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내포 일대는 본래 미륵신앙이 매우 발달한 지역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4세기 무렵부터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미륵이란, 아직 세상에 오지 않으신 부처님, 먼 미래에 세상에 오셔서 중생을 구제하실 부처님을 말합니다. 내포 일대에는 그야말로 동네 장승만큼이나 많은 미륵불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요. 오늘은 당진시 정미면에 위치한 안국사지에서 우리의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안국사지는 은봉산 중턱에 있던 절터로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요.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미현조’에 ‘안국산에 안국사가 있다’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 창건이나 폐사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절터에서 발견된 명문기와 등의 유물들을 조사한 결과로는 고려 중기, 1030년 경에 창건되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국사터의 앞면에는 돌로 쌓은 축대가 있고, 터 안에 장대석과 주춧돌 3개가 남아 있는데요. 절터에 석조여래삼존입상, 석탑, 매향암각 등이 있어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이는 석탑의 형태가 뭔가 좀 이상한데요. 1층의 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 몸돌이 없어지고 지붕만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폐사과정에서 사라진 건지, 이 터 아래 묻혀 있는 건지 알 수 없는데요. 어쩌면 이 사찰이 겪었던 오랜 세월의 풍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몸돌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는데요. 각 층의 지붕돌은 크고 무거워 보이며, 처마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 4단의 지붕돌 밑면받침을 밖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인데요. 1층 몸돌이 작아서 마치 기단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듯 하여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어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입상은 보물 제 100호로 지정되었는데요. 발가락까지 제작된 고려시대의 흔치 않은 석조여래삼존입상이기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커다란 자연석에 최소한의 가공을 해 질박한 맛이 더해져서 마치 동네 아저씨, 아줌마 같은 정겨운 느낌인데요. 머리에는 면류관 모양의 근사한 보개를 쓰고 있습니다. 고려 중기에 유행했던 사상 중 하나가 바로 황즉불, 황제가 곧 부처다 라는 사상인데요. 황제는 부처님처럼 고귀하다 라는 뜻과, 황제는 부처님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좌우에는 본존불을 모시는 보살상이 있는데요. 머리에 갓이 없을뿐 전체적인 형식은 보존불과 유사합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보존불보다 입체감 조각되었으며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요.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졌고 전면에 마멸이 심하여 세부적인 표현을 확인하기 힘듭니다.
불상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보이네요. 배를 닮았다고 해서 배바위라고도 하고, 고래 닮아서 고래바위, 베틀의 북을 닮았다고 해서 북바위라고도 불립니다. 배바위에 관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 오는데요. 옛날 고려 초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나서, 바닷가에서 배를 만들던 가씨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풍랑을 만나서 그만 이 근방까지 휩쓸려 왔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 어부가 그를 구해서 아내와 함께 극진히 간호를 해줬다네요. 몸이 회복된 가씨가 보답을 하려고 소원을 물었더니, 어부가 배나 한 척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마침 가씨가 배를 만드는 목공이어서 근사한 배를 한 척 만들어줬다고 하네요. 이게 소문이 나서 주문이 밀려들고 가씨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가씨는 벌어들인 돈으로 곡식을 사들여서 이곳, 안국산 바위 구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날 큰 배를 만들고 있을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씨가 거적으로 바위 구멍을 가리려고 하는데 마침 벼락이 떨어져 배가 큰 바위로 변해서 구멍을 덮어버리고, 가씨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하네요. 전설에 의하면 배바위 아래에는 온 나라 사람이 하루 먹을 양의 곡식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또 이 배바위에서 돌을 던져 저 부처님 보개 위에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얘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고 하네요.
배바위를 잘 살펴 보면 글자가 여러 자 새겨져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 글자들은, 모년 모월 모일에 염솔마을에 다니던 목공이 이곳에 같이 묻혔다. 모년 모월 모일에 여미 북쪽마을 입구 동쪽 물가에 모 스님의 향을 묻고 아미타불의 고을인 이곳에 적어둔다는 글귀라고 하네요. 글귀를 통해 목공 가씨의 전설과 부합하기도 해 문화적, 사료적 가치는 물론 향을 묻었다라는 점에서 지역에 내려오는 매향문화를 증명하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매향이란 향나무를 묻어두는 행위를 말하는데요, 향은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후로 부처님을 공양할 때 최고의 예물로 여겨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땅에 묻힌 침향목의 수지가 오랫동안 굳어서 만들어지는 침향은 향기가 좋고 그을림이 없으며, 약재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불교에서 최고의 향으로 여겨졌는데요. 하지만 침향은 구하고 비싼 수입품이라 왕실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후기 민중들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를 묻고 매향의식을 시작했는데요. 이를 통해 미륵세상이 도래하고, 백성들의 삶이 평안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때 묻은 향나무는 오랜 세월이 지나 침향이 되어 바다 위로 떠오를 것이라고 믿었는데요. 혼란했던 고려 후기로부터 조선 전기 사이에 크게 유행했던 이 매향 의식은 현실의 고단함을 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달래려고 했던 당시 백성들의 열망이 미륵신앙과 합쳐져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국사지 주변에는 백합, 수국 등 여름꽃이 활짝 펴 한여름의 운치를 더하고 있는데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불상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석불 입상과 석탑으로 유명한 안국사지는 주변 절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천천히 돌아보기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