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책을 들다 / 박명숙
책이 친구이던 때가 아득하다. 얼마나 좋았으면 학창 시절의 꿈이 서점 주인이었을까. 책이 많아서 실컷 읽을 것 같아서다. 교과서 볼 시간에 위인전이나 소설, 시와 수필을 즐겨 손에 들었다. 부모는 학교 공부하는 줄 알고 기특하다는 눈으로 딸을 바라봤다. 집안일 부려도 방에서 책을 들고 있으면 급한 것 빼고는 불러내지 않았다. 친구들은 시험 기간에 밤새도록 공부하느라 코피까지 흘렸다는데 난 소설책 읽느라 새벽에 잠이 들곤 했다. 그토록 책에 푹 빠졌다.
누구에게 말도 한번 못 붙이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학교 다닐 때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 아마 말 한 번 안 하고 집에 오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쉬는 시간에 활발한 아이들은 이 반, 저 반 돌며 놀다 시간이 부족해서 헐레벌떡 교실에 들어오기도 한데 난 그 시간이 너무 길고 싫었다.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를 건네볼 용기가 없어서 누가 와서 말을 걸어주기 전에는 늘 혼자다. 숫기가 없다. 그래서 책과 함께 그 시간을 견뎠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한다는 아이들만 모아 놓은 장학 반이어서 마음먹으면 성적이 잘 나왔을 텐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찍이 대학교는 꿈도 꾸지 말라 했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 볼까 하고 인문계로 가라 해서 입학을 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되어 어머니도 우리 집 형편을 보고 대학교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당차고 다부지지 못해 부모를 설득해서라도 가야겠다는 의지도, 미래에 대단한 꿈도 없어서 가난에 따랐다. 포기하고 나니 점수에 관심이 없어서 교과서 대신 일반 책을 손에 들었던 거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로 가방은 무거웠다. 좋아하는 책이 친구가 된 동기가 슬프기까지 하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어서 글을 쓰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힐 뻔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하고 좋아진 것이 몇 가지 있다. 남 앞에서 조금씩 말도 하고, 어려운 자리에서도 짧게 내 생각을 전하기도 한다. 어린이집 원장하면서 학부모, 교사들과 대화를 자주 하다 보니 단련이 되었나 보다. 친구도 지역마다 한 명씩은 흩어져 있어서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형편이 어려워서 못 했던 공부를 대학원까지 마치고 지금의 직업도 얻게 되어 기쁘다. 그런데, 손에서 책을 놓은 지가 언제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친구였던 책과 이렇게 멀어질 수가 있을까. 가까이 두고 날마다 읽는 것은 성경책밖에 없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남편이 그만 자라고 자꾸 왔다갔다 한다. 이런 날이 자주 생기다 보니 건강 해친다고 글 쓰는 걸 싫어하는 내색을 했다. 지금까지 썼던 글 몇 편을 들고 가 남편에게 읽어 주었다.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살짝 웃기도 한다. 친정어머니 이야기를 적은 글에서는 그이가 고개를 못 들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같이 울었다. 그 뒤로 내가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있어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행여 방해가 될까 봐 혼자 조용히 잠이 든다. 무엇을 하는지 이제 이해했고 자기 기준에서는 잘 썼다는 뜻이다. 마음껏 해도 되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 숙제 마감 하루 전날 밤이 되고서야 끙끙대고 있다. 한계에 부딪힌다. 좋은 글이 되려면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한다. 셋 중에서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글이 술술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 찾는 것과 같다.
다시 손에 책을 들어야겠다. 부지런히 읽고 배워서 지그시 바라보는 남편에게 보답으로 훌륭한 작품 하나 선물하고 싶다.
첫댓글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글 쓰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격려가 힘이 됩니다. 선생님처럼 자연스럽게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글 올리고,
잘 모르는 제가 봐도 문장이 날로 좋아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의지와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직장 다니랴, 학업 이어가랴, 아이 키우랴 고생하셨네요.
토닥토닥
실은 저도 남편한테 밤늦게까지 잠 안 자고 있다고 맨날 야단맞습니다. 하하!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은 짠하게 보는데 저는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좋았던 기억이 더 많거든요.
선생님 저도 정말 문장이 책 많이 읽으신 분 같이 느껴졌어요.
호호호. 그랬다니 더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이 책은 더 많이 읽은 것 같던대요? 글에서 많이 느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