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시각에서 용서가 가능한가?
최근 정희진의 공부 유튜브 채널에서 ‘피해자의 오만’이라는 방송을 보았다. ‘오만’이라는 단어가 ‘피해자’와 연결되니 어색했다. 오만의 사전적인 뜻은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 또는 그 태도나 행동’이라고 한다. 정희진은 영화 ‘밀양’을 ‘피해자가 도덕적 우월감을 가졌을 때 자폭하는 이야기로 자기 파멸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피해자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의 고통을 다루고자 하는 예술가가 있을 뿐이고 그들의 고통을 다루고자 하는 공부가 있을 뿐이다.”고 마무리를 한다.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민간인학살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용서 가능성’에 대해 누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용서를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연 용서가 가능하지 않은가?
15년 전 둘째 아들의 학교폭력으로 재판하였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가해자였고 둘째 아들이 피해자였다. 여러 상황이 있었지만, 이 논의에 맞춰서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중재하는 상황으로 가해자의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가해자와 가해자의 엄마는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교 관계자가 이렇게까지 용서를 구하는데 나에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남편도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용서를 구하지 않냐고. 그런데 내 눈에는 가해자의 아버지는 용서를 구하는 시늉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해자 본인과 가해자의 엄마는 그냥 나와 우리 가족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대표로 사과한다고 우리가 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해 주어야 했을까?
작은 아들의 학교폭력은 내가 민사소송까지 끌고 갔다. 이유는 작은 아들이 원해서였다. 가해자에게 맞아서 앞니가 부러졌고 그에 대한 보상을 원했다. 결국 중재가 되지 않았고 소송으로 갔는데 동네에서는 다르게 이야기가 퍼져서 내가 있는 줄 모르고 “아이끼리 싸울 수도 있지. 돈에 환장한 아줌마가 아이를 상대로 소송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 “나는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소송을 포기할 것이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졌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고통의 감정은 물질이고 그것은 몸에 있다(45)”라는 글처럼 고통이 몸에 새겨져 사람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방법으로 그 고통을 피한 것 같다.
학교폭력의 소송 과정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학교관리자, 학부모들이 좋은 것이 좋다고 했다. 경찰도 “친구끼리 싸우며 큰다”라는 말을 했다. 남편도 그냥 합의해 주자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작은 아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해 주었다. 우선 가해자를 전학시키며 소송을 진행했고, 폭력을 알면서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교사와 학교, 경기도 교육청까지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작은 아들은 승소했다. 이 학교폭력의 소송 과정으로 인해 작은 아들은 사회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는 아이로 자라서 지금은 직업군인으로 살고 있다.
나는 가해자가 용서를 구할 때만 피해자가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먼저 용서해 줄 수 없고 가해자가 진정한 용서와 사과를 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를 통해 피해자는 상처를 받는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분노는 개인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 관계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분노는 관리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죽음보다 더 잔인한 사건은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용서와 치유라는 당위이다(45).” 피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