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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1)
고후 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10 / [환상과 계시] 이처럼 자랑을 늘어놓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짓이지만 조금 더 자랑을 하겠습니다. 주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입니다. 2-3) 14년 전에 나는 하늘로 들려 올라간 일이 있습니다. 내가 몸까지 올라갔는지, 아니면 내 영만 올라갔는지는 묻지 마십시오. 그것을 대답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4) 어쨌든 나는 낙원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인간의 능력으로나 말로는 도저히 그려 낼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 또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습니다. 5) 그 일이야말로 내게는 크나큰 자랑거리입니다. 하지만 내놓고 떠벌리고 다닐 마음은 없습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다만 내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과 이런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불러 주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6) 내가 비록 이런저런 자랑을 한다 해도 그것이 모두 사실이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내 생활과 설교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과장할까 싶어 그만두겠습니다. 7) 다만 이 말을 덧붙여 두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놀라운 경험 때문에 교만해질까봐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병은 사단의 사자가 되어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나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8) 나는 그 병에서 회복되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9)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마. 네게 내리는 은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사람에게 가장 잘 나타난다.' 이제 나는 내 약한 것을 기쁘게 자랑합니다. 나의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10)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모함한 대적자들의 이간질에 대응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환상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랑은 신비한 체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겸손과 약함에 있다고 밝힙니다.
주의 환상과 계시(1-4)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자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체험이 개인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대적자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자랑 속에 바울의 겸손함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비록 이 자랑이 자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해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이 경험한 것을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육체의 가시와 겸손(5-10) 바울이 자신이 경험한 환상에 대해 말하는 목적은 자기 자랑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환상에 대한 언급이 성도들의 태도에 변화를 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는 것은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역할과 부르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신비한 체험과 계시는 그를 스스로 높히게 만드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바울에게는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가시는 사역에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응답은 자신이 겪고 있는 약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형성시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납니다(9). 이런 깨달음은 앞으로 그가 사역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분명하게 합니다(9-10). 하나님을 위한 사역의 열매는 인간적인 가능성 안에서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대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도에게 나타나는 어려움은 성도를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만드는 통로가 됩니다. 성도는 이를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적용: 바울의 고백과 같이 당신에게 나타난 약함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들고, 당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비결이 되고 있습니까?
F. B.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으로 된 선반에 있는 줄로 알고 우리의 키가 높아질수록 그 여러 층의 것을 가질 수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후에 깨닫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층 되는 선반에 있는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선물들을 받아 가지려고 하면 내가 높아지기를 원할 것이 아니고 더욱 더 나를 굽히고 내려가며 또 내려가기를 힘써야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 설 교 >
능력의 은밀한 비결
고후12장 7~9절 / 김홍도목사
중국선교 떠나기 전 주일 밤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갔더니, 제 아들 김정민 전도사가 대단히 기뻐하고 흡족한 태도로, 주일 낮 설교를 하고 났더니 고모부(김용일 원로목사)가 진지한 설교에 은혜 많이 받았다고 진심으로 칭찬해주더랍니다. 너무 좋아하고 흥분된 모습을 보고 중국에 갔다가 공항에서 차를 타고 오는 중에 김정민 전도사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로 “너 지난 주일, 설교 죽쑤었지?”라고 했더니 “아니, 아버지가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얼마나 설교를 망치고 헤매었는지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투시해서가 아니라, 은혜 받았다고 칭찬을 많이 듣고 나면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애타게 오랫동안 기도도 하지 않게 되서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고 실패하게 되는 것이 영적 생활의 원칙이기 떄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너희로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도 진리입니다. 욕을 먹고 수치와 핍박을 당하는 것은 육신적으로는 괴로워도 영적으로는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생활로 승리하는 생활의 은밀한 비결의 첫째는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을 항상 느끼는 것입니다.
1. 약함과 부족을 느낄 때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이만하면 됐다.”“나는 알 만큼 안다.”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은 떠납니다. 반대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한없이 절감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릴 때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3층천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온 체험도 했고 많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 사람입니다. 신약성경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몸에 사탄의 찌르는 가시가 있어서 그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병이 안질이라고도 하고 간질병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특별기도를 세 번이나 드렸는데도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고,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장 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12장 7절에 설명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가시가 있으므로 바울은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지 않고 머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게 되는” 비밀을 깨달은 다음부터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장 9절)고 깊은 체험을 말했습니다.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을 깊이 깨달을수록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한 만큼 능력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1미리만 떨어져도 진액의 공급이 중단되고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죽게 되므로,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가지가 줄기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시들고 말라져서 버림을 받고 불태워 버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1장 14절부터 보면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하시고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지렁이”와 같이 연약하고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이러한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호랑이나 사자처럼 잘난 체하고 강한 체하면 하나님의 능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은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몽땅 비워버릴 때,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충만해지고 능력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과 무능함을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사람이 강하게 일어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볼품없고, 값도 싼 그릇입니다. 이런 질그릇에 보배같은 은혜와 능력을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번쩍번쩍 빛이 나고 값비싼 그릇, 자기가 잘난 체하는 그릇에는 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담아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종들이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극심한 고생을 겪게 하는 목적은 빨리 자기를 깨뜨려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병 중에 가장 큰 병은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병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능력도 체험하지 못합니다. 황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미국 사람들의 큰 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는데, 사실 자기 영어 실력은 중학생 영어 실력만도 못하고 설교를 할 수 있는 정도는 더욱 못되는데 대 집회의 강사로 초청을 받았으니 큰일났더랍니다. 좌우간 그 큰 부담감 때문에 두 달 동안을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두 달 동안을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했는데 집회시간에 큰 능력이 나타나는데, 말을 몇 마디 하지도 않고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많은 군중이 삼단 쓰러지듯이 꼬꾸라지고 불을 받고 은혜를 받는데굉장하더랍니다. 그 후부터 그 교단에서 일약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3절~5절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깊은 체험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했습니다. 생수의 근원 즉, 참 기쁨과 만족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것을 의지하고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그것은 물이 다 새어버린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물질, 건강, 명예를 하나님처럼 의지하거나 사랑하지 말고 세상 것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를 잘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다리는 비결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다리는 것이 능력의 비결이며 승리의 비결입니다. 시편 40편 1절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사모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더니 드디어 응답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줄 알아야 능력을 받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중대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는데, 120문도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열흘 동안 참고 기다리며 기도했더니 큰 은사와 능력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심령 상태가 항상 스폰지(해면)같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스폰지는 속이 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물에 대자마자 물을 쏵 흡수해버립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자아를 다 비워버릴 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딱딱한 돌맹이나 사기그릇은 속이 꽉 찼기 때문에 물이 한 방울도 스며들지 않습니다.
시편 42편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히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고 사모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TV에서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마시려면 온갖 위험이 다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 속에 악어가 숨어 있기도 하고 사자나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사냥꾼이 총을 가지고 기다리기도 하는데, 얼마나 물을 마시고 싶은지 그 위험을 무릅쓰고 시냇물을 마시러 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을 찾고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119편 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얼마나 사모했는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얼마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던지, 키는 작은데다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아 섰으니까 뽕나무에까지 올라가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당시의 세리면 세무서장입니다.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체면, 위신 다 버리고 애들이나 올라가는 뽕나무에 올라가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오듯이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걸어오셔서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얼굴만 슬쩍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이름까지 불러주시고, 집에 잠깐 들러가셔도 영광인데 자기 집에서 주무시고 가시겠다고 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예수님은 결국 “이 집에 오늘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이렇게 귀중하고 힘이 있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병고침 받기를 얼마나 사모했던지,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 대도 낫겠다고 할 만큼 사모하고 옷에 손을 댔더니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서 의원도 못 고치고 백약이 무효했었는데,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가복음 9장 21절)
이렇게 하나님을 갈급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① 능력을 받습니다.
이사야 40장 29절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급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는 능력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② 하나님을 만납니다.
삭개오가 갈급히 사모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집에 모신 것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레미야 29장 12절~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③ 구원을 받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갈급히 사모했더니 결국 자기 집에까지 모시고 온 가정이 구원받았습니다. 이사야 45장 22절에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④ 수치를 당치 않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고 우쭐하고 까불면 망신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지만,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높여주시고 영광을 받게 하십니다. 시편 25편 3절에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라고 하셨습니다. 자고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해야 합니다.
⑤ 회복의 은혜를 받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교만한 마음이 꺠어지면서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육신의 병도 고쳐주시고 병든 사업도 치료해 주시고 병든 가정도 치료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이 영적생활의 비결인데 생전 밤 예배는 나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부흥회를 열어도 일류 강사가 와도 아예 참석할 생각 안하는 것은 스폰지가 아니라 돌맹이같은 신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주일 낮에만 충실히 출석하는 사람도 B급이나 C급 신자는 되는 줄 압니다마는 더욱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믿음이 없이는 영적 성장이나 체험을 갖기 어렵습니다.
성도의 능력
고후12장 7~12절 / 김삼환목사
성도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환란과 유혹과 재난 속에서도 교회는 살아있고, 성도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넘어졌지만은 교회가 넘어지지 않는 것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역도 선수가 큰 쇠덩어리를 들어 올리듯이 교회의 힘은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들어올리는 성도의 능력은 어디있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기도하고, 모세도 기도하고, 어거스틴도 기도하고, 우리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약한자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약해도 기도하는 어머니는 강합니다. 몇 사람이 모여도 기도하는 교회는 가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날 동안은 기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능려깅 있어야 하니까요. 용맹스런 사자도 늙으면 힘이 없습니다. 죽을때가 가까워 오면 그를 잡아 먹기 이해서 광야에 모든 짐승떼들이 사자를 물어 뜯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늙어도 힘이 있습니다.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얻는다라고 했고, 사 40장에는 늙어도 곤비치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는 사도 바울이 죽는날까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모세가 120세가 되도록 능력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늘 교통하는 기도가 있는 동안은 성도를 해칠자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기도는 유치원때도 합니다. 나이가 많아서도 기도합니다. 국민학교 때도 국어를 배우지만 대학가서도 국어를 배우듯이 기도는 어렸을 때도 하지만 우리가 장성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요, 기도의 높은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집사 정도만 되면 금식기도를 몇번은 다 거쳐야 됩니다. 40일 금식기도를 예수님이 하셨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귀한 자입니다. 기도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 능력있는 자입니다. 기도를 얕은 곳에서 하면 신앙생활을 얕은 곳에서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몇십년 다니면서도 아직까지 금식기도 한 번, 일주일 금식기도도 하나님앞에 감당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약한 자입니다.
아는 것, 머리는, 들은 것은 많을지 몰라도 움직이는 능력, 처리하는 능력, 감당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깊이 들어가서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앞에 모릎 꿇고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은 저는 오늘 특별히 한 곳에 맞추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어려움을 참는것에 대해서 맡추려고 합니다. 성도의 능력은 어려움을 잘 참음으로 우리의 큰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 충만하고 말씀에 깊이있고, 기도 많이 했지만은 바울의 능력, 사도의 능력은 참는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은사도 아니고 능력도 아닌 것 같지만은 오히려 모든 능력 위에서 지배하는 하는 것이 인내인 것입니다. 참는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앞에 성령 충만하고 기도도 많이 했지만은 어려움이 안팎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면 아무 어려움이 없어야 될텐데 사도 바울에게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같은 믿음도 없고, 바울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만은 어려움은 오히려 챔피언처럼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전에 11장을 보겠습니다.
11장을 보면 바울은 어려움이 밖으로부터 많이 있었습니다.(고후 11:23-27 :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분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나의 어려움도 대단한데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까? 바울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참았습니다. 그래서 큰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아무 어려움 없이 하는 것 아닙니다. 문제없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면 일을 많이 할 것 같지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밖에서의 어려움만 있었다면 그래도 괜찮아요. 안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자기 육체에 가시가 있었어요. 큰 질병이 있었어요. 눈이 나쁜 것은 성경 여러곳에 나오고요, 신약성경 12권을 썼지만 거의 자기 손으로 못 적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적을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옆에서 적어 주지 않습니까? 눈 어두운 것만 해도 큰 어려움이지요. 그런데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간질병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병은 다 고치는데 자신의 병은 못 고치는 거예요.
안타까운 일이잖아요. 기도 많이 했어요. 눈물을 흘리고, 몇 년을 매어 달렸는데 하나님은 이 병을 고쳐주지 않았어요. 고쳐 주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느냐? 크게 두가지예요. 네가 약할 때 강하다라는 거예요. 네게 그것이 없으면 일을 많이 할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 때문에 더 크게 임하여서 하나님을 향하여 더 큰 일을 하게 하기 위함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지요. 무슨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문제가 없으면 기도 많이 할 것 같잖아요? 사실, 그 사람 기도 안합니다. 많은 것 주시면 감사 많이 할 것 같지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은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감사하지요. 부자들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이 절대로 헌금 하는 것 아닙니다. 시간 많은 사람이 충성하는 것 아닙니다. 시간 없는 분이 충성하고, 어려움이 많은 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좋은 환경에 있는 분..
2090작전에도 누가 안 나오느냐? 팔자 좋은 분 안 나옵니다. 간단합니다. 신앙은 환란과 어려운 고난이 있는 분들이 하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큰 일을 하는 줄 믿습니다. 고난은 좋은 학교입니다. 배고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평생 먹어도 먹는 감사를 모릅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하루 하루에 대한 삶에 대한 감사를 모릅니다. 건강에 대한 고마움, 하나님 주신 축복, 나라에 대한 고마움, 부모에 대한 고마움, 교회에 대한 고마움, 이웃에 대한 고마움, 이 세상에 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일에 대해 전혀 눈을 감고 살게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학교에 교장 선생님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를 위해 최고의 고난을 당하시고, 지금도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역사가 고난의 역사입니다. 교회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여기에 제2회 졸업생이 사도바울입니다. 얼마나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까? 바울에게 그 크고 ㅁ낳은 어려움은 일을 못할 것 같은데 기독교 역사에 바울같이 일 많이 한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 같이 능력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느냐. 고난에서 왔습니다. 오늘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인물이나 위대한 국가나 위대한 작품들이 다 고난을 통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문학집에 존 번연의 철로역정은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은 밀턴이 눈이 어두워 기록한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위고도 나폴레옹3세때 국외로 추방되어 5년동안 망명생활을 하며 집없이 고난 당하며 길거리에서 쓴 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입니다. 이것은 원고가 8000매 정도 되는 엄청난 대작입니다. 이방인 저자 까뮈는 어려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아 두메 산골에 극빈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지 1년만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외가댁으로 가서 그곳에서도 극빈 생활을 합니다. 너무나 어려운 절망 속에 자라났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은 절망에 있을수록 어려움이 있을수록, 살아나고, 강해지고, 힘이있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몰아 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싹들을 이른 봄에 보십시오. 모진 추위 속에서 누르는 땅을 뚫고 일어나는 생명을 보십시오. 그는 빈민국에서 자라났습니다. 1937년에는 결핵에도 결렀습니다. 1942년에는 신문에 투고한 일 때문에 정부의 미움을 받아 강제 추방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1947년 페스트라고 하는 작품을 내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1957년에는 '추방과 왕국'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잘아는 일본 작가 가운데 미유라 아야꼬 라는 자각도 있습니다. 이 분의 작품 빙점이 있습니다. 이 분은 병원에서 수십년을 누워 지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예 믿고, 은혜 받고, 너무 감사해서... 예수 믿고 나면 모두가, 세상이 다 바뀝니다. 보는 것이 바뀝니다. 아무리 좋아도 예수 없는 사람은 불평, 불만이 많고, 예수가 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알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신앙에 눈 뜬 사람,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 감사해서 일기를 적었습니다. 자주 글을 써가면서 문장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사람은 무엇이든 자꾸 하다 보면 자라나는 것이지요. 그 후 그가 빙점이라는 작품을 내어 놓았을 때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큰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찾아온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남습니다. 여러분, 물질이 찾아오고, 명예가 찾아오고, 인기가 찾아 오는 것은 오히려 좋은 것을 다 가져가 버립니다. 인격의 아름다움이 파괴되고, 양심이 파괴되고, 훌륭한 신앙도 다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 세상의 부귀, 영광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언제나 좋은 것을 가져다 줍니다.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걱정 말라고 합니다. 마음대로 놀라고 합니다. 마음껏 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어라. 참아라. 이겨라. 십자가 져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것과 마귀가 우리를 이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움이 많이 왔지만은 사도 바울은 힘있고, 능력있는 삶을 다 이겨내는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약할 때 강함이라. 할렐루야!
약한자 입니까? 자신을 약한자라고 생각합니까? 강한자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트탈때가 언제입니까? 까불고, 잘났다고 하고, 교만하고, 큰 소리 치고,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무언가 여유가 있을 때 마귀가 틈타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부패시키는 것이고, 교만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를 넘어 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약해 보세요. 겸손해 보세요. 늠이 있나요? 마귀가 틈 탈 수 있는 길이 있나요? 그래서 약한자가 강한자이고, 약한자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틈 탈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부족함이 없어야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이 있어야 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을 전도해 보면 돈 많이 벌어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많이 벌면 예수 믿습니까. 믿다가도 떠나 가는대요.
우리는 잘 입어야, 먹을것이 ㅁ낳아야 모든 것이 풍성해야 행복하다. 잘 믿는다. 걱정없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모든 것이 많을수록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고, 해도 많고, 나쁜 것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힘은 어려움을 참는데 있을줄 믿습니다. 한국 교회가 힘이 있고, 성장하는 것은 바로 고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90% 이상이 다 교인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교회가 성장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일본도, 중국도 선교사가 우리보다 조금 먼저 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부흥이 없고, 한국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일본에는 순교자가 별로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나 ㅁ낳은 순교자를 내었는지 모릅니다. 개신교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기 때문에 순교의 피가 교회의 거름입니다.
말 한마디만 하면 잘 살수도 있는데 그 한마디 지키느라고 모진 고문 당하고, 식구들과 함께 유리걸식하면서 우리 선조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주었습니다. 순수한 깨끗한 신앙을 물려 주었습니다. 금요일에 방지일 목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구역장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예수 믿을 때 아버지가 먼저 믿으셨다고 합니다. 방씨 문중에 종가집 아들이 믿는다고 해서 온 문중이 모여서 붙들어 매놓고 두드려 패는데요, 물을 뿌려가며 때렸대요. 짐승처럼 잔인하게 때리며 호적을 파서 내어 쫓는다고 해도, 끝까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거예요.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고 매맞으면서도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고 나도 예수를 믿을란다. 하며 고문하던 할아버지가 아들 편에 서서 죽기전에 그 아들을 잡고 그 동네를 떠났답니다. 문중 재산 다 버리고, 모든 것 다 버리고, 거지 같이 나와서 산으로 가서 밭을 일구며 감자 심고, 옥수수 심고, 하였는데 은혜를 주셔서 농사가 그렇게 잘 되었대요. 그렇게 살다가 전쟁이 나고 남쪽으로 내려 왔는데, 방목사님을 통해 자녀들 중에는 85명의 목사, 박사가 태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신앙을 어려움 가운데 지켜야 그것이 힘이 있는 것이고, 능력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줄 믿습니다. 고난은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은 내게 손해이고, 이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고난은 내게 끊임없이 좋은 것을 가져다 줍니다. 시 119(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4:16(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미국 집회를 간 사랑의 교회는 해외에 있는 교회중 최고로 부흥하고, 목사님이 큰 일을 합니다. 신문에도 많이 나오고하여 이 분이 어떤 분인가 생각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교회가 13,000평에다 1,500만불을 들여 교회를 짓고 수천명이 모이는 아주 큰 교회이고, 부흥을 하는 교회였어요. 알고보니 그 목사님이 누구보다 많이 배우고, 인물이 좋아서 능력이 많아서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이 부산에서 개척교회를 하셨는데 자녀들이 당하지 않은 고생이 없었어요. 그 시련이 세계적으로 큰 일을 하도록 자녀를 길러준 거예요. 자녀에게 물려주는 가장 좋은 재산이 무엇이냐? 고생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고생없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고생없이 길러야 그 아이가 큰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 살아가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 세상에 그렇게 길러서는 밥도 못 먹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라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자녀가 고생을 당할 때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오히려 사람이 되고, 교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인간이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는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은 자식을 낳을 때 얼음물에 넣었다가 건져 낸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사자나, 표범이나, 치타는 새끼들이 빌빌거리면 그냥 죽여버립니다. 그렇게 커서는 노루에게 물려 죽는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살 필요가 없다라는 거예요. 지난번 TV에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희귀종 흰꼬리 수리를 촬영했는데 보니 독수리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는데 한 마리는 건강하고, 다른 한 마리는 약해요. 어미가 고기를 가져다가 누구에게만 주느냐 하면 잘 ㅁ거는 건강한 새기에게 주고, 약한 새끼에게는 주지를 않아요. 빼빼 마르고, 죽어가는데도 어미가 사랑해 주지를 않아요. 학자들이 해설 하기를 독수리 세계가 얼마나 냉정한데 힘있는 독수리를 길러야지 빌빌대는 것은 길러봐야 까마귀에게 물려 죽는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기를때에 예수님의 말씀에 마귀가 우리는 삼키려는 이 땅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도록 길러야 성도가 승리하는 것이지 베드로는 뭐라고 했습니까?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는때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능력있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험한 세상길 나홀로 가도 외롭지 않으오. 비 바람 속을 나홀로 가도 내 맘에 두려움없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가 계시오니 주를 뒤따라 나서는 길에 두렵지 않아♪ 우리나라는 축복을 오복이라고 할 때 수부, 귀, 강령, 단암입니다. 오래살고, 돈 많이 벌고, 영광누리고, 건강하고, 그 다음에 자식 많은 것을 복이라고 했어요. 서양 사람들은 이런 것이 복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중요한 목표를 정의, 진실, 사명감, 개척정신, 이런 정신적인 면으로 맞추는데 우리는 물질에다 맞추고, 건강에다 맞춥니다.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까? 사명감이 없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서 큰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을 길러서 오늘 우리도 오복에다 정신적인면 어떤 어려움도 참아낼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것이 제일 복받는,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우리는 자녀를 길러야 할 줄 믿습니다.
저는 이번에 집회를 가서 하루 요세미티 공원에 갔습니다. 공원 하나가 경상북도 크기예요. 몇시간을 가는데요, 왠 공원이 그렇게 큽니까? 그런데 여관이 하나 없고, 술집도 하나 없고, 호텔이 딱 하나 뿐이예요. 우리는 한집 건너 love Hotel이고 술집이 온 나라에 가득찼어요. 그곳은 반짝 거리는 것이 하나 없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가 자연 관리도 너무나 잘하고, 사람이 자연을 보고, 감사하고, 증기지 않고, 우리는 방안에 들어가서 즐기려고 하고, 지금 일산 아줌마들이 잘하는 거예요. 잘 싸운다라는 거예요. 일산 여자들이 최고예요. 나라가 이래서 되겠어요? 세계에 이런 나라가 없어요. 이렇게 술집 많고, 러브호텔 많고 되겠어요? 저희 아이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그곳에 가보면 여관 하나가 없어요. 술집 하나가 없어요. 오락실 하나 없어요. 우리는 대학촌이 소돔 고모라입니다. 공부하면서 천하에 제일 타락한 곳이 대학생들이에요. 개똥같이 공부를 하고 있어요. 이렇게 타락할 수가 없어요. 지방이고, 서울이고 할 것 없이 온 세계에 타락한 문화들은 우리 대학촌으로 다 들어오고 있어요. 세상에 이래서야 어떻게 나라가 되겠느냐 말이에요.
오늘 우리는 자녀를 기를때에 정신적으로 그런 대학에 가더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은 그런곳에 빠지지 않도록 좀 똑똑하게 길러 내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요셉같이 길러요. 사람이 재산인데 사람이 이렇게 타락해서야 우리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겠느냐 말이예요? 이제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고생하며 커야 됩니다. 며느리 볼때도 고생한 며느리, 사위 볼때도 고생한 사위, 지도자도 고생한 지도자, 고생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일꾼이 되겠어요? 고난을 미워하지 마세요. 고난을 싫어하지 마세요. 피하지 마세요.
누가 내 말만 하면 달려들고 하지 말고, 오늘 우리는 내게 고난을 주는 사람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민식 목사님은 내게 고난을 주는 사람이 천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로 좋은 사람 만들려고 고난을 주고 떠나가는 거예요. 천사가 왔다가 떠나간다라는 거예요. 고난이 올 때 인격이 다듬어 지고, 강인한 정신력이 살아나고, 삶에 대해 감사하고, 양심은 살아나고, 이웃에 눈을 뜨고, 신앙에 눈을 뜹니다. 어려움을 이기는 자가 인생의 금메달을 걸게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저도 아이들 길러보면 군에 가서 훈련소에 있을때는 편지도 자주 보내고, 아버지, 아버지 찾고 그래서 효자하나 태어났다... 그러나 좋아지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부대배치 받으면, 좋아지면 끝나는 거예요. 사람은 환경이 좋아지면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들고 타락하고 잠다는 거예요. 나는 우리 성도들이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어려움이 있는 분은 소망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들은 집에 가보면 집에 가시가 있고, 만나보면 그 가시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러나 그 가시가 우리에게 진주를 만들어 내고 그 아픔이 우리에게 신앙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가정도 어렵게 살때는 아이들과 정도 많아지구요, 하나가 잘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한 방에 잠자고, 한 상에 먹을때가 좋은 거예요.
아이들도 방을 하나씩 달라할 때 주지 말아요. 수상하다니까요. 아이들은 같이 섞여 같이 만나야 정도 살아나고, 부모도 알고, 감사도 알고, 이런 만남이 있어야지 잘해주는 것이 부모가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서 강인한 어디에 가서도 넘어지지 않는 능력있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데 능력이라는 것을 잘살고, 힘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것이 능력이 아니라 참아내는 사람이 제일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어디가서도, 어떤 어려움도 잘 이겨내는 사람이 제일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 내 입에 맞는 것만 골라먹는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분을 소개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분은 만델라입니다. 이 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통령이었습니다. 이 분은 1964년에 감옥에 들어가서 27년간 한번도 나오지 못하고, 보통 감옥이 아닌 바닷가에 외로운 고도에다, 마치 귀향을 보내듯이 그냥 갇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혹독한 고난이 있었지만 만델라는 거기에서 기도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감옥에 가면서 자꾸 발전을 한거예요.
흑인을 사람 취급도 않고, 공부도 함께 하지 않고, 선거도 하지 못하게 하고, 아무런 자유도 없이 짐승처럼 죽이고 팔고 하던 몇백년 동안 고난을 당하던 그 나라에서 흑인이 드디어 백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 여론이 이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끝나는 줄 알았어요. 흑인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얼마나 그는 잘하는지요. 백인을 모두 추방하고 죽이고 할 줄 알았는데 백인 대통령을 부통령으로 세우고, 경제를 회복하고 나라를 펴화롭게 이끌어 나갔어요. 세계의 경제가 그 나라를 지원해 주고, 얼마나 훌륭히 잘해내었는지 모릅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거기에서 훈련을 받으면 좋은 지도자가 되고, 큰 일을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줄 믿습니다. 성도의 능력 한 손에는 기도, 또 한 손에는 고난, 이것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약할 때 강함이라.
내가 너무 약합니다
고후12장 9~10절 / 김형준목사
모든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나 목적하는 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점을 극복하는 일에 많은 것을 투자하거나 약점을 숨기려고 하거나 방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이 약점으로 인해 놀라운 일들을 이룬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점이 있는 사람을 자신의 일에 주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약함이 더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약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고 우리의 약점을 통하여서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어떤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 을 말씀하시기 원하십니다.
이사야 55:8-9을 보면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우리 보다 높고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하거나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하시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무엇보다도 보는 관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질병이 치료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시기와 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금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아직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는 우선순위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선순위와 달리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순위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생각이 옳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을 통해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 신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주님과 함께 거할 때에 놀랍게 역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과 판단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모든 일을 감당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주님께서 우리에 게 맡겨주신 일들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고린도후서 4:7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을 통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 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결점까지 사용하셔서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더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까지도 함께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은 우리가 감추거나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기대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까지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앞에 겸손함으로 믿음으로 승리를 선포하며 나아갑시다.
역사를 움직여온 사람들 중 많은 경우는 자신의 연약함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오히려 강하게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내가 연약하고 실패할 때, 내가 한계에 부딪혔을 바로 그 때가 약할 때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그리고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강한 용사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고후12장 7~12절 / 민경설목사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우리는 끝냄과 시작을 바로 하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바르게 끝내는 일을 못한다면 바르게 시작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2월을 바르게 끝내야 새로운 1월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끝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끝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삶이란 매일 매일 끝내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의 삶을 바로 끝내야 새로운 복된 영생의 삶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빌3:13∼14]"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가 이처럼 바르게 삶을 끝내고 바른 인생의 삶을 시작 할 수 있는 삶을 성숙한 삶, 철든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가능합니다. [요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가 부모를 알게 될 때 자식이 철든 삶을 살 듯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성숙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세월이 지나서,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게 될 때 "아 그래서 그런 것이다"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13: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깊이 깨달아 갈 때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삶을 바로 해석하여 똑바로 살아가게 됩니다. 즉 바르게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애5:21]"여호와께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에도 바울사도가 하나님을 깊이 깨닫고 성숙한 삶의 신앙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체의 가시를 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후12: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고하는 것은 자기를 높이는 교만으로 자기의 위치, 자리를 이탈한 것을 말합니다. 자고하게 되면 사단의 밥이 되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로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존하게 한 것입니다.
둘째, 기도 응답 받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후12:8-9)"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기도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기도의 응답, 무응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응답보다는 기도하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것입니다.
셋째, 많은 환란과 고통 속에서 약해진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후12:9-10)"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람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누구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무엇이든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의존할 때 온전하여 집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오히려 강하게 됩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이 오히려 강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은 답답하다 하더라도 무릎 꿇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었구나 할렐루야!
내가 약할 그때에
고후 12장 7~10절 / 박상훈목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배경이 있습니다.
존 번연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자들의 손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본시 대단히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감옥에 갇혀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속히 제가 이곳을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세미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후12:9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는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비록 감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변함 없이 족한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닫자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던 감옥 생활도 그에게는 천국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장장 12년동안 갇혀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자신이 말로 복음을 전할 때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쓴 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 그는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더 크고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신비한 영적인 체험도 했습니다. 셋째 하늘로 표현된 낙원, 곧 천국으로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천국의 놀라운 광경을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령한 체험을 했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는 마치 사단의 사자처럼 그를 괴롭혔습니다. 몹시도 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에게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시는 아마도 그의 안질, 곧 눈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바울은 시력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다멕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아주 강한 빛이 그에게 비추어졌습니다. 그때문에 그는 사흘 동안이나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뒤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 일로 인해서 시력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도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켜야 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그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가시는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기간을 정해 놓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 가시가 나를 찔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가시를 저에게서 물리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에게서 가시가 제해지도록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듣고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비록 그에게서 육체의 가시가 제하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가시를 이길 수 있는 큰 힘을 은혜 가운데 얻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가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가시가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에게 있는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생각을 하던 가시가 사실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그 가시를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억지로 그 가시의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시가 원인이 된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약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서 더욱더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믿음으로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저런 가시로 인해서 우리가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낙심을 해 버립니다. 좌절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인생의 실패자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를 찌르는 가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무턱대고 염려부터 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르켜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4:6∼7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염려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도의 제목일 뿐입니다. 시50:15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축복된 계기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도 하지말고 바울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나와서 아뢸 수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크게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방법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첫째,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경우입니다. 소경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뜨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보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동안이나 병들어서 누워있던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병 낫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그의 병을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습니다. 12년동안이나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병 낫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원하는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둘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응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큰 은혜 가운데 가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동일한 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을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고난의 잔을 옮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을 북돋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세 번 간절히 기도하고 난 뒤에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다른데 있다고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즐겨 순종을 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에게 응답을 하십니다.
옛날 영국에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친구들의 눈동자는 다 파란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자기의 눈동자만 갈색이었습니다. 소녀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문제 때문에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소녀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눈동자도 친구들처럼 파란색이 되기를 원합니다."
베개를 눈물로 적시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대를 가지고 맨 먼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기의 눈동자 색깔을 확인했습니다.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많이 낙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서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인도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인도의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파란 눈동자의 사람을 보면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은 갈색이었습니다. 인도 사람의 옷을 입고 인도 사람처럼 치장을 하면 영락없이 인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사람을 사귈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쉽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받는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혜롭지 못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라고 하나님께 조를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응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가시로 인해서 약해지셨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울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수로 우리의 갈한 심령을 언제나 촉촉하게 적시어 주실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염려하지도 말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도 들지말고 사도 바울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아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비록 바울에게서 육체의 가시가 제하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큰 은혜를 받아서 그 가시를 이겨내는 힘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시가 자기에는 주는 유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지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의미 없는 가시를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그 가시를 우리에게 허용하실 때는 그 가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시가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지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가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해졌을 때 다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그러면서 절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마련입니다. 탕자가 그러했습니다. 강할 때는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약해졌을 때에 다시 두 손들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밧단아람을 떠나서 금의 환향을 합니다. 강해졌을 때입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서 자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그때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얍복 강변에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밤이 맟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제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날 밤 야곱은 자신이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항복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형 에서와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야곱은 브니엘의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육적인 야곱이 변해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승리자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부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때로는 가시를 허락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시는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천국으로 이끌려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소지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그는 교만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겪었던 신비한 체험을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2:1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 단어가 무엇입니까? "무익하나마."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신비스러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겸손하게 "무익하나마"라는 단어로 시작을 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을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여기서 말하는 "그"라고 지칭한 3인칭 대명사는 누구를 가르키는 것입니까?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바울은 신비한 체험을 했지만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가 싫어서 "그"라고 하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2절 하반부입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면서 바울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만 높이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놀라운 천국의 광경을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것을 들었다, 내가 이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셔서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하여 그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가시로 약해졌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흙이 단단해서는 그릇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흙에 물이 들어가서 그 흙이 진흙처럼 부드러워져야 그릇을 제대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쇠로 연장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쇠가 단단해서는 연장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불에 달구어져서 쇠가 부드러워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연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단단해져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찌릅니다. 온유한 심령, 애통하는 심령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날 그때가 우리는 강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가시가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겸손해져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더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찌르는 가시의 의미가 무엇인가, 가시가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자기를 찌르는 가시를 오히려 기뻐하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물론 가시 자체가 선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사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힙니다. 못살게 굽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 가시를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그 고통을 참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가시로 인해서 기뻐하고 그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신앙의 성숙한 단계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조개 두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조개가 옆에 있는 조개에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기에게 있는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아마도 내 몸 속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가시가 나를 찔러서 견딜 수가 없이 아파."
그러자 다른 조개가 뽐내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과 바다에 찬미 있어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너무나도 건강해. 내 몸 속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곁을 지나가던 게 한 마리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게는 아픔을 호소하는 조개에게 다가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네가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은 너의 몸 속에 진주라고 하는 보석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다."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드러운 조갯살 속에 깔깔한 모래알이 하나 박힙니다. 그때 조개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육체의 가시입니다. 조개는 고통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짜냅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계속해서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생명의 즙을 짜내고 또 짜내어서 그 깔깔한 모래를 감싸고 또 감쌉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찌릅니까? 우리는 진주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값진 진주를 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가시가 있었는데 왜 우리에겐들 가시가 없겠습니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중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성적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업을 잘하는 사람도 때로는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도 때로는 가시와 같은 존재를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가룟 유다와 같은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정리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 가시를 우리에게 허용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가시로 인해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그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가시로 인해 약해졌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쉽게 좌절해 버립니다. 때로는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가시가 우리를 찌를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족한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큰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가시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가시를 기뻐하며 우리의 약함을 도리어 자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그 가시를 제해 주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나가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내 몸의 가시
고후12장 7~10절 / 지용수목사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반짝’ 하는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빛의 속력으로 달려도 우주를 한 바퀴 도는데는 2억만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우주의 폭이 2천조 킬로미터라고 하니 그 크기를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늘의 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수없이 많은 별들로 구성된 은하계가 천억 개나 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2천억 개가 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별들이 서로 부딪히지도 않습니다. 항성은 항성대로, 행성은 행성대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습니다.
이 넓은 우주에서 오직 지구별에만 물이 흐르고 산소가 있고 오곡백과가 자라서 사람이 삽니다. 이사야 45장 18절 말씀에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 지구촌을 지으셨고, 우리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과학과 신앙은 똑같이 경이로움에서, 신비로움에서 출발한다.”
과학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경이로운 이 세계에서 출발하니 사람을 보든 식물을 보든 천체를 보든 경이로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하니 신비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뉴턴은 “우주를 연구하는 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신 이상자이다. 나는 저 하늘의 천체를 볼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짓지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운행하지 아니하시고는 이 우주가 있을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는 것을 뉴턴은 깨달았기 때문에 하늘의 별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이 위대한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아무리 자랑해도 다 자랑할 수 없고, 그 거룩함과 크심을 아무리 찬양해도 다 찬양할 수 없는 그 거룩하시고 크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도로에 있는 무인 카메라는 과속 차량을 단속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상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인 카메라에 찍히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저는 교통 법규를 잘 지키니 교통위반 범칙금 통지서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몇 년 간 교우들에게 교통법규를 잘 지키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 교회 직원이 “목사님의 범칙금 통지서는 교회 사무실로 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범칙금 통지서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교우들에게 큰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 후에는 더 조심해서 운전하는데, 한 번은 어떤 생각에 잠겨 무심코 달리다 보니 무인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 과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고, 이 범칙금 통지서도 사무실로 가겠구나.’
그 때로부터 두 달쯤 지나서 사무실에 범칙금 통지서가 왔는지 물으니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무인 카메라의 일은 과속 차량을 잡는 것인데, 그 무인 카메라가 너무 바빠서 저를 놓쳤나 봅니다. 무인 카메라는 이렇게 가끔 실수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찍어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은 죄인을 잡아내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40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이것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그 누구도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려 함이고,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미국에 신앙 깊은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8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천국에 가신 것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아 마음이 늘 무거웠습니다. 아버지의 신앙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중에 아들 모간이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아들 모간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습니다. 세 살 된 아이가 하늘을 가리키며 “엄마, 하늘에 있는 저것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구름이지.”
“아니, 그 옆에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
엄마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 저기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잖아. 예수님도 서 계시고. 예수님 옆에 우리 할아버지도 계시네. 아이고, 예수님이 우리 할아버지를 어루만지시네. 할아버지가 좋아서 웃으시네. 엄마, 저기가 천국이지?”
엄마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세 살 먹은 아이에게는 환상 가운데 천국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천국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생 문제로 고민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 살 먹은 아이의 눈을 열어 천국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고 너무나 사랑이 많으십니다. 친정 어머니보다, 친정 아버지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방황하고 엇길로 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늘 사랑의 품에 안아주시고 영원토록 지켜주시고 영생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고 은혜 주기를 원하시고 지켜 주기를 원하시고 복 주기를 원하시고 평강 주기를 원하십니다.
God is so good. 너무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 한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우주를 지으시고 마음대로 운행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아픈 가시를 주십니다. 그 가시가 우리를 혹독하게 찔러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장미에도 가시가 있지만 그 가시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시는 우리 자신을 찌르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의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암이라는 질병의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교통사고라는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배신이라는 가시에 찔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1)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을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는 극장이라고 합니다. 극장의 배우들이 극본대로 행동하듯이, 바울은 일생 주님만 존귀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만 위해 사는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아픈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가시가 너무 아파 “사단의 사자가 나를 이렇게 공격하는구나. 너무 아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찌른 가시는 무엇이었습니까?
마틴 루터는 마귀의 공격이라 해석합니다. 마귀가 바울의 주위를 돌면서 바울을 공격하여 바울이 일생 고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바울을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가시였다는 것입니다.
터툴리안은 바울의 두통이 그의 가시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은 두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견디기 힘들어했는데 그것이 그의 가시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켐피스 같은 신학자는 바울이 정욕을 컨트롤하지 못해 아파했는데 그것이 그의 가시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은 혼자 사니 때때로 불타오르는 성욕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하며 사는 내가 정욕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다니…….’하며 자신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고 한탄하며 아파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이나 크리스소톰 같은 사람은, 사도 바울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돌을 던지고 죽이려 한 유대주의자들과 이단자들이 그의 가시였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심한 안질과 간질이 가시였다고 해석합니다. 사도 바울은 설교하다가 쓰러지기도 하는 간질환자였고 또 안질이 심해서 시력도 좋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 보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목회자에게는 가시이고, 설교하다 간직 발작으로 강단에서 쓰러지는 것도 가시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 15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바울은 이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바울을 교인들이 업신여기지 않고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했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바울을 아꼈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기 싫은 착한 목회자 바울의 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부담되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제발 이 가시를 뽑아 주세요. 제발 이 가시를 뽑아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바울이 스스로 말하기를 ‘세 번이나’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은 똑같았습니다.
“내가 네게 준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네 약함 가운데서 온전하게 됨이라.”
바울이 깨닫습니다.
‘아하! 내가 받은 계시와 은사가 많고 내가 받은 축복이 너무 커서 이 가시까지 뽑아버리면 내가 교만해질까 봐, 그래서 마귀의 종이 될까 봐 이 가시를 뽑아주지 않으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 가시를 주셨구나.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임하니 내게 이런 가시를 주셨구나.’
그 때부터 바울은 오히려 그 가시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시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노라면 ‘나는 이렇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데 어찌 내게 이런 아픈 일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부도내시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경제는 풀리지 않고, 자녀도 제대로 되지 않고, 몸에는 병이 오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임을 알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을 그렇게 괴롭혔던 것이 간질이든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욥의 가정에 사단이 와서 아들딸을 죽이고 모든 재산을 빼앗아 망하게 했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사단이 욥의 집에 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단이 여러분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요나서 1장 4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큰 태풍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려움을 당하거든 ‘왜 이런 일이 있나요?’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면 안 됩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면 더 어렵게 됩니다.
어느 책에서 본, 말조심에 대한 글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하고 물으면 “힘들어. 힘들어 죽겠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니, 그것이 힘들어? 정말 힘든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라고 하시며 더 힘든 일을 겪게 하신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힘들다. 힘들다.”라고 하는데, 예수 제자학회에 갔다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일거리가 많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답니다. 96개국의 해외 근로자 50만 명이 이미 우리나라에 와 있고 또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오려고 줄 서 있는 근로자가 5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청년 실업자가 엄청나다’니 웬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대로 이보다 더 어려움을 주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움이 있음에도 “요즘 어떻게 지내?”하는 질문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잘 지내.”라고 대답하면, 하나님께서 ‘저 아이가 무척 어려운데도 잘 지낸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것을 주어야겠구나.’라고 하시며 좋게 해 주신답니다.
따라 합시다.
“말조심 하자.”
우리는 정말 말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도 계속 되고 하나님의 뜻이 계속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9장 4절에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자가 대단해도 죽은 사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가 사자보다 못해도 살아 있는 개는 죽은 사자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렵다 해도 살아 있으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되어도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살아 있는 것,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이 가시를 제게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 아픈 가시를 제게 주셨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가시가 너무 아픕니다. 좀 뽑아 주세요.’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너무 아파서 “하나님, 이 가시를 뽑아 주세요.”하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네 가지로 응답하십니다.
첫째는, 만일 우리의 죄 때문에 가시를 주셨다면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켰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한 것이 떠오르게 됩니다.
한 부자가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시면 제 재산을 다 바치겠습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조금 후에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 제 재산을 다 바치면 저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절반만 바치겠습니다.”
육지가 보였습니다.
“하나님, 절반이 아니라 천만 원만 감사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풍랑을 일으키셨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
사람은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는 “이번에 도와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어려움이 지나면 그것을 깹니다. 그런 사람과는 거래를 해도 재미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는 큰 복을 주지 못하십니다. 큰 복을 주시면 그것을 받아 삼키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사람은 다시 거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 약속을 지키게 하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가시로 찔러 깨닫게 하십니다.
대개 병은 죄 값입니다. 육신의 병은 죄 때문에 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떠오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하면 대개는 그 가시를 뽑아주십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의 가시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뽑아 주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훈련으로 주신 가시는 때가 되어야 뽑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좋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아프게 하는 가시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뽑히지 않고 때가 되어야 뽑힙니다. 훈련이 다 끝나야 뽑힙니다.
요셉의 가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 요셉이 17세에 형들에 의해 팔려 남의 집 종이 되었습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해 부잣집 아들이 종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가시였습니다. 또 깨끗한 청년 요셉이 강간 미수범으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이것도 아픈 가시입니다.
누명을 써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모를 것입니다. 제가 미주 양곡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유럽 여행을 다니고 있다느니 미국에 별장을 지어 놓고 놀고 있다느니, 별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또 스위스 총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스위스에 가 있을 때도 사단은 이런 저런 말로 제게 누명을 덮어 씌워서 제가 편지를 보낸 적도 있습니다. 그때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잠시 누명을 써도 마음이 아픈데 요셉은 강간 미수범이라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종살이와 옥살이를 한 13년은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시키신 기간이었습니다. 그 가시가 아니었으면 그가 대 제국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아픈 가시로 그를 찌르셨던 것입니다. 13년간의 훈련 기간이 끝나니 가시가 다 뽑혀서 그날로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 30에 총리가 되어 80년간 영광을 누렸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가시가 계속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는구나.’라고 믿고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그 훈련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큰 뜻을 행하시기 위해 가시를 주십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하루에 삼천 명, 몇 천 명씩 부흥된 데는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뜻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됨으로 힘을 얻어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예루살렘 교회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죽게 하시고 교회가 핍박을 받도록 하셔서 흩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세계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한 장로님은 큰 재벌이 되니 한 번에 수백만 원짜리 식사를 하면서도 교회 일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장로님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며 귀히 여기던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내가 잘못 살았구나.’하고 깨닫고 바로 돌아서서 교회에 충성하고, 지금 보석 같은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시로 찔러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저능아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만일 내 딸이 저능아가 아니었으면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였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우쭐댔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정신이 박약한 딸을 주셔서 모든 사람은 귀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이 가시 때문에 그는 일생 힘들고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을 귀히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필을 통하여 세계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픈 가시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겸손을 유지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그 가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이 너무 귀하여 가시를 뽑아내면 교만해져 망할 사람에게는 그의 겸손을 유지시키기 위해 계속 그 가시를 주십니다.
바울의 가시가 바로 그런 가시였습니다.
바울은 자기 손으로 성경을 썼습니다. 바울이 바빠서 가지 못할 때 그의 손수건을 가져가서 병자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나았습니다. 바울의 이름만 들어도 귀신이 겁을 내고 떠나갔습니다. 또 그는 천국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이고,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건강하다면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섬길 것이고 자신도 우쭐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망하게 하지 않으시려고 그에게 가시를 주어 꾹꾹 찌르신 것입니다. 바울이 너무 아파 “하나님, 제발 이 가시를 뽑아 주세요.”라고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니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가시를 감사하며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대개 남달리 귀한 은사를 받고, 남달리 자녀가 잘 되고 집안이 잘 되는 큰 복을 받게 되면 고개를 바짝 쳐들다가 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달리 귀한 은사를 받고 귀한 복을 받은 사람에게 남이 모르는 아픈 가시를 주셔서 늘 조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한 귀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권사님이 십수 년 전에 제게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 허리가 이렇게 적당하게 아픈 것을 감사합니다. 이보다 더 아프면 고통 때문에 못 살았을 것이고, 이보다 덜 아프면 제가 까불다가 못 살았을 것입니다.”
만일 권사님이 건강하면 주일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놀러 다니며 까불까불하다가 망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리가 아프니 그 때마다 “주여, 주여!”하면서 조심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아픈 정도로만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구두를 닦는 일을 하며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5만 명 사원을 거느린 경영자가 되어 교만한 것보다는 구두를 닦으며 겸손한 것이 복이 있습니다. 교만하면 망합니다. 항상 겸손하고 감사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데이비드 맥넬리라는 사장이 출장 중에 구두를 닦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두를 닦는 사람이 손님의 구두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구두인 것처럼 닦았고 손님을 대할 때도 얼마나 정성껏 대하는지, 데이비드는 구두를 닦는 동안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그의 태도 때문인지 여섯 명이나 구두를 닦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구두 닦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런 일을 하면서도 행복하십니까?”
“예, 저는 행복합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이 일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수입도 좋고요.”
구두를 닦아도 사명을 가지고 하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고 자신도 기쁘고 돈도 많이 번다는 것을 데이비드 사장이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모든 축복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모든 가시 속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현재 나의 상황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시가 있을 때는 기도해야 됩니다.
그럴 때 회개하면 되는 것은 회개할 때 그 가시를 뽑아주시고, 어떤 가시는 훈련 기간이 지나면 뽑아주신 후 그 가시로 인하여 나를 더 좋게 만드십니다. 어떤 가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어떤 가시를 통해서는 우리를 일생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축복이 됩니다. 은혜나 복과 같은 좋은 것만 축복이 아니라 아픈 가시도 결국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프만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누에고치에서 나방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좁은 구멍을 비집고 힘들게 나오자마자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나방이 매우 불쌍해 보였습니다.
‘나방이 참 고생하는구나.’
또 한 마리의 나방이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구멍을 비집는 것을 본 그는 선한 마음으로 구멍을 넓게 뚫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방이 쉽게 쑤욱 나왔습니다.
‘이놈, 내게 감사해야지.’
그런데 그 나방이 날개를 펴려다가 턱 쓰러지고, 또 날개를 펴려다가 턱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러다 죽고 말았습니다.
나중에야 가프만은 나방이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올 때 머리에 있는 영양분과 기름이 온몸과 날개에 죽 퍼져 날개를 힘 있게 펴고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미리 구멍을 뚫어 놓아서 머리에 있는 영양분과 기름이 고루 퍼지지 못해 나방이 날지도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사랑하시고 아끼십니다. 하지만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야 우리에게 유익이 있고, 그 가시가 있어야 우리에게 유익이 있을 때는 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아프게 하는 가시를 주신 의미를 깨닫고 그 가시 때문에 우리 주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깨달을 것은 깨닫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여 오늘 여기에서 가시가 뽑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가시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 가시로 인하여 우리의 삶을 승리와 영광과 기쁨과 축복으로 꽃피울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약한 것을 기뻐하라
고후12장 7~10절 / 민경설목사
앗시시의 성자 프란시스(1182-1226)는 44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프란시스는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낫지만 향락과 방탕으로 죄악과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치료 불가능한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기도하다가 주님을 체험하고 나서부터 세상과 부귀영화를 뒤로 했는데 그 때부터 오히려 참평화와 자유가 있었고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해서 다 맞고 다 진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역설적인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 오히려 주님을 만나고 진리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누가 고난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구원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이런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많은 희생과 댓가를 지불해야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참승리와 참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은 자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3층천(천국)을 체험한 자입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1-2] 이런 바울 속에 하나님께서는 가시(사단의 사자)를 두어 고통 속에 있게 하시며 바울이 세 번씩 가시가 떠나길 기도했지만 응답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속에서 오히려 약한 것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 “약할 때 강함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참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바울이 깨달은 역설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고난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고난 속에서 자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고난 자체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환란이나 핍박이 나타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물론 주님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보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오더라도 고난 속에서 자유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가난, 악, 환란이 오지 말기를 기도하지 말고 가난, 악, 환란 속에서 자유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자유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내가 커지지 말고 내 안에 주님이 커져야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내가 커지면 부패한 성분이 커지고 환란과 어둠, 사탄의 진지가 더욱 견고해 집니다. 주님이 커져야 고난 속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성공하는 것은 나도 원하고 주님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커지면 망가집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누구에게보다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자아가 커지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이것은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작아지고 주님이 커져야 능력이 온전해집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 고난(가시) 속에 십자가 비밀을 알기 원하십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세상 사람들은 참고 견디지만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를 위해서 작아지고 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입니다. 내가 작아져야 주님이 나타나고 진정한 강자가 됩니다. 누가 나를 욕하던지 나의 겸손의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참는 것, 죽는 것, 작아지는 것, 짓밟히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약한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삶, 축복의 삶을 살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라
고후12장 7~10절 / 정필도목사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더구나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어찌하든지 자신의 약점은 감추려 하고 자신의 부족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나 완전한 척 하려다 보니 자연히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으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을 늘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롭고 쓸모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는 원래 구두수선공이었습니다. 대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잘하다가 선교사가 된 것이 아니라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하다가 은혜를 받아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 그가 구두를 수선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으로 인해 그를 업신여기고 악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캐리는 모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붉히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고 도리어 “예! 그런데 저는 구두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구두를 수선했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히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크게 쓰십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 좋은 열매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자기가 마치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약점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약점이 없고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영안이 어두워 자신의 부족을 모르고 잘난 척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물리치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잠 16:5, 약 4:6, 벧전 5:5).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약점에 대하여 솔직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7~29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지혜롭다 생각하고 능력도 출중하고 문벌도 있고 모든 일에 자신만만한 사람을 잘 쓰시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은 부족하고 천하고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6:16을 보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 된 사람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주목했습니다.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본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외치니 그 사람이 즉시 뛰어 걸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고 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지내려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행 14:1~18).
고린도후서 4:7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을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비유하여 말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자기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 한 분은 건축 중인 교회를 둘러보다가 건축현장에서 그만 머리를 부딪혀 그날 이후로 정신이 돌아오지 않고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또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 중의 한 분은 목회도 잘하고 무슨 운동이든 못하시는 것이 없는 다재다능한 분으로 토요일마다 청년들과 축구를 하실 정도로 강건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축구경기 중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으시더니, 결국 목 아래 부분이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이날 이후 일어나지 못하시고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툭 치면 깨어지는 질그릇과 같이 약합니다.
헤롯 왕은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아마 뇌염 모기에 물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었지만 하찮은 벌레에게 물려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사도 바울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가시는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고치기 못하는 나쁜 성격이나 습관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육신에 어떤 장애가 있거나 아니면 만성적인 병이 있거나 몸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 바울에게 간질이 있었다고 하고 또 다른 학자는 시력이 쇠퇴하여 편지도 대필해야 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약점이 있는 사람 부족한 사람을 들어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1967년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 여사는 그녀의 사후에 출간된 자서전에서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입니다. 나는 못났기 때문에 기도했고, 못났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나의 약함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망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골다 메이어는 수상의 자리에 있는 12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백혈병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며 직분을 잘 감당했습니다.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 증세로 다리를 절고 고생했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은퇴하는 그날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사상 네 번이나 지낸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쓰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 절대주권이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육체의 가시가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은?
1.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믿음이 강해집니다.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되어 도망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야곱이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더 크게 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우리를 자고하지 않게 하여주고 항상 겸손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내 자신이 겸손한 자가 되었다고 하면 더 큰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나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하나님이 앞서 주시기를 간구하고, 하나님이 앞서 행해주셔야 안심하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앞서 나아가지 않게 됩니다.
4.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활발하게 만들어줍니다.
육체의 가시가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가운데 서로를 중요하게 여기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따라서 서로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강하게 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점은 경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우리의 약점은 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점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약점 때문에 더 사랑받게 되고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악한 사람 외에는 누구나 약한 것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기는 얼마나 연약합니까? 누구나 천진난만한 어린 아기를 보면 즐겁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돌봐주려고 합니다. 훌륭한 신앙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약자에 대해 애정을 갖고 항상 도우려고 합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시각 장애우인 강영우 박사는 외출할 때 되도록 지팡이에 의지하여 혼자 다닌다고 합니다. 길을 건널 때나 위험한 곳에서는 항상 이분을 도우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걱정이 없으며, 이때 만나서 사귀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국 여자가 주한 미군 병사와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서툴고 길도 모르다 보니 남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자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남편을 귀하게 여기고 조금만 잘해주어도 크게 기뻐하고 행복해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여인은 직장생활을 하며 자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남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둘 사이에 기쁨과 보람도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여인에게 지혜가 있었다면 남편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더라면 행복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 앞에서 언제나 알아도 모른 척, 할 수 있어도 못하는 척하며 “여보!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 없인 못 살아요.”라고 애교스럽게 말하는 여자는 일생을 편하게 삽니다.
5. 약점을 극복한 사람이 약점을 가진 다른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하나님의 거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약점은 그의 성질이었습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화가 나서 말로 명하라 한 반석을 지팡이로 쳤으며, 우상숭배하는 백성들을 보고 화가 나서 십계명이 쓰여진 판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같은 성격을 가진 모세를 '지구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기드온의 약점은 낮은 자존감과 뿌리 깊은 불안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점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를 두 번이나 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는 자의 조상’으로 바꾸셨습니다. 충동적이고 의지가 약한 베드로는 '반석'이 되었고,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19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2:3을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에 떨었던 바울을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시고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를 높이 들어 쓰셔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가장 본질적인 자질은 완벽함이 아니라 신뢰성에 있습니다. 신뢰성이 있어야 사람들이 따릅니다. 우리도 늘 완벽하기를 바라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은 솔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을 크게 들어 쓰십니다.
성공적인 기도
고후 12장 7~10절 / 임덕순목사
여러분은 이번 기도회에 기도 잘 하셨습니까? 성공적인 기도회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공적인 기도는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기도의 성공일까요? 소리의 크기가 성공을 결정할까요? 열심일까요? 많이 모인 것일까요? 무엇으로 기도의 성공을 평가할까요?
성공적인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찾아보십시다.
1.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달은 것,
기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내 말도 해야 하지만, 가장 훌륭한 대화는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상대의 말은 듣지도 않고 내 말만 하는 사람은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로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상대방과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대화에는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기 전에 날마다 먼저 예배를 드렸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의례상 필요해서 한 것이 아니라 기도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도회에 말씀을 얼마나 잘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까? 그래서 나의 삶을 반성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감사해라. 주일성수해라. 전도해라. 십일조 드리라. 성실하게 살아라. 이웃을 사랑해라. 하시는 그분 뜻대로 살려고 작정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에 성공한 것입니다. 말씀 깨달음이 기도 성공의 첫째 요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대화를 하는 목적은 상대방이 나의 의견을 들어주고 나를 위해서 그의 마음이나 태도를 바꾸어 달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돈을 빌려달라거나, 우리 집 잔치에 참석해 달라거나, 어디를 나와 함께 참석하자거나 하는 상대방의 마음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 대화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병든 몸을 고쳐 달라거나, 자녀의 앞길을 인도해 달라거나, 좀 더 지혜롭게 살아가게 해달라거나 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 마음이나 태도를 움직여 달라는 것이 우리가 하는 기도의 대부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자 해서 대화를 한다면, 하나님도 나의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움직여 달라고 하는 요구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십일조도 드리지 않고, 주일성수도 하지 않고, 전도에도 관심이 없으면서, 하나님의 요구에는 귀를 막아버리고, 오직 내 몸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 아들 장가가게 해주세요. 내 며느리 아들 낳게 해주세요. 라고 내 말만 한다면, 이런 기도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혹시 신이 계시다면 이런 도움을 좀 달라는 이방종교의 기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고 그것에 따라서 내가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기를 바라고 요구하시는 바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잘 듣는 것, 그래서 마음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 성공의 제 1조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고 높인 것 (찬양)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과 마주앉아 대화하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이 상대의 의견을 듣는 것 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신뢰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찬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이요, 그의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자비와 사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드리는 상대가 한 나라의 제왕인데, 그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알고 대화를 한다면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 과 대화에 성공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 구절구절마다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공의와 능력에 대한 칭송이 가득히 들어있습니다. 그 찬양과 감사는 내가 당신을 이렇게 인정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높이고 그 자비를 청합니다. 고백인 것입니다.
찬양만 아니라 감사가 필요합니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고 하셨는데, 감사함으로 아뢰는 기도는 상대방이 능력과 위엄과 자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들로 나를 도와주신 경험을 내가 했었고, 그래서 다시 기도하는 내가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노라고 하는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 대화를 신청하는 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번 기도회에 감사 많이 드렸습니까? 첫날에도 감사헌금을 드리며 시작하고, 오늘도 감사헌금을 드리며 기도회를 마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감사헌금도 감사로 기도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긴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사를 담지 않고서는 감사헌금도 무용한 것입니다. 마음 가득한 감사함으로 기도합시다. 말을 많이 못했어도 감사하는 사람을 주님은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7:12-19에는 열 문둥이가 주님께 치료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홉 명은 단지 문둥병만 고침을 받았지만, 돌아와 감사한 한 명은 죄까지 용서를 받았고 영혼의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감사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주님 때문에 살고 있고 주님께 언제나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만 가슴속에 가득히 담겨 있다면, 그의 기도는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니 구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기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걱정 없이 맡겨버리고 의지하는 사람이 기도에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이제는 얼굴에 수색을 버리고 돌아갑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를 하라하신 분이고, 우리의 문제를 이미 다 아시는 분이며,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려고 이미 작정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감사 찬송을 드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고 찬양하며 그분을 신뢰했다면,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성공했습니다.
3. 내 뜻을 진실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아뢴 것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실뿐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가 뭐라고 간구 할 줄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묻습니다. “너 뭐가 필요하니?” “운동화 새로 사 주세요.” “네 운동화가 떨어졌는데 왜 나한테 이야기 해?” “우리 아빠잖아요.” 부모는 자식의 정확한 요구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분명하게 요구할 때, 들어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20일 동안 기도하고도 이번 기도회에 내가 뭘 기도 했던가 알지 못하면 실패한 기도회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툭 던져서는 안 됩니다. 내용이 불분명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진지하고 겸손하게 간구하되 분명한 내용을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의 문제에 대하여 대책이 있으시겠지만, 내 뜻은 이것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식답게 자기 뜻을 솔직하고 겸손하게 아뢰어야 합니다. 내 뜻을 진실하고 겸손하게 아뢰었다면, 내생각대로 응답이 되고 안 되고 에 관계없이, 기도에 성공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기도회에 진지하고 진실하게, 겸손하게 여러분의 뜻을 분명히 간구했습니까? 나는 2003년 특별기도회에는 이것을 이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었다, 라고 기록 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기도했습니까? 그랬다면 이번 기도는 잘 한 것입니다.
4. 성령을 의지하면서 계속하여 성실하게 사는 삶
마지막으로 또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기도회는 오늘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상대하는 삶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삶은 어쩌면 오늘이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엊그제는 매일 밤마다 나와서 이렇게 저렇게 기도하더니, 네 사는 모습은 어쩌면 그렇게 엉터리로 사느냐 고 하신다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단지 몇 개의 문제를 우리가 간구한대로 응답해 주셨다고 해서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문제를 만나는 사람들이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만나는 문제와 위기는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지난 며칠동안만 아니라, 날마다 성령을 의지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면 날마다 도우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고,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 에서 꼭 지녀야 할 것은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주관하시는 이 세상만물과 자연은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얼마나 정확하게 돌아갑니까? 수 만년이 지나도 하나님은 정하신 질서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지으신 사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그 아버지의 인도를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은 성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성실한 삶, 무책임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들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성실하게 사는 삶이 기도의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가 확인 되었다면, 이제 공은 하나님께로 넘어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말로 하실 것은 말로 하실 것이고, 상황으로 하실 것은 상황으로 하실 것입니다. 혹 어떤 것은 대꾸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든지 처분대로 감사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다.
내가 요구한 그대로 응답해 주셨다면, 내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구한 것이니 참으로 감사한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요구한대로 주시지 않고 달리 주셨다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응답을 주셨으니 더욱 감사할 일입니다. 오래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식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응답이니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꿰뚫어서 보시는 분이요, 시간과 역사를 장악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미루시는 일을 우리가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보류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한 응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공은 하나님께 넘어갔으니 그분이 주시는 처분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사하면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복된 삶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성공적인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기뻐하라
고후12장 7~10절 / 엄기호목사
우리 인간은 극단적인 환경에 직면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다가도 슬픔과 비탄의 자리에 떨어지기도 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다가 갑자기 환난과 시련에 봉착하기도 하면서 길지도 않은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만납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에게 왜 고난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아직도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고난은 필요하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되고 육은 죽고 영으로만 살게 된다’라고 했고,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고난이 클수록 영광도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크고 작은 곤경에 허덕이면서 고난 속에서 비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인생고에 허덕이는데,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며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이 초청에서 제외될 아무도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예기치 않은 난관과 고난에 봉착하면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 하며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받는 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조건 사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한 영적 실패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난은 무가치하며 오직 불행만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고 선하다고 했는데 이는 모순이며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한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몸에 가시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가시가 간질병 또는 안질이 아니었는가 하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시가 너무 고통스럽고 많은 믿는 자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파울의 병을 고치는 대신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일반적으로 육체의 가시, 즉 질병은 영적으로 고통과 나약함만을 준다고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로 인하여 오히려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파울은 크게 깨달음을 얻고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고난의 가시를 제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고백하였습니다.
고난은 두 가지의 중요한 속성이 있습니다. 바로 환난과 시련은 우연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이 환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환난과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없이 순조롭게 인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으나 고난을 당했을 경우 그 고난과 싸워서 이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고난과 싸워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자
우리 인생 행로에 도전해 오는 고난을 이겨 나가는 방법은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장애를 예로 들면, 고칠 수 없는 것은 그 상황대로 받아들이면서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극복하여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이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고난을 은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고, 중풍 병자가 걷고, 혈루증이 치료되고, 죽은 자도 무덤에서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자를 다 치료하고 모든 죽은 자를 다 살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올 때, 고통 가운데 처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어진 고난 가운데 순종하며 기도할 때 더 큰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건강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될 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성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실패가 그 사람을 더 크게 성공시키기도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고난이 닥쳐도 불행이라고 속단하지 말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자기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면 은혜요 고쳐주지 아니하셔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건강해야 가치가 있고 병들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성공하면 가치가 있고 실패하면 가치가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병상에서 자기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생각이 변화되고 마음이 새로워져서 이전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패했을 때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여 더 큰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고난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고난을 인내하자
하나님의 은혜는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한결같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성공할 때는 은혜로 알지만 실패할 때는 은혜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언제나 넘치게 주십니다. 성공할 때는 은혜로 성공하고 실패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실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만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할 수가 있었고 일체의 삶의 비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을 주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처할 때 인내로 이겨냅시다. 하나님은 아프시게 하시다가 싸매어 주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을 당할 때 인내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어떤 자리,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일으켜주십니다. 영혼을 고쳐주십니다.
고난 중에도 할 일을 찾자
우리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는 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가시 보자기에 싸서 주십니다. 가시 속에 담아진 은혜를 아는 자만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고난까지도 주님을 위하여 쓰여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믿음이 있는 자는 고난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파선된 배 위에서나 감옥 속에서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손발이 착고에 잠겨 있어도 환경과 형편을 바리보지 않고 고난 중에 그가 할 일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럴 때 예언대로 응답되고, 기적은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는 날마다 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이런 사람을 통하여 큰 일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직장이나 일터를 잃거나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거나 돈을 잃을 수도 있고, 하는 일마다 불통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실직을 당할 수 있고, 예수 믿는 사람도 부도를 당할 수 있고, 예수 믿는 사람도 퇴출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이 당하는 것과 믿는 사람이 당하는 것은 그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똑같은 용광로이지만 나무가 들어가면 다 타버리고, 금광석이 들어가면 불순물만을 걸러내 순금이 나오듯이, 믿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고난을 받지만 그 미치는 영향과 결과는 아주 다릅니다.
현재, 고난을 당하고 계신 분 있습니까? 고난을 피하려고 죄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당할수록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고난이 오면, ‘아 이제 주님이 축복해 주시겠구나’ 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만은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믿으며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승리와 축복과 기적의 역사가 임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인의 역설
고후12장 7~10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앙인의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세상적인 삶의 원리에 정반대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예로 악을 이기는 길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상 생각하고는 틀리지요. 오른편 뺨을 치거든 너도 한 대 갈기라고 했는데 성경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송사하여 겉옷을 가지려거든 속옷까지 주며, 참 생각해도 알 수 없어요. 왜 속옷까지 줘야 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라고 하신 가르침이신 것입니다. 억지로 오리 가지고 하면은 “내 오리 더 가 드리지요. 십리까지 갔습니다.” 세상적인 우리 생각과 주님이 주시는 지혜가 정반대되는 역설이 될 때가 많습니다. 또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가르침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생각하기에는 자꾸 받는 것이 복된 것인줄 아는데 주는 것이 복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 아닙니까? 오늘 그 중에 몇 가지를 여러분과 더불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1. 내가 약할 때 강하다
첫째로, 내가 약할 때 강하다.
내가 약한데 뭘 강합니까? 약한데 쓰러질 지경인데 어떻게 강하냐? 여러분 약한 사람을 보면 누가 붙들어 주던지 지팡이를 집든지 휠체어를 타든지 자기보다 강한 것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강하면 다른 데 의지할 필요 없어요. 내가 두 다리로 굳세게 서고 두 손으로 나를 방어할 수 있지만 내가 약하면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든지 자동차에 의지하든지 지팡이에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약하면 도울 자를 찾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우리에게 어려움이 다가오고 우리가 약해지는 것은 강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간증을 하나 읽어 보니까 우리 교회 나오는 자매님이 처음 교회에 나왔다가 별 재미가 없어서 그만 집어 치웠는데 가족이 교통사고가 나서 남편이 목의 신경이 끊어져서 하반신 마비가 되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니까 이제 집안 살아나갈 일이 막연합니다. 어찌합니까? 별도리 없이 그때부터 하나님 살려 달라고 새벽기도도 나오고, 주일 기도도 나오고 기도원에 가서 사흘 동안 평생에 안 해본 금식기도를 하고 하나님 살려 달라고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집에 와서 남편에게 안수 기도하니까 남편이 일어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약했으니까 하나님을 찾았지 강했으면 하나님 안 찾았습니다. 남편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건강한데 뭘 하나님 찾겠느냐. 그러나 남편이 하반신 마비가 되니까 병원에서도 이제는 평생 하반신 마비로 병신이 되지, 낫지 않는다고 선언을 하니까 그때야 강한 자를 찾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붙들어 줘야 되겠거든.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어서 건강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은 바로 약한 강한 자를 붙잡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계시나 지식이나 깨달음이 너무 많아 영적으로 강한 자였었습니다. 바울선생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지금도 제가 바울 선생의 글인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읽으면 마음에 굉장한 감동을 느끼고, 이렇게 깊은 계시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감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계시를 받으니까 어깨가 우쭐해지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이만하면 되었다. 내가 충분한 지식과 계시와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울선생을 더 크게 사용하려면 낮아지고 깨어져서 더욱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교만해질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약하게 만들어야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울 선생께서는 사탄의 사자, 육신의 가시(병)가 그 몸에 와서 약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의 사자가 왔으니 사탄의 사자가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 선생은 일어서도 고통을 주고 앉아도 고통을 주고 일을 할 때도 적군들이 생겨나고 반대가 생겨나고, 여러 가지 괴로우니까 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은 평안하면 잊어버릴 때가 많아요. 그러나 심신이 괴로운 사람은 24시간 내내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살려 주옵소서.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합니다.”기도 안할 수가 없어요. 아프고 답답하니까. 저도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평안할 때는 ‘아이고 하나님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번뜩 납니다. 하루에 살면서도 내가 평안하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어요. 가끔 있는 것이 아니라 종종 있어요. 그러나 내가 고통스러우면 한시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 날 도와주십시오. 날 도와주십시오.’ 그럽니다. 여러분 자식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타향에 나가서 산 자식들이 평안하고 잘 살면 부모에게 1년에 편지 한 두번 할지, 더구나 요사이 핸드폰만 들면 이야기 할 수 있어도 전화도 안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자꾸 전화가 오거들랑 좋은 소식인줄 생각하지 마세요. 괴로우니까 뭐 도와 달라고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편안할 때는 부모에게 별 전화 안하다가 괴로우면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난 다음에는 “날 좀 도와주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약하니까 도움을 청하지 강한데 도움을 청하지 않지요. 바울선생이 그렇게 하나님께 묵시와 계시를 많이 받고 지식이 풍부하더라도 괴로우니까 사탄의 사자가 와서 그를 온통 괴롭게 하니까 그는 24시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10절 이 배경을 알고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할 때 강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약하지만 원수가 볼 때는 엄청나게 강하다. 왜, 내가 약하니까 강한자하고 손을 꽉 잡고 함께 가니까 강하거든. 어린 아이가 자기 혼자는 약하잖아요. 그러나 아버지와 손을 탁 잡고 나가면 기세당당하잖아요. 그러므로 실제 자기 개인적으로는 극히 약하지만 타인이 볼 때 엄청나게 강한 것은, 엄청난 강한자의 손을 잡고 의지하고 나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너무 힘없고 약하고 고달프더라도 예수를 의지하고 나가면 사탄이 볼 때는 여러분 엄청나게 강한자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플러스니, 예수님이 함께 오는데 감당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 없이 나 혼자 강하다고 끄덕 거리는 것은 사탄이 볼 때는 하루 아침 거리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강한 자는 자기가 약한 것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인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 있는 자는 자기가 지혜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고 참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자기가 무지한 것을 깨달은 사람이고 참으로 부자는 자기가 가난한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야 정말 지식과 지혜와 축복을 주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큼직한 사건들은 강한 사람들보다는 대부분 약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운동을 할 당시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최초의 독일어 성경입니다. 또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고 하는 「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괴로울 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서 신앙고백인 천로역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밀턴은 그의 유명한 「실락원」을 적었는데 그는 장님이 되어서 아무것을 볼 수 없을 때, 상상의 눈을 뜨고 실낙원이라는 아름다운 장편시를 지은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은 나폴레옹 3세 때, 빅톨 위고가 국외로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 고난 당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여 적은 책인 것입니다. 음악의 거성인 베토벤은 청각 장애가 와서 음악을 들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자기 이외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였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미국의 역대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4선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위에서 힘이 와야지 내 힘 가지고는 조그만 일밖에 못해요. 큰일을 하려면 위에서 힘이 와야지요. 위에서 힘을 얻으려면 의지해야지요.
의지하세 의지하세 곧 의지하세, 구하겠네 구하겠네 곧 구하겠네.
의지하는 자를 구해주지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꼿꼿이 선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붙들어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고 안아 주시고, 엎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내가 하나님께 항복할 때 이기는 자가 된다
둘째로, 내가 하나님께 항복할 때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 뜻을 거역하면서 아~ 내가 내 중심에 서서 내 고집대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형편없이 약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깨어져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개인이나 가정이나 생활이나 사업이나 모든 것이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께 항복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서서 나가는 자는 강하게 보이나 실제로는 형편없이 약한 자인 것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씨름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처자들 데리고 많은 짐승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가까이 와, 얍복강을 건너고 난 다음에 형이 있는 곳에 사자를 보내니까, 형 에서가 동생을 죽이려고 400인의 집에서 기른 장정들을 데리고 출동을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 야곱은 간담이 녹았습니다. 이래서 자기 처자와 짐승 떼를 얍복강을 다 건너게 하고 난 다음 자기는 안 건넙니다. “여보, 함께 가야지요.” “아빠! 왜 안건너가?” “너희들 먼저 가! 나 여기 볼 일이 있다.” 왜냐, 형이 와서 짐승 떼를 치고 처자를 치면 죽일 의사가 있으니까, 삼십육계를 놓겠다는 것입니다. 도망치고 안 죽이면 그때 슬며시 머리 긁고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약한 놈이 어디 있습니까? 처자를 형의 칼의 밥으로 내어 놓고 자기는 살겠다고 강 건너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가 지는데 갑자기 키가 크고 장대한 분이 다가오더니만 그를 꽉 붙잡고 “건너가라 이놈아! 강을 건너가서 처자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될것 아니냐! 건너가라!” “나 안가요. 내가 살아야지 뭐 처자가 죽더라도 내가 살아야지 무슨 소리 하느냐. 나는 안가요.” 그런 남편하고 결혼한 여자는 행복한 여자죠? 결혼할 때 조심해야 돼요. 책임질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결혼만 하고 책임 안지는 사람하고 결혼했다가는 신세 망치는 것입니다. 야곱은 책임을 안 져요. 처자가 다 형의 칼에 죽으면 자기는 도망치고 인생 새 출발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 이때 읽을 때만 되면 야곱에게 한번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나요.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건너가라! 건너가라!” “안가요.” 얼마나 고집이 세든지 초저녁에 씨름을 시작한 것이 새벽에 해가 뜰 때까지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손을 들어 환도뼈를 치니까, 뼈가 어그득하고 어그러져 자빠졌습니다.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보니 큰일났다 말입니다. 이제 형이 오면 도망치기 틀렸어요. 그냥 완전히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걸을 걸어도 그냥 걷지 못하고 이러고 몇 자국 달아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나에게 복 내려 주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나이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쉽게 말하면 사기꾼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네 이름은 이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불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긴 자라고 말하느냐. 그가 하나님께 항복을 하니까, 하나님은 항복한 자를 승리자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 이야기가 창세기 32장 24절로 25절에 있는데 제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성경을 같이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 다음?창세기 32장 26절로 28절 읽으십시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완전히 하나님과 씨름해서 사실을 졌는데, 하나님은 진 사람 보고 “너는 이겼다.” 항복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저자들이 남편,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얍복강을 건너서 오는데, 머리를 삼발이 되고 얼굴은 전부 콩팥을 문지른 것같이 새까맣게 되고, 옷은 찢어지고, 절뚝, 절뚝, 절뚝하면서 걸어옵니다. “아이고 이것 왠일입니까? 어쩐 일입니까?”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고 “그냥 따라만 오너라. 너희들은 다 내 뒤에서라.” 이제는 처자들을 전부 자기 뒤에 세우고 자기가 앞에 섰습니다. ‘죽더라도 내가 먼저 죽는다. 인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래 형이 4백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죽이려고 와보니까 한줌도 안 되는 동생이거든 절름거리고 오는데, 불쌍해서 보지를 못하겠어요. 머리는 산발이 되고, 옷은 찢어지고, 절뚝절뚝 하는데 칼로써 뭘 죽이겠습니까? 과거의 원한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에서 뛰어내려서 동생을 껴안고 “야 이놈아, 20년 동안 날 떠나서 있더니 이제는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오느냐?” 엉엉 울고서 서로 목을 껴안고 화해하고 죽음을 면하고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싸우지 아니하고 승리를 갖다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가 무엇입니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어지면, 하나님은 인생의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는 것을 보라. 오늘 너희가 본, 이 애굽 적군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모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복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데, 우리가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멀리 서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 항복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버리면 내 어디 가리까 그 찬송처럼 하나님께 항복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3. 내가 빈 그릇이 될 때 가득 해진다
셋째로, 내가 빈 그릇이 될 때 가득해 지는 것입니다.
빈 그릇이 되는데 어떻게 가득해 지느냐. 가득한 그릇을 가져야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인생에 빈 그릇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이 채워 주시지 가득히 담고 있으면 채울 곳이 없습니다. 가득히 담아 있는데 또 무엇을 채워요. 채울 틈이 없잖아요. 죄악과 세상이 가득하면 하늘나라를 어떻게 채워요? 벌써 가슴 속에 죄가 꽉 들어차고, 세상이 꽉 들어차 있는데, 거기에 하늘나라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4:17)는 것은 죄와 세속을 회개하고 비워 버려야, 천국이 들어올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빈 마음에 가득히 임하는 것이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와 세상을 다 회개하고 털어 버리고 빈 그릇이 될 때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탐욕을 비워야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욕심이 꽉 들어차서 자기 욕심대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우상입니다. 우리가 나무나 돌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형상을 만들어 절하는 것만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욕심이 우상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는 절대로 천당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아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욕심을 갖고 있으면 엄청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절대로 채워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십일조와 헌물을 아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십일조가 아깝고 헌물이 아까워서 그것을 안 드리고 하나님 축복만 주십시오. 십일조가 헌물이라는 탐욕을 비워 놓아야 그 그릇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그 그릇을 안 비워 놓는데 어떻게 복을 주십니까? 저는 목회 시작할 때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였었습니다. 불광동에서 서대문에 버스비가 없어서, 늘 걸어서 왔다 갔다 하고, 옷은 한 벌로써 봄, 여름, 가을, 겨울 갈아입을 필요 없이 한 벌만 있으면 다 입어요. 좀 살게 되고 난 다음에 팬티도 입고, 런닝도 입었지 팬티도 런닝구도 없이 살았습니다. 완전히 거지대장이었습니다. 교회는 뚫어진 천막에다가 가마니 깔고 살았어요. 그래도 내게 무엇 하나 생기면 십일조는 반드시 드렸습니다. 반드시 드렸어요. 점심때가 되면, 제가 점심을 먹고 올라오는데 우리 손자와 같이 점심을 먹는데, 우리 손자인 성욱이가 올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뭘 갖다 줍니다. 자기가 먹던 과자도 있으면 내게 갖다 주고, 바나나도 꺾어서 갖다 주고, 강냉이도 갖다 주고, 먹기 싫은 과자도, 젤리도 주고 자꾸 나에게 손에 쥐어주고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네가 날 닮았구나? 주기를 좋아하는 날 닮았구나.’ 저는 원래부터 하나님께 드리기 원하고, 이웃에 주기를 좋아했었습니다. 이래서 있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 늘 도움을 베풀었는데, 그 어려운 시기에 심고 난 다음, 잠시 동안 어려움을 당했지만 50년의 목회생활에 99%는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아니하나 보란대로 그대로 해주신 것입니다. 저는 실제 나의 생활 속에 50년 동안 경험하고 배워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신 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것으로 심고 비워 놓아야 하나님이 채워 주시지 내가 가득히 채워 놓고 난 다음에 복을 달라고 하면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로 12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
하나님 거짓말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거짓말 하면, 저 하늘 지으시고,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시행하고,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믿고 있으면 빈 그릇은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신 주님, “도적이 오는 것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했는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케 하사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을 착한 일은 넘치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뭐 있어야 착한 일을 하지 쥐뿔도 없는데, 무슨 착한 일을 해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남을 복되게 하지, 아무것도 없는데 누구에게 복을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랑과 행복을 이웃과 나누라고 하는데, 무엇이 있어야 나누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 나누면, 하나님은 더 주시고 또 그것을 나누면 더 주시고, 하나님은 자꾸 주시는 양을 크게 하고, 그릇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릇이 있어야 복을 줘요. 엘리사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서 그 과부가 엘리사에게 와서 “엘리사 선생님! 우리 남편이 선지자인데 세상을 떴는데 채주들이 와서 애들을 잡아서 종으로 팔겠다고 합니다. 살려주십시오.”엘리사가 “집에 뭐가 있느냐?” “먹다 남은 기름 조금밖에 없습니다.” “어.. 집에 돌아가서 애들을 시켜서 이웃의 그릇을 빌리되, 많이 빌려라. 그리고 문을 닫아놓고 그 기름병으로 그릇에다가 부어라.” 그래서 이 과부가 애들 시켜서 이웃에서 모든 양푼과 대야를 다 빌렸습니다. 그리고 집에 부엌에 갖다 놓고, 문 닫아 놓고 그 조그마한 기름병 갖다 부으니까 기름이 줄줄 나오는데 끝이 없어요. 한 그릇 채워 놓고도 다른 그릇 내오니까 또 줄줄 나오고 또 줄줄 나오고 온 집에 있는 그릇에 기름이 가득차고 난 다음에 애보고 “얘야~ 또 대야 가지고 오너라!” “엄마 다 가져 왔어요. 이제 없어요.” 그러니까 기름이 뚝 그쳐 버렸어요. 기름이 그릇이 있을 동안에는 늘 흐르지만, 그릇이 없으면 그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속 빈 그릇을 만들어야 계속 부어 주시지, 여러분 빈 그릇을 안 만들면 축복은 그칩니다. 내게 주시는 축복을 자꾸 나누어 주어서 내가 자꾸 적은 그릇을 비우면 큰 그릇으로 또 채워주고 큰 그릇을 비우면 더 큰 그릇으로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하나님은 그 풍성한대로 우리 쓸 것을 더하시고 채워 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나는 이 성경만 보면 친정어머니가 눈에 보여요. 요사이는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 시집살이하다가 고생 많이 하고 친정에 왔다가 시집에 갈 때, 친정어머니가 부엌으로 불러다가, 조그마한 그릇에 딸이나 손녀가 함께 그 그릇에 보리나 쌀을 이렇게 대에 넣어서, 흔들어 가지고 눌러서, 또 넘치게 해서, 싸서, 안겨 보내는 것입니다. 더 주려고 무수히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냥 그릇에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후히 되어서 또 눌러 가지고서 더 흔들어 가지고서, 또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이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의 하나님이요, 이게 여러분의 친아버지요, 여러분을 지으신 자의 소원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데 왜 헐벗고 굶주린다는 말인 것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은 염려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좋은 하나님을 여러분 의지하고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사업가인 워너 메이커가 하루는 장미 화원을 잘 가꾼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워너 메이커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종류의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장미꽃들을 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마누라 닮았는가봐. 우리 정원에 나가면 나무들이 좋고, 꽃들이 잘 피었는데 ,우리 집사람하고 나가기만 하면 자꾸 나무를 꺾어요. 나는 너무 아까워 못 견디겠는데 “아 그것 꺾지마라고..” 꺾어야 잘된다고 자꾸 꺾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도 섭섭하게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 보니까 우리 마누리가 나보다 지혜가 있어요. 장미꽃을 꺾기 시작했는데, 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다 꺾어 버립니다. 이를 보고 놀란 워너 메이커가 물었습니다. "아니, 왜 가지를 모두 칩니까?" 그러자 집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다 쳐버려야 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가지를 잘라내도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큰 교훈을 받고 충격을 얻었습니다. ‘아.. 내 사업에 여러 가지 가지를 쳐서 자꾸 나누어 줘버리면 본통 사업이 축복을 받는구나!’ 가지를 그대로 늘여 놓으면 꽃들이 장미꽃이 조그마한 것만 달랑달랑 달리는데 다 꺾어버리니까 몇 송이 피더라도 큼직하고, 보암직하게, 피는 것처럼 복도 자잘한 것은 다 나누어 줘버려야 큼직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워너 메이커는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사업체는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과 탐욕을 비워 빈 그릇이 될 때 가득히 채울 수 있습니다.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고,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은 다 나눠드리고, 다 흩어주고, 우리 생활에 가지를 꺾어 가지고서, 너무 늘어진 것 다 나눠주고 나면은 하나님이 크게 열매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좌우간 인생은 너무 복잡하게 살지말고 단순하게 사는 게 좋습니다. 먹지도 않을 것 집에 갖다 놓고, 쓰지도 않을 것 벽장 속에 두지 말고, 오늘 가서 다 가지고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에 가지고 오세요. 베게도 좋고 홑이불도 좋고, 담요도 좋고, 먹던 약도 좋고, 내가 안 쓰는 것을 왜 가지고 있습니까? 나 쓰기는 필요 없고 남 주기는 아깝고 썩을 때까지 갖다 놓습니다. 사실 여러분 벽장 열어보면 쓸데없는 것 많아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먹는것 많이 있고 돈도 남아서 안 쓰고 놔두고 있으면 가지고 오세요. 하하하..좌우간 자꾸 비워야 하나님이 성령의 기름이 부어지지 비우지 아니하면 안부어지는 것입니다. 버려야 얻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4. 내가 죽을 때 영원히 산다
넷째로, 내가 죽을 때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왜냐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살거든요. 속사람과 겉사람이 함께 살아요. 여러분 모두다 이중인격입니다. 속에 영혼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 두 사람이 살아요. 그런데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죽어야 다른 사람이 사는 것인데, 세상 사람은 속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만 살다가 70, 80, 90 되면 흙으로 돌아가고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살려면 정욕과 탐욕과 욕심인 겉사람이 죽어야 돼요.
요한일서 2장 15절로 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에 탐욕은 다 세상 육신에 속한 것 아닙니까?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만지는 대로 그대로 다 가지고 싶고, 방탕하고 허랑한 육신을 따라 살면 영은 죽어요. 육신을 죽이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육은 싫어하지요. 그러나 영은 사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안 나오고 세상에 놀러 다니고, 등산가고, 낚시가고 하면 육은 재밌지요. 그러나 영은 말씀 못 먹고 굶주려 죽지 않습니까? 기도 안하고 텔레비젼 보고 허~~ 하고 있으면 육은 좋지요. 그러나 영은 말라 죽지요. 세상에 화려한 것에 취해서 세상을 따라 가면 육은 좋아하지만 영은 죽습니다. 영은 교회를 찾아와서 말씀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찬양하면 살지요. 그러나 이 세상은 얼마 있지 아니하여 끝나잖아요. 제가 20대, 30대에는 60,70이 되면 ‘와따~ 고목나무구나. 곰팡이 폈구나. 얼마 안 있으면 사라지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내가 그 고목나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 사는 것 여러분,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젊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나도 옛날에 자랑했다고.. 순식간에 할아버지, 할머니 되고 말아요. 육신의 삶이란 있는 것 같은데 벌써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영혼을 구원해야 돼요. 영혼을 잃어버리면 온 천하를 구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름다운 국민 아이돌(idol)이 된 배우가 자살을 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왜 죽노? 살아야지. 세상을 따라 살다 가니까 세상에 절망이 오니까 생명을 끊잖아요. 세상이 그런 겁니다. 세상이 한때는 환영을 하다가 필요 없으면 짓밟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으면 좋을 때는 하나님이 좋아서 좋고 나쁠 때는 하나님이 위로하고 붙들어 주시니 좋고 하나님 보다 더 좋은데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고 아버지를 섬기고 살았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야지. 하나님이 주신 영(令)대로 이 땅에 살고 하나님 섬기며 살다가 하나님 오라 하실 때 천국에 들어가면 영원무궁토록 부귀와 영화와 공명은 견줄 수가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인데 그 길을 택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21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육신의 세상에서 나는 죽고,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꿈꾸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원으로 해서 이전 것인 그 겉사람은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그리스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장사 되었다가 부활한 것을 새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변화를 항상 생각하고,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고 꿈꾸고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새사람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하고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육체는 점점 죽이고, 영적으로는 점점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자라나야 돼요.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어머니가 태어나게 해서 태어났는데, 그 다음 지가 먹어야지요. 그래야 자라지 안자라고 핏덩어리로 남아 있으면 안 되잖아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되고, 장성하게 되어야 천국을 나가서 장성한 분량대로 은혜를 받습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다 똑같은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안 자란 어린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살고 초등학교 정도는 초등학교에 살고 대학정도 자란 사람은 대학정도 살고 완성된 사람은 완성된 곳에서 살고 천국에 차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천국에 주님께 더 가까이 가서 살지, 천국 말죽거리에 가서 사는 여러분 안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말죽거리가 좋게 되었지만 우리 어릴 때는 말죽거리가 우스웠어요.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꿈꾸십시오. 예수와 죽었다고 믿으십시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성령을 모시고 속사람이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여러분, 성경에는 내가 약할 때 주님께서 붙들어 주므로 강하고, 내가 하나님께 항복해서 두 손 들었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이기게 만들어 주시고, 나를 비우면 충만하게 되고, 내가 죽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장 1~10절 / 조용기목사
할렐루야~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로 지진이 하루에 네 번네지 다섯 번씩 파도처럼 다가오는데 마음에 좀 불안하더라구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나도 다른 사람처럼 일본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 가니까 모두 다 도망치는 사람만 있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굉장히 마음에 상처를 입고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물질을 잃어버린 사람,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거니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지치고 피곤하고 고통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나라에 있는 크리스챤으로서 뜨겁게 사랑을 베풀고 기도를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대표해서 며칠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그들을 위로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가 월요일 날 갔기 때문에 수요일 날 돌아오려고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붙잡고 못 가게 하지 않습니까? 가지 말라고... 앞을 막아서 할 수 없이 목요일 날 하루 더 잡히고 금요일 날도 못 가려고 하는 것을 기어코 뿌리치고 왔습니다. 그만큼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들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과 같이 사는 주의 종이니 제가 있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주 안에서 행복합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축복받았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오늘 교회 잘 오셨습니다. 인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지난겨울은 대단히 추웠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 다가오는 봄과 여름이 퍽 따뜻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평온함을 감사하려면 폭풍우를 당해봐야 알아요. 제가 이번에 일본 동경에서 지진을 당하고 보니까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별로 그것을 느끼지 않았는데...
밤에 평안하게 잘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10시쯤 된 밤중에 갑자기 몸이 막 이렇게 흔들리는데 천정이 달그닥 달그닥 하는 소리가 나고 야~ 큰 폭풍우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잠을 자려고 하니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폭풍우를 당해봐야 평온함을 알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씀을 마음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항상 대낮만 있으면 빛의 고마움과 귀중함을 모릅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되면 빛의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존 크리소스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환난이 없으면 평안함도 없고 겨울이 없으면 여름도 없다.”
맞습니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의 찬란함을 알듯이 고난을 통하여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늘 평안만 하면은 은혜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신앙을 잠재울줄 아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고통스러울수록 신앙은 더 불같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현재 북한은 교회를 박해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문이 열리면 하나님의 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증명되듯이 박해 속에서 복음의 위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려고
첫째로, 왜 우리에게 고난을 하나님은 허락 하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와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크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둠이 있어야 빛이 증명 되는 것과 같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는데 병들어봐야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의학과 의술이 얼마나 귀중한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생명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죽인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서 건져주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용서받는 은혜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 없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용서하는 의로운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이기 때문에 주여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죄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더럽고 불의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로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병들었기 때문에 안수 받고 병나았다고 할렐루야 하고 야단하는 것은 병들었기 때문에 치료의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저주 속에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리는데 주님의 복을 받아 잘살게 되면은 주님의 축복의 은혜를 알게 되고 나중에 우리가 죽어봐야 천당이 얼마나 좋은 것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안 죽어 보고는 천당이 얼마나 좋은 모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천당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체험하기 위하여 예수 죽인 것들을 몸에 짊어져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예수님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가 죽음에 넘겨진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야 예수님의 도우시는 능력을 나타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증거 하려면 내가 체험한 것이 있어야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체험도 못했으면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을 통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으면 담대하게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병에서 고쳤습니다. 우울증에서 치료했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을 주었습니다. 가난과 헐벗음에서 축복을 주셨습니다. 증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인 앞에 죽음의 시련을 겪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사망을 당하여 그것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극복함으로 그 영광스런 생명의 증거가 주위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망이 다가와도 예수님만 계시면 끄덕 없다.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일본에 가서도 늘 말한 것은 재앙은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온다. 지진이란 것이 꼭 일본에만 오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올 수 있고 미국에도 올 수 있고 구라파에도 올 수 있다. 문제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을 극복해 주시는 예수님을 모셨느냐 안 모셨느냐 그것이 문제다. 예수님 없이 재앙을 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지만 예수님이 계시면 재앙을 당할 때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께서 능력으로 재앙을 잠잠케 해주신다.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갈 때 예수님을 모시고 가기 때문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잠에서 깨워 일으키니 풍랑을 잠잠케 하셨다. 예수님 없었으면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인데 예수님이 계시니까 풍랑을 잠잠케 해주신다. 우리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풍랑이 안다가온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죽음의 풍랑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문제는 풍랑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풍랑을 잠잠케 하는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시느냐 안계시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의 능력으로 와 계시면 주님께 부탁하고 부르짖으면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예수님 얼마나 허약했습니까? 무능력하게 보였지만 주님이 그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의 약한 것을 다 대신해서 갚으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한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무능력한 대속주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주님이 이 자리에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알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능력으로 부활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든지 모르든지 여러분 속에 계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 아닌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4절로 5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리스도가 부활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사망을 이겼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으니까 우리도 이미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하게 하려고
둘째로,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부르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말을 잘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 방언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통역할 수 있는 은사도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특별히 하나님의 사역을 맡길 때는 하나님이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난 다음에 기도를 안하면 잃어버려요. 그런데 보통 편안하고 좋은 일만 생기면 문제가 기도를 안하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돌아보면 내가 평안하고 좋을 때는 별로 기도 안했어요. 솔직한 말로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서대문 여의도로 나와서 목회할 때는 하루에 평균 5시간 기도했습니다. 5시간이라면 긴 시간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5시간 기도해도 만족하지 못해요. 고난이 하도 많기 때문에 그를 이기기 위해서... 그러나 요사이는 평안하니까 하루에 1시간도 기도하기가 힘들어요. 하나님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셔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한다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입장이 곤란합니까? 고난을 주면은 기도는 하겠지만 고통스러워 괴로워하고 편안을 주면 좋아 보이는데 또 기도를 안하고...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특별한 은혜와 은사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12장 1절로 7절에 있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에 사도바울 선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을 때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가 몸 안에서 올라갔는지 몸에서 빠져나가서 영혼이 올라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층천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에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도저히 사람으로써 말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사도바울 선생에게는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그런 체험을 안주시느냐. 사도바울 선생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소아시아에 가서 남보다 많이 매를 맞고 감옥에도 수없이 들어가고 배도 굶고 고통도 당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체험한 체험이 강력하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에 올라간 체험을 했으니까 언제 죽어도 나는 천당 간다. 그러므로 죽는 것 겁나지 않는다. 그는 용기와 담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선생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그런 체험을 주신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큰 일을 맡기면 큰 체험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저의 생애 속에 생시처럼 본적이 꼭 한번 있습니다. 그것은 폐병 걸려서 제가 죽어갈 때 주님께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니까 내 등 뒤에서 누가 용기야 그렇게 부르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이 나를 부르시는줄 알고 예~ 하고 돌아보니까 어떤 흰옷 입은 분이 서 있는데 수염이 듬성듬성 나셔서 나를 보고 싱긋 웃으시면서 손을 내밀면서 너 안 죽는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이 그렇게 한줄 알고 나 안죽는 줄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나를 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온 천하 만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안죽는다. 그 체험한 것이 내 일생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 그 때 예수님이 안죽는다고 그러셨는데 안 죽는다. 고통이 다가오고 괴로움이 다가와도 나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국에 복음을 증거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안 죽는다.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 체험이 나로 하여금 용감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셔서 아프리카에 중동에 남미에 구라파에 기후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른 곳에 가서 감기가 들리기도 하고 몸에 몸살이 오기도 하고 고통이 다가와서 괴로울 때도 그때 본 환상이 마음에 용기와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번 그리스도를 체험하면 그 체험과 동등하게 사명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말하기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이란 이러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면 자랑을 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어요. 자기가 되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사자를 하나님이 보내셔서 바울 선생을 굉장히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이 고통 속에서 고쳐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했는데 주님이 말씀하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해진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약할 때 주님께 매달리고 기도를 하니까 주님이 더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쳐서 약하게 하므로 우리의 교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통이 오면 기도하게 되어요. 지금 일본 교회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합니다. 고통스러우니까 기도 안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까? 배가 부른 사람이 밥 달라고 간구하지 않잖아요. 고난당한 사람은 고난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에게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지시인 것입니다. 기도하라! 기도를 해서 그 기도의 결과로 더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고 더 신앙이 자라게 하시고 더 큰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데 기도 안하면 그런 것을 줄 수가 없으시니까 하나님이 기도하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염려 많이 하잖아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할까? 어디가서 살까? 염려 많이 하는데 하나님 편에서는 말씀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내가 있지 아니하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나에게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므로 아뢰라.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기도하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은 더 강하게 말씀 하십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부모를 봤느냐? 그런 부모 없지요? 아무리 못된 부모라도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 달라는데 굼실굼실하는 뱀을 내어줄 그런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정상적인 부모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구해야 되겠는데 안 구하니까 하나님이 구하라고 옆구리를 찌르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은 구하라고 하나님이 찌르는 것입니다. 구하면 한 단계 또 높은 단계로 축복을 받아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이 큰 시련을 겪지만 일본 국민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주님께 구하면 일본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난은 반드시 환난과 동등 곧 그 이상의 축복을 동반하는 것이 환난의 속성입니다. 환난이 와서 더 나빠지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면 환난과 동등 곧 그 이상의 축복을 반드시 가져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환난은 그 환난과 동등 이상의 축복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죽으나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살았을 때만 우리를 돌봐 주시고 죽게 되면 안돌봐 주시는 그런 주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사나죽으나 같이 계셔서 돌봐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로 10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러므로 여러분 약하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약할 그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강하다고 자랑하면 내가 내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할 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닉 부이치치라고 하는 분 아시죠? 작년에 우리 교회 금요철야 때 와서 간증한 호주 청년인데, 저도 청년 때문에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기 보세요. 팔도 없고 다리도 없습니다. 그는 1982년 호주의 브리스번에서 목회자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낳고 보니 팔다리가 없어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수많은 절망과 낙심과 좌절과 우울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울에 빠졌다는 것은 이 닉 부이치치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팔다리가 없이 세상에 살려니까 얼마나 사람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당하고 구경거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는 자라면서 수많은 절망과 낙심과 좌절과 우울을 경험했습니다. 자살의 유혹도 수차례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 안에서 장애를 딛고 일어나 19세부터 시작해서 스물아홉 살이 된 지금까지 세계 각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존재의 목적을 찾았습니다. 당신이 불 속에 던져지는 고통 중에 있다 하여도 그에 따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팔도 다리도 없는 저를 그의 손과 발로 사용하신다면, 주님은 원하는 마음이 있는 그 누구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말 귀를 기울여 단단히 들으십시오. 목적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필요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가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부이치치가 하는 말은 나같이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인생도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니 팔다리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들은 말할 필요없이 하나님 앞에 찾으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버림받은 인생은 없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작년에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강연을 했는데, 환자 중에 사고로 다리와 골반에 장애를 입고 크게 낙심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큰일을 해내려고 사고를 당한 거야. 그걸 믿고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형처럼 포기하지 마라. 더 큰 시키려고 네가 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더 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다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쓸모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찾지 아니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가 만든 비영리재단인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라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런 성경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서 29장 11절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결과에는 하나님이 평안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희망차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종국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현재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현재 내게 큰 불행과 재앙같이 보여도 주님께 의지하면 주님은 그것을 변화시켜서 결국에는 평안과 희망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믿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여 그것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극복함으로써 그 영광스런 생명의 증거가 주위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더 큰 은혜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2011년 2월 25일 순복음가족신문에 실린 양천대교구 김영수 집사님의 간증을 여러분 한번 들어 보십시오.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술과 담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고, 아침이면 밥보다 술을 먼저 찾았습니다. 이렇게 술과 담배에 찌들다 보니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점점 불러져왔습니다. 그 부인이 자꾸 병원을 가보라고 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간경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의사가 그 부인을 불러서 당신 남편은 오래 살아야 여섯 달밖에 못산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부인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이기 때문에 구역장에게 부탁해서 온 구역원들이 아침, 저녁으로 그 남편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남편은 술을 안마셔도 복수가 차고 손발이 부어올랐고 정신을 잃어 쓰러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며 고통과 절망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남편이 성도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마음 속에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밖에 없다.’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람이 깨닫는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환경에서 권면을 해도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교회 가겠다고 말하고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예배를 드리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제멋대로 살았는지 깨닫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주일예배 때 제가 신유시간에 간경화 원수 마귀는 물러가라! 이렇게 기도하더랍니다. 그 다음에는 오늘 간경화증에 걸린 사람이 나았다. 그래서 그 부인과 함께 아멘! 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그때부터 기적같이 배에 물이 빠지고 좋아지더니 이제 깨끗이 나아버렸어요. 그날부터 기적같이 좋아져서 지금은 건강해져서 우리 남선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6개월도 못산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 분은 질병이 불행이 아니라 그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이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복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재앙이나 환난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재앙이나 환난을 잠잠케 해줄 예수님이 계시느냐 안계시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물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물질적인 문제도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번 우리에게 들어오시면 영구히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고난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극복하면 그 영광스러운 생명의 증거가 주위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국 침례교 목사였던 로버트 로우리 목사님은 남북전쟁이 터지자 전사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 주기 위하여 일선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시체더미 속에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신음하는 군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로우리 목사님은 장례식보다 일단 죽어가는 사람부터 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부상자들을 구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고 힘들게 했든지 그도 그만 기진맥진해서 시체더미 속에 쓰러져 같이 신음하고 거의 죽게 된 것입니다. 일어날 기력도 잃어버리고 정신까지 희미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로우리 목사야, 내가 살아있다. 나는 어두움을 이기고 살아났다. 지금 내가 부활의 능력으로 네 속에 살아있다. 너는 죽지 않는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렇다. 주님이 살아계시고, 살아계신 주님이 내 속에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있으니 나는 죽지 않는다.” 이렇게 외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의지해서 열심히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가 지은 찬송이 바로 160장입니다.
♬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
어둠을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신 것입니다. 죽은 예수 아닙니다. 살아계신 부활의 예수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살아있는 예수님을 찾고 만나고 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고 믿고 환영하고 의지하면 예수님은 여러분 속에서 죄를 멸하고 사탄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고 저주를 멸하고 사망을 멸하고 생명과 영광으로 채워 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죽이고 도적질하는 것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2천 년 전 갈보리 산 십자가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연약을 담당하시고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살아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여러분 믿는 우리가 고난을 겪는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을 체험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진리 속에 자라게 하려고
셋째로, 우리에게 연약이 다가오는 것은 진리 속에 자라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제일 처음 불광동에서 삼박자 구원이라고 했는데 제가 삼박자 구원을 그렇게 외치고 부르짖는 것은 너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렸기 때문에 그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오랫동안 기록되어 있는 요한삼서 2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읽어도 그것을 중심으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조용기 너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는 말을 그렇게 집요하게 설교하느냐. 내가 팔자 고약하기 때문에 내가 살기 위해서 그 진리를 붙잡지 아니할 수 없었고 나같이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속에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연약함이 그리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삼중축복 아닙니까?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 다음에 깨달은 것이 오중복음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몸찢고 피흘린 열매를 이 땅에서 누려야 되겠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이후로 초대교회에 있었고 초대교회가 지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기적은 끝났다. 하나님은 이 세상 인간 역사속에 들어와서 일하지 아니한다. 지나간 일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배울 따름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6.25사변 난 이후 우리 한국 실정에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필요했지 훗날 천당에 올라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필요하다. 지금 용서받아야 되겠다. 지금 성령 받아야 되겠다. 지금 병 나아야 되겠고 지금 축복 받아야 되겠고 지금 생명을 얻어야 되겠다. 지금의 하나님 역사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중복음을 제가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의를 주는 하나님, 거룩하게 하고 성령 충만 주시는 하나님, 병고치고 건강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시는 하나님, 부활 영생 천국을 주시는 하나님, 오중복음을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여러 가지 고난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그 고난과 괴로움이 우리에게 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고난과 괴로움이 우리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4차원의 영성이 뭐냐. 무엇 때문에 4차원의 영성이냐. 그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계시지만 눈에 안보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눈에 안보입니다. 그러니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니 하나님이 들어주시는지 안 들어 주시는지 알 수도 없고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기고 싶어도 안기는 방법을 모르겠고 하나님이 내 속에 모셔 들이려고 해도 어떻게 모셔 드릴지 몰라서 당황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하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듯이 마음에 모셔드리고 내 품에 안길까? 거기에 대한 고민을 하고 기도할 동안에 하나님이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있다. 꿈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가 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가 있고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기고 하나님을 내 속에 모실 수가 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고 하나님과 함께 역사를 이룰 수가 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줬기 때문에 그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도하게 되고 우리 성도들은 이 4차원의 영성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내 속에 들어와 역사하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말씀을 생각할 때 생각 속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내가 성령을 통해서 기도하며 꿈을 꿀 때 꿈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고 내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을 때 믿음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고 내가 입술로 고백할 때 말씀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니 나의 생애 속에 말 속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믿음 속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꿈 속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생각 속에 하나님이 와 계시니 그를 잘 다스리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역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 삶의 필요에 의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 선교를 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의 가슴에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같이 강을 건너는데 선교사는 이 사람들이 왜 나에게 무거운 돌을 가슴에 안겨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키는대로 따라가니까 강 중간에 가니까 물살이 굉장히 세서 돌을 안 안으면 그대로 떠나가 버려요. 돌을 안고 있으니까 물살이 센데도 건너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는 것은 그 짐을 짊어져야 그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에 짐을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이 있으니까 기도하잖아요.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잖아요.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이기고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깨어 영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인 것입니다.
<결론>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보면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세상에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와서 우리 겉사람은 낡아져도 그를 통해서 반대급부로 속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에 큰 은혜를 받아서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당하면 우리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더 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인데 이 사랑도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해지는 우리
이수영목사 / 고린도후서 12:1-10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신자들에게 사도 바울을 악평하며 그의 사도적 귄위를 부인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서 받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자기 경험을 말하며 자랑하기를 싫어했지만 그의 대적자들이 그들이 자처하는 대로 지극히 큰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부득이 그 또한 그들이 자랑하는 환상과 계시 이상의 영적 체험을 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님에 의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변호하지 않을 수 없을 때만 어리석어 보이는 자기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신비스러운 빛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체험을 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환상과 계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쓰기를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기가 아는 “한 사람”, “이런 사람”이라고 3인칭으로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경험한 일들은 너무나 신비스러워서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자신조차 정확히 기술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아무튼 그는 무아지경의 황홀감 속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 낙원을 체험했으며 거기서 사람의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놀라운 계시를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옛날 사람들 생각에는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날고 구름이 끼는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별들이 있는 하늘이며,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낙원은 하나님과 그의 구원 받은 백성이 거주하는 초지상적 장소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과 낙원을 동의어로 사용한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는 천상의 광경을 바울에게 보여주신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주의 일을 하면서 온갖 실패와 재난과 신체적 학대를 당할 때 그가 목격한 하나님의 낙원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극복할 용기를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소개한 그의 신비스러운 환상과 계시의 체험은 그 누구의 영적 체험보다도 자랑스러운 것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도 아니겠지만 바울은 그것을 자랑하기를 매우 자제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랑은 잘못하면 교인들의 관심이 하나님이 아닌 바울 자신에게로 쏠리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며, 바울의 자랑을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로 바울을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그를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5-6절을 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한 것은 사도 바울이 경험한 그 놀라운 환상과 계시는 진정 자랑할 만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자랑이 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이 되어야 할 일에서 바울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즉 바울이 자기의 약한 면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바울 자신이 자만하지 않게 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자랑이 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6절 하반절에서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한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행하는 목회를 통해 그를 보고 들은 바로 그를 평가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지나치게) 그가 정확한 말로 옮길 수도 없는 그 특별한 영적 체험 때문에 그를 과대평가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체험을 이야기하기를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대적자들의 자랑을 듣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자기의 자랑을 듣고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한 데서 보듯이 자기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체험의 주인공을 3인칭으로 불러 “한 사람”, “이런 사람”이라 하며 “나”라고 1인칭으로 부른 자기 자신과 애써 구별하려 한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는 오직 약함이 있을 뿐임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많은 큰 계시를 주신 일 때문에 자기가 교만해질까봐 자기에게 또 주신 약함 즉 육신의 가시를 언급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바울 자신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의 육체에 심한 고통을 주는 어떤 질병이라 추측합니다. 그것이 말라리아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간질병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며, 심한 눈병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의 볼품없는 외모와 어눌한 말솜씨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사탄의 괴롭힘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들로부터 오는 박해를 말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느 견해가 옳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가시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바울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며 자만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는 그것이 외적인 것이었든 내적인 것이었든 참기 힘들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고, 그래서 바울은 그의 육신의 약함을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하기로 했음을 토로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기의 간구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가 족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 이상의 은혜를 베푸실 뜻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더 은혜를 베푸셨다가는 그가 교만해져서 자기의 약함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가 약한 것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으며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질 수 있으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9절 하반절에서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한 것은 그가 단순히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해지겠다는 자세를 넘어서서 자기의 사역이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역사하시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표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한 것이 그 뜻입니다.
자기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그 뜻을 확실하게 이해하기에 이른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모든 약함과 그로 인하여 겪는 어려움들을 오히려 기뻐하기로 마음과 생각을 확정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진정 강해질 수 있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된 바울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위대함이 어디 있는 것인지를 봅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 속에서 자기가 강해지고 자기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역 속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주님의 능력이 항상 머물며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강해지면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약해질 수밖에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약해질 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고 그래서 자기가 강해질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성격 강하고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유익하지 않음을 종종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 안에서 시기와 긴장과 분란을 일으키며 많은 교인들을 시험 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를 약하게 여기며 겸손하고 무슨 일이든 늘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하는 이들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며 교회를 편안하게 하고 덕스럽게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자랑을 하며 자신을 과신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늘 자신 없어 하고 소극적이며 회피적인 것도 좋지 않습니다. 왜 나에게는 아무 재주도 능력도 없나 하고 열등감이나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있어도 안 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일하시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약함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약할 때 진정 강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온갖 약함을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온전히 나타내실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하나님께서 강해지시고,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님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며, 우리가 우리를 완전한 비움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채우시는 놀라운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아픔, 그것은 위장된 축복
삼하 14:25-27, 고후 12:7-10, 눅 18:9-14 / 인명진목사
이솝 우화에 나오는 사슴 이야기 잘 아시지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호숫가로 내려왔습니다. 사슴은 물속에 비친 자신의 여러 갈래로 뻗은 뿔을 보고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뿔이 아니라 가늘고 긴, 빈약한 다리를 보고서 실망했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다리는 없는 것만 못하다.” 이때 갑자기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나서 사슴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사슴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한탄하던 가늘고 긴 다리를 의지하여, 숲속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자랑했던 뿔이 그만 수풀에 걸려서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슴은 이렇게 한탄하면서 죽어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다리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던 뿔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구나!” 오늘 구약의 말씀에는 자랑이었던 뿔 때문에 수풀에 걸린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임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거기에다가 이스라엘 전체에서 풍채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미스터 이스라엘이라 불렸겠지요?
대개 사람이 잘 생겼다 싶어도 한두 군데쯤은 부족한 데가 있기 마련인데, 압살롬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기가 막힌 미남이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잘난 인물이었기에 아버지를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후에도 백성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성서는 특별히 압살롬의 머리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털이 풍성한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 여겼고, 남성미의 기준이라 생각했습니다. 삼손의 힘의 비밀이 머리털에 있었다고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머리털은 힘, 권세, 지위를 나타내었습니다. 대개 머리를 길게 기르는데, 너무 길면 1년에 한 차례 정도 축제일에 깎게 됩니다. 압살롬의 자른 머리털의 무게가 200세겔 약 4.5Kg으로 보통 사람들의 네 배나 되었으니 머리털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의 완벽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외모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는 그가 기도했다든지, 선지자를 찾아갔다든지 신앙생활을 한 흔적을 한절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겁탈한 이복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대항을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했습니다. 뭐가 잘한 일이 있다고 살아 있을 때 자기 공적비까지 세웠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성서는 압살롬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도 자세히 보도합니다. 자신의 자랑이었던 머리털 때문에 죽었습니다. 자랑 때문에 죽었습니다. 말을 타고 도망가다가 머리털이 상수리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말은 빠져나가고 압살롬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 요압장군이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렇게 자랑하던 머리털이 마치 교수대의 밧줄처럼 그를 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가 세웠던 공적비는 묘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다윗과 비교해 보십시오. 다윗은 인간적으로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시골 목동 출신입니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외모도 압살롬만큼 수려하지 못했습니다. 키도 자그마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던 최대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족한 부분이 잔이 넘치도록 모두 채워졌습니다. 자랑으로 여기던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때때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내 존재를 말해주는 자랑보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믿음과 정직과 사랑이 오히려 생명을 구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네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것이 오히려 파멸로 이끌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재물을 자랑하던 사람이 재물 문제로 감옥에 갑니다. 권력을 자랑하던 사람이 권력 때문에 죄를 짓고 파멸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세상살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많아 교만해지면 넘어집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 때문에 겸손해지면 오히려 복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서가 들려주는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앞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이고, 뒤의 세리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누구의 기도를 들어줄 것 같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그래 너 잘났다.”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반면에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심금을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넘어지고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은혜를 덧입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때로는 해가 되고, 우리가 아픔으로 여겼던 것이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을 뜬 사람에게 아픔, 그것은 위장된 축복으로 다가옵니다. 앞으로 다가올 때에는 분명히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뒷면을 바라보니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가장 깊이 깨달았던 사람은 바울입니다. 아마 바울만큼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충돌하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지켜주었던 자랑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고, 자신에게 너무도 크나큰 아픔이 되어 숨기고 싶었던 것들이 자신을 자라게 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픔의 앞면만 본 것이 아니라 뒷면을 바라보고서 자기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분명히 저주요,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아픔 속에 온 인류를 구원하는 신비가 담겨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자기의 아픔을 통해 십자가의 신비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사슴의 뿔처럼 자랑할 것이 한 가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뿔이 너무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신앙의 조건으로는 완벽했던 사람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받을 훈장이 너무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이 예수 믿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랑이라고 여겼던 것이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바울에게 있어서 주 예수보다 더 큰 자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주신 것보다 더 큰 자랑이 없었습니다. 바울의 최고의 자랑은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이었습니다. 저는 갈릴리성도들의 최고 큰 자랑도 예수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왜 신앙생활의 방해가 됩니까?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랑으로 삼는 것 때문에 자신이 본질상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 그것 때문에 구원을 얻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여러분, 신앙은 예수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랑이 많으면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랑은 믿음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모든 자랑을 해로 여겼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신앙이 깊어지면 질수록 자기가 없어집니다. 처음에는 지극히 작은 사도 중에 한 사람이라 고백했습니다. 중간에는 만삭되지 못한 사도라 했습니다. 나중에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이렇게 느낀 겁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잘해서 이렇게 느낀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기의 죄를 더 많이 깨닫고 영적인 부끄러움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더욱 더 겸손히 예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신앙생활을 잘 하면 잘 해서 교만해지고, 못하면 못해서 좌절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교만해집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많이 안다고 교만해 집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영적으로 교만해집니다. 봉사 많이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로가 생겨 목소리가 커지고 교만해집니다. 무슨 업적이나 공로가 쌓이면 겸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너무도 당당하게 이런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울조차도 자랑할 것이 많으면 겸손을 지킬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바울도 계시를 많이 받으니까 교만해지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의 교만을 막아주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런데 우리 중에 누가 자랑할 것이 많은데 영적인 겸손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견제할 수 있는 한 가지 아픔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그 아픔이 나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영적 겸손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정말 놀라운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약성경도 12권을 썼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보면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교만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서운 병을 주셨습니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치욕스러웠는지 바울은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이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픔을 토해내는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병을 고쳐주시지도 않았고, 바울의 기도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의 기도는 몰라도 바울의 기도는 꼭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 가정도, 지식도, 미래의 꿈도 다 포기한 사람 아닙니까? 바울만큼 헌신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 기도 들어주지 않으면 누구의 기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바울의 이 기도를 기각하셨습니다.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거절하셨습니다. 왜 거절하셨을까? 더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단순히 바울의 아픔을 해결해 준 것이 아니라 아픔을 통해서 바울을 더 풍요로운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픔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비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이 아픔의 신비를 깨닫고 바울이 고백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큼으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 가시가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픔을 주셨고 나에게 가시를 주셨다.”
여러분,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고 만사형통하면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습니까? 얼마나 교만하겠습니까? 그래서 아픔과 고난을 제거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아는 종으로 쓰기 위해 아픔도 주셨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네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아픔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붙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 의지한 것 아닙니까? 나의 아픔과 눈물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아닐까요? 내게 아픔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 삶에도 부끄러움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과 부끄러움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더 놀라운 것은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았습니다. 몸도 괴롭고 영적으로도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은 오히려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데는 말할 수 없이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자비에 꽁꽁 묶어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로소 자신의 아픔이 은혜인 줄 알았습니다. 위장된 축복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요, 걱정거리가 오히려 자랑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위신을 깎아 내리는 그 부끄러움이, 자신을 망신시키는 아픔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라도 보통 은혜가 아니라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까지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 아픔, 자신의 삶을 괴롭히는 가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자신이 약한 존재임을 속속들이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을 붙드는 그 때,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오롯이 드러났습니다. 그 아픔이 바로 영원한 자랑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무탈하게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을 누릴 때 하나님을 잘 섬기십시오. 세상에서 잘되고 영적으로 잘 될 때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받은 축복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하십시오. 하나님이 굉장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혹시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그것도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어도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이 성숙하고 새로운 축복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육체적인 아픔이나 영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아픔과 어려움이 우리에게 위장된 축복으로 다가옵니다. 아픔이 다가오는 앞면을 볼 때 그것은 분명히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뒷면을 바라보니 그것은 분명히 축복이었습니다. 그냥 위장된 축복이 아니라 나의 인간성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게 하는 너무도 크나큰 축복입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난마저 위장된 축복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길을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아픔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말고, 그 아픔이 주님을 만난 흔적이 되어 바울 사도처럼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백해 보십시오. 다가오는 아픔의 앞면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아픔의 뒷면을 바라보십시오. 아픔, 그것은 분명히 위장된 축복입니다. 아픔을 통해 십자가의 신비를 경험하고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가기로 소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약점이 자랑이 되는 삶을 삽니다
고후12장 1~10절 / 김필곤목사
"약한 나를 인정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가와무라 노리유키라는 사람이 지은 책입니다. 『마음으로 암을 고친다』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의학박사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말하기를 약점을 인정하는 사람이 건강하고 약점을 인정하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나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한 척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 약점들이 있습니다. 이 약점으로 인하여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일 사람 란게이이히바움이라는 사람이 서양 천재를 78명을 조사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83%가 육체적, 정신적, 가족 관계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천재라고 하지만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잔다크, 미켈란제로, 루터, 파스칼, 뉴톤, 루소, 괴테, 하이네, 바그너, 비스마르크, 릴케 등 모두 약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약점들이 있습니다. 시인 바이런은 기형아였고, 줄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자였고, 베토벤은 청각 장애자였고, 나폴레옹(155cm), 등소평(150cm)은 키가 작았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눈이 안좋았고 모차르트는 폐병환자,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환자였습니다. 문제는 약점이 있고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 약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문제입니다. 대부분은 약점을 처리하는 방법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승화시키는 방법들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천재들처럼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에 몰두하여 자아성취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둘째 방법은 투사를 하는 것입니다. 가학하는 것입니다. 저 같이 눈이 작으면 눈 큰 사람을 괴롭힙니다. 가난하면 못을 가지고 다니면서 좋은 차를 귺고 다니는 것입니다. 눈큰 아내 은근히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그것으로 인생을 망치는 경향을 봅니다. 중국의 등소평은 키가 참 작은 분이었습니다. 150cm입니다. 그런데 그는 12억이나 되는 중국을 그 어려운 도탄에서 건져내는 세계적 지도자가 됩니다. 그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택동이 어느 날 중국 공산당 정책 위원회에서 안건을 처리하는데 만장일치로 결의하면서 "우리 기립, 기립하여 찬성을 표하십시다." 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등소평씨가 일어났는지 앉았는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너무 작아서 말입니다. " 다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자 등소평 의자 위에 올라서서 "저도 일어섰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하고 온 세계를 향해서 큰 소리를 쳤던 나폴레옹도 키가 155cm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외모 때문에 아주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올포트는 미국의 남자대학생 90% 여자대학생 91%가 정신적, 신체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맥스웰 말프는 사람의 95%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분석 학자인 에릭슨은 7-12사이에 열등감이 생기는데 중학교 상급반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고등학생들이 자살의 유혹 받는 가장 큰 원인은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의 늪에서 헤매입니까? 약점을 바라보는 눈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1)신체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모자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머리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의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3)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약점을 놓고 다른 사람의 강점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교의식에 사로잡히면 우월감과 열등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는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너는 내 것이다. 온천하 보다 귀한 자다. 내가 피값을 주고 산자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은 우리를 망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은 약점을 얼마든지 자랑이 되는 삶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약점이 자랑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약점에 포로가 되지 말고 강점을 극대화시켜야 합니다(1-6).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덴 그 약점에 집중하면 사람은 그 약점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사 그 약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몇 년전 서울 보건대학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오는데 잘생긴 학생 하나를 제 차에 태웠습니다. 오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 어머니가 둘이라는 것입니다. 큰 어머니가 있고 자기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부터 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약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점에 포로가 되면 사람은 그 약점 때문에 무너지고 그 약점이 발목을 잡아 인생의 쓴 뿌리가 되어 인생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 약점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됩니다. 창문이 더러우면 밖에 널어놓은 옷이 아무리 깨끗하여도 더럽게 보이는 법입니다. 성격이 삐뚤어집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약점에 집중하면 매사 "나같은 사람이 무엇을 하겠느냐? 이런 우리 집이 무엇이 잘 되겠느냐?"는 식입니다. 그 때 제가 그 학생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다 해결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거침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디딤돌이 되어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가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가시는 헬라어로 '스콜롭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뚝'이라는 말입니다. 조그마한 가시만 손에 박혀도 온 몸은 그곳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뚝이 박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괴롭히겠습니까? 정확히 그 가시가 무엇이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질병으로 생각하고 그 질병은 안질이나 간질 또는 만성 말라리아로 보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재기되는 것은 안질설입니다.(갈4:14절 이하) 눈이라도 빼 주었을 것이라는 것을 통해 추측하는 것입니다. 큰 글자로 쓴 것(갈6:11)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떻든 이 가시는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생의 즐거움을 빼앗고 온전한 활동에 지장을 주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약점 뿐 아니라 말을 잘 못하는 약점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 중에서 바울에게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바파 아볼로 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약점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할 것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약점에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인생 발목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9). 그런 자기 자신을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생 출신입니다. 남이 가질 수 없는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 자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삼층천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자랑할 만한 강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1절에 보니 이처럼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지만 조금 더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14년 전에 하늘의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이 얼마나 큰 자랑 거리인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붙들고 하나님이 쓰신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아브라함 약점있었습니다. 아내 두 번이나 남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것에 포로되어 살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 붙들고 한 시대 사용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줄거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 떠났고 믿음으로 약속 기다렸고 믿음으로 이삭을 받쳐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 약점많습니다. 사기꾼 거짓말쟁이입니다. 욕심장이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보실 때 그것으로 포로되어 멸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장자권에 대한 열망 하나님의 축복권에 대한 열망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도 살인자라는 약점이 있었지만 모세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은 그것으로 한 번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도 타인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그것에 집중하고 포로가 되는데 있습니다.
약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강점을 극대화 하여 하나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강점을 극대화해 버리면 약점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약점은 수치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약점이 있는데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9일날 신문에 한국인으로 미국 정부에서 최고위직 백악관 차관보에 오른 강영우 박사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실명했습니다. 서른이 다 돼서 미국에 이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약점에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장점을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그의 약점은 이제 약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의 총리로 연립내각을 이끌면서 중동평화를 위해 애쓴 여성정치가 골다 메이어(1898-1978)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2년동안 백혈병을 앓았습니다. 그는 얼굴이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이었다.내가 못났기에 열심히 기도했고 공부했다.나의 약함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토스카니니 그는 눈이 나빴습니다. 연주할 때 악보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보를 다 외워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지휘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단원들은 악보를 다 외우고 있는 그를 지휘대에 세웠습니다. 그 일이 그는 세계적인 명 지휘자되었습니다. 약점이 우리를 오히려 새로운 세계로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2. 약점을 자신의 강점을 다스리는 도구로 받아들입니다(7-9).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약점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멸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열등감 가지고 스트레스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만해지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강점을 다스리는 도구로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버팀목으로 주신 것입니다. 차를 보십시오. 악셀레이터가 있고 브레이크가 있습니다. 만약 브레이크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의 브레이크로 우리에게 약점을 허용했습니다. 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것을 사단의 사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훈련시키고 제어하는 도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가시를 준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여러가지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가시를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자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교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영웅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바울의 인생에 손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유익이 되도록 가시를 허용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으로 인해 너무나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7). 바울은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체험 후에 따르는 위험은 1) 교만 2) 말씀의 경시 3) 신앙생활의 변질입니다. 바울은 계시받은 것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경험한 것들을 보십시오. 그가 본 환상과 계시를 보십시오. 2절에 보십시오. 그는 셋째 하늘 낙원을 보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가히 듣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14년 전에 본 환상입니다. 역사적 사건입니다. 자신이 몸으로 승천해서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인지, 몸은 지상에 두 고, 영혼만 간 것인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든지 자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에는 마게도니아로 오라는 사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행9:3; 16:9; 18:9; 22:17; 23:11; 27:23; 갈1:16; 2:2) 설교를 듣다가 창틀에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적을 베푼 사람입니까?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 주님은 그에게 가시를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약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 수 없고 교만한 자가 하나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에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사탄의 종이 되어도 하나님의 종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를 주어 교만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합니다. 그 병에서 회복하도록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일생 다하는 날까지 그것 붙들도록 했습니다.
약점은 강점을 다스리는 도구로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약점은 강점을 강점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서게하는 버팀목입니다. 약점이 강점을 다스리는 도구로 사용될 때 우리는 그 약점이 우리 인생의 자랑거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더욱 가정에 충실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내가 더욱 하나님 의지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내가 더욱 성실하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약점 때문에 더욱 정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괴테, 쉴러, 밀튼, 줄 베른 등과 같은 사람은 시력이 나빠지자 더욱 정신력 연마에 힘을 써 위대한 작품을 쓰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사람은 청력장애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소리에 열중할 수 있었습니다.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 불구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기라는 초인적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손자(孫子)는 단근형(斷筋刑)을 받고 절름발이가 된 후 `병법(兵法)'을 지었습니다. 희랍의 대웅변가 데모스데네스도 반벙어리였습니다. 그 약점 보상코자 자갈을 물고 해변에 서서 파도 소리를 이기는 발성 수련으로 목을 트고 있으며, 작가 사머세트 모옴이 그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말더듬이었다는 단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명작「실락원」을 지은 존 밀턴은 42세에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2년후 남은 눈마저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조차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밀턴은 그 약점 때문에 더욱 강하여져 「실락원」만들어 냈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이 오히려 위대한 문학 작품을 낳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약점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합니다(9하, 10).
약점이 있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비결이 무엇이냐? 약할수록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약점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10절을 현대인의 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10)"
우리가 약점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합니다. 약점을 극복하여 그 약점이 자랑거리 되게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그 약점으로 인해 인생은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당당한 사람입니다. 다 부인한다하여도 자기는 부인하지 않겠다고 합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후 베드로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십시오. 앉은 뱅이 만났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합니다. 예수님 의지합니다.
다윗은 사무엘이 기름부을 때 대상으로 생각지도 않을 정도의 사람입니다. 기드온은 가장 미약한 지파 출신입니다. 겁쟁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한 시대 쓰임 받았습니다. 약점이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약점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약점이 있으면 있을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칼빈 약점 있었습니다. 루터 약점있었습니다. 원수들은 그 약점 붙들고 넘어뜨리려고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점 붙들고 하나님 의지하라고 합니다.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게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내가 잊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다 잊겠다고 말씀합니다. 기억지도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를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약점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약점이 있으면 사람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약점을 과도하게 평가절하해서는 안됩니다. 약점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도구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고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희귀종입니다. 가치있는 것은 희소성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힌 모세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출4:11-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내 안에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울 때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무었이라고 말씀합니까? "나의 보는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7:6)" 헬렌켈러, 루즈벨트, 단테 열등감을 가질 만한 약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들을 사용했습니다. 단테를 보십시오. 베아트리체 첫눈 반했습니다. 그러나 거절합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더욱 하나님 의지합니다. 결국 신곡을 쓰는 동기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다 무능력하고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약점을 통하여 축복의 그릇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고전1:27-29)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니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약점을 가졌지만 하나님 의지하면 한 시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됩니다. 에훗는 왼손잡이 였습니다. 오른 손은 불능자입니다. 드보라는 당시 물건 처럼 취급당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지하자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 내가 강점이 있느냐 약점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붙들림 받아 하나님의 쓰임을 받느냐입니다. 지금 나에게 미모가 없고 능력이 없고 돈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붙들립받아 쓰임받기만 한다면 이땅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스펄전(Spurgeon) 목사님이나 미국의 무디(Moody)같은 분들이 그렇게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그 비결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능함과 부족함을 깊이 절감하고 죽도록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린 데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