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5)
우리는 한번 즈음 영화의 한 장면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우리를 억울하고 힘들게 했던 원수(?) 앞에 서서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철저하게 원수를 응징하는 통쾌한 꿈을.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주인공(선한 이의 역할)의 통쾌한 복수로 대리 만족을 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오늘 요셉은 자신을 억울하게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장면을 마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요셉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형제들을 시험하며 복수(?)할 기회를 살피는 듯 했습니다. 곡식을 얻으러 온 형제들에게 곡식의 값이나 은잔을 숨겨 보내어 마침내 친동생 베냐민까지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친동생 베냐민을 포함한 모든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에 결국 요셉은 감정을 터트렸습니다. 모든 사람을 물리고 이윽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알렸습니다(4절). 그리고 형제들을 만난 기쁨과 회환의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2절).
동생 요셉을 죽이려다가 겨우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요? 아직 남아 있는 가뭄과 기근 가운데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으로 인해 ‘살았구나’하는 안도보다 오히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요셉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공포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3절).
원수의 공격과 저항까지 완전히 해장시킨 주인공과 같은 요셉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요셉이 자신을 ‘꿈 꾸는 자’라고 조롱하던 형제들에게 ‘이집트에 판 자(4절)’라고 소개했습니다. 처절한 복수를 위해 그들이 한 행동을 기억하게 하고 상응하는 복수를 해도 정당해 보일듯 싶은 장면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억울하고, 비통했던 복수의 언어보다는 요셉의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걱겅하지도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5절 새번역)”라고 형들을 안심시켰습니다. 통쾌하게 원수를 응징하는 보복보다는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용서의 장면으로 이어졌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신약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인류의 불순종과 죄악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독생자를 보내시고, 하나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버린 인간에게서 요셉의 형제들을 투영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형제들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심판하고 보응할 수 있었던 장면에서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형제들을 용서했던 요셉에게서 예수님을 엿보게 됩니다.
요셉의 이집트 생활이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반인륜적인 죄악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말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을 하는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은 가뭄과 기근 가운데 자신 앞에선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자신이 먼저 이집트로 왔는지 깨닫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잔을 피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고통과 시련을 기꺼이 감당하는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대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의 뜻을 이루어지기를 겸손하게 고백하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