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고 야구부가 78년 해체돼 광주상고로 전학을 오게 됐다. 아직 1학년이고 해서 좀처럼 출전할 기회가 없다가 전남지역 가을리그 때 기회가 왔다. 광주일고와의 경기에서 1-1이던 8회 대타로 출전, 동급생인 선동열에게서 1점홈런을 빼앗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동열이는 그게 야구 시작하고 처음 맞은 홈런이었다. 지금도 나만 만나면 "첫 홈런을 뺏은 녀석"이라며 웃는다.
그때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편지봉투에 쌀을 담아서 걷어주는 등 야구부 일이라면 전교생이 발벗고 나서 도와주는 통에 배고픈 줄 모르고 운동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당시에는 훈련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시작한 운동이 오후 10시에 마치면 11시에나 잠자리에 들었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 자리에 누우면 아침이 빨리 올까 봐 잠드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프로야구가 없었던 때라 고등학교 야구가 무척 인기가 좋았다. 특히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붙으면 광주는 북새통을 이뤘다. 80년 대통령배대회 때 광주일고와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아쉽게도 2-8로 졌다.
3학년 때였던가. 여학생들이 보는 잡지에 내가 3페이지에 걸쳐 나온 적이 있었다. 그후 하루에 팬레터가 50여통씩 쏟아져 무척 기분이 좋았다.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가끔 그때가 그리운 게 사실이다. <기아 장채근코치(82년 졸업)>
물론 88년 대통령배에서 우승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88서울올림픽 때문에 고교야구 일정이 모두 앞당겨지는 바람에 광주일고와 예선 한판으로 1년치 대회 참가를 결정했다. 이종범 정영규 성영재 등이 있던 광주일고한테 역전패하는 바람에 우리가 대통령배를 나가고, 광주일고가 청룡기대회를 나가게 됐다. 우리가 먼저 우승을 따내자 청룡기 우승을 못하면 어쩌나 하고 광주일고가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광주일고도 청룡기를 따냈지만….
우승했을 때 대구상고와 붙은 결승전보다는 8강전 기억이 더 생생하다. 그때 구대성이 있던 대전고와 만났었는데 맞대결에서 내가 이겼다. 잘 던지기도 했지만 나는 8번타자로 나와 구대성으로부터 결승타점을 포함해 4타수 2안타를 뽑아냈다. 그때가 타자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였다(웃음). <기아 박충식(89년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