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
귀가歸家의 여정
-예수님이 참고향故鄕이시다-
오늘 2월6일은 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26명의 신자들이
일본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날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시 이들의 영웅적 순교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이들중 예수회 사제였던 성 바오로 미키는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에 순교하였고
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26명 순교자들은 일본인들과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회원들,
즉 일본인들과 유럽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성 바오로 미키와 23명의 체포된 그리스도인 동료들이 1597년 1월 3일부터 2월5일까지
27일 동안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1000km 걸어가 모두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걸어가는 동안 교회의 찬양과 감사의 찬송가인 테데움을 불렀습니다.
다른 동료들 25명과 함께 십자가 달려 순교 직전 성 바오로 미키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고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고, 그의 스승 예수님처럼 사형집행자들을 용서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영웅적 신앙이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이들은 순교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임을 믿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영웅적 순교의 죽음도 가능했음을 봅니다.
성 바오로 미키의 영웅적 순교 모습에서 우리의 첫 순교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떠오릅니다.
저는 믿는 이들의 삶을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의 여정이라 일컫곤 합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 계신 본향집으로 귀향이라는 것이지요.
고향을 찾는 원초적 본능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바로 이렇게 고향을 찾는 귀향본능에 따라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친정집을 찾는 느낌이고 많은 분들 역시 고향집을 찾는 느낌이라 말합니다.
어제 저를 찾았던 ‘혼인주례 1호 부부’와의 만남도 참 행복했습니다.
고향집을 찾듯이 수도원을 찾은 부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부가 떠나기 전 성덕聖德 점수를 각자 매겨 보도록 했습니다.
100점 만점에 기본점수 20점, 진복팔단 8개 항목
각각 10점 만점에 80점, 그리고 예수님 보너스 점수 10점으로 했습니다.
각자 후하게 점수를 주라 했습니다.
점수를 확인해 보니 자매님은 99점, 형제님은 94점이었습니다.
“99점, 94점 놀랍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성인부부입니다. 오늘 2월5일은 두 성인부부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격찬의 덕담과 더불어 크게 웃었습니다.
완전히 주님의 한가족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제 저는 본기도 서두중 “주님의 가족”인 저희를 자애로이 지켜주십사라는
말마디에서 은혜 받았다 고백했습니다.
특히 영성체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체성가 177장을 부를 때는 주님의 한 가족이 된 느낌을 지니곤 합니다.
제가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 여정중 성전聖殿에 들릴 때마다 느낌은
꼭 고향집처럼 편안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수도원이
완전 고향집처럼 느껴져 휴가의 필요성을 잊고 지낸지 수십년이 됩니다.
특히 성체성가 177장 2절은 늘 불러도 새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가사도 곡도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 바로 거기가 외딴곳이자 고향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원고향입니다. 주님의 한 가족이 되어 예수님을 모실 때 비로소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영문 주석에서 얻은 통찰이요 그대로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된(were healed)’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에소존토(esozonto)’는 단지 육체적 치유 이상의 뜻을 함축한다.
초대교회 어휘중 그 말은 구원의 전적 체험을 묘사한다. 그말은 단지 ‘복지(wellness)’가 아니라
, ‘온전함(wholeness)’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귀향(coming home)’이다.”
바로 예수님께 귀향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동창회나 특정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과정을 수료한 뒤에
모이는 모임을 가리키는 표현도 홈커밍, 귀향입니다.
고향집인 예수님께 돌아와 만날 때 비로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미사는 귀향의, 커밍홈의 실현이요 구원의 체험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고향을 잃어 병든 이들 원고향,
본향집인 예수님께 돌아와 만나니 모두 치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 청했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그대로 예수님께 귀향하여 치유 구원받는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부터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말씀으로의 창조과정을 통해 사람이 살 수 있는 보금자리 집을 마련해 주시는 과정이 참 인상적입니다.
창조과정이 일정한 틀에 따라 반복적으로 이뤄집니다. 한 대목만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부르셨다-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이런 틀로 계속되는 창세기 창조과정은 내일까지 계속됩니다.
뚜렷이 경계를 지어가며 참으로 인간이 살 수 있는
보금 자리 가정 집의 품으로 만들어 주는 과정이 은혜롭고 인상적입니다.
더불어 예전 수차례 인용했던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라는 괴테의 말도 생각납니다.
한계없이 끝없는 욕망대로 살 때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반대도 그대로 성립됩니다.
“천국에는 한계가 있다”입니다.
한계가 없는 혼돈 상태를 점차 뚜렷한 경계를 지어
천국같은 살집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섬세한 배려의 창조과정입니다.
그래서 한계限界와 경계境界를 뚜렷이 지어주는 수도원 자연 환경, 삶의 한계를 지어주는 관례서,
하루 삶의 일과표의 균형과 조화가 무질서의 혼돈이 아닌 질서잡힌 지상천국을 살게 합니다.
이래서 참 자유로운 삶을 위해 한계에 익숙해지는 자발적 선택의
‘한계의 훈련’이 정주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귀가의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고향입니다.
원고향, 본향집인 예수님께 귀향하여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얻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께 귀향하여 한계와 경계가
분명한 균형과 조화의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