용의 모습을 닮아 그 끝쪽 봉우리가 '용산(龍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즉, 휘어 도는 강가로 머리를 불쑥 내밀어 마치 용이 물을 찾아 나왔다가 풍족한 물을 만나 입 부분을 물에 푹 잠근 모습이라고 '용산'이라 하게 된 것이다.
<동국여지비고>(권2) 산천조(山川條)에도 그 사실을 적어 두었다.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이 사쪽으로 뻗어나가 추모현(追慕峴.무악재)이 되고, 다시 한 산줄기가 남쪽으로 약현(藥峴)과 만리현(萬里峴)이 되어 용산(龍山)에 이른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양화나루(양화진.楊花津) 동쪽의 이 언덕을 '용두봉(龍頭峯)'이라 하였다. 이로 보아 이 곳의 모습이 용머리처럼 보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 증보문헌비고>에는 백제 기루왕 29년에 한강에 두 용이 났다고 하면서 '용산'이란 이름이 땅모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적어 놓고도 있다.
□ 어느 누구고 시인이 돼
물 가운데로 머리를 쑥 내민 그 산마루에서 바라다보는 물가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으랴. 예부터 여기서 바라다보는 경치 중 여덟 가지를 꼽아 '용산 팔경(龍山八景)'이라 했다.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의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의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경치
여기서, 만천(蔓川)은 일제 때 '욱천(旭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왔던 '덩굴내'(지금의 용산 전자상가길 밑으로 지나는 내)를 말하고, '사촌(沙村)'은 '새남터'(지금의 서부 이촌동)를 말한다.
경치가 아름다웠던 용산 일대는 예부터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순간의 시인이 되게 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이 곳을 지나다가 결국 여기서 노래를 흘리고 만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 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 감이 아쉽구나.'
조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용산하일시(龍山夏日詩)〉라는 노래에서도 그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냈다.
'……새남터 푸른 수림에 돛단배 다 지났구나.
동작나루에 해는 저물고,
……노들 서쪽 언덕엔 풀빛이 그윽한데,
……밤섬 너머의 잔잔한 물결이 버들 그늘에 찰랑인다.
조선시대엔 이 용산 산허리(청암동)에 독서당(讀書堂)을 두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했다.
□ 고려 충숙왕도 찾아와 경치 즐겨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용산은 옛날 고려 때에도 주목해 왔던 곳이다.
강물이 비탈 아래로 잔잔히 휘어 돌고, 그 가운데에 너벌섬(여의도)과 밤섬이 떠 있으며, 물 건너 남쪽 멀리로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솟아 있어 한 폭의 그림 그대로였다.
고려 숙종 때(1096∼1105) 왕명을 받아 남경(南京)의 새 도읍터를 찾아나섰던 대신 최사추(崔思諏) 등이 서울 부근의 산수 지리를 답사할 때 맨먼저 찾았던 곳도 여기였다.
이러한 용산의 아름다움은 고려 왕실에서도 알려져 고려 25대 충숙왕은 그 12년(1325) 8월에 왕비 조국공주(曹國公主)와 함께 개경에서 한양으로 행차, 푸른 강물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곳 용산의 산마루에 올라 작은 전막(氈幕)을 지어 행궁(行宮)으로 삼고, 3개월간 정무를 살피기도 했다.
여기서 충숙왕에게는 아주 좋은 일이 생긴다.
그 해 10월에 원자(元子) 아기를 낳는 경사를 맞는 것이다. 한양에 행차한 지 불과 두 달, 행궁을 이 곳에 정한 지 스무 날만에 얻은 큰 축복이고 경사였다. 그래서, 이 아기를 '용산'이란 땅이름을 넣어 '용산원자(龍山元子)'라 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아기를 낳은 산모인 왕비가 산후 조리가 좋지 않아서였던지, 그 해 10월 20일에 저 세상으로 가고 만다. 이 때의 왕비의 나이는 불과 18세. 이 갑작스러운 일은 왕자를 낳은 기쁨 속에 차 있던 충숙왕을 일시에 슬픔으로 몰아 넣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충숙왕과 공주는 10리나 되는 긴 호수를 이루고 있던 이 곳 용산강에서 만발한 연꽃도 구경했다고 한다. 이러한 좋은 곳에 행궁을 마련했으나, 왕자를 얻고 왕비를 잃는 희비를 맛본 충숙왕은 더 머물고 싶지 않았던지 이 아름다운 용산, 그러나, 왕비를 잃은 슬픔을 안겨 준 한 많은 이 용산을 떠나 11월 4일에 다시 개경으로 훌쩍 돌아가고 만다.
그 달 9일, 왕비의 시신도 운구되었다. 왕비는 원나라 순제(順帝)의 손녀로서, 충숙왕 11년(1324)에 왕이 원나라에 가 있을 때 결혼한 여자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 속국이나 거의 다름없는 상황이어서 고려의 왕은 원나라 왕녀와 결혼해야 하는 사정에 처해 있었다.
공주의 죽음은 낭설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용산으로 왕을 오게 한 것은 조륜과 왕삼석 등이었는데, 이들이 왕을 유인해서 왕을 용산 한강가 습한 곳에 머물게 하곤, 공주로 하여금 알맞지 않은 환경 속에 아이를 해산케 해서 병에 걸려도 구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외진 용산의 작은 전막에서 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니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수 있겠으리라.
용산원자는 그나마 그 뒤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17세의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 미녀 시인들의 시 모임이 열리기도
고려 말에서 조선 말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많은 문인들과 명사들은 용산 산비탈에 별장과 정자를 마련하고, 자주 올라와 풍류를 즐기며 시를 쓰기도 하며, 좋은 놀이터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덕망 있는 대신인 남공철(南公轍)은 벼슬에서 물러나기 전에 이 곳 강 언덕에 집터를 마련하고, 미리 귀거휴양(歸去休養)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임금이 퇴직을 허락하지 않아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로 옮겼다.
'용산의 술집 장막을 꿈에도 잊을 수 없어
강가에 돌아와 살고자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임금의 은택 지극하여 직책을 더디 풀어 주시니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꽃을 심었나 물어 본다.
호수 밖의 푸른 산이 저 멀리 보이는데,
책부터 먼저 실어 촌가로 내어 보낸다.
이 해 다시 저물고, 흰 머리털만 늘어 가니,
뜰 앞의 매화나무가 혼자서 또 꽃을 피우겠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임금도 이해했는지 얼마 후 그를 영의정 자리에서 '봉조하(奉朝賀)'라는, 조금은 가벼운 직책으로 옮겨 준다. 그 후로 남정승은 용산의 정자로 나가 휴양할 수 있었고, 자주 이 곳을 찾아와 주는 원로 대신들과 함께 심원정(心遠亭)에 올라 아름다운 용산 풍경을 즐겼다.
용산강 언덕에선 김금원, 김운초 등 미녀 시인들의 삼호정(三湖亭) 시회(詩會)가 벌어지기도 했다. 원주 출신의 여인 김금원은 타고난 재질로 불과 14세에 국내 명승지들을 찾은 많은 명시를 지었다. 한양에 들어와서는 풍류 문인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김덕희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경 좋은 용산 언덕에 '삼호정(三湖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실인 금원과 함께 나와 거처하면서 경치를 즐기며 함께 시를 읊었다. 여기에 다시 금원의 친구인 여류 시인 김운초, 김경선, 박죽서, 김경춘 등이 자주 금원을 찾아 삼호정에 올라가서 강변 풍경을 명시로 옮겼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미녀들의 시 모임. 용산의 멋진 그림은 그들이 만들어 냈다.
'……강 언의 봄 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강 위의 푸른 물결 노란 석양을 흘려 낸다. ……'
'서호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최고라오.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즐긴다오.'
금원의 이 삼호정 시들을 보면, 용산강의 옛 정취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용산 기슭에는 심원정과 삼원정 외에 파청루와 추흥정도 있었는데, 심원정은 임진왜란 때 화전 조약을 맺은 곳으로 유명한데, 지금 용산문화원이 들어선 이 곳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송(白松)이 몇 그루 남아 운취를 더해 주고 있다.
□ 옛날엔 마포의 염리동까지가 용산 영역
지금은 '용산'이라 하면 대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로 알고 있지만, 옛날에는 지금의 마포구 염리동까지가 용산 영역에 속했다.
용산은 고려 말 이전에는 과주(果州)에 딸렸었다. '과주'는 지금의 '과천'에 해당한다. 이 용산 지역은 고려 22대 충렬왕 12년에 '부원군(富原郡)'이 되고, 조선 초에는 한성부 성저(城底) 10리의 구역이 되었다가 중기 이후에는 한성부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으로 되었다.
'용산'이란 이름은 그 후에도 계속 써 왔으나, 일제 때에 와서는 '면(面)'으로 되면서 서울 영역에 들었다 빠졌다 하는 등 기복을 겪었다.
일제 강점 직후인 1911년에 경성부(서울) '용산면(龍山面)'이으로 하였던 것을 그 3년 후에 이를 고양군으로 돌렸고, 1936년에 경성부 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로 다시 편입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2월 13일 경성부 출장소를 설치하고, 1943년에 경성부 용산 출장소로 개칭하였으며, 같은 해 6월 10일에는 용산구역소(龍山區役所)로 또 개칭함으로써 처음으로 '구(區)'자가 붙은 이름을 달게 되었다.
광복 후에 정식으로 '용산구'가 되긴 하였으나, '용산'이란 산의 북쪽 일대를 마포구로 넘겨 주면서 영역이 많이 바뀌게 됐다. 한때 용산면 관할이었던 도화동과 마포동, 공덕동, 염리동, 토정동까지를 마포구로 넘겨 주면서 용산은 지금과 같은 지역을 갖게 된 것이다.
□ 수운의 중심지로도 각광 받아
용산 일대는 이 태조의 한양 도읍 때부터 수도의 중요한 교통 중심지가 되어 왔다.
용산의 산기슭 한강물이 휘어 도는 곳, 지금의 마포대교 일대의 강 주위를 '용산강(龍山江)' 또는 '용호(龍湖)'라고 했는데, 왕조 초에 이 강에 수로운전소가 설치되고, 수참전운사(水站轉運使)라는 벼슬을 두어 수로 운송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 강원, 충청, 경기의 4도의 조세곡 수운선들이 모이는 등 수운의 중심지로 변해 갔다. 수군을 주둔시키고, 군자감(軍資監)을 설치해서 물자의 저장, 출납을 맡아 보게도 했다.
산 아래 한강물이 휘어 도는 지금의 산천동 강가에는 '벼랑창'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 땅이름은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의 급료를 지급했던 창고인 별영창(別營倉)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용산 일대가 군대 주둔지였음은 그 유적지들로 나타난다.
지금의 원효로3가 원효전화국 옆은 군자감에 딸린 강감(江監)터로, 옛날에 많은 군수 저장미를 쌓아 두었던 곳이다. 그리고, 원효로4가 성심여고 뒤쪽 언덕 일대는 선혜청(宣惠廳) 관하 구휼(救恤) 양곡을 저장하는 별고(別庫)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 별고를 '선창(宣倉)'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이 곳 '신창동(新倉洞)'이란 동이름은 이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사(備邊司) 군인들이 이용하던 우물인 '비변사우물'(다른 이름으로는 '응달우물')이 근처에 있는데, 지금은 뚜껑을 덮어 그 사용을 막고 있다.
'용산'은 이제 단순히 산(山)이 아닌 광역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지형이 용(龍)을 닮았대서 나온 이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역사와 함께 많은 것을 간직해 온 용산.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경치로 널리 알려졌던 용산. 이렇던 용산도 변화의 물결에 밀려 차츰 그 모습이 하나하나 허물어져 갔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용산 산머리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아름다운 풍경들의 사라짐이다. 용산팔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에 오르면 주위의 모든 자연 모습이 그림 그 자체였다.
휘어 도는 한강 물줄기, 거기에 떠 있는 밤섬과 여의도, 북쪽으로 보이는 인왕산과 안산, 그 뒤를 든든히 받쳐 주고 있는 북한산의 웅장한 자태, 남쪽으로 보이는 새남터, 그 뒤로 멀리 보이는 관악산과 청계산, …….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용산의 제일 명소였다고 할 수 있는 독서당은 딴 곳으로 옮겨갔고, 그 터엔 조선 말 세관감시소(稅關監視所)가 세워졌다가 그 후엔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으로, 일제 때엔 총독부의 정무총감(政務總監) 별장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다. 자유당 시절에는 그 근처에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섰다가 없어졌다.
한강에는 밤섬이 없어져 버렸고, 여의도마저 마포 쪽에서 떨어져 나가 영등포 쪽으로 붙어 버린 데다 아파트나 고층 빌딩들이 묵직하게 얹혀 있어 그 옛날의 모습을 전혀 상상치 못하게 한다. 그나마, 강가로는 강변 도로가 강을 막아 물가의 경치들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산의 남북으로 아파트나 다른 건물들이 들어차서 이젠 용산 산마루에서 볼 수 있었던 그 멋진 경치들을 거의 모두 잃고 말았다.
산 아래 산천동 저지대까지 물이 들어 호수와 같았던 좋은 풍경도 한강 연안에 둑이 생기고, 그 안쪽으로 집들이 들어서면서 볼 수 없게 되었고, 정자나 별장들이 있었던 무성한 나무숲의 산비탈까지에도 작은 살림집들이 닥지닥지 들어서 용산의 본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더구나, 지금은 산 양쪽으로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차면서 산허리가 뭉개져 버리고, 건물 숲에 가려져 이젠 마포나 원효로 등 어느 방향에서나 용산의 산머리조차 보이질 않는다. 산등성이에 있는 유서 깊은 용산성당의 종탑(鐘塔)도 산 아래 어느 쪽에서도 잘 보여 전에는 한 폭의 그림이었는데, 이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아파트 숲에 묻혀 그 모습을 멀리서는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용머리를 물에 담근 채 계속 쉬고만 있던 그 말없는 용. 그러나, 철저하게 등을 할퀴어 버린 용. 이젠 그 아픈 상처를 못 참겠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화풀이라도 할 것 같아 조금은 겁도 난다. ///
940811 서울00 방송 2025(30분) 옛방 평화방송 서울 야화 `용산 `새남터 `둔지산
용산
용산(龍山)은 한강의 용산강 유역의 땅을 말한다.
'용산'이란 이름은 아주 오래 전의 문헌에도 나온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백제 기루왕 21년, 한강에서 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용산'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고, 용산의 산세가 인왕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려간 모양이 흡사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용산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 때의 기록에도 있다. 본래 용산 일대는 작은 구릉이 연결돼 있고, 굽이진 큰 강을 끼고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고 한다. 고려 25대 왕인 충숙왕은 원나라에 있을 때, 순종의 아들인 위왕의 딸, 조국장 공주를 아내로 삼고, 다음해 귀국하여 공주와 함께 한양으로 와서 용산 근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행궁을 짓고 즐겼다고 한다. 여기서 공주가 원자를 낳았는데, 이름을 '용산원자(龍山元子)'라고 했다는 것이다.
용산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바다'란 인천 앞바다의 바다가 아니라 한강의 넓은 곳을 말한다. 고려 때에는 이 용산의 땅이 과천에 속했었는데, 이 곳에서 용산원자를 얻게 되자, '기름진 땅'이란 뜻으로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시켰다.
용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조 3년에는 고봉현(高峰縣), 고양군(지금의 고양시)에 속하기도 했다.
용산강과 마포강 일대는 한강 하류 가운데서 가장 넓은 곳이며, 옛날의 한강의 주류는 지금의 여의도 샛강을 지나 흘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바다로부터 거대한 바닷고기가 용산강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돌고래가 아닌가 싶다.
1922년에는 김홍운이란 사람이 고래 새끼로 보이는, 길이가 6척이나 되는 것을 잡아다가 지금의 명동 공터에 갖다 놓고 구경을 시킨 일이 있는데, 그 때 용산의 어상조합은 노량진 인도교 근처에 고래총을 세워 준 일이 있다고 한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다음과 같은 '용산 팔경(龍山八景)'이 있었다.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진의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에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사촌의 저녁경치
용산8경의 '사촌(沙村)'에서 '모래사(沙)'자를 쓰지만, 사촌은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서 한강 인도교에 이르는 벌판을 말한다. 지금의 '서부이촌동' 일대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용산의 노른자위가 됐지만, 옛날에는 온통 모래사장으로, 1900년 전후까지만 해도 지금의 이촌동 한강맨숀이 들어선 자리만 해도 그저 허허벌판이었고, 5 60채의 오두막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 근처에 새남터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삼각지 로터리로부터 동쪽으로 나지막하게 구릉을 이룬 야산이 있는데, 이 야산의 이름을 '둔산(屯山)' 또는 '둔지산(屯之山)'이라 했다. '둔(屯)'이란 군대의 주둔지를 말한다. 미8군이 주둔해 있고, 그 일대가 지금은 용산 가족공원이 조성돼 서울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지만, 그 야산의 완만한 구릉이 미군의 골프장이 되기도 했다. 미8군의 용지와 함께 지금 국방부가 이전하기 전의 육군본부가 자리 잡았던 둔지산 일대에는 예전에는 한강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 원래 '둔지미', '둔지산', '둔산' 등의 이름을 가진 산들은 대개 다른 산과 한 무리를 이루고 있지 않고 벌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인데, 묘하게도 이 곳에는 군대가 주둔하여 '둔산'이란 이름이 꼭 군대 주둔 관계로 나온 이름으로 알게끔 되었다.
이 둔지산에는 장병들의 무운(武運)을 비는 신앙의 대상인 '무후묘'하는 사당이 있었는데, 이 묘당에는 중국의 무신인 관우와 우리 나라의 무신인 김유신 장군이 함께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러일전쟁 때 이 일대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그들의 신사(神社)를 모시기 위해서 이 '무후묘'를 보광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이 김유신과 관우를 모신 무후묘는 보광동에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의 여단 사령부가 이 곳 용산 둔지산 일대에 주둔지를 정하게 되면서 이 곳을 '신용산(新龍山)'이라 했는데, 그 때부터 일본군은 해방 전까지 이 일대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 중추인 조선군 사령부를 이 곳에 두었다. 그 후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그대로 미8군 사령부와 우리 나라 육군본부가 들어서고, 6 25사변이 일어나자 유엔군 사령부가 들어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둔지산을 '왜둔산(倭屯山)'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일본군이 주둔해 있는 산이란 뜻이다. 그 남쪽에 왜군의 병영이 있었다고 해서 '남영동(南營洞)'이란 동네 이름까지 생겨났다.
신용산 일대에는 조선시대에는 한강가 요지여서 군자감(軍資監)을 비롯한 여러 관청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신용산(둔지산) 일대는 주거지라기보다 한강진의 수군을 배경으로 하여 도성(都城)을 지키는 군사적 요지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주력 부대가 이 곳을 점령하고 주둔을 했었다. 또 임진왜란뿐 아니라 구한말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군란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온 청나라 부대 역시 이 둔지산에 주둔하기도 했다.
지금의 이촌동과 용산동 일대는 일제 시대 이전에는 경기도 고양군 둔지면(屯之面)이었는데, 일제 때 한남동쪽의 한강면(漢江面)과 합하여 그 두 면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한지면(漢之面)'이라 하였다. 한지면은 이 이촌동에서부터 보광동, 한남동을 거쳐 멀리 잠실까지 이르는, 한강가 일대를 모두 포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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