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소에 화가 많이난 상황을 이렇게 표현 하곤 했습니다.
"확 칼 찔러삐까" "오늘 니 죽고 내 죽고 해보자"
막상 글로 표현하는 지금 순간도 부끄러워지내요. 경당 친구들이 읽게 되면 놀랄 것도 같고.
예언자적 상상력 책을 읽고 놀랐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찬 비판이 아니라!...
이 문장만으로 가슴을 열번 쳤습니다. 내가 뭔데 그렇게 의기양양했던지. 의기양양한 분노가 의로운 것이였는지.
분노로 가득찬 비판이 무엇을 살릴 수 있을지. 내 입으로 수없이 증거한 이 사랑없음에 얼마나 애통하셨을지.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찬 비판이 아니라 애통하며 함께 서가는 것. 그런 삶이 요청되며 그것이 살리는 길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덕에 살아가는 생 입니다. 크게는 우주와 사람을 창조하신 분에 의해서이고 작게는 혼신을 다해 사신 우리 조상들 덕분입니다. (크고작은 것을 나눌 수 없으나) 이번 역사 세미나에서 본 우리나라 면면의 사건들 앞에 겸허해 집니다. 때 마다 생명걸고 살리려는 분들에 의해 지금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의 앞에 분노와 비판하는 것을 넘어 함께 서가며 살리는 길을 도모하는 자로 변화해 가길 소망합니다.
2.
아무것도 가능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가는자가 상상하는 사람입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꿈꾸는자가 상상하는 사람입니다.
논리적인 수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것. 그래야 현실에 과격한 태도로 맞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가능, 상상, 꿈꾸는자, 비논리성이 현실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논리적인 수준을 벗어난다 하면 비과학적이고 관념적인것 아니냐 반문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게는 내 현실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10분만에 찌개 끓이고 반찬 두서너개 할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공동체로 살기 전 저를 아시는 분들은 100% 불가능이라 할 것입니다.) 30살 넘은 여자들이 축구를 막 좋아하게 될 줄이야, 우리가 삼삼오오 모여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이 꿈인지,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공동체로 사는게 가능할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게 논리적으로 설명될 일인지...
누가 우리를 꿈꾸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불가능하다 두렵게 하는 것일까. 이성과 논리라는 잣대만 들이대고 속이려는지...
기꺼이 받아들이고 꿈꾸라 말하는 이 책을 이 땅의 역사공부 말미에 만난것이 신묘합니다.
3.
이 책은 우리에게 온전한 확신의 삶으로 초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이 뭘까. 우리는 하나이지만 전체의 다양성 안에서 하나입니다.
각 사람 마다 마다가 온전해지려 하지 않으면 전체가 온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 혼자 온전해지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이 온전하게 변화지 않고 나만 우리만 온전히 산다는건 모순입니다.
그렇게 전체가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서로의 모양으로 온전해지려 할 때 비로소 완성될텐데.
모양은 다르지만 결국 온전해져 가는 길은 하나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봉실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그 길은 "비움" 뿐입니다.
내가 온전한 삶 살겠다는 것은 너를 잘 만나 결국 하나가 되겠다는 것인데. 너를 진실되게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언제나 구별하려 하고, 편견, 고정관념, 자기경험, 자기이해, 오해, 착각등이 큰 장벽입니다. 그 벽을 허물기 위해선 나를 비우지 않고는 안됩니다. 비워야 만나지고 채워집니다.
지난 2016병신년만 돌아보아도 내 삶은 증거합니다. 나를 가득 안고 온전해지겠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온전해지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나를 주장하지 않으면 가득 채워집니다. 그것이 온전한 현실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정말 그런가. 그 길 뿐일까. 못 믿는 것인지, 알지만 싫어서 그랬는지. 온갖 핑계를 대었지만 이 책은 예수의 삶으로 확증했습니다. 온전히 비우고 포기하신 분의 위엄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갖고 싶어하는 힘은 그 위엄에 비교 할 수 없다 싶었습니다. 이 땅의 불의 무찌르고 승리의 역사 쓰고 싶다며 구하던 힘은 나를 버리고 비워야만 채워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4.
예언자는 '고난을 감당하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 삶과 고통 사이에 가로놓인 장막을 찟어 버리는 것'이라는 문장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음과 양 처럼 고난과 사랑, 슬픔과 희망은 늘 함께 입니다. 그것을 온 삶으로 인정해야 불평하지 않고 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오지 않거나 급 변화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감당하는 능력을 쌓아가야 하겠습니다. 아주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만 여전히 현실로 맞닥뜨리면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인정하며 잘 훈련해 가고 싶습니다.
첫댓글 분노가 일 때가 많이 있지요. 다만 분노가 애통으로 바뀔 때를 기다리고, 그제야 행동에 나섭니다. 그것은 나의 힘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나의 힘만으로는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임을 알기 때문이지요), 부디 선한 힘이 부족한 나를 채우기를 바라는 고백이자 간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녕 진정 그 대상을 위한 일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로 행하게 됩니다.
분노를 애통으로 바꾸게 하는 겸손과 사랑을 함께 배우고 훈련해가야겠습니다.
민들레에 방문했을 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상상의 결과였네요.^^ 꿈꾸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이 제 내면에도 있는데 이미 현실로 이루어진 것들을 잘 누리며 스스로 한계짓는 것을 넘어서서 나를 비우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꿈을 꾸길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