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역성이란 무엇이며, 건축가로서 제주에서 끌리는 공간은?
제주 풍토를 잘 이해한 건축물은 무엇인가?
지역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미디어제주’의 건축 전문 기자가 제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19명의 젊은 건축가를 인터뷰했다.건축가 대부분은 1970년대생으로 제주에서 성장하여 지역에 대한 자긍심이 큰 세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20년 이상 건축 활동을 해오면서 고민했던 제주의 땅과 건축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풀어냈다.
독특한 자연만큼이나 제주는 독특한 공간과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옥도, 초가집도, ‘옴팡진(움푹한)’ 마당도,바다와 뭍의 경계면인 바당도, 올레라는 골목길이 있는 마을도 육지와는 확연히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이런 제주의 독특한 지역성은 하나의 ‘붐’으로 연결되었다. 제주 붐 중에는 부동산 붐도 있고, 건축 붐이 있고, 제주살이 붐도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제주라는 땅을 딛고 사는 사람과 제주를 자신의 터로 삼기 위해 새로 들어온 사람, 도시개발의 확장으로 달라지는 농촌의 풍경, 거대자본이 밀려오는 현장, 제주의 본모습과 상치되는 건축 행위 등 이런 현상은 제주 건축계에 지역성에 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다.‘제주다움’은 무엇인가, ‘제주의 지속가능한 가치를 어떻게 건축 속에 담아낼 것인가’에 대해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에는 디자인이 잘 된 건축을 기술적으로 소개하거나 설계 노하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제주 건축가들의 생각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현대 건축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나 제주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 제주에서 건축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새로운 영감을 던져줄 만한 내용들이다.
목차
시작하는 말 _ 젊은 건축가들이 말하는 제주도는 무얼까?
아틀리에11건축 박현모 _ 내 건축의 자양분은 바다, 산, 오름, 돌담
더현건축 현혜경 _ 바다와 육지 사이의 경계면 탐색 중
에스오디에이건축 백승헌 _ 사용설명서가 첨부된 건축을 지향한다
홍건축 홍광택 _ 패러다임 건축에서 삶의 건축으로
티에스에이건축 김태성 _ 관계, 균형, 공공성을 구축한다
소헌 양현준 _ 보여주기 위해 집을 지을 이유는 없다
에이루트건축 이창규 _ 세대와 이웃이 공유하는 ‘풍경’이 존재하는 곳
마음건축 조진희 _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의 건축
탐라지예건축 권정우 _ 물리적 확장이 아닌 가치의 개발 방식은 어떨까
건축사사무소 오 오정헌 _ 제주는 어떤 건축이든 품는 힘이 있다
청수건축 김학진 _ 조경을 먼저 구상하고 건물을 설계한다
도시건축연구소 문랩 문영하 _ 도시재생, 지역민이 주도하게 하자
영건축 강주영 _ 작품이 아니라 서비스, 내 건축의 출발점이다
선우선건축 강봉조 _ 안도 다다오 씨, 질문 있습니다!
가정건축 박경택 _ 도시 공공성 지도를 만든다
비앤케이건축 고이권 _ 건물이 들어섰을 때 얼마나 안정감을 주느냐가 중요
빌딩워크샵건축 김병수 _ 도심 개발은 ‘보행자’, ‘자연 경관 보존’을 중심으로
지맥건축 김정일 _ 땅을 보고 사람과의 관계를 본다
사이건축 정익수 _ 제주의 강인한 기원을 담은 건축을 꿈꾼다
추천사 _ 보다 천천히, 보다 조화롭게
책 속으로
제주도의 흙은 63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만큼 다르고, 그러기에 여러 작물도 분포한다.제주의 흙을 돌이라는 재료와 엮었을 때 어떤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실험을 하고 있다. 제주돌을 이용해 여러 건축가들이 시도했는데, 제주 흙은 다루는 건 보지 못했다. 제주의 돌과 흙으로 제주 땅의 가치를 만들어보고 싶다.
--- p.21
집이 서귀포시 남원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동네이다. 집 마당은 바당이었다. 경계였다. 그야말로 ‘엣지’에 해당되는 곳에 살았다. 바다와 물이 만나는 경계면, 밀물 때 물이 들어왔다가 썰물 때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는 곳, 그 영역도 땅이다. 그 경계를 땅으로 읽고 들여다보며 건축가로서 보다 나은 대안을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37
제주도 집은 재밌다. 집은 도로보다 낮았고, 마당도 평평한 곳은 없으며 동산이 있었다. 어릴 때는 무척 재밌는 공간이었다. 동산에 오르면서 초가지붕이 다 보였다. 그래서인지 입체공간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단차를 살려서 집을 지으려고 한다.(2019년 제주 건축문화대상 본상 수상작인 ‘송당리 오름을 품은 집’도 집 내부에 단차를 살려서 만든 집이다.)
--- p.49
내 집을 직접 지어본 경험으로 공사 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은 내부공간 디자인은 건축주가 시공자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물론 핑계는 있다. 건축주의 사정상 인테리어 설계비까지 지급하는 경우가 많이 않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설계한 공간의 디자인을 포기하는 것은 건축가로서의 자격이 없다. 사무실 상황에 맞는 각자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 p.79
에이루트 건축사무소엔 그들이 만든 제주 원도심 지도가 있다. 로드뷰가 찍히는 21세기에 마을 지도가 필요한가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위성지도와는 다르다. 위성지도는 현황만 보여주지만 이 지도에는 해석이 들어간다. 건축적 해석이다. 구도심을 보면 안팎거리 집이 있고, 일제 가옥도 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의 근대문화자산도 있다. 이런 것을 계속 살리면서 역사가 누적된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 p.102
제주도는 흔히 “사이트가 깡패”라는 말을 많이 한다. 뭘 지어도 주변환경과 어우러지고 과하지 않다면, 제주는 어떤 건축이든 품어내는 힘이 있다. 서울 청담동의 건물을 제주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세련된 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축을 할 때는 건물은 여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주도는 건물 자체가 여백이 되는 곳이다. 서울은 건물이 여백이 되어주지 않는다. 꽉 막혀 있다.
--- p.139
청수리는 곶자왈로 유명한 곳이고, 자연을 보존하려면 직접적인 개발 위주의 설계보다는 자연을 중점적으로 고민하는 설계를 해야 한다고 본다. 큰 땅이 있으면 조금씩 하는 건 어떨까. 자연을 놔두고 조금씩 개발하면서 연결하는 방식들 시도해봤으면 한다. 지금처럼 도시화를 만드는 방법과 순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 p.150
아무래도 제주도 초가집은 음예(陰?)공간과 더 어울린다. 기존 한옥에서는 느끼지 못한다. 초가는 겹집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은 어슴푸레한 빛이 있었다. 정지의 덧문을 통해 살짝 나오는 아주 가느다란 빙, 빛은 어둠에 있을 때 더 강렬하다. 한참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 순례자 성당’에서 이러한 빛을 보았는데, 제주 초가집에 스며드는 빛과 견주고 싶은 마음이다.
--- p.253
출판사 리뷰
최대 건축에서 최소 건축으로
자연과 풍경-공존과 배려
제주의 풍경을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안도 다다오, 이타미 준 등 거장의 건축물도 구석을 차지하겠지만 결국 다수의 건축은 지역 건축가에 의해 계획되고 그 지역의 풍경의 수준으로 연결된다고 보면 된다.이 책은 또 ‘지역성’이라는 오래된 화두를 제주의 젊은 건축가들은 현장에서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를 담은 제주 건축 담론집이다.
날씨와 풍광으로 따지면 걸어다니기에 최적의 지역이 제주라 할 수 있지만 정작 제주가 걷기 불편한 도시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도시는 건축가들의 제안을 받아 중,장기 계획을 세워야 함을 말한다.
“제주도는 도로를 잘 닦는데, 앞으로는 시대가 달라진다. 도로에 치중하는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심도 분산되지 말고, 이왕이면 압축하여 만드는 게 낫다. 집중해서 인프라를 만들고 나머지는 자연에 돌려주는 방식을 생각해본다.”(183쪽)
제주의 자연을 일개 기업이 사유화했을 때 발생하는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섭지코지가 알려지면서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서,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착한(?) 관청이 여기저기 길을 뚫어놓았다. 그것도 왕복 4차선으로, 일출봉과 섬지코지로 연결되는 관광객 차량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해결일 수는 있으나, 지역민과 공생을 위한 최선책인지는 의문이다. 조그마한 집으로 어우러진 동네인데, 강남대로 같은 큰 도로를 만들면 작은 집들과 스케일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게 우리 마을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더욱 문제라 생각한다”(197쪽)
인구 감소, 환경 보존을 위해서는 건축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문하기도 한다.
“최근 도시계획은 격자 그리드로 만드는데, 울퉁불퉁하던 지형은 사라지고 땅의 모양은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고 있다. 앞으로 그런 도시계획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제2공항이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제2공항 배후도시를 만든다면 또 격자 그리드를 만들 것이다. 결국은 사람이다. 건축의 주인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자본이 건축의 주인이다. 그러니 건축과 도시는 황폐화된다.”(252쪽)
물리적 확장이 아닌 가치의 전환 방식으로 도시를 재구성하는 건 어떨까?
“일상의 경험을 잠깐 바꾸는 것도 건축일 수 있다. 하나에만 집중하는 도시재생은 오래걸린다. 그건 그렇게 하고, 키치한 것은 토치에 톡톡톡 불을 붙이듯이 점적으로 해보자. 점적으로 하면 연속성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연속성을 지닌 도시 재생은 다른 분들이 하고 있으니까, 나는 쿡쿡 찌르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143쪽)
인터뷰이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자연과 풍경’이다. 좋은 건축이란 ‘있어야할 장소’에 있으면서 그 장소와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건축일 것이다. 그 다음 열쇠말은 ‘공존과 배려’이다. 제주는 바람이 많고 거세서 집들을 ‘옴팡진’ 땅에 낮게 지었다. 거기에 혼자 높은 집은 없었다. 제아무리 멋있는 건축이라 해도 개성이 강해 주변과 어울리지 않거나 경관을 독점한다면 그것은 좋은 건축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주 건축가들은 나름 세대 구분을 해왔는데 〈나는 제주 건축가다〉에 참여한 건축가는 그들이 구분한 세대 가운데 6세대로 불리는 이들이다.6세대 젊은 건축가들은 제주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시대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에서는 선배 세대들보다 유연하다. 그것은 오늘날 땅과 사람, 삶과 역사, 지형과 풍경 등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