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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史 金奎植 박사의 偉像<큰 이미지>
恒山 김 유 혁(단국대학교 종신명예교수)
김규식 박사는 1881년 1월 27일 (庚辰 2월 28일) 청풍김씨 후예인 아버지 金智性의 아들로 그의 고향인 강원도 洪川에서 태어났다.
김규식박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뒤 동년 11월 23일에 임시정부요인의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김규식박사 일행을 환영하는 국민적인 열광이 대단하였다. 필자도 신문의 보도사진을 접하고 그 분의 용안을 처음으로 확인하였고 그분의 기사를 탐독하면서 김규식박사의 위인상(偉人像)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이승만박사, 김규식박사, 김구선생을 건국 초기엔 우리나라의 3영수라고 일컬었다.
(김규식 소년유학시절)
이승만박사는 대미외교 독립운동가였고, 김규식박사는 다변외교(多邊外交) 독립운동가였으며, 김구선생은 항일투쟁을 위한 투사육성 독립운동가 이었다.
특히 김규식박사를 일컬어 학자형 정치인이라고 하거니와 그분의 역량은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 분은 조실부모하고 어린 때에는 병약하여 회생가망이 없다하여 병풍 뒤에 버려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가 당시 미국의 선교사인 원더우드(Horace G.Underwood: 元杜尤)이었다. 네살 전후로 추정되는 병약한 어린이가 울면서 벽의 종이를 빨아먹는 것을 보고 이 아이는 죽지 않는다며 스스로 경영하는 고아원으로 데려갔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남들보다 영특했고 영어의 습득능력이 뛰어났다. 원더우드 부인은 특히 그 아이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것이 김규식 어렸을 때의 편모(片貌)였다. 김규식은 1897년 가을, 불과 16세에 미국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곧 바로 미국 동부지역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등록했다. 다음 해인 1898년 6월에 예과 졸업시에는 준 우등생으로 선발되었다. 동년에 학부 문과대학에 진학했다. 이어서 1900년 6월경에 열린 강연대회에서는 1등을 수상했고 1902년 1월에는 전교 회장으로 피선 되었다. 그의 연설문은 2월호 잡지에 실렸다 (제목:동방의 서광: The Daun in East).
그 연설문은 하나의 시(詩)와 같이 아름다운 글이었다는 중평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규식이 참으로 우수했다는 것은 학문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졸업성적도 당시 최고득점자의 성적이 평균 92.13점이었는데 김규식은 91.67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4년간 통산 평균 성적은 92.16점이었다. 따라서 졸업식전에서의 대표연설은 김규식이 하기로 추천되어 다시 한번 그의 명성이 워싱턴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 즈음에 김규식은 구름 타고 하늘에 오르는 희열을, 도리어 통렬히 반성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엄숙한 시간을 자주 지니게 되었다고 스스로 술회고 있다. 이 점이 김규식이 지니는 위인상(偉人像)의 소지(素地)를 귀띔해주는 DNA가 아닌가 싶다. 동양의 현철인(賢哲人)들은 일일삼성(一日三省)을 통하여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수신(修身)철학으로 삼았던 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금 일깨워준다. 김규식은 자성(自省)시간을 지닐 적마다 “물을 마실 때마다 샘을 판 이의 노고를 잊지 말자는 속언(俗諺)”을 잊지 안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김규식박사가 자신의 아호를 우사(尤史)라 한 것은 원더우두의 은덕을 잊을 수 없다는 뜻에서 언더우드의 한자 이름(元杜尤)의 끝자를 따서 우사(尤史)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규식은 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 마자 잃는 고독(孤獨)감에 잠겨 때로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가 방화했던 일과, 누구로부터 따듯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허전함에 휩싸이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욱이 가정이라는 포근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정서상의 삭막함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와 같은 울적한 감정에 둘러싸이다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또는 사회적으로 폭발하기 쉽다. 김규식은 그런 충동을 느끼게 될 때마다 “로녹강”이 흐르는 전원도시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옛 고향처럼 상기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고. 작은 규모의 로녹 캠퍼스를 더 없이 좋은 안식처처럼 돌려 생각하자는 혼자 말을 되이곤 했다 한다. 따라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사고전환과 사기종인(舍己從人)하는 겸허의식과 그리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먼저 들을 다음에 판단을 보다 공평히 하는 태도를 익혀야 한다는 겸청제명(兼聽齊明)의 방법을 고려하는, 이른바 신언근신(愼言謹身)하는 습관혁명 이야기를 자주 내비추기도 했었던 모양이다.
근세사 연구 및 독립운동사와 독도연구에 거의 독보적인 고 최서면(崔書勉)박사는 이 사람이 청풍인이라 해서 우사 김규식박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비교전 자주 들려주곤 했다. 그는 말해 주었다. 김규식박사는 중국 중경등지에 오래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관련된 많은 회의를 주재하곤 했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회의를 주재해도 동일한 주어, 유사한 문귀. 거듭되는 기조문을 사용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규식박사의 폭넓은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귀띔해주었다.
김규식박사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엔 언더우드 선교사를 도와 새문안교회에서 종교사업을 통하여 동포 계몽운동에 힘썼으나 105인 사건(기독교지도자 구속사건)을 조작하여 일제의 압박이 가해오자 신변위험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게 되었다고 우사의 비서였던 송남헌씨는 전해주었다.
김규식박사는 해외활동을 하면서 우선 몽골의 수도인 우란바타르(일명 庫輪)에서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을 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 후 파리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박사와 만나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개설하고 외교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모스코바에서 “동방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리게 되자 김규식박사는 52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동 대회에 참석했다. 동 대회에서는 김규식박사가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김규식박사는 임시정부의 학무총장 외무총장을 역임하면서도 상해 남경 성도 등 주요도시 소재 대학에서 섹스피어와 영문법과 중국 고전 문학작품을 영어로 강의를 하면서 독립자금 모금에 심혈을 경주했다. 19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부주석(副主席)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해방을 마지 하였다.
필자는 1980연대 중반기에 김규식박사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김규식박사의 영애인 따님이 미국에 거주중인데 서울에 온다는 것이다.
우사선생이 사랑하는 여식이라하여 아름도 우애(尤愛)라 명명했다고 한다.우(尤)는 우사의 (尤)이기도 하지만 그 글자는 “더욱”이라는 뜻을 지니는 바, 우애는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망명생활로 가족과 많은 세월을 헤여져 있게 되자 아버지의 두터운 사랑의 마음을 이름으로 지어준 것이다.
우애씨는 나보다 여섯살이나 위라서 나는 그녀를 누님이라 부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김규식박사의 역작인 양자강의 유경(揚子江의 幽景)인 장편시집(長篇詩集:5章600餘節)이었다. 그것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풍(文風)이 느껴지고 주선(酒仙) 이태백과 시성(詩聖) 두자미(杜子美)의 시귀가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말미에 “ 이 장편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준 고마운 연합군 장병의 고귀한 희생과 위대한 승전을 위해 여러분에게 바친다”고 했다.김규식박사의 사려 깊고 금도(襟度) 넓은 기개(氣槪)앞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또 다른 하나는 김규식박사께서 영어교육을 했던 교재가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의 별도 서가에 보존중이라는 것을 듣고 복단대학에 두 번이나 찾아가서 총장 및 노교수 몇 분에게 탐문해봤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교재를 찾아낸다면 그것을 김규식박사의 수택본(手澤本)으로 영구보존하려 했지만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그밖에 몽골에서는 김규식박사께서 미국의 자회사인 메이요 지사장으로 계시던 사욱(社屋)을 발견하여 감회가 깊었다. 그 유허(遺墟)를 방몽하국인에게라도 알려주기 위해 한한문으로 대자보를 써서 부쳐 놨다. 몽골인들은 무엇인지 몰라서인지 수년간 지나도록 그대로 부쳐 있었다. 아울러 김규식박사의 사촌매제인 이태준(李泰俊)이 몽골 중학교 최초의 교의(校醫)와 황실 전문의사였던 것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규식바사께서 6.25당시 납북되어 서거한신 이후 그의 묘소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이도 2000년 11월 초에 북한방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목적은 고려 고종왕 시대로 올라가서 네 번째 왕자인 국학대사께서 세운 국청사(國淸寺) 복원문재로 일본인 2명 한국인학자 3명 천태종 승려 2명이 일단이 되어 본인이 단장으로서 방북했다. 그들의 일방적인 일정과 일방적인 의제로 일방적인 돈의 요구를 해 왔다. 국청사 복원의 돈이 문제라면 그 문제는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우리 측 요구를 제시했다. 그것은 국청사 옛터가 있는 개성지역 일대를 제한적으로나마 자유통행 도로를 개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 동지의 허락이 있어야한다면서 난색을 표하더니 느닷없이 이틀 뒤 북경행 고려항공편에는 좌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돈에 대한 답변이 나올 때까지 억류한다는 속셈임이 뻔 했다. 나는 그 순간 김규식박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몇 년전 몽골정부의 친지인 고위직 인사에게 북한에 가면 남한인사에 과계되는 책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통해서 구한 책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위대하 4월의 대화”였다. 김규식, 김구, 김일성 세 사람의 대화기록이다. 아마도 애국열사묘역에 가면 김규식박사의 묘석도 있으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나는 귀국하기 전에 애국열사묘역에 참배하고 싶다”했다. 일행들은 모두 동의하지 안했다. 그러나 북한 측 사람들은 은연중 반기는 눈치였다. 내가 대표로 다녀온다고 일행과 헤어졌다. 나의 일주일간 동행해준 북 사회과학원 부원장(金世民)과 나에게 배차해 준 벤스 차(영빈용 벤스 2차뿐이라함)기사와 셋이서 묘역으로 갔다. 묘역 안내인은 약 40세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 곳에서는 안내인이라 않고 “520 애국열사 묘 강사”라 한다. 그 여인은 묘소 1기마다 앞에 서면 30분 이상 열사강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김규식 선생의 족하(족질)되는 김유혁입니다. 여기 오면 김규식선생을 뵈일 수 있을까 해서 왔다고 했더니, 그녀는 자기 혼자서 박수를 치면서 “잘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모시고 있다”며 요즈음 날씨가 쌀쌀해서 참배객이 없는데, 오늘 중앙당에 보고할 자료가 생겼다면서 반겨주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가보니 묘역 중앙통로 제1열 좌측 3번째 자리에 (김규식선생 애국지사-1880년12월28일생,1950년12월10일서거.)
우사연구사업이 명실 없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위인을 씨족관렴속에서 풀어드리지 않으면 안타까움의 여한을 달 낼 길이 없어진다. 다행이도 격조 높은 “미래한국<월간지>”에서 김규식박사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것을 거듭 감사하게 여기는 바이다. 끝으로 한마디 부언할 것은 김규식박사의 통일론에 관해서도 한마디 하라면 필자의 전문분야는 아니나 요약한다면 그의 기조는 “분단불가, 분열불가론(分斷不可 分裂不可論)”이다. 국토가 분단되면 결국 민족분렬의 불행을 자초하게 되고, 민족분열이 되면 국토가 불가불 분단된다. 분단과 분열의 불가론은 잘 연계지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단불가론의 기조는 국토를 하나로 보존하면서(헌법의 정신과 같이) 공산분자는 우리의 울 안에서 교화흡수하거나 척결하는 양면정책으로 풀어간다는 것이 그분의 기조라고 이해한다. 국토는 물건 개념의 것이기 때문에 분단이 가능하지만, 민족은 개념상 선천적 생존체이기 때문에 분단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분열의 비운이 불가피 한 것이다. 분열이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보자기를 찢어야 나누어지는 것처럼 분열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경우 실향민 또는 탈북민의 경우 모두가 고향을 잃고 혈육과 생이별을 하여 뼈아프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경우, 실향은 했지만 제2의 고향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경우, 제2 아버지 제2 어머니라는 혈족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산가족에게는 70년의 통한이 현재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그간 성급한 사람들은 김규식박사의 통일론의 기조를 화이동류(和而同流)하듯이 심고원려(審考遠慮) 없이 고함박성(高喊拍聲)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들어냈던 경우가 없지 않아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분들이 좀 더 깊이 연구되어지기를 기대할 뿐이다.(끝) <이 글은 미래한국 2020.8월호에 이미 게재발표되었음 아립니다>
(略歷) * 단국대학교 종신명예교수 * 일본 와세다대학 사회공학박사
* 단국대학 부총장 * 금강대학 총장
* 안중근의사 기념관장 * 새마을운동 중앙회장
* 충남도청 이전 추진위원장 * 이방자여사정신 한일공동현창회장
* 自治議政 종신 칼럼이스트 * 문예춘추 등단 시인
* 제왕학1-5집 출간 외 다수 * 백마고지 전투 무공훈장 외 호국영웅기장 등
* e-mail.yhkim880@hanmail.net T.010-5264-2769 .恒山硏究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