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의 존재론, 의미없는 실패라도 좋은
김수이(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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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의 시는 세계의 소멸과 존재의 몰락이 한꺼번에 진행되는 가장 어두운 세계의 흐릿한 삶 속에서 탄생한다. 가장 어두운 세계란 폭력, 불의. 비양심 등의 윤리적 차원의 부정성이나 지배 논리, 구조적 모순 등의 사회 역사적 차원의 부정성을 초과하는 더 근원적인 부정성에 휩싸인 세계를 뜻한다.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세계의 당위적 모습이나 존재의 존엄성 등이 아니다.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세계와 존재 자체이다. 안희연의 시는 삶 자체의 실종, 삶 자체의 불기능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이 사태를 하루하루, 한 호흡 한 호흡씩 살아내야 하는 자의 통증에 관해 쓴다.더불어 이 통증의 힘으로 쓰인다. 기묘하게도 안희연이 앓는 통증의 구체적인 증상은 무감각과 무력감이다. 세계와 존재와 삶에 대한 통각이 예민해질수록 강렬해지는 무(화)의 감각.
안희연은 고통스러운 무감각, 격렬한 무기력, 무욕한 의 욕 등의 역설적인 존재 방식이야말로 어떤 외압에 의해서도 박탈될 수 없는 존재의 마지막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라지는 세계 속에서 함께 휘발하는 "거의 사라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안희연의 첫 시집은 최근 우리 시의 중요한 의제인, 동일성의 허구와 과잉을 넘어선 시적 체제 및 시적 주체를 향한 탐색의 선상에 있다. 어쩌면 오늘날 지구와 자연의 생태학보다 더 위태로운 상황에 있는 것은 세계와 인간 존재의 생태학이다. 지속 가능한 세계가 아닌 '세계' 자체의 지속에 관한 생태학, 생물학적 차원 이전의 존재론적 차원의 생태학은 현대의 시와 문학이 감당해야 할 최후의 과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안희연은 자신의 시가 발생하는 기원에 대한 성찰을 시 쓰기의 핵심 과업으로 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문제에 접근한다 최근 우리 시에서 세계와 함께, 세계 속에서 존재하기 위한 시적 주체의 고투는 대략 두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하나는 지금까지 시적 주체에 설치한 다양한 장치와 이름 들을 반납하고 '익명'으로 귀환하면서 소실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시적 주체의 다르거나 새로운 차원을 발명하는 것이다. 이를 감축과 (재)생산의 존재 방식, 최소화와 최적화의 존재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생략)
단적으로 말해서 '익명'은 동일성의 주체가 취할 대안이 아니라 기원이자 본질이며, 이를 각성한 존재가 세계와 함께, 세계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수렴하고 재구성해야 할 존재 조건이다. 이 점에서 주체의 탄생은 세계의 지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글쓰기의 탄샘과도 같은 과업을 공유한다. 주체는 모든 관점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무 관점도 갖지 않을 수는 없다.
(생략)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태양이 태양을 삼켜 자멸하고
멈추지 않는 비가 내리고
매일 조금씩 떠내려가는 방 안으로
새 한마리가 날아들고
날려 보내도 기어이 되돌아오고
더듬더듬 그 새를 살피고
이름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
이름이라니,
우리는 정말 멀리 와버린 것이다
ㅡ호우부분
안희연은 존재의 감축과 (재)생산, 최소화와 최적화의 작업을 따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존재의 소실점과 존재의 (재)탄생 지점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안희연에 의하면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므로, 내 입에서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파트너). 타자들에 의해 타자들로 찢기면서, 즉 부분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매번 다른 사람이 되"는 '나(들)'은 존재의 최소화와 최적화를 부단히 실행하는 중에 있다. "'아직 덩어리인데 괜창으시겠습니까?"(r액자의 주인]), "내 손이 한 일이 아닙니다"(r히스테리아), "목소리는 목 안에 없는데 어디서 오는 것일까"(뇌조), "이제 나는 목이 부러지는 높이를 아는 사람"( 화산섬.) 등에서 보이듯 미정 과 부정, 답 없는 질문, 한계 인식 등의 존재론적 사유가 이 과정에 수반된다. 불확실하고 모순에 찬 삶의 정황들을 알레고리화하고, 이 알레고리화된 상황들 속에서 암시와 상징의 언어를 통해 벌이는 안희연의 시적 고비는 "하루 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입체 안정.)로 집약된다. 예컨대, "몸이 바닥 쪽으로 기울 때 한꺼번에 살아지면서 완성되는 것 단 한순간이라도 나의 최대치가 되어 보는 일"("러시안률렛)이 그것이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존재론적 싸움의 앞날은 그리 순탄하지 않다.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은 몇몇 예외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실패하게 될 것이며, '한 사람'에 이를 수 없는 혼란스럽고 미진한 하루들은 계속될 것이다 안희연에게 존재(함)의 이러한 혼돈과 투쟁이 극대화되는 곳은 '백색 공간'이다. 백색 공간은 표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흰 종이를, 심층적으로는 무한히 도래하면서 비워지는 글쓰기의 공간을 의미한다. 모리스 블랑쇼가 "본질적 고독" 가운데 "비인칭의 긍정이 예고되는 공허한 장소 "라고 규정한 곳, 홀로 있는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는, 그러나 "밝힐 수 없는 그 누구(on)가 있는 곳"이라고 진술한 바로 그곳이다. 글쓰기의 공간은 익명의 타자들이 실명의 반대 개념이 아닌, 이성과 언어로 포착할 수 없으 며 다만 아스라이 감지할 수 있을 뿐인, 글쓰기 자체를 (불)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불)가능성으로 잠재해 있는 곳이다.
(생략)
안희연의 시에서 백색 공간에 가득한 '침묵'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침묵'이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이나 이상 또는 부정의 어떤 경지를 가리킨다. 아무도 없으나 누군가(밝힐 수 없는 타자)가 있는 곳, 백색공간=글쓰기의 공간은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 끄러지면서//글자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이곳이/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곳이며, 오히려 "그리다만 얼 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되는 곳이다. "물도 햇빛도 없이/침묵이 고이면 얼마나 깊은 두 눈을 갖게 되는 지"를 존재의 촉수로 감지할 수 있는 공간. "온몸이 뒤틀린 나무가 온몸을 비틀며 자라고 있"는, 성장하기 위해서는 왜곡과 기형을 피할 수 없는 공간.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무의 상태가 "단 한권의 책"과 존재의 "밤' 을 위한 공통의, 최적의 수사가 된다. 안희연이 '백색 공간' 이라는 제목의 시 세편을 쓰면서 굳이 구별의 표지를 달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역설과 관련이 있을 터이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ㅡ백색 공간 부분
안희연 시의 주체는 익명에 근거하나 익명을 끊임없이 위반해야 하는 존재의 운명과 글쓰기의 운명이 같은 지평 에 있음을 인식하고, 둘을 함께 살아내는 데 매진한다. '나 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책과 존재의 밤을 꿈꾸면서,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사유와 상 상의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새로운 옆을 만든다" 언어의 연쇄 및 언어와 더불어 갱신되는 존재(함)의 연쇄 를 의미하는 "새로운 옆"들은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 고, '누군가'들이 모여 '나'를 이루며, 목소리들이 모여 "한 사람"을 이룩하는 과정을 환기한다. 안희연에게 존재한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환유의 운동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새로운 옆을 만"드는 안희연의 환유의 운동은 "자꾸만 미끄러지"면서 타자를 향해 가는 이동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지나쳐온 타자들을 매우 느슨하게 끌어안고 축적하는 형태를 편다. '나'는 점점 더 많아지고 넓어지며 복잡해지는 것이다.
안희연은 옆으로 활짝 열린 채 수많은 누군가들로 붐비는 존재의 현장이 바로 '나'이며, "내가 한사람이라는 것을 믿는" '나'의 복잡다단하고 역설적인 신념이 "이름이 돋아"나는 존재하기-글쓰기의 생장점임을 피력한다.
1
휴일이 되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헬멧처럼 내 얼굴을 뒤집어쓰고 손목 안으로
손목을 밀어넣었다
2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문 과일
그는 접시를 닦으며 나에게 맞는 이름을 찾는다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군가 죽은 병원 거품 속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은
접시일까 이름일까
나는 내가 한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4
(------)
문득 손이 뜨겁다 손끝에서 이름이 돈아날 것 같다
ㅡ하나 그리고 둘 부분
안희연은 대체로 '안과 밖'의 경계/차이의 구도로 상상 되어온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옆'의 수평과 연대의 구도 로 치환한다. 위의 시에서 보듯 안희연에게는 안이나 밖도 옆'의 공간성으로 경험된다. 위나 아래도 별반 다르지 않 다. 근접성, 평등, 접촉 등을 함의하는 '옆'은 안희연이 지 항하는 삶과 시의 윤리적 지평을 가능하게 한다. '옆'은 "너 의 슬픔이 끼어들"("파트너) 수 있는 '나'의 윤리적 가능성 의 지평이며, 이 윤리적 가능성의 지평으로 인해 문득 뜨거워지고 드넓어지는 '나'의 존재적 지평이다.
(생략)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 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들은 "심지도 않"았는데 "벽을 뚫고 자라나는 나무들 처럼 계속 진주해와 '나'의 '옆'을 이룬다.
눈을 감았다 떠도 아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도 않은 나무가 자랐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죽음들을
더는 넣어둘 다락이 없어 벽을 뚫고 자라나는 나무들을
여섯번째 아이가 떨어지면서
어깨 위에 잠시 앉아 있겠다고 한다
참
다정한
무게
ㅡ월요일에 죽은 아이들 부분
안희연의 '옆'의 존재론에 생산과 연대의 방향성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옆'의 부정적인 운동성은 본디 안희연이 기존의 세계로부터 배운 것으로, 수동적이고 기계적이며 질적 변화가 없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지금껏 수많은 지시어를 만나왔습니다 나에게는 예언의 새가 있고 언제나처럼 그것을 따라가면 될 일이었습니다"("피아노의 병), "쉽게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긴다/돌을 나르는 것 외엔/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평생" "나는 이 영원을 기록하기 위해/세상 모든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당분간 영원.) 등에서 드러나듯 존재감을 감축하고 세계를 희석하는 익명의 어두운 작용은 삶 속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이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은 안희연에게 중요하다. 안희연의 첫 시집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익명을 근간으로 하여 이름의 불가피성을 포용하며 작동하는 주체의 역량과, 익명으로 환원되고 해체되는 일을 막을 수 없는 주체의 무기력을 아우르려는 균형 감각. 안희연은 실명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쓰는 일이 성공을 기약해두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고 그녀는 단언하거니와, 의미있는 실패조차도 아닌 '의미없는 실패'로 귀결되어도 무방하디는 폐기는 강렬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