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아는 스페인의 과달키비르 강 어귀에 있는 내륙 항구도시이다. 이곳은 문화 중심지로서,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을 지배했을 때의 수도로서, 스페인의 신세계 탐험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곳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았을 때에는 히스팔리스로 알려졌으며 서(西)고트족의 중심지였다가 711년에 무어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아바스 왕조 및 그후의 알모라비드와 알모아드 동맹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문화 중심지였다. 1248년 페르난도 3세가 이끄는 스페인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이슬람교도들이 쫓겨난 뒤 이 도시는 급속히 지위가 격상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이 도시는 새로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1503년 카사데콘트라타시온(무역관)의 설립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들과의 해외교역에 있어서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17세기에 들어서 교역업이 쇠퇴한 반면 문화활동이 활발해졌다. 이 도시 출신의 화가인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무리요와 조각가인 후안 마르티네스 몬타녜스, 시인 페르난도 데 에라라 등은 스페인이 자랑하는 예술가들로 꼽힌다.
18세기에 부르봉 왕조가 이 도시의 경제를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19세기에 일어난 프랑스의 침략, 혁명, 내전 등으로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1847년에 부활절에 이은 연례 축제로 4월 축제가 마련되었다. 1929년에 개최된 이베리아아메리카 박람회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며, 주변의 습지는 경작지로 개발되었다.
20세기에는 항구가 확장되었으며, 공업·상업의 요지로 다시 활력을 얻게 되었다. 주교관구로서의 지위를 이어오고 있으며, 대학교(1502 설립)가 하나 있다. 주요수출품은 포도주·올리브·과일·코르크·광물이며, 공업으로는 담배·무기·섬유·도자기·기계류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세비야 대성당(1403~1506 설립)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르네상스 양식),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네오르네상스 양식)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고딕 양식 성당 중에서는 세비야 대성당이 가장 크다. 1401년 성당 참사회의 “그 어떤 다른 성당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크게 지어 이 성당이 마무리되면 성당을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해야 한다.”라는 결정으로 무조건 톨레도 대성당보다 크게 지어야 한다며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짓기 시작해 105년 후인 1506년에 완공된 세비야 관광의 핵심이다. 대성당 종탑인 히랄다 탑은 오렌지 정원과 함께 유일하게 남은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의 한 부분이다. 17~18세기에 들어와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면서 여러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심 산
세비아 전경 ▼
세비아 광장 ▼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1929년 세비야의 이슬람 성과 도시 벽의 해체로 인해 형성되었다. 이 광장은 스페인어로 "Plaza de España"이라 불리며,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장소로 지어졌다. 1929년에 열린 스페인·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가 만들었다. 반달 모양의 광장을 둘러싼 건물 양쪽에 탑이 있다.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본관 건축물은 이슬람의 양식까지도 일부 혼합되어 있다.
주홍빛의 아름다운 건축물 앞에 위치한 대형 광장과 수로는 그 위용을 더해 준다. 2층으로 올라가면 광장 주변을 건물 테라스를 따라 걸으면서, 더 넓게 광장을 볼 수 있다. 양 끝의 탑이 있는 곳으로 가면 반대편 탑 건물이 한눈에 보이면서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가 나타난다 이스파뇰 광장은 많은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김태희의 CF의 촬영지로 사용되어 어 유명세를 탔다.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2: 클론의 습격"의 일부 씬이 이 광장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세비야 대성당 ▼
세비아성당 히랄다 첨탑▼
1198년 이슬람 사원의 탑인 미나레트로 세워졌지만 세 번의 증축을 거치면서 높이 98m의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히랄다 탑은 계단이 없고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도록 되어 있는데 이슬람 시대에는 미나레트를 오르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탑 정상에 오르면 세비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장관이 펼쳐진다. 28개의 종이 매시간 아름다운 소리로 종을 연주하는데, 축제 기간에는 종이 360도 회전하면서 엄청난 소리를 낸다. 탑 꼭대기에 한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깃발을 들고 있는 여인상은 ‘엘 히랄디요’라고 하는데, ‘엘 히랄디요’는 ‘바람개비’를 뜻하는 말로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처럼 회전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히랄다탑 풍향계▼
대성당 내부▼
세비아 대성당 박물관 성물 (聖物): 성물은 종교 의식에 쓰는 여러 가지의 신성하고 거룩한 물건을 말한다. 십자가, 십자고상, 묵주, 성모상 따위와 미사 제구들이 여기에 속한다.중세 시대 남미에서 많은 금과 은을 가져와 성물제작에 사용되었다 ▼
세비아 메트로폴 파라솔(햇빛가리게)▼
세비아 전경▼
왕궁 건물 - 대사의 방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가면 이와 아주 유사한 건물이 있다.▼
오렌지 정원 ▼
히랄다 탑과 함께 옛 이슬람 사원의 일부가 남아 있는 장소다. 정원 한가운데 있는 중앙 분수대는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드리기 전 손과 발을 씻었던 곳으로 고트족 시대에 만들어졌다. 정원을 통과하면 대성당의 출구인 ‘용서의 문(Puerta del Perdón)’이 나타난다. 용서의 문을 빠져 나가면 재입장이 불가하니 나오기 전 놓친 곳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대성당 중앙 제단(Capilla Mayor)▼
1480년부터 1560년까지 무려 80년 동안 제작된 높이 27m, 폭 18m 크기의 화려한 중앙 제단 장식은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남미의 황금과 은으로 제작되었다.
세비아대학교▼
대성당 내부▼
콜럼버스의 묘(Sepulcro de Colón)▼
1492년 망망대해를 건너 서인도 제도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유럽인이 볼 때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다. 다만 아메리카 원주민 입장에서는 대량학살을 일으킨 악마로 인식됐다. 지금도 엇갈린 평가가 계속되는 콜럼버스는 최후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이탈리아인인지 바스크인인지 포르투갈인인지 출생마저 불분명하다.
호세 연구원은 "콜럼버스는 죽은 뒤에도 복잡한 경로를 여행한 드라마틱한 인물"이라며 "콜럼버스가 1506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죽자 형제 디에고가 시신을 스페인 세비야로 운구했다. 1542년, 역사적인 항해 50년을 기념해 유해는 도미니카 산토 도밍고 대성당으로 다시 옮겨졌다"고 전했다.
콜럼버스의 유골은 1795년까지 산토 도밍고 대성당에 안치됐다가 스페인이 도미니카 공화국을 잃자 쿠바로 이동했다. 거기서 1세기를 보낸 뒤 유골이 세비야로 돌아왔다고 여겨진다. 콜럼버스가 평생 여러 곳을 탐험했듯 죽은 뒤 유골도 계속 이동했기 때문에 마지막 안식처를 특정하는 것이 어려웠다.
호세 연구원은 "1877년 산토 도밍고 대성당에서 '저명하고 뛰어난 영웅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문장이 들어간 납 상자가 발견됐다"며 "상자에 든 뼛조각 역시 DNA 검사를 통해 세비야 대성당의 것과 동일하게 콜럼버스의 것일 가능성은 얼마든 있다"고 역설했다. 이어 "콜럼버스는 미국에 지대한 영향을 준 탐험가지만 사실 북아메리카 본토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고 최초라는 수식어도 붙일 인물이 아니다"며 "이런 사실이 끈질긴 조사를 통해 밝혀졌듯, 그의 유골을 특정하는 작업은 미스터리한 콜럼버스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대성당 내부▼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