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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사기』 ‘조선열전’ 해설(마지막회)
<조‧한 전쟁은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니었다>
[해설]
1. 고이다패망固已多敗亡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들을 잃었다.”고 하였다. 누선군이 여러 번 싸움에 패하여 군사들을 잃은 후 왕검성에 도착했을 때 병사가 7천명이었다. 그러면 누선장군이 처음 출병할 때 수군의 수는 얼마였을까? 앞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주석한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는 내용을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우니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누선장군이 처음 출병할 때 수군이 5만이었는데 여러 번의 해전에서 패하여 수많은 군사들을 잃고 겨우 7천명이 왕검성에 도착했다가 그마저도 우거에게 격파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천자주수天子誅遂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제남태수 공손수가 주살된 이유는 태사공(사마천)이 이르기를 “순체荀彘는 공손수와 더불어 공을 다투다가 함께 주살되었다.”고 하였다. 또 『사기색은』은 “ ..... 두 장수를 의심한 위산과 공손수는 법에 따라 주살되었다. 장계를 어지럽게 보고한 것이다.”고 하였다. 공손수는 좌장군 순체와 공을 다투고, 거짓 보고를 한 이유로 주살되었다.
3. 4군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서는 무제가 원봉 3년(B.C.108)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군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한서』「무제본기」에서는 4군의 명칭이 낙랑ㆍ임둔ㆍ현토ㆍ진번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한서』「지리지」에는 낙랑ㆍ현토의 2군만 기록하고 있고,「오행지」에서는 원봉 6년(B.C.105)조에 ‘선시양장군정조선先是兩將軍征朝鮮 개삼군開三郡’이라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한사군을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고조선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 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하였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군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위치문제도 앞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위치문제는 진번의 위치문제로서 앞서 한사군명칭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진번위치와 연결되어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재북설과 재남설로 크게 나뉘어져 전통사학자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찬자는「기이」 이부조二府條에 사왈私曰 조선전즉朝鮮傳則 진번眞番ㆍ현토玄菟ㆍ임둔臨屯ㆍ낙랑등사樂浪等四 금유평나무진번今有平那無眞番 개일지이명야蓋一地二名也 라 하여 평나平那를 진번으로 보았고, 이 견해는『동국통감』등에 계승되었다. 한백겸은『동국지리지』에서 이를 예맥구지貊國舊地 즉, 강원도 춘천부로 이해하였고, 이익은『성호사설』「유선」에서 진번을 ‘요하이서최근중토자遼河以西最近中土者也’로 규정하였다. 한편 홍만종은『순오지』에서 진번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정약용은『아방강역고』에서 진번지지眞番之地 수불가상雖不可詳 요재금흥경지남要在今興京之南 동가강지좌우佟家江之左右 흥경지남興京之南 압수이북鴨水以北 금애하이동今靉河以東 파저강지좌우波猪江之左右 연강흑지지沿江黑之地 즉비요동即非遼東 우비조선又非朝鮮 필고지진번야必古之眞番也 라 하여 재북설在北說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유득공의『사군지』에 계승되었고, 한진서의『해동역사』「지리고」에서도 이같은 견해가 유지되었다. 한편 일인학자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압록강이북지역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稻葉岩吉은 충청도지역에서, 금서룡은 충청ㆍ전북 등지에서 진번의 위치를 찾았다. 또 이병도는 대방군 영토에서 이를 찾아 재남설을 강조하였다. (「한사군문제의 연구」 pp. 97∼209) 이와 함께 도유호는 진번이 현재 함경도 이동 쪽에 위치해 있다가 예군 남려의 반란 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창해군 영토의 임둔군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p. 3)
이같이 진번군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한사군설치 이전에 연의 침입을 받았던 진번, 조선과 위만조선에 복속되였던 소읍으로서의 진번ㆍ임둔 및 한漢과 직접교역코자 하였던 ‘진번방중국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번의 위치가 확정됨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는 다양하게 변화되는데,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현재의 평양인가 요동지역인가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반적인 연구 성과에 의거할 때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한사군의 위치보다는 그 성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4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의 경우 종래에는 낙랑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421년 동안 계속하여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랑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군현적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전한시대를 제외하면 비교적 짧으며,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국계 유이민 집단의 자치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25) 따라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성격 검토를 통하여 재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4군의 위치는 앞의 ‘진번ㆍ조선’과 ‘진번ㆍ임둔’ 항목에서 언급하였다. 낙랑군은 조선지역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백석산(갈석산)과 발해, 남북으로는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진번군은 요동지역으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의 요동성이 중심이며, 하북성 북부(영정하 이북)지역이다. 임둔군은 현 중국 하북성 창주시蒼州市 일대이다. 현토군은 위치이동이 있었는데, 초기 현토군은 옥저지역으로 현 요하 이서의 중국 요령성 지역에 해당한다. 기원전 82년 현토군이 진번군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진번군은 폐지되고 현토군으로 남게 되었다.
4. 홰청후澅淸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에는 지금의 산동성인 제齊에 속한다고 하였고『사기색은』에는 회청은 제에 속한 현명縣名이라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산동성 제齊 지역이다. 이유립 선생은 산동성 임치현 서북쪽인데 춘추때의 획음. 본시 니계 땅이라 하였다.(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회청이 본시 니계 땅이라는 이유립 선생의 고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회청후로 봉해진 삼參은 위만조선에서 니계상尼谿相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산동성의 니계 땅이 본래 위만조선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5. 적저후荻苴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건원이래후자연표」에는 ‘적저荻苴’로 기록되어 있고,『한서』「서남이양월조선전」에는 ‘추저후秋苴侯’로 기록되어 있다.『사기집해』와『사기색은』에는 발해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2) 필자의 주석
발해渤海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하간현, 창현으로 나오며, 이유립 선생은 천진부 경운현 동쪽지방이라 하였다.(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6. 평주후平州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와『사기색은』은 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양부梁父에 속한다고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양부梁父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산동성 태안현 남쪽 60리로 사수현과 접경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유립 선생은 산동성 태안부 모현 서쪽지방이라 하였다.(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7. 기후幾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와『사기색은』은 위소 말을 인용하여 하동河東에 속해있던 현명이라고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하동河東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황하 동쪽이라 하였고, 이유립 선생은 하동 상湘과 로潞의 사이로 현재의 산서성 로주라 하였다.(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8. 온양후溫陽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건원이래후자봉표」와『한서』「지리지」남양군南陽郡의 속현에는 날양涅陽으로 되어 있다.
(2) 필자의 주석
제(齊)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온양현은 현 수도의 양유壤柔현에 속한다고 하였고, 이유립 선생은 열수의 북쪽이니 오늘의 하남성 진평현(옛 제 땅)이라 하였다.(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9. 열구洌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 나타난 내용에 의하면 한군漢軍이 집결키로 한 열구가 열수洌水의 하구지명河口地名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앞서의 내용에서 제(산동반도) 지역에서 발해(현재의 발해)로 한의 수군이 항해하였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열구가 현재의 요동지역 발해연안에 존재하였다고 보아 요동지역에서 발해로 유입하는 강으로 파악함으로써 열수洌水와 연결되는 왕검성도 이곳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리지린,『고조선연구』)이러한 사실은 4세기초 진晋의 곽박이 주석한『방언方言』의 ‘조선열수지간朝鮮洌水之間’이란 내용에 대해 ‘열수명재요동列水名在遼東’이라 한 기록과,『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의 ‘조선유습수朝鮮有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삼수합위열수三水合爲洌水 의낙랑조선취명어차야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란 내용 등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열수洌水는 요하遼河이며 열구洌口는 발해로 요하가 유입하는 지역으로 이해된다.
한편『수경주』이래로 유지된 열수=대동강설은 평양을 왕검성 및 낙랑군지역으로 이해하고 대동강 하구에 존재한 지명의 유사성과 특히 ‘낙랑유적’과 ‘점제현신사비’의 존재로 확증된다고 보았다. (금서룡,「열수고」 p. 56; 이병도,「위씨조선흥망고」 p. 72) 그리하여『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의 주석에 ‘분려산分黎山 열수소출列水所出 서지점선입해西至黏蟬入海 행팔백이십리行八百二十里’라 한 내용이 위의 사실과 부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서 논급된 발해의 위치문제와 평양부근의 ‘낙랑유적’이 고조선의 유물이란 사실 등을 들어 반박하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또한 고조선의 이동설을 주장하는 견해에 의하면 열수가 고조선계 지명인 까닭에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 있었던 때의 열수와 대동강 유역로 이동한 이후의 열수가 다르다고 한다. 즉,『사기』와『한서』의 열수는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한 이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이 열구는 대동강 하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40∼49)
(2) 필자의 주석
본문의 내용에 의하면 누선군이 집결키로 한 열구는 열수洌水의 하구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 『산해경』의 ‘해내북경’에 열수洌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위 구절에 대하여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고 하였다. 열양列陽은 열수의 북쪽을 의미한다. 연나라가 열양에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으므로 열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면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은 어떤 강일까?
『전국책戰國策』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文公, 재위 BC362-BC333)에게 한 말이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중략...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菉沱와 역수가 흐르며,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했다. 안문과 갈석은 모두 호타하의 북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열수는 호타하임을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곽박이 ‘열수가 대방에 있고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열구는 호타하 하류에 해당하며, 대략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부근이다.
10. 양군구욕兩軍俱辱 장솔막후의將率莫侯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없음
(2) 필자의 주석
조‧한 전쟁은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년) 당시에 일어났다. 사마천이 이 전쟁을 전체적으로 평가한 내용이 “결국 (한나라 수륙) 양군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漢나라의 육군대장인 좌장군 순체는 참수되어 머리가 거리에 효수되는 기시형에 처해지고, 수군대장인 누선장군 양복은 참수를 면하는 대신 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요동군을 거느렸던 좌장군의 졸정인 다多는 싸움에 패하여 참수되었으며, 우거를 회유하러 갔던 위산과 제남태수 공손수 등은 모두 한무제에게 주살되었다. 이처럼 조‧한 전쟁에 참여했던 한나라 장수들이 모두 참수되거나 서인이 된 반면 항복(?)한 조선의 장상들은 모두 제후의 반열 올랐다. 조‧한 전쟁은 결코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었으며, 위만조선의 내분에 의하여 연방제가 해체되고, 4군과 여러 열후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나라가 설치하였다는 한사군은 그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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