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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답사
바쁜 월말 월초를 보내다 보니 답사 다녀온 지 어느새 한 주일이 후딱 지나버렸습니다.
난 왜 늘 바쁜 걸까? 유유자적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가끔 드는 의문입니다. 비단 직장일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늘 시간이 없고, 능력이 부족해서 구상만 하다가 지나쳐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능력보다 욕심이 많아서일까요?
송창식 노래처럼
하고 싶은 일들은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두 팔이 너무 모자라고
알고 싶은 진리는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머리가 너무너무 작고
잡고 싶은 순간은 너무너무 많은데 가는 세월은 너무 빠르고
이런 걸까요? 에혀......
부처님 오신 날 주간을 맞아 청주의 불교유산들을 중점 둘러보는 답사로 기획한 답사였습니다.
400년 된 절집의 건물들, 완벽할 만큼 온전하게 본존된 괘불,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부처님 말씀을 찍은 곳, 거대한 석불상, 당간까지 온전하게 남은 철당간, 이 지역만의 특별한 불비상들, 그리고 삼국통일 이전의 고대 삼존불상까지, 모두 청주지역의 명품 불교미술품들이었습니다.
지역에 찾아온 손님맞이 오셔서 좋은 해설까지 들려준 길동무님과 간간이 전문가의 견해로 추임새를 해준 도깨비님 고마웠습니다.
답사에서 몇천 년 만에 뵌 백설공주님 반가웠습니다. 앞으로는 종종 뵙겠네요 ^^
건강에 무리될까 조심스러운 가운데에도 참석하신 대동여지도님도 반가웠습니다.
늘 그랬지만 다녀온 답사를 되새김하며 후기를 써봅니다.
다음 답사서도 반갑게 해후하시길요~~ ㅎㅎ
※ 사진은 분청이 찍은 것과 제가 사답 때 짝은 것들이고, 내용이 길어져서 청주박물관의 불비상에 대해서는 따로 올리겠습니다.
안심사(安心寺)
마음이 평안한 절이란 이름이 좋아선지 전국에 같은 이름의 절들이 많다.
청주시 중심에서 서남쪽으로 차로 30분쯤 가면 나오는 안심사는 정갈하고 조용해서 이름 그대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절이다.
한 달전 사답 때는 꽃들도 많이 피어 참으로 아름다워서 꽤 긴 시간을 머물며 혼자 놀았었다 ^^
안 그래도 조용한 절인데 답사 때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어서 말소리도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통일신라 혜공왕 떄 진표울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그 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도 임진왜란의 참화를 벗어날 수는 없었는지 그 이후의 유물들만 있다.
광해군 때 지어진 비로전(현재는 영산전)과 인조 때의 대웅전 건물, 그리고 영산전 안 괘불함에 보관된 국보로 지정된 괘불이 안심사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안심사 대웅전
원래는 측면 3칸이었던 건물이 언제인가 뒤쪽 1칸이 줄어들었고, 다포계 팔작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키 작은 사람이 큰 모자를 쓴 것 같고 뭔가 때똑해 보인다.
단순한 간결함이 미덕인 맞배지붕에는 주심포라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측면 한 칸이 줄어들면서 대웅전 내 불단 뒤 후불벽이 외벽이 되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집은 늘리면 늘렸지, 웬만하면 줄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뒤쪽 한 칸을 잘라낸 이유는 뭘까?
현재는 건물 바로 뒤에 바짝 붙은 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을 해봤다. 언젠가 산사태로 대웅전 뒷벽까지 흙이 밀어닥치자 어쩔 수 없이 한 칸을 줄였을 것이라는......
애초 후불벽에서 외벽으로 바뀐 벽은 재활용된 목재를 사용한 듯 조각조각 모자이크 같은 모습이다.
답사에서는 마침 시작된 예불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대웅전 내부(사답 때 찍은)
불단 위 닷집 위치만 빼고 네 벽을 빽빽하게 채운 공포가 천장을 좁아 보이게 한다.
다포계 건물의 화려함과 복잡함을 느끼게 한다.
안심사 영산전
본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이었으나, 지금은 나한들을 모신 영산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의 건물이면서도 풍판(맞배지붕 건물의 측면을 비바람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는 판자)이 달린 측면에도 공포를 설치했다.
아름다운 맞배지붕 건물의 측면들, 시계 방향으로 수덕사 대웅전, 무위사 극락전, 관룡사 약사전, 봉정사 극락전
맞배지붕 측면은 추녀가 없어서 측면의 아름다운 가구가 노출된다.
측면에도 공포가 있는 안심사 영산전과 달리 공포가 없고, 풍판을 달지 않아 보기에 시원해 보인다.
영산전 내부에 놓인 긴 괘불함에 국보 제297호인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길이가 긴 괘불함 보통 법당 불단 뒤에 보관하는데 안심사 대웅전은 후불벽 뒷공간이 없어서 이곳에 보관한 것 같다.
괘불함을 이렇게 불단 앞에 보관하는 것은 여기서 처음 본다.
영산전에 있는 법고의 몸통
큰 통나무 속을 파내서 이음새 없이 만들었다. 북을 두드리는 양쪽면의 가죽 부분은 소실 등으로 파손되어 없다.
안쪽에 '만력이십구년신축(萬曆貳拾玖年新築)’이라는 묵서 표기가 있어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1년(선조 34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 -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절에서 큰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법당 앞에 걸어놓고 예불을 드리는 대형 걸개그림이 괘불이다.
그래서 웬만큼 사세가 되는 절들은 괘불 한 점씩을 갖고 있어서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괘불만 90점 가까이 된다.
그 중 안심사 괘불은 크기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지만, 본존 상태가 좋고 원래의 화려한 색채가 그대로 살아있으며, 그림 아래쪽에 순치 9년(조선 효종 2년, 1652)에 안심사에 봉안 했다는 시기와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을 알 수 있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
현재 많은 괘불 중에 국보로 지정된 것은 7점 뿐이다.
안심사 세존사리탑
안심사에는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100여 년 전 사리탑을 안심사로 옮겨 오면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사리비도 함께 있는데, 전형적인 조선 후기 석종형 승탑에 왜 '세존사리탑'이란 명칭이 붙었는지 설명문을 읽어봐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
(선광 7년 정사년 7월 일 청주목 바깥의 흥덕사에서 주조한 활자로 인쇄)
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 卷下 (백운화상이 초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이라는 긴 이름의 이 한 권의 책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찍은 책으로 공인된 데는, 이 책의 마지막 장, 마지막 줄에 있는 "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 이 20자 덕분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찍었는지가 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직지심체요절은 공민왕 때의 고승 백운화상이 역대 불조선사들의 주요말씀 중 요점만을 뽑아 지은 것으로, 그의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책으로 펴냈다.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준 하권 한 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다.
흥덕사지에서 발굴된 치미와 청동금고(靑銅金鼓)
직지를 인쇄한 '청주목 외 흥덕사'가 어디인지 알 수 없던 중 1984년 청주 운천동의 택지개조성공사 중 절터가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서원부 흥덕사'가 새겨진 청동금고와 '황통 10년 흥덕사'가 새겨진 청동 그릇 뚜껑이 나오면서 흥덕사의 위치가 확인된 것이다.
'직지'가 인쇄된 유서깊은 자리에 고인쇄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쫌 어벙한 아니, 많이 어벙한 내 모습도~~ ^^
활자를 모아 모아서~~ ^^
흥덕사지, 발굴된 절터에 법당만이 덩그러니 복원되어 있다. 뭔지 아쉬운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용화사 석불상군
청주 무심천 옆 주택가에 자리한 용화사에는 거대한 석불상 7구가 있다.
5m가 넘는 거대한 입상들과 좀 작은 좌상들까지 크기와 형태 존상의 유형이 다양하나 무두 고려시대 불상들이다.
무심천 언저리에 방치되어 있던 걸, 1902년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의 후원으로 용화사를 짓고(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를 헐어다 옮겨 지었다고 한다) 일곱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현재는 삼불전에 입상 3구와 극락전에 좌상 등 작은 불상 4구를 나눠 모시고 있다.
용화사 인근인 무심천 주변에는 흥덕사지. 운천동 사지. 사뇌사지 등 절터들이 많았던 곳으로, 여기저기 절터들에 흩어져 있던 불상들을 한자리에 모신 것으로 보인다.
삼불전의 입상 3구
삼불전에 들어서면 모셔진 거대한 크기의 석불상에 압도된다. 고려 초기의 불상들로 제일 큰 가운데와 오른쪽은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고, 왼쪽 불상은 오른손에는 보병을,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다.
오른쪽 불상은 양어깨를 감싼 옷 주름이 무릎 아래까지 물결처럼 흘러내려 눈길을 끈다.
이 불상의 등 뒤에는 큰 크기의 나한상이 양각되어 있다.
불상 등 뒤에 새겨진 나한상, 누구의 모습일까?
당간(幢竿)
절의 입구의 높은 깃대 꼭대기에 거는 당은 깃발과 같은 장엄물이며, 당을 걸기 위한 깃대가 당간이고 그 당간을 고정시키는 것이 당간지주이다.
답사 다니면서 절이나 절터의 입구에서 흔하게 보게 되는 당간지주는 전국에 100여 기 가까이 된다고 한다(북한지역에 있는 6기 포함). 대부분 돌로 된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지만, 당간까지 남아있는 건 8기뿐이다.
● 철당간 : 용두사지(청주), 갑사(공주), 칠장사(안성), 법주사(보은, 고종 때인 1866년 당백전 만들 때 사용되어 없어졌던 걸 1972년에 복원했다).
● 석당간 : 나주 동문리 석당간, 담양 읍내리 석당간, 부안 서외리 석당간, 영광 단주리 석당간
우연히도 당간이 남아있는 곳은 모두 옛 백제의 영역이었던 지역이다. 당간지주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경북지역을 포함한 영남권에는 1기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백제 때 만들어 진것은 아니다. 당간의 건립은 통일신라 때 시작되어 고려떄까지 성행하다 불교가 위축된 조선시대 들어서는 새로 세워지지 않았다.
또 한가지는 돌로 만든 석당간은 4기가 모두 전라도 지역의 절터에 있으며 원래의 절 이름을 알 수 없는 곳들이다 (익산의 미륵사지에서도 석당간 파편들이 발굴되었다).
당간은 손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는 목재로도 많이 만들어졌을 텐데 목재의 특성상 보존된 것이 없다. 당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에는 이것도 비중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용두사지 철당간
몸통에 쓰여있는 명문으로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가 명확한 당간이다. 그래서 많은 당간과 당간지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려 초인 광종 13년(962년)에 용두사에 세워진 당간으로 지역의 유력 호족 세력과 관련이 깊다.
철통을 쌓아 세웠으며 기록에는 원래 30단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20단만 남아있다.
옛 청주읍성의 중앙이고 지금도 청주의 중심 번화가에 자리하고 있어 청주의 상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옛 청주읍성 성벽에 기대어
조선시대 청주목의 읍성은 일제 초기 시가지를 새로 조성하며 헐렸고 그 자리는 도로가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청주읍성도>에 의해 옛 모습을 알 수 있으며, 최근 그중 일부인 서벽 35m를 철거된 지 100여년 만에 복원했다.
성벽 철거시 뿔뿔히 흩어졌던 성돌들을 지역 시민단체 등이 '청주읍성 성돌 모으기 운동'을 통해 찾은 수 백개의 성돌이 복원에 쓰였다고 한다.
청주읍성도
조선 후기에 그린 지도로 읍성의 사대문 위치와 청주목의 동헌, 객사, 병영 관련 시설 배치 등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망선루, 철당간의 모습도 보이고 남문 밖 무심천에는 현재는 매몰된 돌다리 남석교(南石橋)도 그려져 있다.
중앙공원과 망선루(望仙樓)
청주의 중심에 시민들의 휴식처로 문화공간으로 사랑받는 중앙공원은 옛 청주읍성 내 청주목 관아가 있었고 후에는 도청이 있던 자리로 도청건물을 옮겨가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인근이 젊은이들이 넘치는 거리인데 비해 서울의 탑골공원만큼이나 많은 노인들의 휴식처이다(밤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고 공연 같은 문화행사도 많다고 한다).
공원 내에는 충청병마절도사 영문과 망선루, 조헌 전장기적비, 척화비 등이 있다.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관아의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건물이다.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했던 공민왕이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조선조 들어서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며 유지되었지만, 일제 때 헐려서 다른 곳에 옮겨지어 져 학교 교사 등으로 쓰였다.
원래의 누각 모습을 찾기 어려울만큼 많은 변형이 되었던 걸, 2000년 현재의 자리에 원형을 찾아 복원하였다.
조헌 전장기적비(趙憲 戰場記蹟碑)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은 영규대사의 승병 등과 함께 왜군들을 물리치고 1592년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했지만, 같은 달 18일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사후 120여 년이 지난 숙종 때인 1710년 청주성에 조헌을 기려 세운 비이다.
중앙공원의 압각수(鴨脚樹)
수령 900년의 은행나무로 고려말의 시국과 관련된 일화가 전설이 된 나무여서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에도 이름이 나온다.
나무잎이 오리의 발가락 닮았다고 해서 압각수 이름이 붙었다지만, 압각수는 은행나무를 중국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은행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기도 하다.
운천동 절터 출토 동종
오대산 상원사종,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국내에 3구밖에 남아있지 않은 통일신라시대 범종이다.
용뉴, 비천상 위치, 당좌의 모양 등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과 화염보주와 새, 꽃무늬 등 새로운 장식도 있는 양식적 변화도 있다.
이 동종은 청주 무심천 부근의 운천동 주택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흙속에 파묻힌 동종 안에 금고(金鼓), 금동보살입상, 향완 등이 함께 묻혀 있었다고 한다.
말 탄 사람 장식을 한 토기
햐! 명품이네~~
걸거나 매달 수 있도록 고리가 달린 고려시대의 청동향로. 몸체가 달걀처럼 둥글고 아름다운데 손잡이 끝장식도 연꽃봉오리 모양이다.
창밖에 장독대가
1987년 개관해 30년이 된 국립청주박물관은 우암산 동쪽 기슭에 자리해 주변의 수려한 풍경과 잘 조화를 이루는 박물관이다.
고 김수근이 1979년에 설계한 작품으로 경사진 언덕을 따라 층층이 이어진 축대는 인근의 상당산성의 이미지를 반영했다고 한다.
한옥을 형상화한 나지막한 여러 동의 건물이 이어져 있다.
특히 중간중간에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볼 수 있게 한 설계가 돋보인다.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오래전 절터였을 곳이지만, 지금은 밭이나 건물이 들어선 마을 초입의 작은 언덕 위 느티나무 옆에 보호각 안에 삼존상이 있다.
하나의 광배에 불상 3구를 조각하여 일광삼존불이라고도 한다.
보호각 앞에는 석불입상 하나와 주인 잃은 광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작년에 삼존상과 석불입상을 묶어 보물 제1941호로 승격되었다.
본존불의 머리 부분과 우협시 보살이 떨어져 나가서 아쉬운데 남아있는 부분도 여러 조각으로 파손됐던 걸 붙여 좋았다.
삼국통일 이전인 6세기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이 지역이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축을 벌여 번갈아 차지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어느 나라 조성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래선가 현장에서 본 느낌은 어딘가 서산마애불 같은 분위기도 있고, 협시보살의 옷 장식과 둥근 두광에서는 경주의 배리삼존불의 느낌도 들었다. 서산과 경주의 것보다는 비중리 삼존상이 앞선 시기의 것이다.
석불입상과 광배
낮은 언덕 위 보호각에 삼존상이 있고 그 앞에 광배 하나와 석불입상이 나란히 서 있다.
삼존상도 원래는 더 아래쪽 밭둑에 있었으나 20여 년 전 위로 끌어 올렸고 보호각을 세웠다고 한다.
주변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 있었을까?
발굴조사를 하면 떨어져 나간 조각들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발굴 조사가 없었다면 흔한 통일신라 절터가 아닌 삼국통일 이전 절터에 대한 본격 조사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주인 잃은 광배 가운에는 두 줄로 띠를 둘렀고 밖으로 화불 5구를 역시 두 줄 띠로 연결해 배치했다.
이 멋진 광배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답사의 종료는 도깨비의 '튀소'로~~
하지만, '도깨비' 하면 공유가 먼저 떠오른다. 정작 드라마는 보지도 않았는데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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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 오르네요. 행복한 답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분청언니가 저 어벙은 아니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췸새님 찍을때 표정은 잊을수가 없습니다.
구여워죽것답니다.ㅋㅋㅋ 눈에선♡가 뿅뿅뿅하더이다
정답 : 구여워죽겄다. 고로 어벙은 정답이 아님.^^
정답을 췸새님만 모르고 계시네~
ㅋㅋ
하트 뿅뿅은 아니고~~ㅋ
췸새가 툴툴거릴때 마이 구엽긴하지ㅋㅎㅎ
제 법명이 안심행입니다. 안심사에 갔더니 마음이 평안하더이다^^*
마치 어제인듯 시간속으로 다시 들어가 봅니다. 즐거운 답사였고, 다음주를 기다려 봅니다~
요목조목 수고 했어요^^ 좋은 자료가 되겠네요.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앞에서 님들의 답사 연륜을 느낄 수 있는 토론?이 좋았습니다.
하나의 통돌에 삼존상이 있어 더 귀하게 보였고, 좌협시 보살의 천의 문양 X자를 어디서 보았나를 찾아봤습니다.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293호)의 X자형 문양을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의 X자는 국보293호 보다 심플하게, 문양 전체가 부드러워져 293호 보다 후대의 것으로 보여집니다.
추임새님~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