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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씨알의 위치와 역할
信天함석헌
먼저 말할 것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믿으시는 분인 줄 압니다. 혹 안 믿으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지. 안 믿으시는 이가 계시거든 다른 걸 다 제쳐 놓고 하나님을 꼭 믿으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습니까? 그건 이 자리에서 설명을 못하겠어요. 허나 내게 말 한 마디만 허락이 된다고 할진대, 그 말밖에 다른 말은 골라서 할 말이 없어요. 나는 그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나 하면 그렇지는 못하지요. 그래도 거기서 더 할말이 없어요.
신문이 성경이다
오늘 저녁에 제목을 ‘역사 속에서 민중의 위치와 역할’이라 그랬어요. ‘역할’이란 말은 좀 재미가 없어. 그건 일본 사람이 한 말이오. 이 다음에 쓰지 마세요. 역할이란 본래 한문으로 되지 않는 말이야. 일본 사람들은 ‘약괄’이라 그래. 그런데 ‘할일’이라고 하면 좋잖아요? 아직도 우리말을 채 익히지 못해 그렇습니다만, 그건 뭐 조그만 문제요. 큰 문제는 아니지만, 하여간 ‘역사 속에서 민중의’라고 했는데, 민중이라 그러지 말고 내가 주장하는 대로 ‘씨알’이라는 말을 앞으로 될수록은 자꾸 사용해 주시길 바라요. 마음에 없다면 할말은 없지. 난 강제하는 건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웃음) 뭐든지, 생각도 강요하는 건 아주 싫은 사람이에요.
사람의 가장 귀한 것은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것.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생각은 어디까지든지 자유롭게 하는 것. 다 옳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고 잘못된 생각이 있을지 몰라도 생각은 절대 자유로 해야해. 힘으로든지 돈으로든지 그렇게 아니 하도록 하는 건 아주 나쁜 일이야.
이건 여러분이 보시면 아는 대로 신문이에요. 영국의 근세가 시작될 때 유명한 문호가 있어. 토마스 카알라일이라는 사람.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서 카알라일을 많이 읽는 사람이 없어요. 옛날에는 젊은이가 공부를 했든지 안했든지 사회에 나가서 한 사람으로 살려고 그럴 때에는 주머니에다 카알라일의 '의상 철학'과 '파우스트'를 넣어 둔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아주 좋은 책이에요. 그런데 그의 책 속에 이런 말이 있어요. “지금은 신문이 성경이다.” 성경에 있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지 그게 왜 성경이란 말이오, 그러실지 몰라요. 카알라일도 물론 그걸 잘 아는 사람이오. 그런데 왜 그랬느냐 하면 성경은 물론 원리 원칙 되는 걸 말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옛날과 달라져서 지금 이 시대의 일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나, 그런 걸 알려면 이 신문 안 보고는 모른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문 잘 볼 줄 알지만, 놓지 말고 보세요. 될수록은 자세히 보시오. 신문 광고는 보지 마시오!(웃음) 광고는 장사꾼들이 우리 돈 빼 가고 우리 자유 빼 가고 속여먹느라고 하는 거니까 절대 보지 마시오. 꼭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이 있거든 사 오지만, 이 사람들은 결코 우리에게 보태 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신문 광고를 해서 돈을 벌기 때문에 우리를 업수이 여겨요. 만약 신문 광고가 없다면 신문이 시시할 때, 거기 하나님의 뜻을 표시한 말이 없을 때 우리가 불매 동맹을 하면 하루에 없어지고 말아요.
지금은 우리가 설혹 불매 동맹을 해도 안 넘어갈 겁니다. 광고해서 그걸로 먹고사니까. 세상이 그만큼 잘못된 거요. 사실 신문은 누가 하게 만드는 거예요? 보는 우리가 하도록 만드는 건데, 그 사람들 정부만 믿고 있어요. 그 정부가 늘 있나요? 가다가 없어지기도 하는데, 우선 권력이 있으니까 그걸 믿기만 하면 될 수 있다, 그리고 광고만 내면 신문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신문이 옳은 신문이냐 나쁜 신문이냐는 독자가 판단하지. 독자가 마음에 없어 안 본다 그러면 하루에 없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게 돼야 세상에 바른 의견이 서는데, 여론이라는 게 있게 되는데, 이 나라는 여론이 없는 나라야.
여론이 없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나 하고 싶은 걸 발표할 자리도 없어요. 그래 신문을 보라는 건데, 이 신문이 우리를 저버리는 신문이야. 민중을 당초 저버리는 신문이야. 내 맘대로 하고 싶다면 아예 안 보고 말겠는데, 그렇지만 그것도 잘 읽으면 짐작을 해 알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오늘은 이런 걸 하나 예로 듭니다. '중앙일보'에 난 건데 여기 ‘분수대’라고 하는 난에 제목은 「45개의 미니전쟁」이라.
생전에 브레즈네프가 1979년 빈에서 카터 미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할 때 개막 연설에서 그랬대요. “평화가 아니면 뭐냐, 전쟁이다.” 미국에 사설 연구 기관의 하나로 방위정보센터라는 게 있답니다. 거기서 지난 삼 년 간 지구상에서 사십오 개국이 전쟁에 휘말려서 사백만 명 이상의 군인이 참가했다고 보도했는데, 그 중의 오십만 명은 외국 군대라고 해요. 우리 나라에도 외국 군대가 많이 와 있지요. 북한에서도 저 다른 나라에 가서 전쟁하고 있잖아요?
이걸 다 읽으려면 오늘 저녁 내 본래 하려던 말을 못하고 말아요. 한 실례로 든 거예요. 이 세계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니까 참 문제 아니에요? 지금은 전쟁의 의미도 옛날과 아주 달라요.
이런 것도 있어요. “민주주의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의 말씨가 최근 들어서 아주 거칠어지고 있다. 그는 얼마 전 민주당이 대안으로 내놓은 예산안에 대해서 이것은 미국 재건 계획에 심장을 뚫는 단도다, 칼날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에는 민주당 예산안에 들어 있는 국방 예산의 증액분이 정부 안의 4퍼센트밖에 안 되는 점을 지적하면서 크레믈린이 이런 보고를 보면 아주 기뻐 날뛸 거다”─그렇게 냉소를 했다는 거예요.
최근에 레이건 대통령이 굉장히 도전적으로 나가요. 러시아에 대해서. 물론 레이건이 그러기 전에 러시아가 언제든지 세계를 공산화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우리가 다 아는 일이지만, 그래도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공산당을 이기는 걸까? 다른 사람의 의견은 다른 것이 있을 거예요. 좌우간 최근에 레이건이 굉장히 도전적으로 나가. 그래서 미국에서는 국민들이 걱정을 많이 해요. 지난해에 핵무기를 자꾸 증강을 하려는 걸 반대해서 미국에서 평화 데모를 했어. 내가 처음에 듣기엔 백오십만 명 나왔다고 그러더니 지난번 어느 잡지에서 보니까 이백만 내지 삼백만 명이 그 정책을 반대하는 데모가 있었다 그럽니다. 우리 나라 이따위 신문만 보면, 속알 빠진 신문만 보면 그런 줄 모르고 있지만 세계 되어 가는 일은 그렇게 핵 문제가 아주 어려워지고 있어요.
발등에 떨어진 불
지금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하면 혹은 그럴 거야. “어디 불이 떨어졌어?” 떨어지기 전에 떨어진 걸 보는 사람이 옳게 보는 사람이에요. 그러게 죽은 사람보고 슬프다고 할 필요 없어요. 죽은 사람은 아파할 줄도 모르고 슬퍼할 줄도 모르는 거요. 그러니까 죽은 사람 위해서는 울지 않아도 도리어 괜찮아. 울려면 그전에 울어 줬어야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건 미국이 핵을 굉장히 열심히 하려는 것 때문에 미국 국내서 그렇게 문제가 시끄러우니까 하는 말이오. 미국은 일본, 한국, 대만, 이런 나라들을 한데 넣어서 핵을 같이 해 간다는데, 벌써 1970년대에 단체가 성립이 되었대요. 업자들 사이에. 미국은 얼마든지 자꾸 호화판 살림 하고 싶은데, 그러러면 무기 팔아먹어야지요. 이제 레이건이 그런 정책으로 하는 모양이오. 국민들의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많이 핵을 산출하면 결국은 핵무기를 쓸 것 아니냐, 핵무기 쓰는 날에는 너도 나도 없다, 지구는 아주 없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여러분 학생들은 다 알 거예요. 글 조금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운지 알 건데,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 같은 건 거기다 비하면 문제가 안 돼. 그것만이 아니고 그걸 만들어 내는 동안에 부산물로 나오는 찌꺼기 속에 어떻게 독물이 흘러나는지, 우리는 그걸 모르고 있어요. 신문이 하나도 보도 안해 줘.
외국에서는 자유가 있어서 그런 걸 다 보도해 주니까, “아이구, 원자 발전소 있으면 우리가 야단났군. 사람 못 살겠군” 해서 국민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지난해에 칠 기인가 팔 기인가의 핵 발전소 지으려던 걸 못 짓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그걸 일본으로 넘겨서 발전시키도록 하자 그러는데, 일본 사람은 우리보다는 그래도 깬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거기서도 잘 말 안 들으려고 그래요. 국민들이 많이 반대해요.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생각을 몰라. 원자로 갖다 놨다면 아주 영광인 것처럼 아는데 참 우스운 나라야. 우습다니, 할 수가 없어서 우습다고 내가 그래. 죽게 됐는데 죽는 줄을 모르니까 우습지 않은가.
이 원자라는 게 뭐냐, 기독교의 하나님이 마지막에 세상 심판한다는 것이 이제 이런 걸로 될지도 몰라요. 하나님이 심판하나요? 사람들이 제가 잘못해 저지른 죄를 심판을 받는 거지. 비를 주어도 선한 놈의 밭에도 주고 악한 놈의 밭에도 주고 차별 없이 주는 하나님이 왜 사람 죽이려고 유황불을 내려보내요? 유황불이다 뭐다, 공중에서 천사가 그런다 했지만 실지 역사에서는 인간 제가 잘못해 가지고 제 잘못에 죽는 거요. 필시 그런 것 아닐까?
이 세계가 이 모양이 되어 가는 거요. 죽어도 죽는 줄을 알고 있는 것이 그래도 사람다운 것 아니오? 죽어도 죽는 줄을 알고 죽어야 해. 사람이 죽으면 다가 아니에요. 모르는 사람은, 정치나 하고 있는 사람은 죽으면 다인 줄 알기 때문에 전쟁도 잘하고 사람 죽이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지만, 죽은 사람이 그냥 있는 게 아니야. 절대 사람은 영원한 물건이야. 사람은 이미 동물의 지경을 벗어나서 혼이라는 게 있어. 혼이 뭔지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각자 자기가 지내보면 알지 않아요? 본래 이것은 영원 무한한 성격을 띤 거요. 그건 이따가 시간이 있으면 다소 설명을 보태 할 겁니다.
하여간 사람은 죽으면 다고 천당 지옥이 끝이라─천당이 뭐 저기 올라가 있는 것, 난 믿지 않는 지 오래요. 또 저기 내려가면 불이 있다든지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것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내 마음으로 알아. 땅 속에 들어가면 지옥이 있거니, 옛날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알아도 좋아요. 지금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그걸 우리가 믿을 수가 없거든. 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성경에 어긋나는 것 아니에요. 본래 하늘 나라라고 하는 게 그런 것 아니니까. 우리 정신 속에 임해서 알게 되고 참여하게 되는 나라지. 다만 죽으면 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만은 분명해요. 성경에선 누구나 그래요. 잘못한 놈은 영원한 벌로 부활하고, 잘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을 하고.
그러게 정치하는 사람들한테 될 수 있다면 내가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은 사람은 죽어도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당신도 죽은 다음에 당신 영혼이 있을 것이다, 당신 영혼이 죽은 시체에 돌아온다든지 그런 건 없지, 그건 모르겠지만 믿는 사람은 그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데, 당신도 그렇고 당신이 죽였던 사람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살아 있는 것이고,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사람에게 어떻게 했나에 따라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안다고 가르쳐 줄 수가 있어요. 듣겠다면 밝혀 가면서 며칠이라도 말해 줄 거요. 내 확신하는 대로 말해 줄 거요.
그렇게 하면 그도 사람인 다음에는 회개를 하지 않을까? 그들이 회개한다면 정치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데 누구 말을 들으려고 해야지. 자기네 속에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자기네 일에 반대되는 것 같으면 아예 안 들으려고 해. 그렇기 때문에 언론을 닫아 놨어.
아주 섭섭하기는 금년 연초에 대통령이 시정 연설을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연설을 대통령 혼자서 꾸미지 않았을 거요. 도저히 혼자 힘으로 꾸밀 수가 없어. 아마 각료 중요한 사람들은 다 의논을 해 가지고 신중하게 주의해서 꾸몄을 것인데 그 속에 언론이란 두 글자가 영 들어가 있지 않아.
나는 언론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게 있나 없나를 훑어봤어. 언론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나라가 살려면 언론이 열려야 하는데 그럴 생각 없어요. 내 추측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지만 언론을 만일 열어 놨다가 이 소리 저 소리 하면, 정부에 대해서 비판하는 소리가 자주 나면 이거 튼튼히 못 있지 않을까, 아마 그런 생각에 그러겠는데, 바람이 불어도 넘어가지 않는 집이 정말 집이지. 바람만 불면 넘어갈까 겁을 내는 사람은 집을 잘못 지었지 바람이 잘못이라고 할 수 없잖아?(웃음) 비판을 해서 무너지는 정권이라면 그건 벌써 삼 년 전에 어느 결에 없어졌어야 옳을 거요. 그렇지 않아요?(박수) 왜 그렇게 겁이 나? 진리 위해 반석 위에 세운 집이면 문제가 없지 않아? “네가 암만 해봐라 염려 없다”, 칼 빼들고 그러지 말고 “너도 칼 없으면 나도 칼 없고 그렇게 내기해 보자” 그런 확신이 있으면 왜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그게 어디 잘못된 데가 있는 거야. 그들도 왜 악한 사람이겠소? 하나님이 냈으니까 분명 하나님의 모습대로 생긴 사람들일 텐데 뭣에 가려서 미처 생각을 못해 그래. 뭐에 가렸는고 하니 무기 때문에 가려서 뵈지 않아요. 그게 아주 걱정되는 점이에요.
답답한 건 기독교 목사님들
여기 들어오기 전에도 기관에서 온 분이 주의를 시키면서, 젊은이들 감정이 다 이렇고 하니까 뭐 그러지 않도록 해 달라 그래서, 내가 “사람은 다 제 걱정하는 게 제일이야, 남의 걱정은 하지 말고 제 걱정이나 하라고.”(폭소) 사람들이 제 걱정만 하면 세상이 저절로 문제없어. 저는 그만두고 남의 걱정을 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나지 않아요? 작은 일 큰 일 할 것 없어. 나는 나쁜 마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속을 들여다보면 나도 양심이 있지. 자기 양심 없는 사람 없을 거예요.
저번에 대통령도 그러셨습니다. 사무가 분주하니까 “가족끼리 오손도손 얘기할 기회도 없다”고 그랬어요. 참 그건 가엾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가족끼리 오손도손 얘기하는 그 시간이 중요한데, 그럴 수가 없을 만큼 바쁘다면 참 미안한 일인데, 누가 그러라고 그랬어요? 당신이 그러는 거지.(웃음)
‘가족끼리 오손도손’, 그건 진심에서 나오는 소리요. 남편이 아내보고 거짓말할 리도 없고, 아내가 남편보고 거짓말할 리가 없고, 아버지 아들끼리 앉아서 진정에서 나오는 말인데 사람은 그것 없이는 못 살아가. 천하는 없어도 살아갈 수가 있지만, 가족끼리 모여서 얘기하면 하루 온종일 피로하던 것도 다 나가고 또 내일 일할 기운이 나지 않아요? 사실 좋기는 성경을 펼쳐 놓고 가만 보면 가족끼리 말하는 것보다도 더 좋지만, 그만은 못해도 사람이 양심이 살아나는 데는 가족끼리 앉아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있어야 돼.
적어도 자기 전에 성경은 아니라도 무슨 좋은 책을 들고 몇 구절 읽는 건 절대 필요한 일이에요. 불란서에 있던 로맹 롤랑이라는 유명한 문호가 간디 전기를 썼는데, 간디 전기 중에 그 사람의 전기가 제일 좋을 거예요. 간단하지만, 나도 그 사람의 책을 보고 간디를 좋아하게 되고 그랬지요. 그니가 아주 좋은 말을 했어요. “간디란 사람은 겉으로 보면 정치하는 것 같지만(젊은이들 잘 들으시오. 정치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 잘 들으시오), 낮에 그 사람 하는 걸 외양으로 보면 정치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밤에는 종교 신앙이라고 하는 지하실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이튿날 활동할 힘을 밤마다 길러 가지고 나온다.” 그건 참, 간디를 바로 본 거예요.
간디의 위대함이 어디서 나왔느냐면 그 신앙 생활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영국에서 배운 법률이라든지 누가 갖다 주는 돈으로 된 것 아니다, 바로 본 겁니다. 그렇게 사람의 전기를 옳게 쓰기가 쉽지 않아요. 여러 소리 많이 하면 뭘 하겠어요? 아주 골자 되는 걸 바로 얘기했어야 되는 건데. 낮에 무슨 말을 했거나, 성공을 했거나 실패를 했거나, 더구나 실패를 해서 맘이 언짢거나 남한테 욕을 먹었거든 밤에 고요하게 앉아서 기도를 한다든지 성경을 읽는다든지 그렇게 해야 이 마음이 도로 살아나서 그 이튿날 또 나가 다시 용기를 얻어 활동할 힘이 나와요. 그것도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안해야 옳은데, 신통히 정치는 그것하고는 등진 사람들이 하니까 답답하다 그 말이에요.
지하실 없는 집은 살 수가 있어도 마음의 밑에 종교 살림 없는 그것 가지고는 더구나 정치를 맡아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그러기에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어떻게 하면 그니들한테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저절로 정치란 어떻게 하는 줄 알게 될 거예요. 답답한 건 기독교의 목사님들도 많이 드나든다는데 뭘 했는지 알 수가 없어. 정말 조찬 기도회도 옳게 봤다면 정치에 책임이 있을수록 “이게 이런 겁니다” 그러고,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걸 뭘로든지 설명을 해 드렸더라면 박 대통령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몰랐으니까 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할 수 없잖아? 지옥에 갔대도 별 수 없지. 할 수 없지. 그러니 믿는 사람으로서 조찬 기도회 안 해준 사람도 책임 지기에는 마찬가지지만, 더구나 조찬 기도회 해줬던 사람은 책임을 느껴서 “참 안됐는데, 내가 미안하게 됐는데” 해야겠지만, 글쎄 미안하다는 생각이나 있을까? 있다면 그 다음에 또 가지는 않겠는데.
사상의 게릴라전이 필요하다
이 말부터 하려던 건 아닌데, 될수록은 오늘 저녁 우리 말하려던 걸 말을 해봐야지요. 이 나라가 옳게 되려면 신문이 바로 돼야 하겠는데 신문이 죽었어. 죽은 신문이야. 난 벌써 신문 사설 안 본 지 오래야. 신문 논설을 외국에선 ‘leading article’이라 그래요. 그래도 일반 민중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알려 주기 위해 쓰지, 그저 신문사에서 월급 받아먹으니까 뭘 하나 쓰면 된다, 그럴 수가 없지 않아요? 또 “이 소리 했다가 경찰서 가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안 쓸 수가 있어요?
옛날에 '황성신문' 나고 무슨 신문 나고 그럴 때는 신문 하는 사람마다 나라 생각을 했지, 이거 해서 돈 생긴다든지 그런 생각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어찌 오늘날 이렇게 됐을까?
신문이 죽었으니 어떡하지요? 신문은 죽었더라도 우리 마음까지 죽어서는 안 되지요. 신문이 해줄 역할을 어떻게든 해야 돼. 그러니까 여러분도 허무로 들어서는 안 돼요. 벌써 수십 년 전에 그랬어. '사상계' 장준하하고 얘기하던 때, “그럼 이제 우리는 부득이 사상의 게릴라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랬어요. 옛날에는 게릴라라는 것 없어요. 있대도 조금 있었겠지. 지금은 게릴라라는 것 유명하지 않아요? 정규군이 큰 것 같지만 어떤 때 가면 정규군을 다 동원할 수도 없어요. 쥐는 고양이가 잡게 생겼지 황소가 못 잡는단 말이야. 그런 모양으로 신문에서라든지 잡지에서 못하게 되면 차 마시러 들어가서 다방에서도 얘기하고, 친구 만나 음식점에 가서 얘기하고, 기차 타러 가서 그 안에서 얘기하고, 그게 게릴라전 아니냐. 정규의 언론 기관은 아니지만, 정규의 언론 기관이 다 맥이 빠져서, 권력에 팔려서, 종이 돼서 할말을 못하고 있다 그런다면 우리끼리 어디서든 만나는 대로 해야 돼.
그럼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1차 대전 이후에 나는 그 사람의 영향 많이 받은 사람이오. H.G. 웰스라는 사람. '세계문화사대계'(Outline of History)를 썼던 사람인데, 과학 소설은 그 사람이 맨 처음이오. 비행기라는 게 생겨나기도 전에 공중에서 전쟁하는 걸 소설로 그리고 했는데, 요새는 ‘이티’(E.T.)인가 뭣 때문에 굉장히 그럽디다만.(웃음)
중가운데 딴 문제지만, 저 길거리에 나가 보면 구역질 나서 당초에─미국 갔을 때 어느 친구들이 일부러 날보고 “선생님 이것 좀 보고 가시오”, 내가 별로 영화 좋아하지 않으니 거의 끌다시피 해서 가서 「E.T.」를 보아 줬어. 봤으면 봤지 그저 그렇다, 그것도 장래를 생각하면 걱정되는 점이 많이 있다 그러고 보고 왔는데, 뒤늦게 와 보니까 그저 아주머니들이 여기서도 이티 팔고 저기서도 팔고. 그게 뭐 속알머리가 없는 국민이 돼서 그래. 잘 알아들으시오. 유행이 빠르다는 건 속알머리가 없는 거야. 그것 가지고 나라 못해. 뭐야!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분을 발라도 발라야지, 옷을 입어도 자기의 모양을 보고 이 빛깔이 맞나 안 맞나, 이 구두가 맞나 안 맞나 생각이나 하고 해야지, 남들이 하면 그저 나도 해야지─우리 나라 사람은 남들이 하는 걸 내가 못하면 큰일 날 줄 알아요. 얼굴빛은 보지도 않고 남이 눈을 시꺼멓게 하면 저도 시커멓게 하고.(웃음) 자기가 자기 몸을 생각을 해서 미를 돋궈도 돋구는 거지. 거기도 그렇거든 다른 데는 더구나 그럴 것 아니오?
역사란 알기 쉽게 말하면 노끈 꼬는 것 같아요. 노끈을 뭘로 꼬지요? 실오라기 가지고, 농가에서 새끼 오라리를 짚으로 꼬잖아요. 짚은 이만큼밖에 안 되지만 그걸 가지고 열 발, 스무 발, 백 발, 천 발도 넘게 꼰단 말이야. 요새는 자연 섬유가 아니고 인공이지만, 어쨌거나 요것밖에 안 되는 섬유가 서로 휘감겨 돌아가고 해서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고 얼마든지 길게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럼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지요?
사람도 개인으로만은 역사가 있을 수 없어요. 수십 년 전에 당한 일이지만 독립 운동한다고 붙들려 갔던 일이 있는데, 나 소위 말하는 독립 운동한 일 없어요. 없는데도 붙들려 갔단 말이에요. 날 조사하던 일본 경관이 뭐라 하는고 하니, “너 이놈아, 인생의 종교를 믿었으면(자세히 들어두시오) 우리가 왜 잡아왔겠냐? 네가 종교 이름을 빌어 가지고 독립 운동을 했으니까 잡아왔지” 그랬어. 여러분 어떻게 생각이 돼요?
요새 우리 나라 기독교인은 그런 사람이 수두룩해. 저번에 산업 선교 공청회 한다고 해서 들으러 갔더니, 교회 장로님, 목사님 나와서 말마다 “성경에 산업 선교라는 말이 어디 있어?” 백주에 이런 소리가 나.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참. 여러분 젊은이는 안 그러겠지만, 우리 나라 기독교 안에 그런 사람이 장로도 있고 목사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해. “영혼 구원은 개인의 영혼 구원 얻는 거지 무슨 사회 복음이 뭐냐?”
미국에서 사회 복음 소리가 난 게 언젠지 아세요? 내가 스물 다섯 살 때부터 나온 거예요. 그때 우리는 들어서 알아요. 지금도 개인 영혼이라 그러지만, 개인 영혼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바다에 물방울이 들어가면 어느 물방울인지 알 수가 없는 모양으로, 네 물방울 내 물방울이 없어. 바닷물이 그저 있는 모양으로 하늘 나라도 그럴 거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잖았어요? “일곱 형제가 다 한 여자를 데리고 살았는데, 하늘 나라 가서는 그럼 뉘 아내가 됩니까?” 자기네는 ‘요 자식이 이번에는 걸렸지’, 아주 예수를 잡을 줄 알고 그랬지만, 예수님 뭐라고 해? “야, 네가 모르는구나. 부활해서 그 나라에 가면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간단 말이야.” 하늘 나라가 뭔지, 영혼이 뭔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런 걸 잘 모르기 때문에 속에서 나오는 힘이 없어요. 정신의 힘이 뭐냐? 그걸 모르니까 겁도 나고 도망도 하고, 못할 말도 하고 그러지. 그걸 만일 안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기독교가 이제 그런 정도인데 개인을 육신으로 보면 사람이 죽으면 다지만, 그러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참으로 안 사람은 죽는다고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인생이 뭔지 알아요. 나는 섬유 한 오라기같이 짧은 거지만, 이것이 부자 관계로, 선생 제자 관계로 뭣으로 얽혀서 가면 그 노끈이 수천 년도 가고 수만 년도 갈 수가 있다 그 말이에요. 더더구나 이 안에 소위 정신이 있어서 그게 뒤섞인 다음엔 네 정신, 내 정신을 따로 가를 수가 어디 있어요? 역사라는 건 그렇게 되는 거.
또다른 비유를 한 가지 말하자면 벽돌을 가지고 건축을 해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야. 벽돌 한 개는 요만한 거지만 그걸 막 쌓는 게 아니에요. 어떤 법칙에 의해서, 어떤 설계도에 의해서 무슨 구조를 가지고 쌓아 올라가면 그것이 큰 건축이 돼요. 사람의 역사 생활이라는 건 그런 거라 그 말이야. 하나의 개인, 요거 아무것도 아니고 겉으로 볼 때는 고깃덩이 같지만, 속으로 본다든지 사람의 살림으로 인간 관계가 이렇게 되면 거의 영원성을 띠고 역사 건설을 해 간다, 그것이 소위 우리 역사라는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또 몰라요. 적어도 기독교인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우리 나라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역사 의식이 아주 박약해요. 옛날에 비하면 지금 외양으로는 퍽 많이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바른 역사 의식이 별로 없어. 그러니까 목사님, 장로님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산업 선교란 그런 말 성경에 어디 있냐, 개인 영혼의 구원 얻는 게 목적이지 무슨 그런 걸 하냐, 그런 말을 할 만큼 무식하다 그 말이에요.
그랬는데 재미있어요. 역시 학생이니까 그런 말 했는데 어느 학생이 그 말 듣더니, “어이, 그 장로 정말 그렇게 사회가 어둡다면 거기 와서 말은 왜 하지?” 얼마나 들어맞는 말이오? 나는 미처 그 생각을 못했어. 정말 개인 구원 같으면 산업 선교 해라 말아라 할 것 없잖아? 제 집 골방에서 하나님 믿다가 죽으면 그만이지(웃음). 그러나 왜 못 그러는 거요? 이제는 혼자서 다 할 수가 없잖아. 쌀값 하나가 오르고 내리는 것도 뉴욕 시장에서 달러 시세가 올랐다 내렸다 그걸로 따라잡는 거야. 세계적으로 그렇게 된 거요. 한데 벌써 얽혀 들어간 건데, 사회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금 거기 가서 그러니 그걸 믿는다 그럴 수가 어디 있어요?
그 책임이 어디 있냐? 목사님들에게 있어. 목사님들이 그것 좀 가르쳐 주었으면 좋은데 안 가르쳐 주니까 그런 거예요.
개체와 전체
무슨 소린고 하니 개체와 전체 관계를 마땅히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낱개가 다가 아니에요. 저번에도 누가 칼릴 지브란에 대해 강연해 달라고 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칼릴 지브란의 책 읽었는지 몰라. 나도 번역한 책이 있소만, '예언자'도 있고 '사람의 아들 예수'라는 것도 있어요.
칼릴 지브란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내 이웃이란 뭐냐? 내 또다른 자아(my another self)다.” 참 좋은 말 아니오? 사람들이 내 자아만 귀한 줄 알지만, 이웃 사람도 내 다른 자아다, 조금 큰 의미로 하면 이 나라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다 나의 자아라는 거예요. 내 마음에 안 든다 해서 고소를 하고 그러는 사람이라도 그것도 내 자아인 다음에는 나하고 관계가 있지 없는 사람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 사람은 그런 줄 몰라서, 날 미워하는 마음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면 불쌍해 보여. 예수님이 “너를 대적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라” 하셨어요. 그 사람을 원수로 알지 않아. 딴 사람으로,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알지 않고, 그것도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똑같은 건데 생각하니까 가엾게 생각을 하잖아요.
역사는 그렇게 관계되어 내려오는 거예요. 사람은 개체지만 살아가는 데는 이럴 수밖에 없어요. 사람은 죽으면 다가 아니고 죽은 후에도 사는데, 그럼 “어떻게 삽니까?” 그건 지금은 모르지요. 아무도 “너 어머니 뱃속에서 어떻게 살았냐?” 그러면 대답할 수가 없잖아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뱃속과 여기는 차원,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어요.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면 그전에는 어디 있었지?” 모르지. 어디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지 없다가 나왔을 리가 어디 있어요? 생리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아버지한테 있었다고 그럴는지 몰라. 아버지는 또 그럼 어디 있었어? 이렇게 차차 올라가면 하나님 없지 않아요. 그래 예수님 말씀이 “내가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었다”, 그거 옳은 말 아니오?
이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 지극히 작은 이런 사람 하나라도, 학생 하나라도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는 사람인 줄 모르니까 잡아다가 귀쌈도 때리고(웃음),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고 그러지만, 만일 영원히 살아 있는 걸로 알면 안 그럴 거예요. 감히 안 그럴 거예요. 그런 역사 의식이 없어서 그래. 역사에 참여는 자기네도 다 하고 있지. 하고 있지만 자기가 깨닫지 못하면 그런 짓을 해. 그러니까 중요한 건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역사에 참여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역사에서 도망하는 재주 없어. 링컨의 유명한 말 있지 않아요? “역사에서 도망할 수 없잖아?” 역사에서 도망할 수 없는 줄 안다면 그렇게 무책임한 정치를 하지 않겠는데, 그걸 깨닫지 못해 그래. 그러니 우리 책임이 중요해요. 모르는 사람 가르쳐야 하니까.
하여간 중요한 건 전체를 알아야 해. 전체가 뭐냐? 그럼 또 말이 길어져요.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설명을 못하겠어요. 쉽게 말하면 우리 민족이 전체 아니냐, 그러겠지만 우리 민족만이 전체가 아니에요. 어렸을 때 전체가 뭐냐 그러면 집안이 전체예요. 그게 다요. 남의 집이 있는 줄을 몰라. 조금 있으면 자기 동네가 다라고 생각하고, 더 커서 나라를 알게 되면 나라가 전체인 줄 알지만, 나라라는 것도 고정이 됐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옛날 나라는 아주 조그만 해요. 그때는 산업 기술도 그밖에 안 되고 교통 수단도 그밖에 안 되기 때문에 골짜기 골짜기에 조그만씩한 나라가 있었어. 그래서 마한이 오십사 개국, 진한이 십이 개국, 변한이 십이 개국, 우리 나라도 수십 개 나라가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 싸움을 해서 삼국이 되었고, 이 못생긴 민족이 그 통일을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꼴이 됐지요. 하여간 우리 나라가 전체인 줄 아는데 현재 있는 이것만이 민족이 아니야. 그전에 났던 모든 사람, 또 그전에 났던 사람만이 아니라 날 사람도 생각해야 돼.
나이 이렇게 많으면 또 오래 살아 보겠다고 보약도 먹고 그래요. 난 안 그런다, 오래 살 생각 안한다 그래요. 왜? 지금 나오기를 기다리는 애들이 주르르 줄 서 있는데.(웃음) 오늘 저녁부터 시작이 될 애들도 수두룩하게 있을 거예요.(웃음) 그렇지 않아요? 그러한데 내가 오래 살겠다고 보약을 먹고, 애를 뱃속에서 없애 버리는 그런 짓을 하고 이 세상이 옳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러는 것, 문명은 발달했다는데 이렇게 마음으로 고생을 하는 건, 나는 옛날을 지내봐서 알아. 옛날 나라가 망하고 살아도 마음이 이렇게 괴롭고 아프진 않았어.
어저께도 노자 가르칠 시간이 있어서 나가긴 나갔지만, 내가 그 사람들보고 그랬어. 내가 이번 학기 괜히 한다 그랬다고 후회했다. 왜 그런고 하니 여긴 좀 낫소만 종로 거리를 지나가노라면 이십 분도 가고 삼십 분도 지나가. 차 타고 앉았으면 사람사람이 얼굴을 서로 비비게 됐어요. 이렇게 말을 들으러 오는 데 사람이 많이 왔으면 그건 괜찮습니다마는, 무슨 길거리에 사람이 그렇게 많아? 거기서 아예 도망하시오! 거기 살지 마시오. 무슨 일 나고야 말아요. 그렇게 하고 일이 안 날 수가 있어요? 전쟁만이 전쟁이 아니라 그게 전쟁 난 거예요. 그게 난리 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하고 약속만 안했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산중으로 가서 가만히 있다가 가랑잎에 섞어져 죽을 텐데 괜히 약속을 했다고 농담 비슷하게 했소만, 눈에 뵈는 것이 이건데, 눈에 뵈는 것만이 아니라 올라가면 하늘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야.
하나님은 그저 하늘 위에 계시다는 것만 알고 내 현실 살림 속에서 보지를 못하면 아무 힘이 없어요. 그 하나님 잘 믿는 목사님이나 장로님도 하나님을 막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지 않아요? 그건 믿기는 믿는데 건성으로 빈말로 믿는 거야. 그런 것을 현실 속에서 봐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나간다면 전체라는 것이 자꾸 커 가요. 옛날에는 나의 판단이 지극히 조그마한 데서 나와요. 그러다 차차 세상이 발달을 하면 한 마을이던 것이 여러 마을이 되고, 우리 나라도 작기는 하지만 적어도 민족이나 전체라 그러면 남북한을 다 집어넣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하나 남북한이 전체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 마음에 양심의 권위가 어디서 나오느냐? 세계 전체, 적어도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통할 수가 있는 말이라면 그게 내 마음의 도덕 기준에 합당한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다음에는 안 되는 거예요. 옛날에 민족을 도덕의 표준으로 할 때는 우리 민족이 할 때는 뭐든지 옳은 것이고, 다른 민족은 죽여도 좋다 그랬지만, 이제는 그런 거 아니 통해.
그런 건 성경을 글자대로만 보면 안 나와요. 그렇지만 성경을 옳게 보는 사람이라면 자연히 알게 돼요. 그러니까 전체란 곧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건데, 태양이 위에 있으면 그림자가 땅에 비치는 모양으로 영원 무한한 세계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현실의 세계에 비칠 때 그것이 우리 사람 마음속에서 전체라는 거예요. 그러면 전체를 무시하는, 거기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야. 현실 속에서는 그 이상을 갈 수가 없어요. 그것과 나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개체와 개체 사이의 생각도 바로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 얘기하려면 하나님 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들었을 거예요.
그러게 성경을 본 다음에 이것은 무슨 말이지 해서 내 속에서 “그렇군!” 하고 고개가 끄덕거려질 때까지 여러분이 생각을 하셔야 해. 젊었을 때는 암만 그래도 욕심이 많아서 성경도 많이 봤다고 그래야 자랑인 것 같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어떤 때는 하나를 놓고 며칠도 가요. 나는 책을 번역해 봐서 아는데 어떤 때는 하나를 가지고 몇 시간도 생각을 하고, 심하면 며칠이 가도 확신이 안 가. 예를 들면 ‘life’라는 단어가 나왔다 합시다. 그저 생명이란 말이지 하고 그렇게만 번역을 하면 되느냐면 안 그래. 어떤 때는 ‘인생’이라 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생명’, 어떤 때는 ‘사람’, 어떤 때는 ‘생활’이라고 해야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그저 문맥이 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이렇게 수천 년이 되도록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보통 글이 아니란 말이야.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 싸움해도 좋아요. 아니라고 하는 사람 부인해도 골낼 것 없어요. 어쨌거나 이것이 보통 책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지. 그러니 이걸 쓰는 사람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썼을 리가 없어. 말에서 말을 또 고르고 글자에서 글자를 또 고르고 해서 될수록 자기가 체험한 것을 표시하려고 했겠지. 요새는 학자가 다 연구해서 알지만, 천지 창조 설화 비슷한 것이 메소포타미아에도 있고 수메르 사람도 그런 얘기를 했고 애굽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해요. 여기도 있는 신화, 저기도 있는 전설이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이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한 문장이 쉽게, 거저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에는 무슨 말인지 상당히 긴 시간을 놓고 내 마음에 씨름을 해야 돼. 그건 물을 필요 없어. 선생님한테 갈 필요 없고. 주어지는 말이야. 내가 생각해낸 것과 주어지는 말은 딴 데서 오는 법이니까.
정치를 그저 쉽게 되는 대로 몇이 앉아 의논해서 이렇게 하자, 쿠데타하자 그러고, 때리면 때리라든지 죽이려면 죽이라든지 명령을 턱턱 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래요. 말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데 말을 아주 업수이 여겨. 나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아.
생명은 ‘살아라’ 명령받는 것
그런 생각으로 한다면 인도 사람들의 카르마(Karma, 業) 사상은 상당히 깊은지도 몰라요. 오늘 내가 한 번만 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수천 번 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말 났느냐 안 났느냐 토론해도 소용이 없어. 전생의 무슨 일 때문에 어떻게 되어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거기 굉장히 깊은 사상이 들어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면 다른 종교 경전도 어지간히 참고를 해볼 수 있지 않아요?
전체 없이는 내 개체의 의미를 못 가지게 된다, 그걸 한 번 더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이 역사란 있을 수 없어요. 크기로 하면 코끼리란 놈 그렇게 크지만 코끼리의 나라 역사라는 것 있나요? 호랑이의 나라 없지 않아요? 이 역사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거지. 그걸 쉽게 아니까 그저 몇이 앉아서 너하고 나하고 해볼까, 쿠데타하자, 그러는 겁니다. 요새는 태국에서도 할 것 같다는군요.(웃음) 심령에 인생이 무엇인지 참 맛을 본 사람 같으면 안해. 성인이라는 사람은 그따위 것, 소위 임금이라든지 제왕이라든지 그런 것 안해. 인생이 그렇게 옅은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지식만이 이렇게 많이 보급이 됐고, 남의 말을 갖다가 팔아먹을 줄만 알지 그것이 내 속에서 내 혼을 거쳐서 나오질 않았어. 내 혼을 거쳐 나와야만 되는 거요. 그래서 공자님 뭐라고 그랬는지 아시오? “길에서 얻어들은 말 길에서 또 하면 못쓴다” 그랬어요. 그러면 가슴이 뜨끔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거예요. 길에서 얻어들은 말 왜 길에서 하지 말랍니까? 아무리 좋은 말인 것 같아도 누가 그러더라 했으면 적어도 그것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보라는 거예요. 가령 “앞으로 세계는 평화 운동을 해야 된다”, 들으니 좋아서 평화 운동을 해야 된대, 평화 운동을 해야 된대, 그러는 게 반드시 좋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들었으면 가서 ‘어째서 날보고 그런 말 했지?’ 하고 내 속에서 생각을 하면 반드시 오는 것이 있어요. 그건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수긍(首肯)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하면 “그렇군!” 혹은 무릎을 치며 “그렇구나!” 그런 다음에야만 남한테 말을 해도 하고 내가 믿겠다고 작정을 해도 하고. 무슨 사람의 일이란 그런 거야.
역사는,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계속이 되어 오는 거예요. 계속이 되어 온다는 건 사람의 생명이란 영원 무한한 것이다, 영원 무한을 지향하고 가는 것이다 그 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 세계가 이 꼴 되어 가는 걸 보면 아주 비관에 비관을 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비관해서는 못써요. 하지 마시오. 몰라. 자기가 생각해 하지 덮어놓고 내 말 들으라고 선전은 안해요. 하지만 나는 아주 확신하는 것이 있어요. “비관을 해서는 못쓴다!” 비관할 자격이 없어요. 왜? 이 세계가 내가 만든 것 아닌데, 뭐 아니다 그럴 수 없지 않아요? 생명이란 명령이오. 생명이란 ‘명’ 자는 명령한다는 명(命) 자인데, 하나님이 “살아라”, 하나님 모르겠으면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가라” 그랬으니까 나왔지 그러지 않았는데 나올 수가 있어요? 가만 안 있고 어머니 배를 자꾸 차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기 한사(限死)하고 낳으려고 하잖아요? 왜 그러는가? 이제까지 가만있던 자식이 왜 안에서 야단을 하지? 이젠 나가야 하겠다는 거야. 누구의 명령을 들어서? 몰라. 그렇지만 누구의 명령인가 듣지 않았어요? 생명의 주인이 명령한 거예요. 제가 알아 한 것 아니에요. 본능적으로 한다고. 그건 하나님이 그렇게 해. 생명의 근원 되는 이가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데, “열 달 있다가 나가거라. 그래야 사람질한다. 더 있으면 못한다. 그전에 나가겠다는 놈도 안 돼.”(웃음) 법이 다 있잖아요? 생명에는 법칙이 있어요.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고 하겠다는 사람은 다 잘못돼요.
가령 내가 무를 심는다, 무씨 심은 다음엔 사흘 전에는 안 나와. 기도를 암만 해도 안 나와요. 아주 기를 쓰고 특별히 하면 무슨 영향이 갈는지 모르지만, 무씨를 심으면 적어도 사흘 되어야 나오고, 고추씨는 심으면 한 이십 일 되어야 나오고, 인삼씨는 심으면 몇 달 있어야 나옵니다. 가을에 심어 둬야 그 이듬해 봄에 가서 나지, 봄에 가서 심고 이제 나오겠다, 그러면 실패하는 거요. 왜? 생명은 그렇게 법칙이 있어요.
왜 법칙이 있나? 캐 들어가면,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무엇이 있겠지. 하지만 과학은 언제나 뒤를 따라가면서 하는 거지 앞서지는 못하는 거요. 그러게 어떻게 그러냐를 설명은 하지만, 왜 그러냐는 설명을 할 사람이 없어요. “너 어떻게 나왔느냐?” 하면 어머니가 낳았으니까, 아버지가 만들었으니까 나왔다 그러지만, “너 왜 나왔느냐?” 그건 아버지한테 물어도 소용이 없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도 소용이 없어요. 대답을 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창조 소리가 나오는 거야. 과학자들은 가다가 그저 우연히(by chance) 됐다, 모든 게 찬스, 찬스라고 하면 문제가 없어. 그렇지만 사람은 찬스란 것만 가지고는 안심이 안 돼. “이랬다!” 하는 말이 들려야 돼. 그 대답을 들어야 무슨 힘이라면 힘이고 지식이라면 지식이고 그런 게 나오는 건데 그런 줄을 몰라 그러잖아요.
이제는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내 말이 본론도 따로 없고 서론도 따로 없소. 난 본래 말할 때 무슨 원고를 써 가지고 하질 않아요. 왜 그런지 그러기 싫어요. 죽은 말 같아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오늘은 가면 뭘 말하지 그러고 집에 앉아 써 놨는데 떠날 때 깜빡 잊어버리고 왔어요.(웃음) 저번에도 그런 일이 한 번 있었어요. 그랬는데 차에 앉아서 한두 시간 생각을 하노라니까 내 마음에 집에서 생각도 못했던 생각이 정말 나와요. 그게 오늘 저녁에 하는 말인데, 야, 참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군!(웃음)
더 좋다는 생각이 뭔고 하니 이제 말하려고 하는 생각이야. 아까 교회의 장로님 무식해 그러지, 사람은 나면서부터 사회적인 존재 아니오? 개인이 있어서 나라가 됐다, 그건 무식한 생각이란 말이야. 지금 사회학을 배우고 역사를 배운 사람인 다음에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처음부터 사람은 모여서 사는 거예요. 이렇게 나라가 되기 전에는 집단 생활이라 그랬지요. 원시 공산체라 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말하자면 원시 공동체라는 것, 커뮤니티(community), 커뮤니즘(communism)이란 말이 그래서 나오지 않았어요? 사람은 개인이 주인이 되어서 개체로 있기는 있지만, 본래부터 하나로 모여서 살게 생겼어요. 왜 모여서 살게 생겼겠나? 성경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 놓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은지라” 이제 배필을 줘야지 그랬잖아요. 그래서 아담을 잠들게 하고 갈빗대 하나를 끄집어내서 만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그건 이 갈비를 끄집어내서 했다는 말 아닌 줄 알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가 얼마나 어리석은 유치한 나라인가 하면, 지금부터 수십 년 전에 브루너라고 하는 신학자가 왔댔어요. 그 브루너를 보고 질문하기를 “사람이 정말 여기 갈빗대가 남자하고 여자하고 같습니까?” 제가 만져 보지 않고 남보고 물어 보고 있어.(웃음) 진리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그 말이에요. 정말 갈빗대로 만들었을까? 그거야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이것 빼서 했다는 말이 아닌 줄은 알아야 할 텐데, 무슨 뜻을 말하기 위해 그러는 건데 말이에요. 거기서 알 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랬다는 말인데, 왜 그랬을까? 그 말은 다른 동물 만든 것을 모두 갖다 놓고 “네가 이름을 지어 봐라” 했다는 말과 연결해서 생각을 해봐야 그 뜻이 뭔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오늘 오다가 그 생각이 처음 난 거야. 본래 단세포 때는 그저 분열만 되면 되지 않았어요? 단세포는 번식을 하려면 하나가 둘 되고 둘이 넷 되고 넷이 여덟 되고 여덟이 열 여섯 되고 자꾸 분열하면 되는 건데, 왜 후에 오다가 남자하고 여자하고 이렇게 됐어?
식물을 본다 그럽시다. 툭툭 번식했으면 좋겠는데 암꽃 수꽃은 왜 만들었나? 어떤 나무도 암나무 있고 수나무 있는데 그건 왜 그렇게 됐느냐? 그런 건 오다가 마지막에 사람에게 와서 아내 있고 남편 있고 해서 생산이 되도록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야. 준비 과정의 발달이 거기서 시작이 되어서 마지막에 이렇게 됐다, 게까지 의미가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혼자는 못 산다”, 생명이 개체를 내지만 개체가 혼자는 살 수가 없어. 어떻게 하든지 같이 일어서야 살아요.
하나라면 단순해요. 그러나 발달이 되려면 기관이 복잡해지지 않고는 안 돼요. 이건 조금 어려운 말이오. 진화론에 들어가는데, 사람처럼 복잡한 건 없는데 기관이 복잡하게 된 건 무엇 때문이냐 그러면, 결국은 생각 하나 시키기 위해서예요. 기관이 복잡해지지 않고는 사고하는 것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뇌를 발달시켜야 생각하는 게 나와. 그러니 거꾸로 보면 사람이 생각한다는 일이 첫날 아침부터 쉽게 된 것이 아니지요. 그 과정을 올라 올라가면 참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르는 거예요. 본래는 암수가 하나이던 것이 차차 갈라져서 양성이 된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남자 여자가 있으니까 사람이 사회 살림을 하는 건 어쩔 수 없어. 나 혼자서 살래도 살 수가 없어요.
씨알의소리 1989. 2월 98호 1983년 3월 23일 대전 민중교회에서 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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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