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20세기 미국 문단 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늘 논란의 중심이 된 작가 찰스 부코스키는 작품이 너무 많아 생전에 다 출간되지 못했다. 이 책은 지하신문과 문학 저널을 비롯해 음란 잡지에 수록되어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다양한 작품을 담았다. 최초로 출간된 단편, 마지막으로 쓴 단편, 최초의 수필과 최후의 수필, 이 책과 함께 출간된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최초 수록분도 포함되어 있다.
“소설, 단편소설, 시, 편지, 수필 등 거의 50편에 가까운 부코스키의 책이 나왔지만, 데이비드 칼론이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을 발굴해 내면서 부코스키의 작품을 망라하는 여정이 제대로 채워졌다.”
-존 마틴(JOHN MARTIN)
이 기념비적인 산문집은 그의 친숙한 주제에 관한 단상, 아르토, 파운드, 헤밍웨이에 대한 논의, 자신의 미학을 주제로 한 토론 등 그저 무뚝뚝해 보이는 작품 속에 숨겨진 박식함도 엿볼 수 있다. 부코스키를 더 깊게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며, 부코스키를 처음 읽는다면 단번에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 것이다.
“놀랍도록 주목을 끄는 책이다. 시티라이츠서점에 선 채로 부코스키의 책을 단숨에 읽었고, 그가 제대로 해냈다는 걸 느꼈다. 좀처럼 되는 일이 없는 남자지만 그의 글은 진솔하고 특유의 리듬이 살아 있다.”
-아일린 마일스(Eileen Myles)
발표하는 작품마다 거센 비난을 받으며 주류 문단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이단아, 세계적인 추종자를 낳는 작가, 한때 미국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을 당한 작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예술가의 예술가, 찰스 부코스키.
《우체국》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여자들》 《헐리우드》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등 다수의 소설과 에세이, 산문, 시를 통해 국내에서도 확고한 독자층을 형성했다.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으로 시작된 그의 작품 세계가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을 통해 완성되었다.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은 그의 여느 작품과 비교해도 거칠며 웃긴 이야기로 가득하다.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만큼 그 내용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다. 부코스키가 일부는 픽션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야기가 현실로 느껴질 만큼 그의 목소리는 생동감이 넘친다. 그가 문단의 멸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에 대한 연구가 아직 완전하지 못할 만큼 왕성하게 글을 썼다. 술에 취했을 때도 맨정신일 때도 그는 늘 글을 썼다. 생계를 위해 일하느라 허비한 10년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엄청난 글을 쏟아 냈는데, 그 양이 워낙 방대하여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할 정도다.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은 그동안 어둠에 가려진 작품인 만큼 부코스키 연구에 중요한 산문집이며, 그의 진실한 내면이 담겨 있기에 더욱 가치를 지닌다.
“우리의 예술은 우리의 고통을 이성으로 바꾸는 행위다. 우리는 뒤틀어진 마음, 점토 부스러기의 포상 같은 존재이며, 바보 같은 어둠 속 바보 같은 테이블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세상은 시라는 가느다란 바퀴살이 달린 능욕당한 바퀴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중에서
얼핏 그의 단면만 보면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음흉하기 짝이 없는 저질 언어를 내뱉는 한심한 늙은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볼 줄 아는 독자라면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예술가로서 지닌 열정, 방대한 지식에서 비롯한 냉철한 판단력, 단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은 단어와 문장은 거대한 문단을 등에 지고 도덕성을 내세우며 거짓과 인용으로 빼곡한 원고를 집에 둔 채 정장을 빼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글쟁이는 그저 허풍쟁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그가 속했던 밑바닥에서 찾은 진짜를 읽고 느끼고 싶다면 와인 한 잔과 이 책이 필요할 것이다.
책속으로
밖을 돌아다니며 그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여태껏 받은 거절 편지 중 가장 길었다. 보통은 ‘죄송하지만 출간할 수준이 아닙니다.’ 혹은 ‘안타깝게도 완성도가 높지 않습니다.’ 등 짤막하게 적혀 있다. 아예 지정된 거절 문구를 출력해서 보내 주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런데 이번 편지는 진짜, 그 어떤 것보다 길었다. 내 원고 《하숙집 50곳 탐방기》를 거절하는 편지다.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다.
--- p.31
테이블의 커다란 와인병에 술이 좀 남았기를 바라며 내 방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나에게 그런 행운이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한다. 나는 특정 인간 군상의 일대기를 너무나 잘 보여 주는 존재 아닌가. 음흉함, 비현실적인 망상, 억압된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 말이다.
--- p.43
난 사람이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지옥을 거쳐 왔고,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또 있을 거라 믿으며 호흡마다 웃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책은 아주 단조로운 것들을 단조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중략) 난 여기서 창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주방 바닥에 걸레질을 했다. 이제 문제는 집세다. 일주일 뒤면 서른아홉하고도 일주일을 살았지만 여전히 집시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세다. 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시에 모든 걸 던지지 않으면, 그 속을 별들과 거짓으로 가득 채우지 않으면 곤란하다. 시, 그림, 모래, 창녀…… 음식, 불, 죽음, 헛소리…… 돌아가는 환풍기…… 그리고 술병.
--- p.58~59
난 술에 취해 여기 앉아 내일 어디서 어떻게 살지 걱정하고 있다. 생각의 사생활을 보장받고 싶은 사람에게 여긴 있을 곳이 못 된다. 사람들은 내가 괜찮은 시인이고 글을 꽤 잘 쓴다고 말하며 난 잘 모르는 여자들에게서 향내가 풍기는 편지를 받았지만, 내 이성의 해를 등지고 선 까마귀가 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니 분명 내일은 전당포에 가야 한다. 우리 모두는 미친 부적응자이고, 먼지가 날릴 정도로 조용한 캠퍼스 창문에 서서 시를 가르치는 강사는 이 벽들 혹은 사우스할리우드의 집주인들 혹은 랭보나 릴케를 5센트 동전보다 하찮게 취급하는 이 동네의 울상인 얼굴들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이곳에서 인간의 사랑과 인생은 시트 자락처럼 흩날리는 휴지보다 못하고, 우리를 알고 골목을 같이 쓰고 우리의 보잘것없는 관심 밖의 패배를 알아주는 쥐보다 못한 존재다.
--- p.69~70
옛날에는 내가 천재라고 생각했고 굶주렸고 아무도 내 글을 출간해 주지 않아서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낭비했다.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에 앉는 것이 가장 좋았다. 햇살이 목과 뒤통수와 손에 닿으면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아 붉은색, 주황색, 초록색, 파란색 표지 일색으로 꽂혀 있는 엉터리 같은 책들을 봐도 괜찮았다. 햇살이 목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졸면서 꿈을 꾸면서 월세, 먹을 것, 미국 그리고 책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천재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솔직히 난 어떤 부류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 p.76
술에 취한 사람이 미쳐 날뛰고 공격적이라면 자기 집에 가두는 방법을 찾아서 그 사람이 화장실을 쓰거나 뉴헤이븐의 숙모에게 전화 걸도록 해 줘야 한다. 그 편이 감옥보다 낫다. 법정은 잊어버려라. 남아도는 판사는 길거리나 뭐 그런 데서 구멍 메우는 일을 시키면 되니까. 감옥이 전혀 필요 없는 날이 떡하니 올 거라 믿는다. 모든 사람이 상식에서 벗어나 동료를 해치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일을 스스로 거절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물론 나뭇더미에는 늘 골칫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골칫거리는 이해가 처벌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차츰 줄어들 것이다.
--- p.113
어느 날 존 브라이언이 지하신문인 《오픈 시티》를 창간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일주일에 한 번 칼럼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칼럼에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가면을 쓰고 단편을 썼다. 일주일에 한 번씩 2년 가까이 썼다. 이기든 지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경마가 끝나면 여섯 개들이 맥주팩 서너 개를 뜯고 베토벤과 바흐를 시시하게 만들어 버리는 말러를 들으며 칼럼을 썼다.
--- p.176
결국 훌륭한 작가는
두 가지만 잘하면 된다.
살고 글을 쓰는 것.
그거면 끝이다.
--- p.191
일이 날 죽였다. 10년 동안 견뎌 왔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데 정신적으로 분개했다. 그리고 11년째 되는 날 몸이 죽기 시작했다. 난 안정적으로 죽느니 맨발로 사회 밑바닥에 서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자는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나이 오십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은 채 그만두었다. 이상하게도 그 행동이 대다수의 동료 직장인을 화나게 했다. 그들은 나 혼자 그만두는 것보다 같이 죽길 바랐던 것이다.
--- p.204
방금 녹은 버터를 바른 새끼 문어를 먹어치웠는데, 그러고 나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동자가 여전히 8월의 장대비처럼 정신없고 미친 듯 보였다. 라흐마니노프를 듣지 않고 버터랑 문어를 먹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어쩌면 특별한 소스가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 시민으로서 햄버거와 록 음악만 고수해야겠다. 생각은 섹스보다 위험하다. 훌륭한 미국 시민은 생각하지 않는다.
--- p.224~225
난 경마장에서 나의 큰 단점을 발견했다. 가끔은 내가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밖에서 보면 내가 진짜 못하는 걸 깨닫는다. 또한 배우다 만 지식은 지식이 전혀 없는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 (중략) 경마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해 주고 싶은 말은 경마장에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도 가겠다면 관중들의 편견과 개념을 무시하고 단순한 이성을 지녀야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럼 행운을 빈다.
--- p.269~272
아주 어렸을 때 난 굶주린 작가였다. 내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건 별로 흥미롭지 않은 내 인생에서 크게 거리낄 일이 아니었고 죽어 가는 것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새로운 인생을 얻지 않을까? 간간이 막노동꾼으로 일했지만 그리 오래 하진 않았다. 월급을 받으면 최대한 오래 쉬었다. 돈은 그저 월세를 내고 술을 마실 정도만 필요하고 우표와 봉투, 타이핑 용지만 있으면 되니까.
--- p.325
20~30년을 허비한 이야기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쉽다.
그 시간들은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 p.332
‘말’을 좀 조심해 달라는 요청에
그렇게 해 보기로 했다.
그건 핑계다.
아내가 아래층에서
말동무를 해 주고 있다.
그들은 다 괜찮다.
아마도.
아무튼 난 이리 올라와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난 작가다.
술을 마셔야 한다면
타자기 옆에서 마시는 게 더 좋다.
부크
--- p.389
[예스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