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잘 들어봤는데 크리스마스 타이드라는 말도 들어보셨나요? 크리스마스 하면 12월 25일 말하고 크리스마스 타이라고 하면 그날을 지나서 8일 혹은 12일까지 이어지는 이 성탄절의 계절을 말합니다. 우리가 25일을 지나고 지금 성탄절에 계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찬양이 성탄절하고 관련된 것도 적절한 것입니다.
지난 20 5일 지난 수요일 수요일에 우리가 성탄절 예배 그리고 그와 관련된 축하 공연 발표도 있었고 교재를 가졌지요. 저에게는 참으로 귀하고 감동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만들어진 영상을 다시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고 그리고 앞으로 두고 우리가 이 성탄절의 기쁨을 잃지 않는 그것을 계속 유지하고 우리 안에 교회 안에 또 각 가정 안에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는 사람은 기억하고 알아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성탄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기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기뻐한다고 해서 또 즐거워한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탄절에 그리스도와 성탄절에 기쁨을 두 개를 연결을 해서 우리 세 종류의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 있는 크리스마스예요. 그리스도가 있는 크리스마스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고 그의 오심에 따른 기쁨도 같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일 성탄절에 가진 모든 시간이 그렇다고 믿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마스가 있어요. 크리스마스의 기쁨은 있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휴일이어서 연말이어서 일하지 않아서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기 때문에 기쁜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면 조건이 안 되면 사라지는 기쁨이죠.
셋째로 크리스마스 없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있지만 크리스마스의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성경에 성탄절을 지키라 하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또 지킨다고 해도 이 세상 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에 성탄이 주는 그 기쁨을 빼앗기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없는 그리스도 지금 시국이 어떤 상황인데 우리 가정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데 세상에 먹을 것 없어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아파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한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그렇게 도전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생명의 주께서 하시는 것인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가 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거부하자고 하는 기쁨이 즐거움이 과연 무엇인지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바로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 없는 크리스마스의 기쁨인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무관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에 반하고 자신만을 위하고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얻어야 하는 기쁨인가 그런 기쁨이라면 크리스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거부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성탄절의 기쁨, 성탄절이 주는 그 기쁨은 그런 종류가 아니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믿음에서 오는 기쁨이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에 대한 기쁨이고, 이 아기 예수가 자라서 이루실 구원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기쁨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생로병사 인생 전체를 감싸는 기쁨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상황 때문에 형편 때문에, 일 때문에 성탄절에 기뻐하지 못하느라 성탄절에 기뻐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성탄절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이 오신 그때 그때의 배경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두운 세상이었다라고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요. 누가복음 3장에 보면 1절부터 2절 사이에 예수님 당시의 세계를 지배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쭉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 디베리라고 그래요. 영어로는 티베리우스 디베리가 나오고 유다를 다스리는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 분봉왕 여러 지역을 나눠서 다스린 왕 중에 하나로 헤롯, 또 예루살렘에 있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이렇게 언급이 되지 그림은 조금 이해를 해 주세요. ai한테 그래 다 달라고 그러니까 안경을 쓰고 이렇게 그려줬어요. 안경을 뺏어 주면 다시 하니까 또 안경을 쓴 걸로 그려가지고 왜냐 할 수 없이 그려주고 사용하고 있으니까 이해를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중에 헤롯이 있어요. 물어봤더니 저쪽에 여러분이 보실 때 오른쪽에 밑에 있는 사람이 헤롯이래요. 이 헤롯이 분봉 황제 같은 로마 황제한테 권력을 받은 뒤 황제 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자입니다. 빌라도처럼 자기의 의지에 반하여서 세례 요한을 죽게 한 사람이고, 안나스와 가야바처럼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나중에 여호라고 부른 자의 아버지이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첫 번째 그 헤롯의 아들입니다.
그 첫 번째 헤롯 헤롯 가문이 있는데 제일 처음 나오는 이름 헤롯 그 헤롬이 오늘 본문에서 만난 헤롯이에요. 그는 권력도 있었고요. 재물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의 왕이 아기로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했어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온 박사들이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고 돌아간 것을 알고는 심히 분노해서 베들레과 그 지경에 있는 있는 두 살 밑에 사내 아이들을 모두 다 죽였습니다.
그와 같은 자가 다스리는 땅, 또 그와 같은 아들들이 다스리는 주역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어둠의 세상입니다. 태양이나 달이 없어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인간의 탐욕, 그에 따른 압제, 불의한 분노 그리고 강탈하는 폭력, 무죄한 피를 흘리는 살인, 거짓 비방이 지배적이어서 어두운 것이고, 또 그런 것들 아래서 나타나는 신음과 탄식, 아픔과 고통, 가난과 굶주림이 있기에 어두운 것입니다. 다른 어느 때 것과 비교해도 절대 덜하지 않은 어둠이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의 어둠이에요.
그럼에도 그때 성탄의 기쁨이 있었어요. 그리스도의 나신 곳을 가리키는 별을 본 동방 박사들을 향해서 뭐라고 하냐면 그들이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더라. 또 하늘에서는 우리가 잘 알듯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군 천사들이 내는 소리가 있었고, 아기 예수를 방문한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분명히 기쁨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기쁨은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은 있을 수가 없어요. 어떤 상황도 그런 기쁨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땅에 나심은 눈물을 흘리는 중에도 가질 수 있는 기쁨이다.
믿으십니까? 이 부분에서 우리가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정말 구원을 위해서 세상의 기쁨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면 왜 그 아기들이 죽임을 당했을 당해야 했나요?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기에 무제한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게 하셨나요?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에게 도전적으로 던질 수 있는 전문이고 믿는 자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쉽게 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을 먼저 보고 자세히 따라가 보면 얻을 수 있는 답이 있어요. 열쇠는 우리가 이 무고하게 무지하게 피를 흘리며 죽은 이 아이들 이 아이들을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결하기 전에 그들을 죽인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이 헤롯을 먼저 보는 겁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 세상의 구원자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한 것이에요. 그가 하나님의 종일 수가 없습니다. 그가 구원의 도구일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잘 기억된 말 중에 이 사람 헤롯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그 장인을 죽였고, 또 가장 페이버릿한 가장 총애하는 아들을 포함해서 3명의 아이들까지도 아들까지도 죽인 자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그러니까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형제가 그에 대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죠.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 그말 정도로 악한 사람이 헤롯이에요.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때 그곳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의 하나님이 무정하고 잔인한 신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이들을 죽게 했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세상을 덮은 어둠의 권세가 있는데, 이 어둠의 권세가 자기의 종이라고 할 수 있는 헤롯을 이용하여서 자기를 쫓아내려고 오신 이 빛을 대적한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이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무고하게 무지하게 죽임을 당했다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죽임을 당한 아이들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겁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정말로 슬퍼하고 울고 애통해야 할 일이죠.
하지만 산 자와 죽은 자, 모든 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에게는 어두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께는 그 아들이 나중에 어떻게 죽음을 당할 것을 아는 그 하나님 아버지께는 이 죽임을 당한 아이들도 특별한 아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두운 세상이지 그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시려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땅에 베들레이여 복되도다. 너는 헤롯 왕의 잔혹함으로 내 아기들이 학살당하는 고난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서 주님께 순결한 유아들을 바치기에 합당한 자가 되었도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좀 전에 말한 하늘의 관점을 가질 때만 말할 수 있는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헤롯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이에요. 누구든지 죄의 지배를 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어둠을 밝히는 빛에 저항하고 자기 자리를 위해서라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귀 같은 무지한 자라도 공격하고 치고 죽인다. 그렇게 한다면 모두 다 헤롯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헤롯이 보여준 어둠 그 어둠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 안에도 있다 하는 것이에요. 이 시간 여러분 한번 여러분 각자의 마음 속을 마음과 생각, 여러분의 말과 행동까지 포함해서 한번 잘 들여다보고 잘 살펴보세요.
그 안에 어떤 선한 것이 있습니까? 그 안에 무슨 밝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고 다윗이 한 말처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싶습니까? 바울처럼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사야가 말한 대로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외식하는 자가 내가 아닌가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세요. 뭐냐 하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어둠을 볼 수 있는 사람, 그것을 인정하고 벗어버리고 싶은 사람 하지만 잘 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성탄절에서 멀지 않습니다. 성탄절에 참 의미에서 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의 혈과 육에 참여하려 하신다. 그러니까 사람과 같이 우리와 같은 조건에 들어오시려고 한 것이고, 그래서 죽음을 통하여서 죽음 후의 세력을 잡은 자 곧 곧 마귀 디아볼라 이 마귀를 멸하려 하심이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어서 종 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고, 그리고 시험받은 자로서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줄 수 있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2월 25일 성탄절은 지났죠. 그러나 우리는 주현절까지 이어지는 이 성탄절의 계절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를 인하여서 우리의 저와 여러분의 어두운 부분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과 자신을 제대로 이전보다는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모든 어둠을 이기는 빛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기 여러분이 그 빛을 품기를 바라고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함으로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밝게 하는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했듯이 저와 여러분이 또 우리 각 사람이 또 교회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