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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1982.01.04. 엄두섭 목사
로마서 3장 9절 공동번역 가지고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유대인이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대인 들이나 이방인 들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삐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도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
내려가서 19절.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아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놓아주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거기까지 구원 얻는 문제에 관계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서 당신은 구원을 얻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즉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기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분명한 증거를 찾습니다. 그런 분명한 증거가 자기에게 별반 없을 때에는 자기가 구원 얻었는지 아직 얻지 못하였는지 구원여부에 대해서 스스로가 회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신자들 중에는 예수를 믿고 명백한 어떤 체험 어떤 증거를 얻은 이들도 많습니다. 가령 기도의 응답을 잘 얻는다든지 또 그 밖의 영적 특별한 은사를 받고 있다든지 혹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든지 그런 이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야곱 베네라고 하는 그 런 분의 일생을 보면 그분의 일생은 기적이 계속되었습니다. 또 베네는 혼자 있을 때 며칠 동안 빛이 와서 그를 덮어주는 그런 체험도 있었습니다. 또 야곱 베네는 세상을 떠날 때에는 이상한 하늘나라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듣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과 같은 이는 예수를 자기의 육신의 눈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기도하기 시작해서 한 20분만 되면 입신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 구경도 하고 어떤 때는 지옥 가서 구경하기도 하고 그런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퀘이커 파 라고 하는 교파를 세운 죠지 폭스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에 오는 빛을 분명히 체험한다고 했습니다. 내적 빛이라고 내적 조명이라고 그분은 불렀는데 그래서 폭스는 자기 교파의 교인을 빛의 체험을 얻어야 된다고 했기 때문에 빛의 아들이라 그렇게 불렀습니다. 또 유명한 거지 수도한 거지성자 분도 라굴 같은 분은 깜깜한 방에 성당에 들어가서 아무 불도 켜지 않은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으면 라굴의 머리에서 빛이 나고 전신에서 빛이 나고 그랬습니다. 영국의 뮬러라고 하는 분은 4만 가지 이상의 기도의 응답을 받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렇게 명백한 체험과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 분들이 많지만 우리나라 교회 역사라든지 초대교회에 사정을 보면 초대교회에는 카리스마라고 하는 말을 쓰기도 하나님의 선물 특별한 능력 받는 것 초대교회에는 그런 카리스마 적인 것이 분명 있었습니다. 신비적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비적인 체험 그런 체험 적인 거 요새 우리 한국교회에서 체험적인 신앙이라는 말을 쓰는 게 많이 있는데 초대교회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과 증거를 예수 믿으면서 이런 증거를 가진다는 것은 확실히 우리가 힘을 얻는 일이고 또 우리가 영적 기쁨 체험 얻을 때 황홀한 지경에 들어가는 그런 재미가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성경에 마가복음 16장 16절에 거기에 하신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또 병자에게 손을 얹은 즉 병이 낫는다고 성경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봐도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하는 말씀도 있고 또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8장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 보면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 혹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행하는 예언 여러 가지 영을 분별하는 방언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제가 말하는 이런 영적 체험 이런 증거가 있습니까?
이런 아무체험 예수 믿는지는 오랜데도 아무체험도 없어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성경에는 성령 충만에 대해서도 성령 충만과 은사와 능력 을 사모하라고 사도행전 첫머리에 보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성령 충만의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흐리멍덩하고 애매한 것이 아니라 명백한 체험입니다. 우리들에게 그런 명백한 체험이 있느냐 말이지요. 이런 증거를 받는다든지 체험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필요하고 신앙생활에 격려가 되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에 많은 부흥사들이라든지 혹은 기도원에 있는 권사님이라든지 그런 분들이 언제나 이것을 강조하지요. 체험을 얻어야 한다든지 체험적인 신앙이라든지 이런 것을 강조하고 자랑하고 자기는 이런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또 그러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을 몹시 갈망을 합니다. 한동안 박태선씨 바람이 불고 돌아갈 때에 그것을 많이 모두 체험적인 신앙이라고 불 불이 내려오는 것이 사진에 찍혔다고 그러고 피 가름을 한다고 그러고 안찰한다고 그러고 여러 가지 그런 거 요즘도 부흥사 가운데 박덕종 목사 그런 분들 방언을 못하면 구원 얻지 못한다고 그런 소리 하고 다니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자기가 책임을 지고 방언을 줄 수가 있다 이런 이야기도 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런 체험이라든지 어떤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신용할 수가 없고 그런 체험을 하던지 그런 무엇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 얻었다고 하는 구원의 보증이 되지는 못합니다.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만 그런 이상한 체험을 한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영들이 여러 가지 영이 많이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이상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에게도 불교의 고승들에게도 이제 야곱의 하늘나라의 음악소리를 들었다하는 이야기가 비슷하게 어떤 불교 고승들이 문수보살이치는 석종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별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그런 기적적인 것이라든지 이상한 체험 자체를 기독교인들이 얻는 체험 자체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런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구원 얻는 문제하고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보면 마태복은 7장 22-23절에 예수님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쫒고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했지만 주님의 대답이 밝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또 누가복음 17장 15절에 보면 열 문둥이가 예수님께 나와서 참 이적으로 문둥병이 다 나았는데 주님으로부터 기적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구원 얻은 문둥이는 한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 이상한 그런 이야기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인도에 요가 하는 사람들에게도 별 신통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도의 벵갈주에 있는 어떤 요가행자는 60년 동안에 한 방울의 음식도 안 먹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도 있어요. 또 어떤 요가행자들은 산 사람이 큰 마대자루에 들어가서 마대 아구리를 묶어놓고 그대로 땅속에다 파묻어서 한 40일씩 한 달씩 있다가 그 무덤을 파내가지고 다시 살아나는 가사 상태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그런 이상한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 어떤 무슨 체험이라든지 기적적인 그런 것을 우리가 체험 얻는다고 하는 것은 힘도 되고 기쁨도 되고 격려도 되고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체험 얻는 것이 영적은사 축복이라고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그런 체험이 구원을 얻었다는 그의 영혼이 구원 얻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는 신앙이 있고 구원을 얻는 신앙이 있는데 기적의 신앙이 곧 구원의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기적을 행하는 신념,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신념 믿는 신념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는데 먼 거리에 촛불을 세워놓고 신념의 힘으로 촛불의 불을 끄기도 하고 댕기기도 하고 그런 뭐 신념의 놀라운 힘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신념과 신앙은 꼭 같은 것이 아닙니다. 초능력을 행하는 것은 정신 감응력 그것을 요새 텔레파시라고 하는데 텔레파시 정신력이나 신념의 힘으로도 할 수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적 기사를 행 하시면서도 보고 믿는 자 보다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 그런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증거 기적 이상한 일 그런 것이 꼭 있어야 구원 얻은 것이고 그런 것이 없으면 이거 구원 얻은 건지 못 얻은 건지 흐리멍덩한 거 아니라고 하는 거 먼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그다음에 두 번째로는 우리 행위 구원 얻을 만한 착한 행위를 우리가 할 수 있느냐? 모든 종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모든 종교마다 요렇게, 요렇게 살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우리 구약의 율법과 같은 것이 있어요. 그 계명이 있고 상선벌악 선을 행하는 사람 상을 받고 하나님 앞에 상을 받고 악을 행한 사람은 천벌을 받는다고 하는 그 상선벌악을 가르치는 윤리 도덕적인 교훈이 어떤 종교에든지 그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착한 행실을 많이 하므로 선행의 공덕을 많이 쌓아서 구원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마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런 줄 압니다. 성경에 야고보서 2장 26절에 보면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거 있고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22절에 보면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죽 이렇게 말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 그렇게 갈라디아서 5장에도 말씀했습니다. 참 그분이 참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열매는 착한행위인데 그런데 오늘 여기계신 여러분들에게 착한행실이 있느냐? 여러분들이 스스로 나는 착한 행실을 하고 있느냐 선행이 내게 있는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의 생활에는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이들이니까 현재 성신의 그 아홉 가지 열매가 여러분들에게 맺어가고 있습니까? 사랑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까? 너그러운 관용이 있습니까? 자비가 있습니까? 양선이 있습니까? 충성이 있습니까? 온유가 있습니까? 절제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전혀 아름다운 행실이 없는데 착한 행실이 없는데도 그런데도 구원 얻을 수가 있겠느냐? 구원, 구원 우리가 쉽게 말하지마는 구원, 구원 쉽게들 말하고 다니지마는 하나님나라는 도무지 착한행실도 살지 못하고 인간쓰레기들을 갖다놓는 저장소는 아니지요. 하나님 앞에는 거룩하지 못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못합니다. 의인만 의인만이 구원 얻습니다. 의인만 구원 얻는데 하나님 앞에는 의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 율법에 의한 의 가있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의 의 이 두 가지밖에 없는데 이 두 가지 사이에 중간적인 것은 없습니다. 중간무리 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그리스도인의 의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얻는 의 그리스도인의 의 그것이 복음적인 의인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의 의에 대해서 의심이가고 의혹을 일으켜서 거기에서 벋어날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어디에 몰려 가냐 하면 율법적인 의 그것은 자기로 의로 되려하는 자율적인 의인데 그 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또 반대로 자기 힘으로 의를 얻겠다고 하는 율법적이고 자율적인 의에 대해서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절망한 사람들이 가는 곳은 그리스도적인 의를 붙잡게 그렇게 말해야 되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보면 거기 바울이 한 말 가운데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그런 복음 하나있고 또 그 아래 내려가서 또 다른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는 말을 또 하나 썼어요.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과 또 다른 복음 운운하는데 다른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적으로 자기가 뭘 잘 지켜가지고 하겠다는 자율적인 의인데 이런 다른복음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인의 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온 그 복음이 아니라 다른복음 율법적으로 자율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의 그런 것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울은 서슴치 아니하고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게 바울이 거기다가 가혹하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는 너희는 그리스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율법적인 의를 요구하시지마는 인간들은 도저히 그 의를 하나님 앞에 그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는 끊어지고 은혜에게서는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얻는 의는 의롭다함을 얻는 거 그것은 칭의라고 그러지요. 의롭게 한다. 의롭다라고 불러준다. 칭의라고 하지요. 이 칭의는 의롭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칭의는 믿음과 행위를 섞은 믿음과 행위의 혼합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이 구원은 믿음 보태기 뭐 다른 거 행위라든지 착한 행실이라든지 그 영어에 앤드(and) 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믿음 프라스 앤드(and)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믿고 또 선행을 해야지 구원 얻는다. 그것은 성경에는 그런게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혜택을 입으려고 할 때에는 자기의 의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기는 전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의로 옷 입는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상태를 얻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자로서 인정을 받아요. 그것을 칭의라 합니다. 의롭다 칭해준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해준 것 같습니다만 평양에 모선교사가 자기 자가용 승용차를 운전하고 시골길로 운전하고 가는데 어떤 한국 부인이 머리에다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여름에 땀을 찍찍 흘리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선교사가 그 부인 곁에 가서 자기 차를 세우고 부인 뒷자리가 비었으니 들어가 앉으시오 그래서 그 부인이 선교사 차를 타고 뒤에가 앉았는데 선교사가 운전하고 한참 가는데 뭐 뒤에서 숨이 차서 야단치고 야단치는 소리가 나서 그래서 선교사가 뒤를 돌아다보니까 그 부인이 그 차안에서 머리에다가 그 짐을 그냥 이고 앉아있더라고 그러니까 걸어가기보다 더 힘들다. 그래서 선교사가 아니 부인 그 짐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앉지 왜 차안에 앉아서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앉았느냐고 그러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아이고 나만 앉는 것도 미안한데 그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겠느냐고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고 그 믿음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고것이 어딘가 모자라는 것같이 여겨져서 거기다 자기의 무엇을 자꾸 보태려고 하는 인간의 선행이라든지 공덕이라든지 뭐인가 보태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 구원이라는 것은 사랑의 행위 착한 것이라든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라든지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든지 우리가 무슨 공을 쌓는 일이라든지 또 불교 믿는 사람이라면 바른 깨달음 무상정각 이라든지 또 고행을 하는 일이라든지 무슨 수도하는 일이라든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믿음에다가 인간의 어떤 행위를 보태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라 그 말씀입니다. 믿음으로만, 믿음으로만 우리의 사람의 인격가치가 그 사람이 얼마나 바로 사는가? 그 인격가치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육이 있고 인격이 선량하다는 그 인격가치가 그것이 그 사람이 참 뛰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인격, 인간의 장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인 이라고 하는 것은 몇 백 년에 한사람 날까말까 한 것이고 위대한 수도사라고 하는 것도 수십 년에 한사람 어디 가서 참 수도사다라고 저는 발견한 적이 어려워요. 또 불교 말하면 부타가 된다.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부타가 된다. 는 그런 사람 만나겠다고 하는 거는 뭐 수십 세기에 한사람 날까 말까 하는데 이렇게 수억 만 명 가운데 한사람 날까말까 한데 그렇게 해 가지고 성인이 되서 구원 얻는다. 위대한 수도사가 되서 구원 얻는다. 부타가 되서 구원 얻는다고 하면 그렇게 구원 얻을 사람이 인류역사 가운데 한 너 댓 사람 될까 하지마는 도저히 인간이 그렇게 해서 구원 얻을 가망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모조리 구원 얻을 가망이 없는 것이지요. 거룩한 성인 효자 착한행실을 한사람 많은 고행을 한사람 물론 그런 사람들은 거룩한 성인이라든지 착한일 많이 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상급과 영광이 있지요. 영광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인간세상 가운데서 성자라고 불리고 효자라고 불린다 할지라도 선행을 많이 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죄인입니다. 그들도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으므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자기의 의로 자기가 얼마나 거룩하게 살고 자기가 얼마나 착한 행실을 하고 자기의 의로 구원 얻지는 못합니다. 고행하고 정진하는 수도하는 사람들 그런 일 많이 있지요. 끊김.
턱밑에다가 송곳으로 대고서 참선한 거지요. 백일동안 용맹정인을 하는데 백날동안 자지 아니하고 자리에 눕지 아니하고 용맹정진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금욕을 한다든지 고행한다든지 그런 일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육체의 연단은 되는 줄 압니다. 또 정신력을 의지력을 길러서 육체를 지배하고 정욕을 억제하는데 효과가 있고 또 혹은 예수 믿는 사람가운데 성화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 방법이 되는 줄 압니다마는 그러나 고행을 하고 무슨 용맹정진을 하고 그런 이들이 행위 행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는 그 행 자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고행주의자들의 치명적인 결함은 갈수록 더욱더 일어나는 마음속의 죄악을 느끼는 점입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 하는데 옛날 양 도천 목사 그분이 자기의 국부를 다 잘라버리고 40일 금식도 여러 번 하고 많은 고행을 한 분이지요. 그러나 결국 지금은 사교의 교주가 되고 산에 들어가서 황국궁이라 간판을 붙이고 흰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국부를 잘라버리고 고자 된 사람이 결혼까지 하고 고행주의자의 치명적인 결함은 마지막에 그 고행자체에 행 자체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구원 얻을 행위를 가지고 구원 얻겠다는 그런 이야기는 가능하지 못한 이야기지요 우리는 자기가 죄인인줄로 솔직히 자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회개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한 죄를 회개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죄 갚음에 대한 참회의 생활도 우리가 해야 되는데 어거스틴의 회개록이 든지 이지프트의 성자가 자기 잘 못을 회개하기 위해서 요단강 기슭에서 일생을 자기 몸이 쌔까맣게 타들어 가도록 회개했다는 그런 이야기처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 회개도 회개하는 일도 아무리 철저히 회개한다고 해도 회개해서 구원 얻을 만큼 철저히 회개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 완전히 회개하고 구원 얻은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그러니까 우리가 의롭다하므로 얻는 기본적인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고 기본적인 구원 얻은 이들이 그 행위에 성화되어서 구원 얻는 성화는 하나님의 성령에서 오는 것인데 로마서 4장 5-6절에 말씀하기를 이를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심을 믿는 자에게는 그에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러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랬습니다. 이를 아니할 지라도 별로 행함이라든지 남긴 공이 없다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심을 믿는 자에게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롭다 여기시나니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로마서 4장 5절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경 가운데 요한복음 8장 3절로 11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거기에 우리가 많은 감격을 느끼는 기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던 여자를 현장에서 잡아끌고 예수님 앞에 모여온 유대 서기관들과 바리새교인들인데 그 간음하던 여자 수치스럽고 더럽고 그 간음한 여자에게는 착한 행실을 한 것이 물론 없고 그 더러움 부끄러운 추행 그 음녀가 그대로 예수님 앞에서 용서받고 구원 얻었다는 그런 이야기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여자를 머리채잡고 끌고나와 예수님 앞에 와서 돌맹이를 한두 개씩 모두 들고 예수님 앞에 그 여자를 끌고 나와서 바리새교인들이 질문하기를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구약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예수선생 당신을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렇게 계속 질문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고 땅에다가 무슨 글씨를 쓰시고 그리고 일어나서 소리쳐서 말하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가장 엄격한 종교인 유대 율법주의자들도 모두가 바리새 서기관 들이 모두가 그놈이, 그놈이 돼서 어느새 하나 둘 도망쳐 빠져버리고 마지막에 그 여자만 가운데 남아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패배한 그런 기록이지요.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바리새교인들도 돌맹이 들고 왔지만 치지도 못하고 다 도망갔습니다. 또 요한복음3장 1절 이하에 보면 유대교회에서 율법적으로 존경을 받는 가장 인격자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 나왔습니다. 그 니고데모는 상당히 존경을 받는 대 인격자인데 그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에 니고데모의 인격가치라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단 1점의 점수도 따지 못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또 성경가운데 누가복음 15장 11절 그 이하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구약의 모세 율법주의를 비판하는 그런 뜻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줄 압니다. 또 탕자의 비유는 가장 뛰어난 복음적인 비유인데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허랑방탕해서 짐승같이 된 그 탕자가 마지막에는 돼지 먹은 쥐엄 열매를 먹는 그렇게 짐승같이 된 탕자가 그 처지에서 그대로 구원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 탕자가 허랑방탕하고 돌아다니다가 그 꼴이 되 짐승같이 되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 참혹한 탕자의 모양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짐승 같은 놈의 새끼 어디라고 그 꼴로 아버지 앞에 찾아왔느냐? 이놈의 새끼 썩 꺼져 버려. 가서 다시 의인이 되가지고 다시 돌아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그 아들을 그 탕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거지처럼 되가지고 돌아오는 자기 아들인줄 알고 뛰어가서 그 더러운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아버지는 너무도 기뻐서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살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었다고 하면서 반가워서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소를 잡아서 잔치를 하고 그렇게 아버지가 기뻐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탕자의 형 그 맏아들은 율법주의지요. 구약의 율법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그 형은 스스로 경건한 줄로 짐작하는데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 대해 하는 일이 형은 마땅치 못해서 자기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율법을 잘 지키고 그런데도 아버지가 자기에게 대해서는 그렇게 고맙게 해주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타락한 아들이 돌아왔는데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노해서 집에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아버지께 항의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는데 염소새끼 한 마리를 내게다 주어서 내 친구들과 즐겁게 한 적도 어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허랑방탕한 이 아들이 재산 다 낭비하는데 그렇게 소 잡고 한다고 형이 탕자의 형이 불평한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 형과 동생의 태도가 전혀 다르지요. 율법적인 또 자기가 무엇을 한다는 자율적인 선은 의례히 자신하고 무례하고 오만하고 자만심에 빠지고 동생은 복음이지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행동을 하고 있을 때거나 하지 아니하고 있을 때 어느 경우에나 인간은 죄를 짓게 마련인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도 착한 행실이나 선으로도 계명을 잘 지켜도 수도해도 다른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꼭 행위의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한다던지 그 사람이 착하게 살고 있으니까 구원 얻었다고 그렇게 판단 한다든지 아름다운 행실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 자신부터 제가 예수 믿은 지 60년 가까이 되는데 저 자신부터 착한 행실을 해서 구원 얻는다든지 무슨 바른 깨달음을 해서 구원 얻는다든지 무슨 공덕을 쌓아서 구원 얻는다든지 수도 정진해서 구원 얻는다든지 한다면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저 자신부터 절대로 구원 얻을 자신이 제게 없습니다. 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물론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자선사업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바른 깨달음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그 이야기는 추후에 하려고 합니다만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를 유혹하기를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지혜와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그렇게 믿게 해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게 그렇게 유혹했습니다.
이 구원의 기초이신 그리스도의 반석을 거기서부터 흔들게 그렇게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유혹을 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노력이라든지 또 헬라 사람들의 헬라사상을 보면 인간이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의 힘 가지고 노력을 해서 하나님 앞에 설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사도 바울을 이 생각을 부정하고 인간은 다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사람의 운명에 참 유일한 결정 자 라고 그렇게 사도바울을 성경 속에서 주장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어보면 제가 보기에는 사람마다 그 조상의 혈통이라든지 부모에게서 유전 받은 그 악한 성질 혹은 원죄의 유전이라고도 볼 수 있고 또 탁월한 성질들이 모두 있어요. 그런데 그거 도저히 고치기 어렵습니다. 처음 만날 때는 모르지요. 교회에서 교인들을 오래 10년 20년씩 거느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조상에게서 그 부모에게서 혈통적인 그런 것이 있어요. 김씨 최씨 박씨 엄씨 그 성씨에 따라서 독특한 고집이 센 사람이 있고 또 그 지방적인 기질 함경도 사람은 대게 어떤 성질이 있고 또 평안도 사람들은 어떻게 급하고 경상도 사람은 어떻고 또 전라도 사람 그 지방적인 옛날 8도 사람들의 기질이 각각 다르다고 그런 기질도 있고 또 이건 좀 미신적인 이야기 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가 우리 집에 보니까 우리 집 식구가 우리 집사람은 뱀띠에 낳고 우리 아들은 개띠에 낳고 우리 딸은 소띠에 낳고 또 우리 작은 딸은 원숭이띠에 낳고 저는 양띠에 낳았는데 근데 보니까 그게 다 달라요.
개띠에 난 아들은 목욕탕에 가면 물가지고 다 적셔놓고 개 적셔놓듯이 원숭이에 낳은 딸은 그 노는 것이 꼭 원숭이새끼 노는 것 같아요. 거기에 또 뭐가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데 양은 날 때부터 양의 성질이지요. 이리는 날 때부터 이리로 낳는데 그래서 사람이 날 때 악질적이라고 그런 나쁜 성질을 타고난 사람을 많이 대해보면 그 처음에는 밉다가고 이제는 밉기보다 불쌍하다는 겁니다. 그 조상의 죄인지 모르지만 몇 일전에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 특사를 얻어서 석방되 나온 사람이 이틀 만에 또 사람을 때려죽여서 또 잡혀갔어요. 그런 전과 3범인데 크리스마스가 되가지고 특사가 되서 석방되나왔는데 이틀 만에 고향에 갈 여비가 없어서 사람을 또 때려 죽였단 말입니다. 그거야 자기 속에 죄 성이 있는데 자기도 어쩔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불쌍한 사람이에요. 죄 지은 것은 밉지만 불쌍한 사람이에요. 일본에 독특한 우리 기독교로 말하면 예수교 비슷한 불교에 정토정이라고 개척한 침낭이라는 중이 있지요. 그분은 처음에는 무척 노력을 했어요. 수도하고 도를 깨달아 보려고 무척 노력을 했는데 안 됐습니다. 그분이 키가 크고 몸이 건강하고 나이 90살까지 산분인데 장수하고 그 몸이 건장한 그런 분이기 때문에 몸이 약하고 쇠약함을 모른 그런 분이니까 그 불교를 수도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번뇌가 더 많고 육시의 정욕이 더 많고 건강한 사람이니까 암만해서도 안 된단 말이지 암만 수도하고 불경을 읽어도 안 되고 자기가 건강하니까 번뇌가 다른 사람보다 몇 배가 더 심하고 육신의 정욕이 더 강하고 그래서 자 수도해도 안 되고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극악부도한 사람이다 몇십년 수도하고도 나는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내 힘으로는 수도해서 구원 얻을 수가 없다. 내가 수도해도 구원 얻을 수 없고 바른 깨달음으로도 내 속에 불교 중이 되가지고 수도 몇 십 년을 했는데 나는 남보다 건강하고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더 정욕이 이글이글한데 내 힘으로는 구원 얻을 수가 없어 나는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이 번뇌 이 번뇌는 내가 구원 얻는 구원의 씨가 된다. 그렇게 말하면서 절망 속에 내 인간적으로 절망하는 이 절망 속에서 그 여래 우리말로 하면 예수님의 음성과 마찬가지 내 절망 속에서 여래의 음성이 들려온다. 마지막에 그렇게 고백하고 그분이 독특하게 꼭 우리 기독교와 거의 이치가 같은 종교를 세웠습니다. 유명한 분이에요. 불란서의 유명한 신학자 보스웬은 인간의 욕망이 11가지가 있다고 그래서 남을 좋다 밉다 그런 것 또 열망 하는 것 남을 미워하는 증오 희로애락 또 용기 공포 희망을 가지는 것 또는 절망에 빠지는 것 이렇게 화를 내는 것 노하는 것 철학적으로 보면 헬라의 철학자들은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 욕망 그 자체를 악이라고 보았습니다. 욕망은 악한 것이라 보고 이것을 뿌리째 뽑아서 멸하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불교도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에피크로스 파에서는 쾌락주의 철학주의자들인데 그분들은 사람들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사람에게 여러 가지 욕망이 있는 것은 다 선한 것 이니까 그 욕망을 만족 시켜야 한다고 그렇게 반대를 주장했어요. 스토아 철학자들은 욕망은 악한 것이니까 다 뽑아버리고 멸하라고 주장하고 불교에서도 그런 것이고 그런데 에피크로스 파는 쾌락주의 철학자인데 그러면 욕망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선한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욕망 뭐 먹으려고 하는 것 성욕이라든지 욕망을 만족시키라고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우리 기독교는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먹으려고 하는 식욕이라든지 새끼를 치려고 하는 거라든지 이건 모두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인간의 본성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악이라고 까지 그렇게 보지는 아니합니다만 욕망은 선악과 관계없는 인간이 부모의 태에서 날 때부터 생태인데 그러나 아담 하와의 원죄의 영향과 또 우리 각 사람이 각각 자기가 절제하고 살지 않기 때문에 부절제로 말미암아 조화가 깨어졌기 때문에 악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우리 성격에도 언제나 사람의 이성은 자기의 힘으로 자기자력으로 의롭게 살줄만 짐작을 하고 자기 힘으로 주목하는 눈을 전혀 돌리려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 내 생애는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나님 내게 바로 살 여유를 주시옵소서. 내 생활을 개선 하리이다. 그렇게 기도해 보면서 자기의 힘 가지고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고집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사람들의 버릇입니다
자기의 구원 문제를 두고 내 힘으로 믿노라고 하면서도 내 힘으로 아직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이거는 자기기만입니다 사람들의 최대의 지혜는 율법주의를 무시하는 것이고 내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을 무시하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계율을 지키고 자기 힘으로 깨달음을 얻고 자기 힘으로 의롭고자 노력하는 것이 지혜인줄로 생각하고 있지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으려고 할 때 내 힘으로 하겠다는 그것은 단념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성경말씀 가운데 아니지만 마틴루터 종교개혁을 한 마틴루터 선생의 신앙을 보면 마틴루터는 본래 수도삽니다.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수도사였는데 루터는 자기 구원 문제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고 그러면서 수도원 안에 있으면서 수도원 원장과 특별히 독일 신비주의의 지도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루터가 처음으로 로마에 갔을 때에 로마의 유명한 라테란교회의 거룩한 계단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성도 로마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수 천키로 먼 길을 걸어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다 지고 순례하다가 이 로마에 와서 이 라테랑 성당에 스물여덟개의 계단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고행을 하는 것인데 그 전설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러 갈 때에 올라간 계단 이라고 그래도 라트란의 스물여덟개의 계단이 그 계단에 예수님이 흘린 피자국이 지금도 얼룩져 있다고 그럽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예수 잘 믿는 부인인데 그 어머니의 명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그 계단을 로마로 옮겨서 라트란 교회에다 놓은 것인데 그 계단에 대리석 위에다 깐 밤나무 두꺼운 판자가 순례자들이 무릎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 판자가 우묵하게 닳아서 200년 동안에 세 번이나 판자를 갈았다고 그래요. 거기 순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릎으로 올라가면서 힘들어서 무릎이 터지기도 하고 그러는데 역사상으로 이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다가 중도에서 마음이 변해서 벌떡 일어선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였습니다. 루터가 1510년에 로마에 처음으로 순례해서 이 계단을 처음으로 무릎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마음에 확신이 일어나기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성경에 로마서 또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의인은 무릎으로 고행으로 가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말씀이 생각이 나서 그냥 벌떡 일어나서 쑥쑥 걸어서 올라가 버린 겁니다.
그때에는 루터는 수도사였지만 무척 수도를 했지만 도저히 자기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린루터라든지 칼빈이라든지 그런 종교개혁자들의 사사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동과 감화를 제가 별로 받지 못합니다만 그분들이 성인들도 아니고 성격상에 결함이 많은 거친 사람이고 그들의 행위에 결점이 실수가 많은 사람인데 루터 같은 사람은 너무 양심적으로 살지 말라. 그따위소리도 하고 그런 사람이지만 루터는 수도사로 있다가 파계하고 결혼한 사람인데 그러나 루터의 신앙 루터에게서 감격을 얻는 것은 그가 믿음만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다.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 그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일어난 그의 부르짖음 그것이 성령의 가르친 구원의 원리를 분명히 말해준 것이라고 그래서 루터에게 대해서 그런 점에서 받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제일 많이 한 말이 두 가지 말이 있는데 하나는 믿음으로만 또 한 가지 말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구원 얻고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 은혜로만이 믿음으로만 이고 믿음으로만이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 저 자신도 수도 소리도 많이 하고 다니지만 저 자신이 구원 얻는 문제에 대해서 루터의 신앙 종교개혁자들의 신앙밖에 다른데 갈 데가 없습니다. 에베소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랬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랬습니다.
전 세계 마귀 떼들이 모조리 달라붙어서 너는 죄인이다 너는 지옥에 간다. 이렇게 해도 루터는 그 자기의 어렸을 때부터 지은 죄에 두루마리를 루터 앞에 펴놓으면 너는 이런,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너는 죄인이다 어김없이 지옥 간다 해도 그래도 루터는 거기다가 그러나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 1서 1장 7절에 있는 말씀같이 이렇게 담대하게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그 분이 나간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확고한 신앙 속에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원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힘쓰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로 구원 얻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로 9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또 로마서 3장 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