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죄인이다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시작한 재스민운동이 이집트를 넘어 예멘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장기집권을 하는 중동국가로 번지고 있다. 결국 리비아의 카다피는 42년간의 철권정치를 끝내고 초라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번지고 있는 시민운동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지금 북한에서는 3대째 세습정치가 이뤄지고 있다. 불과 29세인 김정은이 권력의 한 중심에 들어와 있다. 있을 수 없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의 선거제도는 당에서 지명한 사람을 대의원으로 뽑고, 그들이 모인 최고인민회의에서 권력자를 승인하는 형식의 비민주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찬성률은 보나마나 100%다. 감히 반대표를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이름은 그럴 듯했다.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권분립 즉 견제와 균형이라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곳에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의 1/3을 선출했다. 북한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권력자 마음대로 얼마든지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후계자를 지명할 수도 있었다.
선거기간에는 대통령 비상조치로 국회와 정당은 해산되고, 어떤 집회도 허용하지 않았다.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은 모두 고문당하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입이 있어도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오직 힘의 원리만 존재하는 불안한 사회였다.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
1972년, ‘유신헌법’ 국민투표가 있던 해에 나는 23세 산골마을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역사의 죄인이다. 공무원 신분으로 유신헌법을 홍보하러 다닌 범법자였다. 수업이 끝나면 가정방문이라는 이름으로 학부모들을 만나러 다녀야 했다. 교장은 교육청의 지시를 받았고,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야 했다. 유신헌법 홍보사업의 암호명은 ‘퇴비증산’이었다. 우리 구역 퇴비증산에서 실적이 적게 나오면 교장은 인사조치 되고 교육장은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교사들의 임무는 학부형들을 만나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가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유신헌법이 필요하고, 유신헌법이 통과되어야 나라가 안정되게 발전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일이었다. 가정방문을 한 다음에는 면담결과를 찬성과 무관심, 반대자로 구분하여 보고하고, 모든 사람이 찬성으로 바뀔 때까지 책임지고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못할 노릇이었다.
어쨌든 결과는 91% 투표에 92%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내가 근무하던 지역에서는 97%가 찬성표를 던졌다. 그 뒤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선출되고, 이어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73명의 후보는 하나마나한 승인절차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들은 유정회의원이라는 원내단체를 만들어 대통령의 신복 노릇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
나는 유신의 기수였다. 마음으로는 반대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교육자의 신분으로 최선봉에 서서 유신헌법을 선전하고 다닌 범법자요, 역사의 죄인임에 틀림없다.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황야에서 외치고, 거리에서 감옥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간 수많은 민주인사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다.
지금까지 유신체제가 존재했더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의 세습정치를 비판하고 비웃을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운동을 지켜보면서 밤잠 설치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역사는 흐르고 그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나의 과거도 지나갔다. 하지만 양심을 팔고 다녔던 당시의 일들은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나를 꾸짖고 있다.
-백봉기, 산문집 ≪탁류의 혼을 불러(2012,8)≫ 中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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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2010년 6월이었지. 같은 해, 같은 달, 한국산문에 입성한 등단동기라고나 할까. 총회 단상에서 연설을 하는 그의 프로필에 형용할 수 없는 위축감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러 가지로 잘 이룬, 한 집안의 남자, 가장으로서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벌써 산문집 두 권을 상재하다니.
학력이나 경력, 배경도 나무랄 것 없이 화려하고 우아하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그래, 용서를 먼저 구하고 홀로 서야 하는 게 맞다. 지난 치적과 과업을 되새김하기 보다는.
아마도 어느 시점에 이른다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이들이 속속 생겨나게 되지 않을까. 탁류를 쓰신 채만식 선생처럼, 위 수필을 쓰신 백봉기 선생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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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不見睫(목불견첩)이라, 눈은 제일 가까이 있는 자기 눈썹을 직접 보지 못하는처럼
지난 것은 역사가 말을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