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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9-20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
오늘 본문 로마서 3장 9-18절은, 우리 인간이 모두 얼마나 철저히 죄인인가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1. 앞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8절까지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악을 지적했습니다.
2.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도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9절의 <죄>(ἁμαρτία: sin)는 복수형이 아니고, 단수 명사입니다.
즉 모든 인류는 죄의 권세자인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3.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9-18절.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온 인류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선포함
19-20절. 율법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선포함
9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at then? Are we better than they? Not at all; for we have already charged that both Jews and Greeks are all under sin;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Τί οὖν; προεχόμεθα; οὐ πάντως·
What then? Are we better? Not at all
‘나으냐’(προεχόμεθα)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are we better) 더 나은 상태에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προέχω)은 ‘앞에’(πρό)라는 접두어와 ‘가지고 있다’(ἔχω)는 동사의 합성입니다. (πρό, meaning "before" or "in front of" and ἔχω, meaning "to have" or "to hold")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προῃτιασάμεθα γὰρ Ἰουδαίους τε καὶ Ἕλληνας πάντας ὑφ’ ἁμαρτίαν εἶναι,
we already charged for Jews both and Greeks all under sin to be
직역하면 ‘왜냐하면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이미 선언했다’(προῃτιασάμεθα)는 부정과거 동사로서(we already charged) dlal 단호하게 선언한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προαιτιάομαι)은 ‘이미’(πρό)라는 접두어와 ‘발하다, 부과하다’(αἰτιάομαι)는 동사의 합성어로서 ‘사전에 고발하다’(accuse beforehand)는 뜻입니다.
맨끝의 동사(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항상 죄 아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우리는 나으냐’에서 ‘우리’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즉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똑같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 모세의 율법을 가졌다는 것이나 할례를 받은 언약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방인의 죄(1:18-32)나 유대인의 죄(2:1-3:8)를 논한 결론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죄의 지배 아래 종노릇하면서, 죄악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이 양심을 가지고 자신을 살펴보아도 죄인이고, 유대인의 율법을 가지고 자신을 살펴보아도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3-34.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2. 그렇습니다.
우리 인류는 조상 아담 이후로, 사단의 말을 따르는 죄악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의와 영생 안에 있게 됩니다.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New International Version: As it is written: "There is no one righteous, not even one;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ὅτι, Οὐκ ἔστιν δίκαιος, οὐδὲ εἷς,
as it has been written that, none there is righteous, not one
직역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기록된 것처럼’이란 뜻입니다.
‘기록된’(γέγραπται)이란 동사는 완료 수동태(it has been written)로서 이미 기록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없나니’에서 동사(ἔστιν)는 현재형으로서(there is) 언제나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10-18절은 구약 시편(시 14:1-3)과 이사야(사 53:1-3)를 인용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을 선언한 내용입니다.
즉 재판장이 법조문을 인용해서 죄인에게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10-12절. 죄의 일반적인 상태
13-14절. 말로 짓는 죄
15-17절. 행위로 짓는 죄
18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임
2. 이 구약의 인용구는 유대인을 압제하는 이방인의 죄악과 하나님의 보복을 지적한 것이지만, 바울은 이 성구에서 전 인류의 죄악상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3. 이처럼 인간은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절감해야만,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4. 좀더 구체적으로, 11-12절에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11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New International Version: there is no one who understands; there is no one who seeks God.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οὐκ ἔστιν ὁ συνίων, οὐκ ἔστιν ὁ ἐκζητῶν τὸν Θεόν·
none there is the understanding, none there is the seeking after the God
‘깨닫는 자’에서 동사(συνίων)는 현재분사로서(understanding) 깨닫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찾는’(ἐκζητῶν)도 현재분사로서(seeking) 찾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두 개의 ‘없고’에서 동사(ἔστιν)는 모두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there is) 언제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본 절은 시편 14편 2절의 인용인데,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고 멸망당할 자인 것을 절감하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은 죄를 절감한 자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양심으로나 율법으로 볼 때 영 죽을 죄인이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죄인인 것을 절감한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이방인이나, 자신은 율법으로 볼 때, 기도와 헌금이나 금식을 잘하는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율법주의 유대인은 거만해서 죄책감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를 비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11-14.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12절.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English Standard Version: All have turned aside; together they have become worthless; no one does good, not even one.”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πάντες ἐξέκλιναν, ἅμα ἠχρεώθησαν·
all turned away, together have become worthless
직역하면 ‘모두가 치우쳐 있고, 다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치우쳐’(ἐξέκλιναν)는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turned away) 확실히 치우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무익하게 되고’(ἠχρεώθησαν)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become worthless) 확실히 무익하게 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ἀχρειόω)은 ‘우유 같은 것이 변하여 못 먹게 된 것, 쓸모없게 된 것, 부패된 것을 가리킵니다( become sour, I turn, of milk), I am good for nothing, render useless; met: I become corrupt).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οὐκ ἔστιν ὁ ποιῶν χρηστότητα, οὐκ ἔστιν ἕως ἑνός.
none there is who practicing good, not there is as one
‘행하는’이란 동사(ποιῶν)는 현재 분사로서(practicing) 행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두 개의 ‘없다’(οὐκ ἔστιν)는 모두 현재형으로서(not there is) 언제나 하나도 없는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1.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란 인간의 성품이 모두 변질되어 악하고 부패된 상태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음식이 변질되어 못 먹게 되고 버린 것과 같이 인간의 본성이 부패되고 타락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2.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도 모두가 선한 행동이 없고, 모두 악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3. 이것은 칼빈(Jean Calvin, 1509~1564년)이 말한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4.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굽어 살펴보실 때, 마치 비행기에서 땅위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죄인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5. 10-12절은,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죄성으로 완전히 오염되고, 어두워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13-15절은 본성적 죄성이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타난 구체적인 죄악된 행동들을 말씀합니다.
13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English Standard Version: “Their throat is an open grave; they use their tongues to deceive.” “The venom of asps is under their lips.”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τάφος ἀνεῳγμένος ὁ λάρυγξ αὐτῶν,
grave having been opened the throat of them
‘열린’이란 동사(ἀνεῳγμένος)는 완료 분사 수동태(having been opened)로서 이미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ταῖς γλώσσαις αὐτῶν ἐδολιοῦσαν,
the tongues of them they are practicing deceit
‘속임을 베풀며’란 동사(ἐδολιοῦσαν)는 미완료 동사로서(they are practicing deceit), 계속 끊임없이 속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ἰὸς ἀσπίδων ὑπὸ τὰ χείλη αὐτῶν·
venom of vipers under the lips of them
1.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는 것은 시편 5편 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무덤에서 송장 썩는 냄새가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부패한 마음 속에 있는 악이 목구멍을 통해서 나와서, 다른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2. ‘혀로는 속임을 베푼다’는 것은 목구멍만이 아니라, 혀로 범죄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주로 남을 속이는 거짓말과 사기 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3.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다’는 것은 독사의 독이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독이 다른 사람을 헤치고, 명예를 홰손하고, 죽이기까디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4절.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New International Version: “Their mouths are full of cursing and bitterness.”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ὧν τὸ στόμα ἀρᾶς καὶ πικρίας γέμει·
of whom the mouths of cursing and bitterness is full
‘가득하고’(γέμει)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jis full) 가득찬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입에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는 것은 시편 10편 7절(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의 인용입니다.
‘저주’ (ἀρᾶς:cursing)란 남이 망하고, 병들고, 죽기를 바라는 것이고, ‘악독’(πικρίας: bitterness, harshness)이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남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2. 그런데, 이런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선량한 사람은 한번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자신이 괴롭고, 깊은 반성을 하게 되는데, 타락한 악인은 말로써 남의 영혼을 괴롭게 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고, 그런 악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모습입니다.
15절.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English Standard Version: “Their feet are swift to shed blood;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ὀξεῖς οἱ πόδες αὐτῶν ἐκχέαι αἷμα,
swift the feet of them to shed blood
‘흘리는 데’란 동사(ἐκχέ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to shed)로서 단호하게 피 흘리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13-14절은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가리켰고, 이제 15-17절 은 행동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본 절은 이사야 59장 7절(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의 인용입니다.
즉 악인이 말로만 남을 망하도록 저주할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달려가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3. 다시 설명드리자면, <우리 인간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은 썩은 송장 냄새나는 더럽고 악한 말이고, 혀는 뱀의 혀처럼 거짓말하고, 그 붉은 입술 밑에는 독사같이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든 인간은 말로써 추악하고, 거짓말하고, 영혼을 죽이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행동도 어디로 가든지 독사처럼 피 흘려 죽이는 행동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인간은 발걸음이 이르는 곳마다 피 흘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4. 이처럼, 말과 행동이 추악하고, 살인적인 인생길에는 파멸과 고생이 있고, 평강이 없다고 했습니다.
16절.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English Standard Version: in their paths are ruin and misery,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σύντριμμα καὶ ταλαιπωρία ἐν ταῖς ὁδοῖς αὐτῶν,
ruin and misery in the paths of them
1. 말로 남을 주저하고, 행동으로 피를 흘리는 악인에게는 파멸과 고생이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이 악하게 타락하여, 말로나 행동으로 악을 행하면, 그 자신이 파멸을 당하고, 그의 인생이 고생스럽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려는 곳이고, 지옥은 서로 미워하고, 해치려는 곳입니다.
즉 서로 사랑하고 돕는 가정이나 사회는 평화와 행복이 깃들지만, 서로 미워하고 해치려는 가정이나 사회는 불행과 고통이 있습니다.
17절.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English Standard Version: and the way of peace they have not known.”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καὶ ὁδὸν εἰρήνης οὐκ ἔγνωσαν.
and way of peace not they did know
‘알지 못하였고’에서 동사(ἔγνωσαν)는 부정과거로서(they did know) 확실히 알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1.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서로 말로 괴롭히고, 행동으로 해치는 일을 하는 사회에는 평강이 없이 불화와 미움과 다툼과 불행한 일들뿐이라는 뜻입니다.
이 ‘평강’(εἰρήνης)이란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안녕과 건강과 복지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peace, common wealth, health, welfare)
반대로 성령님 은혜 가운데서 이웃과 평화하면, 평안과 건강과 부요와 행복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18절.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English Standard Version: “There is no fear of God before their eyes.”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οὐκ ἔστιν φόβος Θεοῦ ἀπέναντι τῶν ὀφθαλμῶν αὐτῶν.
not there is fear of God before the eyes of them
‘없느니라’에서 동사(ἔστιν)는 현재형으로서(there is) 언제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본 절을 시편 36편 1절(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의 인용입니다.
2. 모든 죄악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서 나옵니다. (롬 1:18-2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치 않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남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3. 옛날 무식한 시골 농부도 번개만 쳐도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누가 악을 행하면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주먹을 휘두르며,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나와보라’고 하면서 악을 행합니다.
그러다가 그런 악인이 병들거나 죽거나 망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벌 받아 그런다고 합니다.
4. 모든 죄악의 원인이 18절에,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은 더럽고, 거짓되고, 악하고, 살기등등한 모습일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식할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롬 7:24)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할 수 있습니다.(롬 7:25)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6장 17-18절에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님을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죄성에 따라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살면, 모두 죄악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 따라 주님의 말씀 따라 살면, 의롭고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셔서, 갈라디아서 5장 16절처럼,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악된 삶을 살지 마시고, 성령님을 따라 의롭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190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 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로마서 3장 19-20절은 <죄론>의 결론이며, 21절부터 시작되는 복음의 서론격입니다.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을 진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분위기는 의사 앞에 환자의 모습이 아니라, 법정에 끌려나와 검사의 논고와 판사의 판결을 받는 죄수의 모습입니다.
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we know that whatever the Law says, it speaks to those who are under the Law, so that every mouth may be closed and all the world may become accountable to God;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이 말하는 바는
Οἴδαμεν δὲ ὅτι ὅσα ὁ νόμος λέγει
we have known now that whatever the Law says
‘알거나와’(Οἴδαμεν)는 완료형으로서(we have known) 이미 알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말하는’(λέγει)은 현재형으로서(says)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τοῖς ἐν τῷ νόμῳ λαλεῖ,
to those under the Law it speaks
‘말하는’(λαλεῖ)은 현재형으로서(it speaks)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ἵνα πᾶν στόμα φραγῇ
so that every mouth may be stopped
직역하면 ‘이는 모든 입이 막혀지게 하려는 것이다’는 뜻입니다.
‘막고’란 동사(φραγ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may be stopped) 단호하게 막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καὶ ὑπόδικος γένηται πᾶς ὁ κόσμος τῷ Θεῷ·
and under judgment may be all the world to the God
‘있게 하려 함이라’는 동사(γένηται)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may be) 확실히 심판 아래 있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1. 9-18절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든 인간의 죄악상을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지적했습니다.
이제 19-20절은 결론적으로 율법으로 인간이 죄인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본 절에서 ‘율법’은 원칙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고, 모든 유대인들이 죄인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방인도 불문율법인 양심에 비춰볼 때, 모든 이방인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3. 모든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볼 때, 모두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이방인도 불문 율법인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모두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의 지배를 받고, 율법을 어긴 자는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는 것이고, 율법 위에 군림할 인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페르샤에서 제정한 법률은 그 법령을 제정 공포한 왕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에스더 1:19, 단 6:12, 15)
이와같이 불문 율법을 가진 이방인들도 모두 양심법에 의해서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율법과 양심법을 주신 것은 심판에서 정죄를 받게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온 세상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고, 온 세상 사람은 율법에 의한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4. 율법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검사가 죄수를 고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법조문을 들어, 나의 죄상을 철저히 고발하는 검사의 논고는 끝없이 계속됩니다.
재판장이 피고인 나에게 묻습니다: <할 말 있는가?>
19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즉,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혼인잔치에 참여한 자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인이 묻습니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는가?>
그런데, <유구무언이어늘>이라고 했습니다.
입은 달려 있으되,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5. 우리 피고들에게 재판장의 선고가 어떻게 내려질 것입니까?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20절)
즉 모두 유죄판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즉,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율법의 정죄를 받아, 영원 지옥의 형벌에 처하여진 우리 자신의 운명이라는 말씀입니다.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ecause by the works of the Law no flesh will be justified in His sight; for through the Law comes the knowledge of sin.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διότι ἐξ ἔργων νόμου οὐ δικαιωθήσεται πᾶσα σὰρξ ἐνώπιον αὐτοῦ·
Therefore from works of Law not will be justified any flesh before Him
직역하면 ‘그러므로 어떤 육체도 율법의 행위들로 그 분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다’는 뜻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이란 동사(δικαιωθήσεται)는 미래 수동태로서(will be justified) 장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διὰ γὰρ νόμου ἐπίγνωσις ἁμαρτίας.
through for Law knowledge of sin
직역하면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지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1. ‘율법의 행위’는 ‘믿음’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행위’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지만, ‘믿음’은 성령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 ‘의롭다 하심’이란 법정에서 재판장이 의롭다고 승소 선고를 내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간이 의롭다고 법정 선언을 받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속죄를 받는 길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마음속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3. ‘육체’란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데, 모든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즉 인간은 모세 율법이나 불문 율법인 양심법으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5. 누구 앞에서 의롭다 할 사람이 없습니까?
(1) <그의 앞에서> - 즉,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
(2) 인본주의에 빠져서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6. 예화1: 유치장에 갇힌 죄수 전도
유치장 안에 갇힌 여러 죄수들과 유치장 밖의 자유인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어도,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것이고,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반대로, 사람 앞에서 죄 없는 자유민이라도, 예수님 안 믿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으로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7. 예화2: 탈북자들이 대사관 문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유와 삶을 얻습니다.
(1) 2002년 5월 8일 중국 선양 일본 총영사관을 통해 망명한 김광철씨 가족이 있습니다.
이들 중 5명은 중국공안의 저지를 뚫고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안들이 김씨의 부인 이성희(26)씨를 강제로 끌어내자, 이성희씨는 필사적으로 딸 한미(2)를 영사관 문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은 공안원들에게 끌려나오면서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들의 탈출은 생명을 내건 모험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북송될 것이며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경계선 그것은 영사관 안과 밖의 차이입니다.
(2) 이에 앞서 3월 14일 베이징에서 25명의 탈북자들이 스페인 대사관으로 진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난민자격이었고 정착하기를 희망한 곳은 남한 땅이었습니다.
이들이 대사관에 진입한 후 배포한 성명서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북한 내에서 경험한 극도의 절망감과 박해에 대한 공포로 인해, 앉아서 운명을 기다리느니,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중 일부는 중국 당국이 북한에 돌려보낼 경우에 대비해 자살을 위한 극약도 소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힘은 당신들에게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뿐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사연입니다.
(3) 타국에서 제 3국의 대사관을 피난처로 삼고 뛰어 든 후 실낱같은 생명을 맡기는 북녘 동포들의 처절한 행동에 우리는 목이 메입니다.
동시에 자유에 대한 소중함과 그 자유를 갈망하는 몸부림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숙연해집니다.
국제법에 따르면 대사관 안쪽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상대국 영토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면 상대국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탈북자들은 이 루트를 통해 남한으로 망명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최종 목적지는 남한 땅으로서, 이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들어가기를 원하는 천국과 같다 하겠습니다.
(4) 이처럼,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대사관 문 안은 생명과 자유이고, 대사관 밖은 억압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든 인간도 예수님 안에는 자유와 영생이고, 예수님 밖에는 억압과 영원한 죽음입니다.
8. 예화3: 기차 안에서 도망자 청년이 노인에게 자신의 무죄를 해명하고, 법정에서 무죄 판정을 받은 것처럼.
(1)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과 뭔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청년이 나란히 앉게 되었습니다.
기차가 출발한지 얼마쯤 지났을 때,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무슨 고민이 있는가? 나하고 얘기나 좀 하세”
청년은 흠칫 놀라면서도 이내 마음을 잡고 조용조용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선생님은 제게 도움을 주실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선생님은 처음 만난 분인데요. 하지만 제 마음이 답답하니 하소연이라도 하겠습니다.”
청년은 그제야 비통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여동생의 병원비를 마련하고자 공장의 두 친구와 경리실의 금고를 털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경비원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은 해치면 안 된다 약속했지만, 한 친구가 경비원을 쏘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살인자로 고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청년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내 말대로 하게 런던에 도착하는 즉시 경찰에 자수하게! 그리고 법정에 나가거든 지금 내게 얘기한 그대로 진실을 말하게!”
청년은 한사코 그럴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끈질긴 설득에 그 노인은 자수하고 재판을 받기로 했습니다.
(2) 며칠 후 청년은 두려운 마음으로 경찰에 자수하고 그후 법정에 섰습니다.
잘못했다가는 살인죄를 그대로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에 검찰의 공소장이 낭독되고 이제 청년이 진술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내심 두려웠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기차 안에서 정답게 대화하던 그 노인, 그 사람이 바로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미소를 띠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3) 결국 청년은 살인 혐의를 벗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도 미수죄로 집행유예 처분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절망에서 벗어나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이 청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이 청년은 노인 재판장에게 무한히 감사 감격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마귀가 검사처럼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죽음에 처해야 한다고 우리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그러나, 변호사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해서 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장 되신 하나님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9. 그러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20절 하반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못합니다.
율법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 갈라디아서 3장 2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기까지 몽학선생 노릇하는 것입니다.
(2) 로마서 7장 24-25절에서 말씀합니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1장 18절 - 3장 20절에 계속된 <죄론>을 통해서, 나 자신이 영 죽을 죄인임을 깊이 깨달으십니까?
정말 율법의 정죄 앞에, 철저히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통회자복 해보지 못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도 크지 못합니다.
질병의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치료의 기쁨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구원의 감격을 잃지 마시고, 늘 살아계신 하나님께 즉시 즉시 순종하고, 충성하십시오!
그래서, 은혜가 충만하시고, 풍성한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