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투사처럼
-소비뇽 블랑이 잉태된 강가에서
저 강이 낯설지 않아
루아르 강변에 나 안개처럼 피어있네
영겁의 장막이 걷힌 거기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칼을 씻고 있는 내 모습이 보여
초원을 질주하던 흉노의 말발굽 소리
거친 숨소리 가라앉힌 강은 침묵하며 흐르고 있네
신라 무령왕릉비에 흔적을 남긴 흉노의 발걸음
머물면 쇠약해지는 초원의 바람처럼
이곳 강까지 달려와 휘두르던 오랑캐의 채찍 소리
흉노가 걸었을 강변 소비뇽 블랑 포도밭
그 포도밭에 뿌려진 초원의 냄새
그 냄새에 내 영혼은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초원의 피가 내 몸에도 흐르고 있어 그랬을 거야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번만 오는 것 같지 않아
처음이지만 낯설지 않은 곳엔
우리도 모르는 어떤 인연이 있을 것 같아
나는 루아르강 언덕에 서서 흉노가 달려가는 것을 보았어
거기서 푸르게 기세등등하던 내 모습도 보았어
초원의 투사처럼 시드니 공항을 걸어 나오는 나를 보았어
황무지에서 온 사람
마른풀 찢으며 달려가는 모래바람
붉은 흙 위에 잠든 대지의 흔적을 덮는다
나는 덮인 지난 생을 뒤적이며 발자취를 발굴한다
모래 언덕의 마두금 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는
분명, 갓난 새끼에게 곁을 주지 않는
어미 낙타의 목을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이던
초원의 질주자였을 거야
그때, 나는 낙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마두금을 켜고
그는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어미의 고삐를 풀어
새끼와 함께 초지로 떠나보냈을 거야
시드니 록스 골목
그는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쓰고 말 안장을 쓰다듬었어
소를 몰며 황야를 누비던 거친 피를 다독이고 있었지
지평선이 맞닿은 농장엔 저녁노을이 흥건했어
카우보이모자 던지듯 내려놓는
무교동 선술집
들판 억센 풀냄새 배인 선술집 팝이 그리웠을 거야
마이바흐를 타고 온 친구 앞에 그는
위스키 스트레이트 잔을 들고 앉아 있었어
천천히 라이터를 꺼내고 있었어
무교동에서 해 떨어지는 황야를 바라보고 있는
사막 같은 사람
우리들의 시인 우리들의 시인
Sylvania
크리스마스가 동네 어귀에 도착하는
시드니의 한 여름
하얀 요트 점점이 박혀있는 실바니아 바닷가
소나무 숲 공원에 철새로 날아드는
이방인의 발걸음 하나 둘 셋
크리스마스 선물 쌓여가는 호주인들의 파티
물보라처럼 퍼지는 파란 웃음소리
등 뒤에서 파도가 떠밀고 있다
저쪽으로 쭉 나가면 고향이야
먼바다 가리키는 동양인의 손끝에
어렴풋이 보이는 하얀 모자 쓴 겨울 항아리
항아리 열고 김치 꺼내는 엄마의 굽은 등
너 떠난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화수를 떠 놓았다
폭풍처럼 내 달리기만 했던
도전만을 숭배했던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았지
쓰러지지 않았던 발걸음
기도가 버팀목이었음을
보이지 않는 땅
낯선 어딘가 가난한 짐가방 부려 놓았을
고집부리며 달려갔을 그 밤길 염려되어
장독대 앞에 늘 불침번이었을 어머니
합장한 손끝에 닿아있는 실바니아 바닷물
파도 앞세우고 달려오는 당신의 기도 소리
코카투 아일랜드
결박당한 군함 한 척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바람에 뜯겨나간 갑판 위엔 갈매기의 배설물
하얀 바둑돌처럼 박혀있다
목에 호스를 끼고 군함처럼 병상에 결박당해 있던 아버지
수명 다해가는 전구알같이 깜박이며 의식 돌아올 때면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시간에 할퀴어 붉은 녹물 흘리는 노쇠한 배, 한때는
스스로 파도가 되어 세상을 넘던 용사였을 것이다
머리카락 잘라 부모님 주소가 적힌 봉투에 넣고
폭탄 쏟아지는 파도 속으로 달려 나갔을 것이다
농사꾼은 땅을 파먹고 살아야 한다
할아버지는 대양으로 나가고자 했던
아버지를 열무단처럼 묶었다
할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도 풀지 못했던 결박
마른 장작 되어 병상에 납작하게 누워있던 아버지
지구의 중력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당신은
일어나 걷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수련화같이 하얗게 웃으셨습니다
집으로 모시자는 결정이 있던 날 저녁
담당 의사는
결박이 풀리는 아버지의 웃음 보았던 것 같다
묶인 군함이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가라앉으며 피어났던
아버지의 하얀 웃음 바다 위에 뿌려져 있다
와인학 개론
-발효
마지막으로 효모를 넣고 아기를 기다린다
자궁은 겨울밤처럼 푸근할 거야
햇빛이 물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 몰라
봄이 되면 다시 올 거라는 무당벌레의 약속은
둥둥 떠 있을까
포도알 위에 발자국 남겼을 풍뎅이의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해
나무 위에 잠깐 걸터앉았던 바람은
약속을 가지에 걸어두고 홀쩍 떠났을 거야
미열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엄마가 말했어
아기의 향기가 만들어지는지도 몰라
사람들은 향기가 자갈의 체온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해
꿀벌이 잊고 간
꿀이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아로마 거품이 아기의 물장구처럼 올라오면
해산 준비로 압착기, 산도계, 비중계를 준비해야 해
귀뚜라미 울음소리 독경처럼 들리는 밤
새벽예불 때쯤 아기가 나올 거라고
와인 메이커가 말했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오크통 산실을 바라본다
유영재
2024 계간 <시작>으로 등단
2014 <경북일보> 문학대전 시 부문 장려상
2021 제외동포문학상 시 부문 입상
와인 사이언스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