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비슷한 성적일 때 에이스는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팀의 리더로서의 구실, 카리스마 같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게임이 끝난 뒤의 인터뷰에 몰려드는 매스컴의 수를 세어 보면 된다.
애리조나에는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이라는 걸출한 두 명의 투수가 있다. 지난 2년간 존슨은 실링을 따돌리고 사이영상을 받았다. 실링도 다른 팀에 가면 확실한 에이스이지만 2년 연속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에이스에게 돌아가는 덤이요, 2인자의 설움이다.
그래도 이제는 ‘에이스가 존슨’이라는 현실을 실링이 인정하고 있다. 2000년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실링이 애리조나로 이적해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요즘에야 골프 파트너요, 죽이 맞는 팀메이트지만 당시만 해도 실링은 에이스란 자리를 놓고 존슨과 한번 붙어 볼 만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존슨이 거의 무신경한 태도로 일관한 것과는 달리 실링은 사소한 문제에도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도 경직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반시즌을 지켜보고 난 뒤 실링은 2인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물과 기름처럼 겉돌던 둘 사이는 2000년 오프시즌부터 급격하게 좋아졌다.
사실 존슨은 가만히 있었지만 실링 혼자 덤볐다가 제풀에 포기한 모양새다. 에이스에 대한 대접은 매스컴의 경우 은연 중에 때로는 노골적으로 다르게 마련이어서 사이영상과 같은 사안이 걸렸을 때는 같은 조건이라면 에이스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실링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존슨이나 실링이 선발로 나오는 날 애리조나의 클럽하우스는 경기 전 쥐죽은 듯 고요하다. 이들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한 동료조차도 대화는 꿈꾸기도 힘든 일이다. 여기까지는 존슨이나 실링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존슨이 ‘험악한’ 모습 그대로 카리스마가 있는 것에 비해 실링은 다분히 개인적이다. ‘투수는 이기적이어야 성공한다’는 야구계 속설로 치자면 가장 적합한 예로 실링이다. 모든 데이터를 컴퓨터로 처리해 다음 등판에 이용하는 주도면밀함이 있는 대신 자신이 리드해놓은 게임에 마무리가 나왔을 때 조마조마해 제대로 지켜보지도 못하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안절부절못하는 투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