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에는 주님께서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서 참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가르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도 아니고 니고데모도 아닌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예배를 알게 하실까?
그건 참 예배가 기존 율법이나 제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대낮에 남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 온 여인입니다.
철저하게 육신에 속한 여인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샘물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과
비교할 때에 우물은 일회적인 해결책으로서 육신에 속한 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샘물 곧 물 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요4:14)로서 사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뱃속에서 솟아나서 흐르는 생수의 강입니다(요7:38)
성령에 의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와 연결이 되었으니 강 같이 흐릅니다.
강이란 샘의 근원에서 바다까지 연결이 되어야 강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중간에 그치면 시냇물이라든가 도랑물이라고 하겠지요.
우물물과 남편, 그리고 생수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세요.
팔레스타인의 풍습에 의하면 물은 반드시 남편이 길러다 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리라”하시니
이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물을 내게 좀 달라고 응수합니다(요4:15)
그 때 비로소 예수께서 이 여자의 정곡을 찌르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하시니(요4:16) 이 여인이 남편이 없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남편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지금 있는 자가
남편이 아닌 이유는 물을 떠다 주지 않기 때문임을 지적하십니다(요4:17)
그래서 물보다 그 물을 주는 남편의 중요성을 먼저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지자 운운 하면서 예배 장소를 따지는
이 여인에게 성령과 진리(in spirit & truth) 안에서의 참 예배를 말씀 하셨습니다(요4:24)
결국 생수는 남편에게, 남편은 참 예배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구도가 되었습니다.
그 전 성경의 번역에 신령과 진정이라 되었다고 지금도 거침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배를 모르는 거죠.
지금은 영과 진리라고 하므로 조금 나은 것 같지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아파트에 투자할 때도 영끌이라고 해서 영혼을 끌어들인다고 말합니다.
명상센터니 힐링센터니 하면서 영성이라는 말을 참 흔하게 사용합니다.
쭈그리고 앉아 영의 기운만 받으면 그걸 영성이라고 말한다면 염불도 영성이겠네요.
오직 성령과 진리 안에서(엔 프뮤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참 예배가 성립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은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영적인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를 믿음으로
생수의 강을 맛보며 참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 믿는 우리는,,,하고 말하거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운운 하는
사람은 일단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봐도 하등 문제가 없을 겁니다.
요2장의 혼인 잔치와 3장의 거듭남과 영생 그리고 4장의 생수가 연결이 됩니다.
육신의 물을 남편이 떠다 주듯이 영적인 생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인 남편이 되면 성령의 생수가 배속에서
흘러넘치고 드디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참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 성경강해를 하면서 맨 먼저 물어보는 질문이 이 중에 성령과
진리로 참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아는 분이 있으면 설명해 보라는 겁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는 남편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은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롬6:11)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자리에 옮겨 앉았는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얘 내 아들은 어디 가고 네 혼자만 와서 아버지라고 부르느냐?
이렇게 물어 보실 것 같지 않으세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안에 내 아들 그리스도가 있느냐 그리고 너 역시 내 아들 안에 있느냐
만약 그렇다면 나도 네 안에 있을 수 있고 너 또한 내 품에 안길 수 있다 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은 아무도 나누지 못하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삼지 않고 과부가 되어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그런데 이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처음엔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예수님을 생수를 주시는 남편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에 참 예배를 알고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그리스도를 온 동네에 전파합니다.
이 여자도 이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신자로서 처음에는 그들의
전통적인 제사 장소인 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하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교회나 장소에 따라 예배의 호 불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육으로 난 인간으로부터 거듭나서 새로운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예배는 인격과 신격의 만남인데 성령이 필요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을 사실화시키는 진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은 아닙니다.
예배 전에 찬송을 부르는 이유도 이 성령의 역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예배의 부름이라고도 하고 준비 찬송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을 열심이나 깍듯한 정성이나 노력으로 만날 수
있다면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시 설명하면 성령은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실상화 시킵니다. 그래서 참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말씀이 만나야 하는데 그 때에 그 말씀은 내적인
생수가 되어 하나님의 영과 조화를 이루는 신비한 연합을 맛보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 지식뿐이라면 이 사람의
속에는 아직 말씀과 성령의 화합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이 만날 때에 그 말씀이 생명이 되고
평강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참 예배이야기 다음에 예수님이 양식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온전히 이루는 것”(요4:3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이루어 가다보면 성령께서 붙잡아 주실 때에 자신이 주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증거할 때에 말씀을
받는 사람이 그 말씀을 수용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 기쁨을 얻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성령의 피차 안위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양식이 됩니다.
결국 이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을 참 예배하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 몸이 커지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확장입니다.
주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그리스도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이 됨과 동시에 본인들의 양식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거룩함의 열매가 점점 더 해 가는 것이
전도자의 진정한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과 컨퍼런스를
이루어 참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영과 생명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한 양식이 되고 또 그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할 때에 다른 사람에게도
나와 꼭 같이 적용되는 영적인 양식이 되어 큰 만족을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첫댓글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 자기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 불만이 없는 사람이지요.
싱그러운 봄 향기와 더불어 기분 좋은 미소가 바람과 함께 솔 솔 솔 ~~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