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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과 휴거에 관한 고찰
1). 세대주의 휴거론 비판
본 글에서는 “환란전 휴거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환란통과 후 휴거설”이 성경적임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환란전 휴거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자는 세대주의의 아버지인 다비(John Nelson Darby)였습니다. 우리는 환란전 휴거설이 왜 생겼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대주의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환란전 휴거설”은 성경적이 아닌데도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는 외쳐지고 있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환란전 휴거설”에 대한 재고가 있어서 성경적인 휴거설이 한국의 강단에서 선포되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세대주의의 역사
세대주의 역사는 영국과 아일랜드(Ireland)의 몇몇 지방에서 모인 독립적 단체들의 집회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형제단의 기원은 1828년 더블린(Dublin)시의 위클로의 카운터의 파워스코트 맨션에서 개최되었고, 존 넬슨 다비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플리머스(Plymouth)와 브리스톨(Bristol)에서 에드워드 어빙에 의한 예언 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더불린시의 집회는 영국의 다른 두 집회보다 앞섰기 때문에, 더불린은 세대주의의 발생지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을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현대 세대주의 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다비(J.N.Darby)가 교회를 “형제단”이라 불렀고, 이 형제단의 출판 본부가 바로 플리머스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단 운동은 다비의 이름을 따라 다비주의(Darbyism)라 불려지기도 하며, 그 신학자들을 D-신학자라고 부릅니다. 세대주의의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 그 주요한 대변자들, 곧 다비와 스코필드 그리고 세대주의의 역사적 흐름에 대하여 차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①, 죤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다비는 1800년 좋은 가정적인 배경을 갖고(그의 가운데 이름 넬슨은 유명한 해군 제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88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학(Westminster and Trinity College)에서 법률을 공부하고(1819년 졸업) 성공적인 변호사가 되었지만,27세 되던 해에 그 일을 포기하고 영국 성공회의 신부가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모든 제도에 대해 못마땅해 했던 그는 1827년 그의 소론<On the Nature and Unity of the Church of Christ>(그리스도 교회의 본질과 통일)을 써냄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논문이 나온 그 해에 그는 그 직책에서 물러나 애찬과 기도를 위한 더불린의 한 회합에 참가하였는데, 그의 교육과 재능과 힘차고 매력적인 성품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서 그 회합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비는 칼빈주의와 경건주의를 합쳐 소위 극단적인 다비파(Darbyites)를 조직하였다. 다비는 성격상 괴상한 데가 있었으나,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온후하며 검소하였다. 그는 흉한 얼굴에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고, 강한 조직력과 지칠줄 모르는 정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재능은 다양해서, 저술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전 성경을 독일어, 불어, 영어로 번역했다. 다비가 성경의 권위와 예언서의 중요성을 확신하게 된 것은 말에서 떨어져서 요양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특별히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로 시작되는 이사야서 32:1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형제단 운동이 처음 조직되었을 때, 저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에큐메니칼 운동이었고, 둘째는 안수받은 목사제도와 교회제도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저들은 예배 시 음악이나 어떤 형식의 의식도 반대하였다. 다비의 표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연합”이라는 것이었다. 저들은 안수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라고 하여 언짢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형제”란 말 자체는 교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다비는 영국교회를 떠나 형제단 운동에 가담하고 나서 많은 진리를 재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진리들은 처음에 사도들이 가르쳤으나 후에 그 빛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위대한 종교개혁자들도 이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 “재발견된 진리”란 종교 개혁자들과 현존하는 많은 주석서들이 주장한 기독교의 모든 역사적 교훈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들이었다. 저들은 사도 이후의 모든 사상을 거짓된 것으로 보고, 형제단의 “재발견된 진리” 만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제멋대로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형제단에는 그 자체 내의 분쟁으로 불행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형제단은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극단파요, 다른 하나는 온건파로 각각 알리어졌다. 그리고 다비는 스위스 장기 체류(1838년 이후)에서 플리머스에 돌아오게 되자, 다비가 없는 동안 플리머스 집회의 지도자의 역활을 하고 있는 뉴톤(B.W.Newton)과 다비 사이에는 교리적 차이점이 있는 것이 나타났다.
뉴톤은 칭의에 대한 종교개혁의 교리, 구약시대의 성도들을 신약 계시 교회에 포함시키는 것, 그리고 재림은 <대환란>전에 오지 않는다는 것 등을 믿었다. 그리고 교회는 그는 그 교리를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싸움으로 결과하여 논쟁과 유인물로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뉴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비는 하는 수 없이 50명 내지 60명은 신도들을 데리고 같은 시내에 다른 집회를 열었다. 이것이 극단파의 시초가 되었다. 자기들만이 형제단의 정통파라고 주장하고 자기들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회중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비는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극단적인 논쟁을 즐기는 개인주의자로 일생을 보냈다. 한번은 무디(Dwight L.Moody)와 논쟁을 벌이다가 화가 나서 성경책을 덮고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뉴톤이 자신의 교리적 오인에 대하여 유인물을 통하여 사과했는데도 불구하고 뉴톤을 징계한 일도 있었다. 한편 다비는 자기 사상의 많은 부분이 이단으로 간주되어, 많은 사람에게 슬픔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그릇된 사상을 철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는 교제를 끊으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비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회원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뮬러(George Muller)를 파문하기까지 하였다.
②, 싸이러스 잉걸스 스코필드(Cyrus Ingerson Scofield)
세대주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다비의 충실한 추종자인 스코필드를 놓칠 수 없다. 스코필드는 다비의 사상에 매혹당한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다같이 법률을 공부했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지칠줄 모르는 정력을 갖고 자기의 신념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스코필드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필라델피아 성서대학(Philadelphia College of the Bible)을 설립하였고,1909년에는 그 유명한 스코필드 관주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온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스코필드가 다비의 감화를 받고나서 세대주의 견해를 영속하기 의해 저술된 책이다. 이 성경은 1909년 출판된 이후 200만부 이상이나 매진되었다고 한다. 스코필드는 1843년 8월 19일 미국 미쉬간 주에서 태어나 1921년 7월 24일 죽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사병으로 종군하다가 공을 세워 훈장을 타기도 했다. 군대에서 제대하자 그는 법률 공부를 시작했고, 그 후 정계에 투신하여 ‘그랜트 대통령(President Grant)'에 의하여 캔사스 주 변호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대주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스코필드는 1879년에 회심하여, 3년후,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으로 관주성경을 썼다.
그는 영국 흠정역 성경에다가 자신의 각주를 붙여 모든 독자의 기억 속에 자신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스코필드의 충실한 제자들은 스코필드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생각하기까지 되었다. 스코필드와 사상이 다르다는 것은 곧 바울과 베드로가 다르다는 결론이 된다. 다시 말하면 스코필드의 관주 성경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스코필드 관주성경의 각주에 전부 다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역사적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볼 수 있다.스코필드는 성경을 믿는 보수적인 신자였다. 소위 고등비평이나 자유주의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여러 면에서 공격할 때 이 관주성경이 나왔든 것이다. 이에 대한 도전이 절실히 요구 될 때, 스코필드가 성경의 주요 교리들을 변호하므로 성경 연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도 역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교훈과 전혀 일치하지 않은 것들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많은 지식을 가진 성경 학도라면 이 관주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여기서 좋은 점들을 취하고 잘못된 교리들을 피할 수 있겠지만, 초신자나 아직 신앙의 지식이 부족한 자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책이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의 성경해석 방법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교회를 말하고 성경의 어떤 부분은 이스라엘을 말한다고 결정하고 나서, 이와같은 구분 방법에 따라 그 관계된 귀절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계시록에는 환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교회인지, 또는 이스라엘인지를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결정하고, 이 결정에 따라 교회는 대환난을 면한다하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당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릇된 성경해석이 종말론에 그릇된 방향을 취하여 세대주의라고 하는 괴상한 체계를 만들어 냄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릇된 종말관을 갖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코필드 관주성경의 오류를 지적하고 공격하였다. 그 중에서도 스코필드를 가장 혹평한 인사들은 자기 진영안에 있는 인사들과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계속 확신하는 사람들 이었다. 이들 가운데 Philip Mauro, S.D.Gordon, Cambell Morgan,Harry Rimmer,그리고 Paul B.Fischer와 같은 저명한 인사들이 끼어 있었다.
③, 미국에 있어서의 세대주의
미국의 세대주의는 다비가 1859년 처음 카나다를 방문하고 나서, 그 후 카나다와 미국을 여러 번 방문한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1862년 뉴욕의 제임스 잉글리스(James Inglis)가 월간지 Waymaks in the wilderness를 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대서양 연안에서 형제단의 사상을 보급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이 사상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옹호자 중의 한 사람 J.H.부룩스(James H.Brookes) 였는데, 그가 1870년에 저슬한 책 Maranatha는 여러 판을 거듭한바 있었다.
부룩스는 “Believer's Meetings for bible study"로 알려진 하계 사경회와 역시 1878년 뉴욕에서 처음 시작된 예언 사경회(Prophetic conferences)에 매우 능동적이었다. 세대주의의 역사를 상세히 추구하지 않더라도 미국에 있어서의 세대주의의 그 신속한 성장이 W.E.Blackstone의 저서 “Jesus is coming”과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기인한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블렉스톤의 책은 1878년에 출판되어 처음에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지만,1908년 이후 수십만부가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무료로 배부되었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1909년에 출판되어 1917년에 수정을 가하였으며, 그후 계속 팔려 200만부 이상이나 인쇄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대주의자들의 성경으로, 다비와 형제단의 예언 사상을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국의 세대주의 사(史)는 초기 형제단 운동처럼 내분으로 점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을 가장 심각하게 반대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약 80년전 Robert Camerron 이나 Nathanael West와 같은 인사들은 환난전 재림론 문제로 반기를 들었으며,W.J.Erdman과 Henry W.Frost도 이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세대주의에 가장 강한 반대자 중의 한 사람은, 한때 세대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였든 Philip mauro, A.W.Pink,이다. 한편 미국내에서는 세대주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비-스코필드 형과는 다른 세대주의 한 체계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그 대표자인 E.W.Bullinger(1837-1913)의 이름을 따라 블링거의(Bullingerism) 또는 극단적인 세대주의(Ultra Dispensationalism)라 부른다. “진리의 말씀”을 세대적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블링거의 주장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의 하나는 교회와 관계된 것이었다.
블링거는 사도행전의 오순절의 사도적 교회와 옥중서신의 바울적 교회를 구분하고, 하나는 “신부교회”로 다른 하나는 “지체교회”라 불렀다. 이와 같은 블링거의 견해는 스코필드파에 의해 완전히 거절되었다.
④, 시대적 상황
역사적 기독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대주의의 견해들이 어떻게 이와 같이 교파를 초월하여 광범한 영향을 끼쳤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다비시대의 영적 상황을 더듬어 보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19세기 초에는 교회 강단에서 교리적인 설교를 거의 들어 볼 수가 없었으며, 성직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강조한다는 것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자유주의가 성행하는 교회는 무기력하게 되었다. 강단은 직업적인 성직자들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신자들은 마치 “목자없는 양”과 같이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다. 저들은 예언의 확실한 말씀을 듣기를 갈망했으나, 주일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불확실한 음을 내는 피리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생겨지는 부산물은 성경의 교훈에 관하여는 전적으로 무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형제단 운동은 태어났 것이다. 이러한 영적 공백기에 다비주의와 함께 각종의 혁신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몰몬교도들은 다비의 시대에 천년왕국설을 가르치고 있었다. 죠셉 스미스(Josep Smith)는 1830년에 몰몬경을 출판하였는데, 바로 이 해에 다비는 형제단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스미스는 다비처럼 이스라엘의 재소집을 가르쳤다. 안식교의 창설자인 W.밀러(William Miller)는 1831년에 자신이 교리를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계의 종말이 1843년에 온다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소유를 팔고, 흰 옷을 입고 주의 재림을 기다렸다. C.T.럿셀(Charles Taze Russel)은 1880년에 여호와 증인을 창설하고, 다비가 죽은 바로 전 해인 1881년에는 자신이 저서를 출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파의 환상적인 천년왕국설은 너무나 유명하여, 여기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상황은 다비주의를 쉽게 받아들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예언과 주의 재림을 강조하는 형제단의 교훈은 당시의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의 요구에 충분히 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대주의의 특징
①, 7시대설
스코필드 성경에서 7시대를 다음과 같이 나눈다. 무죄시대(창조로부터 타락까지),양심 혹은 도덕책임시대(타락으로부터 홍수까지), 인간통치시대(홍수로부터 아브라함의 부름까지), 약속시대(아브라함의 부름으로부터 시내산 율법 주실 때까지), 율법시대(율법 주심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공성역 기간까지), 교회시대(그리스도의 공성역 말기로부터 재림까지), 왕국시대(그리스도의 재림으로부터 1천년간)이다. 스코필드 성경에 ‘세대’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세대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의 어떠한 구체적 계시에 대해 그들의 순종을 시험받는 일정한 시기”(A dispensation is a period of time during which man is tested in respect to his obedience to some specific revelation of the will of God"라고 정의 되어 있다.게블라인(Frank E.Gaebelein)은 7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7시대가 있으나 그것들은 내내 순종의 단일 시취에 기초하여 원리에서는 하나다. 그래서 사람이 만일 제일 시대의 제정한 조건들을 능히 수행하였더라면 다른 여섯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실패하였지만은 하나님은 자기의 유죄한 피조물을 내어 버리는 대신에 그에게 시취를 행하셨다. 이같이 각 시대는 실패로 종지하고 각 시대는 하나님의 긍휼을 내어 보낸다.”고 하였다. 이 견해에 대하여 중대한 이의들이 있다.
첫째, 세대주의 자들이 사용하는 시대론의 명칭, 즉 「오이코노미아」(οικονομια)란 용어는 성경에서 경륜(엡 1:9,3:2,9;골 1:25;딤전 1:4),청지기(눅 16:2-4),직분(고전 9:17)등으로 한역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세대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시취나 시련의 기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함은 오용이다.
둘째, 7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이다. 제 2시대는 양심시대라 칭하나 양심은 바울 당시 이방인에게도 심판의 빙거가 되었다(롬 2:14-15).제 3시대는 인간통치시대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세계를 통치하라고 하였으나 통치에 실패하였다고 하나 이 때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때였다. 또 약속시대, 율법시대, 은혜시대(교회시대)로 구분하나 율법시대에도 약속들이 있고, 은혜시대에도 율법이 생의 준칙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셋째, 시련을 계속적으로 봄은 성경적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사람이 계속적으로 시련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초 시취에서 낙제하여 영생의 상급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긍휼하시어 그에게 재시취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과 함께 그 자손들은 전적으로 부패해지도록 된 것인데(롬 5:12-14) 그때부터 인류의 구원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실현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벌써 그 때에 그리스도의 오실 것이 약속되지 않았는던가(창 3:15)? 구원은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넷째, 성경의 유기체를 분열시킨다. 세대주의자 찰스 쿡(Charles C.Cook)은 “구약에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앙과 본분의 법칙으로 적용되는 한 문절도 없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성경을 두권에 나누어 구약과 신약의 한 부분은 이스라엘에게, 신약의 남은 부분은 교회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니 이는 성경의 유기체를 분열시킴이다.
②,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원리를 잘 설명해 주는 세대주의 신학자의 글은 다음과 같다. “세대주의자는 인류 세대에 걸쳐 하나님께서 두 개의 특별한 목적들을 추구하고 계시다고 믿는다. 하나는 지상적 목적들과 관련된 것으로 유대주의에 관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천상의 백성들, 천상의 목적들과 관련된 것으로 기독교에 관한 것이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해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첫째,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살펴볼 때 그렇다.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이방인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따라서 신약교회를 대변하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갈 6:15-16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에서 “이 규례를 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이다.
이 무리 안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참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참조:행 13:32-34,38-39;벧전 2:9).
둘째, 아브라함의 씨(자손)란 표현을 살펴보자. 구약에는 이 용어가 분명히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연적 후손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신약성경은 이 용어의 의미를 확대시켜 이방인 신자를 포함하여 말하고 있다(갈 3:28-29;창 12:2-3,22:18).
셋째, 시온성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서 있는 언덕 중의 하나를 구약에서 종종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 이 용어들이 그 의미를 확장시키어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히 12:22-24;계 21:2).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별도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구약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며, 계시의 점진성을 무시해 버리는 처사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겐 미래가 없단 말인가? 물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자들의 소망하는 미래는 동시에 이방인들이 소망하는 미래이기도 하다.
③, 왕국 연기설
세대주의자들의 왕국연기설이란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야 왕국의 건설을 예언하였는데 메시야가 강림하셨으나, 유대인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건설을 연기하시고 하늘로 가셨는데 후에 다시 와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왕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세례 요한과 예수가 천국이 가까왔다고 전파할 때에 그들은 유대인의 신정국가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왕국설립을 그의 재림시까지 연기하셨다는 것이다. 이 변경의 싯점을 스코필드는 마 11:20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어떤이는 마 12장에) 두고 있다. 그 전환점 전에는 예수께서 이방인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인에게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그 전환점 이후에 그는 왕국을 더 이상 전파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것이 장래 임할 것을 예언하시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피곤한 자들에에게 휴식(안식)을 제시하신 것뿐이라고 한다.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첫째,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예수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제시했던 왕국을 거절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옳지 않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야기한 왕국을 배척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얼마는 예수님을 믿었고 또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병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120명의 무리들(행 1:15),500여명의 무리들(고전 15:6)이 있었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왕국을 연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왕국을 세우셨고 또한 많은 무리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자기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나타내었든 왕국은, 종종 세대주의자들의 주장하듯, 그리스도가 지상적 왕권을 가지고 유대인들을 지배하려고 했었더라면, 아마도 예수님의 원수들은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과정 중 이 일을 들먹거리며 고소하였을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였던 왕국은 영적인 것이었다. 즉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그리고 그 통치의 목적은 모든 죄와 사단적 권세들로부터의 구속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하셨다.
셋째, 세대주의의 왕국의 연기에 관한 가르침은, 만일 예수님이 제시한 왕국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받아들였었더라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었겠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고 유대인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세대주의자 챨스 라이어(Charles C.Ryrie)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제시한 다윗 왕국을 수락하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왕국건설을 위한 기초적 작업으로 필수불가결 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논리의 모순이다. 유대인 대부분이 영접하였는데 누가 그를 죽인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고난 후에 영광을 말씀하셨는데(눅24:26) 세대주의자들은 영광 후에 고난을 말한다.
④, 예언의 문자적 해석
현 시대의 세대주의자인 헤르만 호이트(Herman Hoyt)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이 원리는 성경을 문자적이며 평상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이것을 성경 전체에 적용하려는 태도이다. 즉 성경의 역사적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리적 자료들 역시 이런 식으로 해석되며 도덕적, 영적인 내용 역시 이런 형태로 해석을 시도한다. 예언적 자료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는 상징적 언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상징적 언어가 사용된 경우라도 그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문자적 방법을 적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어떠한 종류의 다른 해석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그들을 위해 의도되었던 메시지를 부분적으로 - 전부가 아니라면 - 나마 탈취하는 것이 된다.”그러나 바른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을 겸하여 하는 것이다.
⑤,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론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첫 단계를 공중 재림이라 하고 이때에 휴거(rapture)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완전히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어느 지점까지 내려오신다. 이때 모든 참된 신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이 부활 후에 그때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는 신자들은 홀연히 변형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휴거가 일어나게 된다. 즉 죽음에서 일어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은 구름 속에 들림을 받아 강림하시는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게 된다. 교회라 불리는 신자들의 이 몸이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 그와 함께 7년 동안 어린양의 혼례잔치를 축하하며, 그 기쁨을 나누게 된다. 교회가 하늘에 남아 있게 될 이 7년 동안,땅 위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다니엘 9:27에서 예언된 환란이 시작되며 그 환란의 후반부를 소위 대환란이라고 부른다. 적그리스도(바다로부터 올라온 짐승)가 이제 그의 잔인한 통치를 시작하는데, 그 통치의 절정은 그가 하나님처럼 경배받기를 요구하므로 막바지에 이른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들이 그 때에 땅위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된다. 또 수많은 이방인들의 무리와 함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에 구원받게 된다. 땅의 왕들과 짐승의 군대들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게 된다. 이 7년 기간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영광중에 다시 이 땅에 오시게 될 것이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땅위에 서실 것이다. 그 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의 적들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에 그의 보좌를 세우시며 그의 천년간의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러한 두 단계로 나뉜다는 입장에 대해서 어떤 확실한 성경적 근거도 없다.
⒞.세대주의의 환란전 携擧설의 부당성
①, 성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세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첫번째 용어는 「파루시아(παρουσια)강림」란 말이다. 이 용어는 주의 재림을 표시하는 대표적인 낱말이다. 특히 바울의 애용어로서 신약에 24회 사용되는 중 마태에 4회 공동서신에 6회 그외는 모두 바울이 사용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 전-후서에 7회나 보인다「살전 2:19,3:13,4:15,5:23;살후 2;1,8,(9)」.이는 원래 왕의 임재를 표시했으나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표시하는 유명한 낱말이 되었다. 이 말을 바울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용어는 원래 일반적인 말 이었으나,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고유명사 비슷하게 되어 가는 경향이 있어서, 급기야는 ‘예수의 강림’이 이 용어의 다른 것과의 관련성을 거의 막을 정도로 이 용어의 용법을 전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기에는 이것이 누구의 ‘강림’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는 속격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기독교적 어법에서의 ‘파루시아’하면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한 사건만을 지칭하게 되어 더 이상의 구체화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은 ‘도착’(arrival)과 ‘현존’(presence)의 두 가지 밀접히 연관된 개념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도착’을 의미하지 ‘귀환’(retur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주님의 공중 재림에 국한시킨다.
둘째 용어는 「아포칼룹시스(αποκαλυψι )나타나심」란 용어이다. 살후1;7, 고전1:7,3:13(롬 2:5,8:18)에 나타난다. 이 용어는 자주 초자연적 영역으로부터 지상적영역에로 위대한 것들이 내려오는 것에 적용한 것이다(단 7:13).이 ‘아포칼룹시스’란 용어에 부가된 색조와 향취는 ‘파루시아’란 말에 의해서 전달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파루시아’는 주로 신자들에게 관심하고,‘아포칼룹시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들에게 주로 관심한다(살후 1;7,8).
즉 이 낱말은 ‘숨은 것이 드러남’을 뜻하여 주께서 나타나시는 사실과 더불어 심판을 통하여 인간의 숨은 일들을 밝히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세대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대환란 끝에 주가 세계를 심판하려고 지상에 영광스럽게 오실 때에 배치하였다.
세번째 용어는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 ια)나타나심」이란 말이 있다. 살후 2:8에 한번 보이는 외에 모두 목회서신에 나타난다(딤전 6:14;딤후 1:10,4:1,8;딛 2:13).이 낱말은 공중에 나타나시는 주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그로 말미암은 항거할 수 없는 권능을 표시하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아포칼룹시스’와 같이 주님의 지상 강림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세 가지 말로 표현했다.「파루시아, 아포칼룹시스, 에피파네아」이다. 이 말의 차이점을 세대주의자에서는 교묘하게 해석한다. 여기서 첫번째 ‘파루시아’란 것은 세계의 모든 불신자들도 볼 수 있게 오시는 것이다. 그들이 여기에 인용하는 성경은 예수님께서 「밤의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이 오시는 때에는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전혀 알 수 없고 이 기간에는 공중의 혼인 잔치가 있은 후에 지상 재림을 하시게 되는 것으로 그 때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며, 이 때의 재림을 「아포칼룹시스‘라고 했다는 것이다. Dr.Allis는 이 문제에 대하여 평하기를 바울 사도가 재림에 관하여 말할 때에 이 세가지 말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살전 4:15,살후 2:1,살전 3:13,살후 2:8에 보면 동일한 사건을 다른 말로 표시한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예수님의 재림에 있어 바울 서신에는 두 가지 재림설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재림은 두 가지로 시간적인 간격을 둔 사건이 아니고 단회적인 사건으로서의 단지 말의 표현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②, 이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혹자는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 몇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든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두 번 환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게 되면 주님이 두 번 심판을 받는 결과가 된다고 한다.
교회가 환난 당하는 것을 예수님이 두 번 심판을 받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는가? 초대교회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받은 환난과 핍박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이는 이론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둘째,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비유로 보건대 교회는 환난 전에 공중으로 휴거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환난과 진노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한데서 나온 오류이다. 앞으로 있을 환난 시 성도가 그 환난을 통과하나 하나님의 진노는 성도에게 임하지 않는다(계16:2).
셋째, 계3:10에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하였으므로 환란기 전의 휴거로 본다.
이 구절에서 “시험을 면한다,”는 내용은 번역상 오역이다. ‘면하게 하리니’는 “보호한다 또는 지킨다”는 말로 번역이 되어야 한다. “시험의 때”는 이중적인 환난을 의미한다. 그 하나는 세상 종말에 있을 무서운 대환난(계13장)이고,또 하나는 주께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심판하심으로 온 세계에 임할 심판이 그것이다.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로하시면서 하신 이 말씀은 이러한 이중적인 환난이 온 세계에 임할 때에 그들을 주께서 지켜 보호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넷째, 계 2장과 3장에서 교회라는 말이 언급되다가 4장 이후에는 한 번도 없으니 이전에 교회는 휴거되고 나머지는 이삭줍기에 해당되는 성도들이라고 한다.
계시록 4장 이후부터 교회의 개념이 없다는 주장은 너무나 비성경적 발상이다. 4장 이후에도 성도들이 환난받는 장면이 여러번 기록되어 있는데 세대주의자들은 “지상에 남은 성도들과 유대인 성도들로 가리킨다,”고 못 박는다. 그러나 “성도”의 용어는 신약용어이며 신약적 개념이지 구약이나 이스라엘의 용어가 아니다. 구약 다니엘서 7장에서 사용한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섯째, 계 4장의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요한의 휴거와 교회의 휴거로 보고 있다.
이는 요한의 휴거도 교회의 휴거도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감동된 것(in spirit=성령안에 있음)이지 변화되어 휴거된 것이 아니다(계 4:2).요한은 밧모섬에서 에베소에 온 후 천수를 누리고(100세) 죽었다(주후 106년경).
지금까지 “환란전 휴거설의의 부당성”을 거론하였다.
사실 초대교회로부터 19세기까지는 대부분 “환란 통과 후 휴거설”을 주장하고, 또 그러한 신앙적인 믿음의 생활을 정립하여 왔었다. 그러다 세대주의 창시자 다비에 의하여 이 학설이 주창되었고 그 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이 학설이 발전되었다.19세기 이 후 신비적인 세대주의 신학이 교회내에 스며들면서 어빙 목사와 시카고 무디 신학교의 스코필드 박사와 달라스 신학교 월드 브리너 학장이 이 학설을 체계화시킴으로 환난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2). 예수회가 만든 휴거신학(神學)
[프리메이슨과 로마카톨릭주의]에서 인용
www.anabaptist.cyworld.com
7년 대환란설의 주장자로 유명한 라쿤자는 예수회의 회원이었다.
유대인으로 가장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가명 벤 에즈라는 1791년에 계시록의 해석을 변질시킨 예수회의 회원인 것이 '사도들의 해석 연구"의 저자였던 메이들랜드 목사에 의해 밝혀졌다. http://kjv.kimc.net[희망의 말씀선교회 발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주할 곳이 많으니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요 14:1-2).
지상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프리메이슨과 로마 카톨릭의 두 가지 전략에 있어 주요 양상은 지상에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지상왕국을 건설함에 있다.
스코필드(Soofield)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으나 증거문헌이 필요했다. 이 교리의 역사적인 발달과 휴거라는 용어의 시작을 살펴보자.
먼저 “던칸 맥도날”목사가 쓴 소책자 <성도의 휴거>라는 책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뉴저지의 O.F.P.M 출판사에서 1970년에 출간되었다. 맥도날(Macdougall)은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Free church) 목사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은 오랫동안 성경의 가르침을 굳게 고수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수백만의 진실한 신자들은 ‘성도들의 비밀스런 휴거’라고 하는 가르침과 그들이 휴거된 후 지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주님은 성도들에게 도적같이 임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공중에서 그분을 마지하기 위해 들림 받는 것(휴거)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채로 남아있게 된다. 그 후에 ‘적그리스도’란 사람이 나타나서 세계의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10개의 국가를 연맹으로 하여 고대의 로마제국을 부활시키고 - 성경은 로마제국이 완전하게 망한다고 다니엘을 통해 언급하였는바 이 주장은 성경적이 아님 - 그곳을 지배하며 유대인이 예루살렘 그들의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약속을 해주고는 3년 반이 끝난 후에는 그 약속을 깨뜨리고 그들을 핍박한다.”
“7년 후 예수님은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고 지상에 천년왕국을 세우기 위해 돌아온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의 실제적인 가르침이며 약간의 사람들도 성경이 실제적으로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영향을 받고 있다.”
이 개념의 근원, 더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한 ‘음모’를 살펴보자.
① 로마 황제에 대한 이론
스페인 제수이트인 알카자(Alcazar)는 사도요한이 그의 시대로부터 수백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단지 그의 생애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만을 기록하였기에 그가 말한 ‘적그리스도’는 아마 네로 황제이거나 다른 초기의 핍박자 일 것이다. (이 이론은 계시록에 나와 있는 카톨릭의 유혈 박해와 종교재판소의 견해에서 보는 카톨릭을 포함하여 많은 기독교인,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교황을 탄압한다는 것이다. 즉 로마 카톨릭도 함께 고난 받는다는 설이다.)
로마 카톨릭안의 동조자 - 미래주의를 정립한 리베라와 함께 주창했던 벨라민 추기경
② 미래 인물에 대한 이론
또 다른 스페인 제수이트 회원인 리베라(Ribera)는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계시록 전체는 예수님의 재림 시점에 일어날 일과 관계된 것이기에 미래의 일이란 것이다. ‘적그리스도’란 이 통치의 끝에 가서야 나타나서 세계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교황청 제수이트에 의해 자행된 바돌로메 대학살은 1572년에 일어났고 리베라(Ribera)는 그의 이론을 1580년경에 내놓았다. 하나님은 증명하셨다. “사악한 것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오늘날의 수천의 ‘성경 교사’들은 리베라의 미래의 적그리스도란 개념에 여전히 머물러있다. “250년 동안(1580-1830) 미래의 어느 날 나타난다는 적그리스도의 개념은 로마 교회의 승인된 가르침이었다.”
임마누엘 라쿤자(Emanvel Lacunza)
랍비 벤 애즈라(Rabbi Ben Ezra)의 별명 그는 스페인계 칠레인으로 16세인 1747년에 교황청 제수이트가 되고 제수이트주의 계열인 장미십자회 비밀결사요원이 되어 수사(수녀)의 감독관이 되었다. 제수이트가 칠레에서 추방되었을 때 라쿤자(Lacunza)는 북부 이태리에 머물면서 “영광과 위엄의 구세주 오심”이란 책을 썼다.
제수이트와 교회가 "미래의 적그리스도" 리베라(Ribera)의 이론을 가르쳤을 때
라쿤자(Lacunza)는 이 가르침에 대해서 성도들의 ‘휴거’와 영광 중에 나타날 실제적인 "메시야" 이 둘 사이에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두 번 오시는데 한 번은 그의 성도들을 위함이고 또 한 번은 그의 성도들과 함께 후일에 오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라쿤자(Lacunza)는 그의 책에서 이상한 말을 하였다.
그는 적그리스도가 로마에 나타나서 교회의 본부가 있는 곳을 강타할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그는 또한 평범하게 서술하기를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두 짐승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진정한 교회라고 위장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카톨릭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고 개신교의 주장에 동의를 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는 한 사람이 아니고 한 영에 의해 고무된 사람들의 집단 또는 강력한 체계로써 교회의 본부를 휩쓴 한 사령부가 통치하며 로마에 주둔한다는 것이다.
또한 라쿤자가 개신교에 동의하는 부분은 계시록 11:3-11의 ‘두 증인’은 두 개인이 아니고, 두 무리의 하나님의 신실한 성직자들로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대항하여 결국에는 그를 이기는 자들이란 것이다.
다음으로 라쿤자는 리베라와 같은 제수이트 이론을 제시하였다.
1. 적그리스도의 출현 : 두 증인들과 그에 관한 모든 예언의 성취는 여전히 미래의 일이다.
2.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질 그 모든 일들은 주님이 영광 중에 재림하시기 직전에 일어난다.
라쿤자(Lacunza)가 시도한 것은 무엇인가?
맥도날 목사가 라쿤자의 저서를 주의 깊게 보고 발견한 것은 그가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견해로 계시록을 보았다는 것이며, 이 둘은 누군가가 “왜 그는 이 책을 썼는가?” 하는 물음이 나올 정도로 초지일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 영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세계적 권력자인 적그리스도가 있는 로마교회에 그의 이런 이론이 영향을 끼쳤다면 논법의 냉혹한 힘은 로마 카톨릭으로 하여금 역사가 이미 하나의 세상 권력을 만들어 냈기에 그것에 강제로 응해야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는 개신교의 입장을 수용하도록 조정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프로테스탄트들로 하여금 적그리스도가 마지막 때가 이르기 몇 년 전에 나타난다는 견해를 수용하게 만들었다면, 이것은 동일하게 프로테스탄트가 적그리스도를 한 개인으로 나타내도록 생각하게 만든다. 즉 프로테스탄티즘은 로마의 핑계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라쿤자의 목적일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라쿤자의 책이 그 자신이 속한 교회의 믿음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실한 로마 카톨릭이 읽어서도 안되고 읽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의 가르침과 달라서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제수이트 사제가 개신교 독자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자신의 구세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한 유대인이 그의 교우의 견해로 쓴 것 밑에 가명으로 “랍비 벤 에즈라(Rabbi Ben Ezar)”라고 썼다. 얼마나 많은 신실한 현세의 작가와 교사와 목회자들이 단지 제수이트의 사제인 라쿤자가 가명을 붙여 쓴 책에 의해 영향을 받았나가 궁금하다. 그 책이 출판되기 전인 1801년에 라쿤자는 죽었다. 그 책은 1812년 스페인의 레온섬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즉시 이단 종교재판소의 공공연한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엔 로마의 금서 목록에 남게 되었다.
다음에 그 책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화국의 외교상의 지점인 런던에서 1816년 출판되었고, 저자는 여전히 “랍비 벤 에즈라(Rabbi Ben Ezar)”로 되어 있었다. 그 책은 4권으로 쓰여 졌으며 신비하게 풀이된 그것은 컨터베리 주교의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로마는 매우 인내심이 강하다!
1826년에 컨터베리 주교의 도서관원인 “메이트란드(Maitland)” 박사는 제수이트의 유혹으로 이미 제수이트가 250년간 가르쳐왔던 그 이론을 제공하는 일련의 예언서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메이트란드 박사의 생각은 유대인 지도자인 벤 에즈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으나, 그는 모든 독자를 논리적인 예정설 결론에 이끈 라쿤자(Lacunza)의 두 가지 견해의 지혜로운 계획에 말려든 희생자가 되었다. 그 내용은 계시록 전체는 몇 년간의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지게 되며 개인적인 적그리스도가 세계의 지도자가 된다는 개념은 자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었다.
메이트란드 박사가 그의 소책자를 통해 숨겨진 제수이트 가르침에 몰두하기에 바쁠 때 젊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파 목사인 신비주의자 에드워드 어빙(Edward lrving)이 런던에서 스페인어로 편집된 랍비 벤 에즈라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기에 힘썼다.
어빙(Irving)의 번역판은 1827년에 나왔으며, 그 책의 서문에서 그는 1816년 런던에서 인쇄된 스페인어 편집 후원자가 밝힌 것처럼 제수이트인 라쿤자를 실제 저자로 소개하였다. 그 책은 여전히 랍비 벤 에즈라란 이름 하에서 출판되었다.(어빙을 추종하는 어빙교파들이 후에 방언 성령운동을 시작했다. 역자 주).
1827년 바로 이때 어빙은 하늘로부터 성도들의 비밀스런 휴거를 설교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 목소리에 복종하여 그는 그리스도가 두 번 오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는 ‘살며시 그의 성도들을 위해서, 그 후에 7년간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있은 후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적그리스도를 쳐부수고 통치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제수이트인 라쿤자의 영리한 작업은 영국의 개혁교회 내에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어빙은 1832년에 런던에 카톨릭 사도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를 설립하였다.
동포교회 운동 - 아일랜드로 넘어가면 라쿤자의 비밀스런 휴거의 ‘씨앗’이 계속 잘 자라는 것을 보게 된다. 로마 카톨릭으로 자란 에드워드 크로닌의 지도하에 첫 번째 교우모임이 더블린에서 형성되었고 로마교회는 반은 카톨릭 나머지 반은 개신교 운동을 벌임으로써 자립하려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1833년 : 죤 뉴먼(John H. Newman)과 옥스퍼드 운동 - 뉴먼은 1801년 런던에서 태어나 1890년에 사망했다. 그는 1825년 미국의 사제가 되었다. 똑똑한 젊은 청년인 그는 1828년 옥스퍼드 대학교회의 성 마리의 교구목사가 되었으며 1832년 말타, 나폴리, 로마와 지중해를 여행하였다. 시실리 섬에서 열병에 걸려 거의 죽을뻔 하기도 했다. 옥스퍼드 운동이 시작될 무렵 뉴먼은 런던에 돌아와 즉시 그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옥스퍼드 운동은 영국교회로부터 개신교의 잘못과 로마교회의 무절제한 잔해들을 근절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실 이것은 국민들에게 카톨릭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시도였고 이 일은 뉴먼이 쓴 미래의 카톨릭과 숨겨진 카톨릭의 음모에 관한 수많은 소책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이 취한 입장은 영국교회는 최고의 정치 권위자로써의 교황은 거부하나 로마교회의 종교적 최고 우위성은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배후에 그들이 남겨놓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애 동안에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뉴먼은 성 마리의 영국교회에서 1843년 2월 2일에 교우 목사로서의 마지막 설교를 한 후 사임하였으며, 1845년 10월 9일에 카톨릭교회를 받아들이고, 1846년 로마로 가서 신학공부를 계속하다가 1847년 5월 30일에 카톨릭 사제가 되었다.
1879년 교황 레오13세는 뉴먼이 ‘우리의 생애 중 거둘 수 있는 씨앗을 뿌렸다’ 해서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성도들의 비밀스런 휴거란 다비에게 내린 성령님의 특별 계시인가? 그를 통해 동포교회운동이 내려진 것인가? 아니면 어빙으로부터 다비가 단순히 유추해 낸 것인가? 제수이트인 라쿤자로부터 얻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님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제수이트에 의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비가 6년 전 동포교회운동에 가입한 후에 지도자가 되어 1833년에는 일 년의 예언에 관한 모임에 초대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모임의 창시자 에드워드 어빙은 1827년 이후 계속 비밀스런 휴거를 전파했다. 그의 영감은 1801년에 죽은 제수이트인 라쿤자가 쓴 책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사실, 비밀스런 휴거의 이론은 1827년에 어빙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랍비 벤 에즈라의 이 가공적인 책은 비 카톨릭에게도 받아들여졌으며 그 책 서문의 실제 저자는 제수이트인 라쿤자임을 밝혔다.
소위 ‘섭리의 진실’이라고 불리는 비밀스런 휴거론은 다비 자신의 계획에 아주 잘 맞았다. 거의 250년이 지난 후에 다비는 예언서 모임에서 제수이트의 미끼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성령님에 의한 하나님의 계시라기보다는 250년간의 로마교회의 제수이트의 고안이었다.
1833년 제수이트 교리인 비밀휴거는 두 개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 옥스퍼드 운동은 로마를 위한 공감을 일깨우는 것으로 영국과 로마의 교회가 함께 하나의 목적과 뜻을 갖기 위하여 로마식 예배를 영국에 도입함으로써 비밀스럽게 영국과 로마교회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 동포교회운동은 개신교 교회의 지지를 움츠러들게 하기 위해 가장 영감 있는 멤버를 꾐으로, 로마에 저항하는 것을 약화시켜 그들의 에너지를 헛된 싸움으로 돌리는 것이다. 복음적인 교회와 로마 사이의 구별을 가능한 한 모두 말살시키고 하나님이 바벨론의 우상숭배에 관해 경고하신 그릇된 것에 대한 적용도 없애자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 대한 공감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한 옥스퍼드 운동 교리는 ‘동포교회운동은 과거의 모든 성도들에게 특히 개신교 교회들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계시에 환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또한 그 교회는 성도들이 휴거된 후 개인적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1833년의 제수이트 전략은 여전히 계속 되어갔다. 그들의 영리한 계획은 1909년 출판된 것으로 시러스 스코필드(Cyrus I. Scofield)박사의? 하나님이 기록한 말씀? 한 부분에 넣은 ‘섭리의 진실’과 잘 혼합되었다. 그 계획은 미국에서 성경을 믿는 수백만의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양식이라기보다는 하늘로부터의 ‘음식’으로써 받아들이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스코필드’가 주석한 이 부분의 강력한 암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거짓 왕국을 건설하도록 만들었다.
만일 그들이 처음에 진정한 양식의 몫을 받았더라면 그들은 결코 속지 않았을 것이다. 스코필드의 주석은 성경을 해석하고 증거하는데 사용됐다.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자들의 것이니, 그들은 자기의 감각을 단련시킴으로 활용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라쿤자가 가명으로 랍비 벤 에즈라를 사용한 것이 다비에게 섭리의 진실을 이용해 유대인 메시아왕국의 견해를 주기에 충분한 암시가 되었다.
수백만의 크리스챤들이 미래의 환난과 개인적인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게 될 때 휴거를 기다리도록 유도되었다. 어떻게 그들은 교묘하게도 제수이트인 라쿤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세상 왕국 속으로 자신들을 넣고 문을 닫았을까?
플리머드 동포교회는 모든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증오와 경멸을 보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 중 하나는 그라 알시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라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고위 지도자이며 사탄주의자인 크로울리(1875-1947)는 플리머드 동포교회 교역자의 아들로 다른 기독교인에 대한 사랑이 결핍된 자인데, 그는 결국 배도자가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성공했다. 신비주의 운동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없애려는 그의 가르침에 의해 잉태된 것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안에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며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두움이 그의 두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라.”(요일 2:11). 수백만의 크리스챤들은 1833년 다비가 제수이트의 미끼로 축연을 베푼 이래 고문당하고 박해를 당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함으로 기독교인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프리메이슨의 새 시대는 세속적인 인본주의를 이용하여 스코필드가 주석한대로 미국 내에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은 조용히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메이슨과 카톨릭의 두 방향의 전략은 1957년판 미국백과사전 19권에 나와 있는 대로 천년왕국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천년왕국은 세상의 혁신으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기다린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미래에 있을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물질적인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들이 가르치기를 모든 민족은 자연히 무기력해짐과 질병의 비확산에 의한 개선과 갱신을 기대해야 하며 삶의 계급제도에 있어서는 계속적인 전진 속에서, 우리민족의 최고의 요소를 지속적으로 증가시켜야 한다.
이 새로 만들어진 철학에 따르면, 천년왕국은 초자연적인 예수님에 의해서가 아닌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출처: 바이블뉴스
3). 환란기 후 휴거설의 타당성
환란 통과 후 휴거설은 초대교회로부터 맥을 이어온 보수적인 신학의 정통견해이다. 이 학설은 루이스 뻘콥(L.Berkhof)과 박형룡 박사의 주장이다. 환란기 후 휴거설을 편의상 “통과설”로 말하기로 한다.
①, 바울과 요한이 예언한 종말의 진행 순서를 볼 때 통과설이 성경적이다.
바울과 요한이 예언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된다. 종말의 진행순서
A.바울의 종말 순서
배도하는 일(살후 2:3a)→ 막는 자(성령)의 역사와 옮김(살후 2:6-7)→ 불법의 사람 나타남(살후 2:8a)
B.요한의 종말 순서
대환란(계 13:1-18)→ 주 예수의 강림(계 19:11-16)→ 적그리스도의 심판(계 19:17-21)→ 사탄의 결박(계 20:1-3)→휴거(살전 4:16-18,계 20:4-6)→천년왕국(계 20:4-6)
②,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회적(單會的)이다.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주장하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회적이다. 데살로니가가 전서 4:17절에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한 말은 마 25:6절에서 처녀들이 신랑을 영접하여 돌아옴을 의미하고, 사도행전 28:15,16절에서 로마의 교우들이 바울을 영접하여 돌아옴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을 위하여 오시고 그들과 함께 오시는 일이 연속하여 될 일이다. 두 사이에 몇 해의 간격이 있으리라고 추상할 이유는 없다. 히 9:28절의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③, 성도의 부활은 단회적이다.
바울은 부활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고 하였다. 부활의 첫 부대는 그리스도시다. 부활의 제 2부대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이다. 부활의 세번째 부대는 천년왕국 이후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이다. 이처럼 성도의 부활이 단회적 임을 말하고 있는데 세대주의는 성도의 부활을 두 번 있다고 말을 한다. 환난 전과 환난 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성경적이다.
④, 성경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와 이마와 손에 666의 표를 받게하는 시험의 때가 있음을 말한다(계13:9,11-18,14:9-12).
⑤, 성경은 대환난 기간 중에도 성도가 이 지상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계 13:6-7)
세대주의자들은 이들이 “유대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공중 재림시에 휴거하지 못하고 환난에 떨어진 자들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뜻 가운데는 성경의 해석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으로 봄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⑥,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출현 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였다(살후 2:3)
⑦, 성경은 “마지막 날”에 성도의 부활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요 6:39,40,44,54,
11:24).
⑧, 살전 4:16-17절의 해석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본문에 나타난 휴거의 장면 즉, 상황을 살펴보면 일곱 가지의 모습을 설명할 수가 있다.
첫째, 주님의 호령 소리가 난다.
여기 “호령”을 발생한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이시다. 이 명령(호령)은 주님이 하늘을 떠나면서 죽은 자들에게는 ‘일어나라’(막 5:41)고, 산 자들에게 ‘이리로 올라오라’(계 4:10고 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주님의 입술로 통해 주님이 친히 내리시는 명령이다.
둘째 ,한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은 접속사 and로 결합되어 있다.
본문의 천사장은 미가엘이다(유 9;계 12:7).그는 특히 하나님을 위하여 사단을 대적해 싸우는 천사이다. 주님의 재림은 사단을 멸하시는 것인 만큼, 미가엘이 활동하게 된다. 이 나팔은 천사가 불 것이다. 이 나팔 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려 주는 신호이며, 당신의 백성에 대한 당신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발해지는 신호이다. 이 말씀을 볼 때 주님은 공공연하게 만인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들을 수 있게 오시는 것이 아주 명백해진다.
셋째, 주께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
이 강림은 눈에 보이는(계 1:7),귀에 들리는(살전 4:16),장엄한(살후 1:7) 강림이요, 심판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마 25:31-46) 오시는 강림이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주님이 재림 하실 때 하늘에 있는 영혼들(성도들)을 데리고 오신다(살전 4:14).예수님은 하늘을 떠나면서 소리를 발하시고, 이때 하늘을 떠나 예수와 같이 내려오던 영혼들이 그들의 육체와 눈 깜짝할 사이에 신속히 재 연합 한다.
다섯째, 우리 살아남은 자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간다.
그 때에 성도의 변화는 “홀연히”이루워질 것이고 그 몸은 육체가 아닌 영체이다. 죽은자가 먼저 산자는 나중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선후를 말하는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동시에 발생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큰 광풍으로 물결이 배에 부딪혀 물이 배에 들어와 가득하매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이여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고 하였다. 이때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였다(막4:35-41).주님의 말씀 즉,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니 바람이 멈추고 바다가 잔잔하여졌다.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이루워졌다(막 4:35-39).
여섯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
여기 “영접하게”로 번역된 헬라어는 “만나게”(to meet)란 뜻이다. 그들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곳은 땅 위의 어느 지점보다 높은 공중이다. 그를 만날 자들은 땅 위의 어떤 한 지역 사람들만이 아니다. 리델보스(H.N.Ridderbos)는 이 사건이 “공중에 머물거나 하늘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지상 내림에 따라 함께 있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형룡은 이 본문의 첫째 치중점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에 있고 그 영접의 처소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공중에 치중하여 거기서 내려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 본문의 둘째 치중은 신체의 변화, 즉 부활체와 같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능력있는 신령한 몸으로 되는데 있다(고전 15:42-44). 그러한데 휴거의 시기에 치중하여 대환란 전에 휴거된다고 상상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라고 했다.
일곱째,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두 그룹의 무리들이 연합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은 공중에서 이러한 만남 후에 주님께서 그의 방향을 바꾸사 그와 함께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은 자들과 변화받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구절은 이런 말을 결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만난 후에 그와 함께 하늘에서 7년동안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한 추론에 불과하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헤어짐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과 같이 공중에도, 주님과 같이 지상에도, 주님과 같이 천상에도 항상 같이 한다는 것이다.
⑨, 고전 15:51-52절의 해석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을 성도의 변화에 대한 말씀이다. 위의 말씀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바울은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바울이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어떤 진리를 말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새로운 그 비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 자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지금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깨달은 것을 밝히고 있는데 주님 재림시에 산 자의 변화인 것이다.
둘째, 마지막 나팔이 불게 될 때에 죽은 성도의 부활과 산성도의 변화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의 마지막 나팔은 살전 4: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과 마 24:31(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과 계 10:7(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의 나팔은 같은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휴거의 시기를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마지막” 나팔이 불 때 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재림 시 크리스찬들 중에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겪지 않은 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 비밀을 안 것이다.
넷째, 주님 재림 시 모든 믿는 자들이 육체적인 죽음을 모면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 계시의 수혜자로 고린도교회를 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기록된 세상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 고린도교회가 가장 세속적이었기 때문이다. 휴거의 기준은 우리의 구원의 기준과 똑 같다.믿는 자는 다 휴거된다.“우리가 다 변화하리라”고 말했다.
다섯째, 모든 크리스찬들이 변화될 것이다.
바울이 이 장에서(고전15장) 부활된 몸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데 변화의 성도도 죽음을 겪지 않는 점만 제외하고는 부활한 성도와 똑 같다. 즉,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욕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고전15:42-44).
여섯째, 휴거는 순간적이다.
헬라어로 원자를 아트모스(atmos)라고 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나눌 수없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1 시간을 나누면 60분이다. 1분을 나누면 60초이다. 또 똑닥하는 1초를 나누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휴거는 너무 빨리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사람들이 도저히 나눌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세대주의 역사와 특징 그리고 환란전 휴거설의 부당성과 환란기 후 재림설의 타당성을 논했다. 본인이 세대주의 휴거론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으나 실은 세대주의를 비판할 만한 학식이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의 환전전 휴거설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중 재림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을 유대인에게만 국한 시키는데 그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계시록에 대한 주석 및 강해집이 수없이 많이 이땅에 존재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대부분 책들이 세대주의 입장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말에 대한 책들도 거의 다 세대주의 입장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앞으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많은 책들이 써지기를 원하는 바이다.
4).맞아 떨어진 적이 없는 재림날짜들
어거스틴, 마틴 루터, 빌리그래함, 길선주, 이호문 등등 유명 부흥사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 학설들이 난무하지만 그 가운데 특히 예수님이 재림하는 시기에 대해 너무나 관심이 많아 아직도 시한부적인 재림날짜를 놓고 아직도 편견이 많다. 여러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재림하는 년과 월과 일시를 시한부적인 시기를 함부로 발표한 것은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재림날짜가 불발탄으로 되어버린 후 잊을 만하면 또 다시 재림 날짜를 발표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온갖 재해, 기근 등으로 인해 재림날짜를 운운하는 어리석은 망상가들은 순진한 성도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A.D 70년과 75년 예루살렘의 몰락을 기인한 재림설, A.D 262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상, A.D 999년 12월 31일 사도시대로부터 내려온 종말론은 어거스틴의 저서인 “하나님의 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시대 후에 있을 것이라고 무책임한 글로 인해 상당수 엄숙한 자세로 기다리다가 심장마비 및 파열로 사망한 예가 있었다고 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멜키오 호프만은 1533년 위대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1556년,
아이작 뉴턴은 1715년, 니콜라스는 1734년,
윌리암 휴스턴은 1736년 10월 12일,
통일교의 교리와 흡사한 세이커의 창시자 엔리는 조직연합협의회의 공식창립해인 1787년에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예상,
제 7일 재림안식교의 창시자 윌리암 밀러는 1843년 3월 21일로 했다가 계산착오라며 1844년 3월 21일로 변경했지만 빗나가 버렸다.
안식교 사무엘 스노우는 1844년 10월
화이트 여사는 1855년 2월,
영국의 마이클 막스터는 1903년 3월 12일 오후 2시 반에 3시 사이에 재림한다고 주장했지만 불발탄이 되었다.
독일신학자 벵겔은 그의 주석에 천년왕국의 개시년을 1836년으로 주장 후대에 많은 혼란과 후유증을 남겼다. 후에 1917년 9월 17일에 재림한다고 재발표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외국에 유명한 부흥사인 빌리그래함은 1968년 6월 11일,
할 린제이는 1981년 비밀공중 재림, 988년 지상 재림,
폴 리탄은 1983년 비밀공중 재림, 1990년 지상재림,
한국의 길선주 목사는 1926년,
이제명 목사는 1953년 12월 29일,
동방교 노광공은 1965년 8월 15일,
성결교의 강계헌 목사는 1967년 6월 8일에 이방인의 때가 끝났다고 예언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장막성전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삭교회의 유재열은 1969년 1월 1일에 비밀 재림, 1971년 1월 8일 공중 재림,
여호와 증인들이 1970년대에 빈번히 재림일자를 발표했지만 모두 빗나가 버렸다.
이월산 기도원의 기성복은 1971년 8월 15일,
팔명산 기도원의 전병도는 1972년 8월 25일에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 뒤 미국 아라복 운동장에서 가진 전도 집회 중 1972년 11월 31일로 변경,
천국복음 전도회의 구인회는 1973년 11월 10일,
통일교 박기동은 1980년,
안상홍 증인회는 서울올림픽 개막일 1988년 9월 16일
남원샛별교회의 김갑택은 1989년 12월 22일,
인천 숭의 감리교회의 이호문 감독은 그의 설교집에서 1989년,
들림 교회 공용복은 1990년 1990년 5월 둘째주간,
동 시대의 부흥사들 신현균, 조용기 목사 등, 대부분은 1988년이나 1992년 시점에 예수께서 재림한다고 발표를 난발했다.
서울 홍익교회(통합) 김태복 목사의 저서에서 1990년 전후한 3년 사이,
영생교 승리제단의 조희성은 1992년 2월 18일,
한국중앙교회 이천성은 1992년 6월 21일로 예상했지만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마라나타의 박용태와 디베랴선교회는 1992년 10월 10일,
그 유명했던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 중심으로 1992년 10월 28일을 예상했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그 후에도 재림에 대한 예고날짜로 발표했지만 이때까지 맞아 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자료제공/이종남목사
첫댓글 모두 다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계4: "이리로 올라오라" 가 사도요한의 실재 휴거라고 하고
계시록 몇장부터 몇장사이에 교회라는 말이 안나오므로
교회에 주신 말이 아니고 유대인에게 준 말씀이라고 우기는
엉터리 성경해석을 많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랬습니다
환난기 후 재림과 휴거는 성경을 보다 자연히 알게 되던데요
답글 감사합니다.
저 언덕 넘어가면 반드시 승리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음을 아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짧은 지식으로 얻은 것으로 님의 글에 질문 드립니다.
?계3:10~.*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의 개역 성경의 해석은 헬라어 성경에 맞게 잘 번역되었다 들었습니다. 님께서 인용한 한 가지의 영어 성경은 님이 본대로의 해석이 맞다고 합니다.
또한 환란전 휴거를 반박하기 위하여 너무 많은 잘못된 예들을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과 상관 없는 사이비의 교리까지 소개 되고 있군요.
현 세대는 말세 중의 말세 입니다. 즉 인봉된 그리스도의 비밀이 풀어지는 세대라고 생각 합니다. 환란전 휴거설이 이 시대에 등장 했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의 건전한 논쟁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
내리라 생각합니다.
@csc6970 관심을 주시고 댔글로 질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본인은 계시록22장 까지 연속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계3:10 역시 빼 놓지 않을 것입니다.
읽으시고 기다리시면 님의 질문에 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글은 재림에 대한 여러주장을 올린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성도의 본분 감사합니다.^^
한가지만 알려드리지요 마 25장에 열처녀들은 virgins 이고
교회는 a chaste virgin 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성도들이 많고 처녀들이 많아도 한처녀 (a chaste virgin)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 25장에 열처녀들이 교회가 아니라는겁니다.
단수 처녀와 복수 처녀들과의 차이점 입니다.
탐구해보세요
신랑도 한명이고
신부도 한명 입니다
(고후 11:2, 킹흠정) 내가 하나님께 속한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순결한 <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한 남편>에게 너희를 정혼시켰기 때문이라.
(고후 11:2, 개역)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개역이 예수님을 한 남편으로 번역한건 잘했는데
처녀를 한 처녀로 번역하지 못해서.. 마 25에서 열처녀들이 교회라는 오류가 생깁니다.
성경은 한번도 교회를 복수형태의 처녀들 이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여성형 단수임으로 한 처녀이고 아무리 성도들이 많아도 한 처녀 입니다.
@김종설 (마 25:1, 킹흠정) 그때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아간 열 처녀(ten virgins)와 같으리라.
상기 구절에 처녀들은 <교회> 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는 a chaste virgin 이라고 했고
마 25장은 ten virgins 이기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때는 (공중에서)결혼식에서 돌아오십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눅 12:36, 킹흠정) 너희 자신은 마치 자기 주인이 <결혼식에서 돌아올 때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이 되라. 그가 와서 두드리면 그들이 즉시 그에게 열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