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 나는 미치도록 나에게 반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여성 예술가 8인의 삶과 자유)
저- 주자네 헤르텔, 막달레나 쾨스터
출-들녘(2004.6.20.311쪽)
독정-2019년 2월 1일
· 마들레네 디트리히
1940년대 헐리우드 최고 여배우. 베를린 카바레 가수로 활동하다 연극과 영화에 출연 <푸른 천사>로 데뷔<상하이 특급><모로코>등. 2차 대전 반나치 투쟁에 뛰어들어 전쟁터로 여행. 90세로 명성 남김
· 엘레오노라 두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연극 배우. 네 살 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 역. 세익스피어 <로미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 이후<테레즈 라켕> <인형의 집>에서 노라 역
엘레오노라가 손님들에게 인형을 선물로 받았는데 떠날 대 그것을 손님들 방에 도로 가져다 줘서 이유는 ‘최소한 그 인형이 잘 지내기를 ,계속 옮겨 다닐 필요 없도록 하려고.“했다.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약간 아래쪽으로 뻗은 속눈썹은 변화무상한 얼굴 놀란 표정, 의문에 찬 표정, 승리의 표정, 절망 표정 등 다양한 모습이다. 내용에서 별로 중ㅇ요치 안흔ㄴ 그을 요하지 않는 역에서도 종종 내면적 성실함으로 무대 위에서 억지로 꾸민 부자연스러움을 없애주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특정한 상황에 목소리를 높여야만 하고 과장되게 행동해야 하지만 그는 기쁨이나 고뇌에 사로잡힐 때 자주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거의 속삭이듯이. 분장실에 세워 둔 옷걸이에는 나무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이 있고, 세 개의 의자에는 다리가 7개 반밖에 없고, 벽지는 좁은 줄므늬나 찢어진 채로 너덜거리는 상태. 나는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가 훌륭하여 마치 그녀의 말을 모두 다 알아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껏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두제를 보았을 때 나는 우리가 러시아 극장에서 지루해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마리 바그만
독일 현대 무용가. 리듬교육 창시자인 자크달크로즈와 자연주의 자유 무용가 루돌프 폰 라반에게서 사사. 1920년 처음 무용학교 개설 <마녀의 춤> 비롯 <봄의 제전> 등 100편 넘는 작품 창작. 2차 대전때 나치에 쫓겨 고국을 떠나 1949년 서베를린으로 돌아와 1953년 독일연방 훈공 심십자상 받고 저서 <춤의 언어> 발간
초원이 끝나는 다른 편에 짧은 바지화 흰 셔츠 입고 한 손에 북을 쥔 남자. 몇 명의 소 녀들과 한 명의 난쟁이가 운동하고 있고 나는 매혹되어 꼼작 않고 지켜봤다. 라반이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나요?” 나도 함께 하고 싶다하자 덤불 뒤에서 옷 벗고 이리와 어울려라 했다. 마치 집에 온 듯 편안했다. 그녀는 나무집 오두막에서 잤다. 초원에는 공동 샤워대가 있고 빗물로 채워진 물통이 나무 사이에 걸려 있다. 사람들이 그 밑에 서서 끈으로 마개를 열어서 상사용했다. 몽베리타에서의 삶은 자연친화적이었다.
다다(DADA)는 시민 질서를 뒤흔들고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을 감행하려 하며 위계질서를 거부, 전승된 전통보다 새 단어와 문장을 만들고 문법이나 논리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운동. 모든 재료는 세속적인 일상 세계의 것이라도 그들은 예술적 가치가 있게 과격하게 구상. 자유 무용 역시 옛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나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일은 보람이다. “너는 해야만 한다. 너는 해야만 한다. 너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니?” 이게 나의 최고의 욕망이었다.
·자유 추구 사진 작가-지젤 프로인트
그가 한 밤중에 은밀하게 전화하여 자기에게 모든 네거티브 필름을 넘기라고 명령했을 때 그녀는 다음 비행기로 너무나도 적절하고 정확한 순간에 그 나라를 떠났다. 이것은 그녀 인생에서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언제 내가 그 자리에서 사라져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을 그럴싸하게 보이고자 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 나는 그 말들을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 남자들에게 행운을 얻으려 한다면 스스로 멍청해 보여야 한다.
·마가레테 쉬테 리호츠키-최초 여성 건축가
20세기 초 여성 건축가로 1926년에 프랑크푸르트 박람회에서 조립식 주방 설비를 갖춘 부엌 설계로 부엌 건축가라는 명성 얻음 1940년 독일에 체포되어 1945년 석방하여 겪었던 충격을 <저항의 기억> 출간. 셰계 평화 운동 공로상 수여받음.
군것질 거리를 파는 시장과 아주 가까웠다. 무릎 위에 고양이를 앉히고 태양의 온기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즐긴다. 아래 보이는 모퉁이를 돌면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각종 레스토랑이 있다. 그는 카메라를 보고 웃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에는 재킷을 헐렁하게 걸치고 티롤 모자를 뒤로 넘겨쓰고 있다.
그녀가 개발한 이주자 통나무집. 즉 순전히 나무로만 제작된 집을 보면 이 집은 사다리로 연결된 식당과 침실이 딸린 작은 공간을 아주 잘 활용. 이 설계도에 따라 궁핍으로 고통받는 이주자들이 협동조합을 원하는 ‘건축자재조합’의 후언으로 최단시간 안에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 뼈대 집은 후에 제대로 된 집을 짓기 시작할 때에는 축사나 헛간으로 개조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안내나 건축보조금을 받았다. 공간 절약 붙박이 서가와 가구, 접는 테이블, 개조된 창문, 부엌에 있는 작은 욕조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이주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가재도구를 살 돈이 없어 쉬테 리호츠키는 상품신용거래처나 대형가구회사로부터 대량구매 할인으로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런 그에게 에른스트 마이가 그녀의 논문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도시주거시설을 세울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빛, 공기, 태양이 모토였고 지그재그주택을 세웠다. 모두 남향이고 일렬이 아니라 지그재그 형태로 변화를 주며 지은 연립주택들이다 측면에 추가로 붙은 창문은 옆 방향으로 환기가 잘될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로는 중요한 위생 조치였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택을 지을 때부터 주부와 점점 더 늘어나는 직업여성의 가사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 가지 질문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양한 부엌 모델을 개발해 프랑크푸르트 부엌으로 박람회에 출품 ”나는 체계적으로 일하는 늙은이다. 스톱위치를 가지고 뛰어다녔다. 밀리미터까지도 헛되이 버리자 않았다. 결국 붙박이장을 만들어 바닥 면적을 30% 절약했다. 그는 키 크고 마른 남자로 이마가 넓고 머리카락 밝은 색깔이었다.
출소해서 쓴 <저항의 기억>책-내가 비겁하고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던 거짓말이 미덕이 되었다.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이 되었다. 이 책은 내가 이제껏 쓴 책으로 나는 오스트리아의 저항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일로 목숨을 잃은 사실을 반드시 상기시키고 싶었다. 빈의 주 법원에서 때로는 하루에 70명이 처형된 사실을 오늘날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판결이 있은 후에 국사범은 여성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촌 4년을 참았다. 뻣뻣해진 모포 대문에 옴이 올랐고 형편없는 조명으로 눈이 나빠졌고 머리카락은 한 줌씩 빠졌다. 나는 어떤 음식이든 맛이 아무리 끔찍해도 무조건 먹어야 했다. 독방에서 수감 중 화장실 수도관에서 물이 흘러나갈 때 다른 방 누군가가 변기통에 대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소련에서의 여성 지위에 대해 강연을 했고 국제노동자동맹 노래를 불렀다. 악몽은 자유 몸이 되었을 때도 군다. 감옥에 있을 때 행복한 연대, 사랑과 우정 안에서 누리는 행복, 먼 나라에로의 여행 만족스런 작업 활동을 꿈꾸었다.
주택산이라고 부른 주택 형태. 녹색 발코니와 태양이 비치는 공간의 테라스 형태로 지어진 고층 건물이 미래의 주택이 될 것이라 예언한다. 줄어들지 않는 호기심을 가진 10세 노인의탁월한 특성. 매 저녁 시간마다 말하는 손목시계가 ‘20시입니다’라고 할 때면 수고양이에게 밥 주고 텔레비전전의 뉴스 프로그램을 켠다. 2000년에 사망
· 엘지 스키아파렐리(1890~1973. 패션 디자이너)
그리스 신화에 이끌렸고 천일야화의 나라를 보았다. 환상 속에서 중국으로 탐험을 떠난 중세 마르코 폴로를 따라갔다. 그녀 무늬가 그려진 빛나는 장밋빛 천을 걸친 페루 여인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국립도서관에 넘긴 도서관에서 보호받는 느낌 자신이 항상 책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코르시나 궁전에 그려진 그림들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메마르지 않는 환상의 원천이 되었다.
그녀는 싸웠다. 자존심과 싸우고 우울증과도 싸웠다. 눈에서 새 빛이 빛나거나 이마에 보이지 않는 장엄함의 자취가 있는 남성들과 지식욕과 따뜻한 마음, 유머에 매료되어 그들은 그녀에게 정신적 고향보다 더 많은 평생의 우정을 선사했다.
자신의 첫 아틀리에를 마련해서 이사했다. 1927년에 첫 패션쇼를 열었다. 사진작가 조르주 후아닝엔 위엔이 프랑스 <보그>지의 청탁으로 그녀의 옷을 입은 모델들을 연출한 사진을 싣자 고객들이 그녀 아틀리에로 몰려들었다. 식민지에서 예술 자극들을 받아들인 아프라키풍 무늬들과 뒤섞였다. 스키아파렐리가 디자인한 몸에 꼭 끼는 검은 스웨터의 칼라에 뜨개질로 만든 실물 같은 나비를 달았다. 40점을 2주 내에 보내달라는 미국 백화점의 대규모 주문으로 사업이 번창했다. 어깨가 드러난 검은 야회복에 검고 긴 닭의 깃털로 시선을 낀 캐서린 햅번. 마에 우웨스터 같은 헐리우드 스타들이 살롱에 모였다. 투박한 가르손(남자같은 여성) 스타일, 세련된 산순함, 샤넬 모드의 슬픈 색상은 끝났다. 적어도 섬세한 수줍음에 만족 않고 우아함을 비웃으며 취향이 있지만 노예처럼 ㄸ끌려 다니려 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여성들 가슴선을 강조하거나 물고기 꼬리 형태의 옷자락이 있는 극적 느낌을 주는 야회복을 다자인 했다. 옷감에는 큰 나비들을 염색해 넣었고 자수를 놓은 연회복은 뒤쪽으로 주름 잡아 입는 시간에 띠라 길게 또는 짧게 입을 수 있도록 했다. 혁명적으로 남성 외투를 디자인. 금으로 만든 긴 손톱이 붙은 검은 장갑이 딸려 있고 멀리서 보면 진짜 곤충이 외투를 입은 사람의 목 주위를 기어다니는 것 같은 인상 주는 곤충 목걸이를 달았다. 그는 라임빛 자극적 붉은색과 밝은 삼홍색을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내세웠다. 쇼킹핑크라 이름 붙이고 그녀 상표로 삼았다. 최신 발명품 중 하나인 지퍼를 고급 의상에 사용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디자인한 것으로 어릿광대, 나비, 달러 기호 모양을 본뜬 단추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샤넬이 고전적이면 그는 바로크적이었다.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그녀가 결코 들으려하지 않는 단어였다.
전쟁이 더 다가오자 그는 낮은 구두와 허리를 조절할 수 있는 스커트를 내놓았다. 미스터리 스커트와 톱니 모양의 달걀껍질 형태로 마름질한 깊게 파인 목선. 그녀의 견본 의상들은 문화유산이 되어 박물관과 전시회에서 본다. 1984년 파리 패션 및 의상박물관은 엘자 스키아파렐라에게 대규모 전시회를 헌정했고 몇 해전에는 그녀 작품들이 뉴욕에서 전시. 그녀의 유명한 향수 ‘쇼킹’은 아직도 파리에서부터 전 세계 애호가에게 발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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