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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의오(動靜疑悟)
움직임은 고요하게 하고, 의심을 품어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動 : 움직일 동(力/9)
靜 : 고요할 정(靑/8)
疑 : 의심할 의(疋/9)
悟 : 깨달을 오(忄/7)
출전 : 명말초석제선사화삼성시(明末楚石諸禪師和三聖詩)
動以靜爲母, 疑乃悟之父.
움직임은 고요함을 어머니로 삼고, 의심은 깨달음의 아버지라네.
청나라 위원(魏源)의 '명말초석제선사화삼성시(明末楚石諸禪師和三聖詩)'에 나오는 구절이다. 위원은 18세기 말에 태어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을 거치면서 청조가 기울어 가던 시기에 활약했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일찍부터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유교개혁을 주장했으며 아편전쟁에서 영국 군함과 대포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뒤로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함을 극력 주장했다.
그의 '해국도지(海國圖志)'는 중국 최초로 서양 여러 나라의 문명을 소개하는 해외 지리지인데 후에 일본 메이지(明治) 유신과 중국 변법자강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명저다. 그는 이렇듯 혁신적 사상가의 길을 걸었지만 불교에도 깊은 조예를 지녀 위와 같은 명구를 남겼다.
동정(動靜)의 관계를 설명하는 비슷한 명구가 많은데 고요함은 움직임의 뿌리라는 구절도 그중 하나다. 활동이 밖으로 드러난 꽃과 열매라면 고요함은 그 뿌리가 된다는 뜻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 꽃과 열매가 풍성하듯이 깊은 고요 속에서 더욱 왕성한 활동이 나올 수 있다. 고요야말로 바로 활동을 잉태하는 어머니이다.
선종(禪宗)의 화두선(話頭禪)에서는 의심을 중시해 의심 덩어리가 커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사 또한 마찬가지다. 더 깊게 의심하는 사람이 결국은 더 큰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너무 들떠 있고, 우리들의 삶 또한 정신없이 바쁘기만 할 뿐 열매도 별로 없이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늘 피곤하다 보니 자신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할 겨를도 없다. 이제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 大疑之下 必有大覺(대의지하 필유대각)
큰 의심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다. 말은 그 머리를 풀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머리를 풀 수 없는 것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여 큰 의심으로 뭉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그런 의심이 걸어지지 않는 수가 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표면만을 보고 생각하지 말고 안으로 숨겨진 진실을 깨닫기 위해 눈 위에 손을 얹어 자세히 보라고 당부한 것이며 나아가 진실은 속에 든 것이니 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일단 어째서 그런가를 잘 살피라 했다.
즉 천자문(千字文)에서도 가장 말미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그런가를 묻고, 다음에 아! 그렇구나 하여 감탄하고, 일단 감탄을 했다면 과연 너도 그렇게 여기는가 하고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으면 있는대로 구한 나머지, 최후로 이것이 확인이 되었을 때 과연 그렇다고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焉哉乎也)"라고 했다.
만약 어째서 그런가를 묻지 않고 만다면 진실을 얻을 수 없는 일이며, 나아가 '그렇다' 라고 감탄하거나 쉽사리 긍정만 한다면 이 또한 조그마한 진실에 빠져 버리는 위험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다만 '너도 그렇느냐?'며 동의를 구하는 물음을 던지고 나서야 과연 그렇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큰 깨달음은 의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이 의심이 여러 가지 확인을 거쳐 더 이상 틀림없는 것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 의심해 나아가 '너도 그렇게 여기는가?'라는 동의를 구하는 반문에 따라 마침내 옳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의심하다는 뜻을 가진 '의심할 의(疑)'는 본디 화살이 어디를 향해 나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하여 발을 땅에 딛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을 그대로 본 뜬 글자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은 곧 깨달음을 얻는 하나의 좋은 방법인 것이다.
역대 큰 깨달음은 바로 의심에서 얻어진 것이니 만약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원리를 그냥 예사롭게 넘겨 버렸다면 어찌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추해 냈겠는가? 의심은 곧 큰 깨달음을 얻어 내는 깨달음의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또 사물에 갊아 있는 진실은 겉의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고 거의 다 깊은 속에 갊아 있기 때문에 내부를 파고드는 깊은 의심이 없다면 깨달음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깨닫다'는 말이나 '알다'는 말은 내부를 깊숙이 파고 든 나머지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알'은 반드시 껍데기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깊숙이 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껍질을 벗겨내야 만이 그 속에 든 알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깨닫다는 말은 되새겨 보면 껍질을 깨어 버리고 속에 든 알을 건져 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알다'는 뜻도 다른 게 아니라, 비로소 속에 깊이 숨겨진 '알'을 찾았다는 말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큰 의심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大疑之下, 必有大覺)'고 말한 것이다.
▣ 맹모의 교육법, 맹자의 공부법
(1)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
공부에 관한 맹자의 기본 정신은 굉장히 엄격하다. 이는 맹자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히, 그 어머니의 교육법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맹자의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씩이나 한 어머니이지 않은가.
맹모의 극성은 삼천지교(三遷之敎)에만 머물지 않았다. '결단(決斷)'이란 단어가 있다. 무엇인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거나 굳은 결심을 할 때 '결단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근원지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도 맹모와 만나게 된다.
학업에 힘쓰던 맹자가 한번은 공부하다말고 밖에 나가 논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맹모는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맹자가 보는 앞에서 한동안 열심히 짜놓은 베를 칼로 서슴없이 잘라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맹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들 맹자를 가르쳤다. "베는 실 한 올 한 올이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한 방울 한 방울 쌓여야만 한다. 네가 공부하다말고 나가 놀았다는 것은 잘려나간 이 베와 마찬가지로 쓸모없어진다는 것과 같으니라." 이 일화에서 이른바 '베틀을 끊어 가르친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또한 '결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2) 거듭 생각하고 배움에는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우선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 갈 뿐이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
이 말은 실제 인식을 감성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따라서 반드시 사유를 거쳐 사물의 진실된 내면, 즉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또 독서를 하면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책을 다 믿느니 책이 없는 것이 낫다'
어떤 공부가 되었건 의문을 품을 줄 모르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독서나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과 관심이며, 그 호기심과 관심의 이면에는 강한 의문이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맹자의 공부법
맹자(孟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자는 자여(子輿), 이름은 가(軻)이다. 선조는 노(魯)나라 귀족이었다.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유가학파의 분류상 사맹학파(思孟學派)로 불리며 공문(孔門)의 적통을 대표한다.
그는 공자의 '인학(仁學)'에 중점을 두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정(仁政)'을 주장하면서, 상고시대(上古時代) 주(周)나라의 토지제도 '정전(井田)'을 이상적 모델로 묘사하기도 했다.
무력을 통한 영토 개척을 강하게 비판하고 상대를 집어삼키는 전쟁을 반대했으며, 민을 괴롭히는 폭군과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해서 정치를 '민을 보호하는 자가 왕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해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적 세계 건설을 주장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에 집착한 사상가였다. 훗날 유가가 독존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란 뜻에서 그를 아성(亞聖)으로 추앙했지만, 당시 정치판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는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민본(民本) 사상을 주장해 사상의 질을 높였다. 공자와 함께 '공맹(孔孟)'으로 불리며 '성선설(性善說)'에 반하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와 나란히 거론되기도 한다.
맹자의 공부법은 앞서 살펴본 공자의 공부법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계통적이다. 먼저 독서와 관련해 맹자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을 중시해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孟子 盡心下篇)라고 말했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서두르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굳센 의지와 항상심을 가지고 꾸준히 한마음으로 해야지 용두사미식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이런 맹자의 공부법을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1.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성경에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도 있듯이 맹자는 독서나 공부는 본인의 의지가 각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구하면 얻고 놓으면 잃는다. 구하는 것이 얻는 데 유익한 것은, 구하는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求則得之 是求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 (孟子 盡心上篇)라고 말했다. 이 공부법을 간단하게 줄여 '자구자득(自求自得)'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와 관련해 또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도란 큰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려우리오! 사람이 그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일 따름이오. 그대가 돌아가서 도를 구하기만 하면 스승이 될 사람은 많을 것이오(夫道 若大路然 豈難知哉 人病不求耳 子歸而求之 有餘師)." (孟子 告子下篇)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바른 도리로 깊이 탐구하는 것은 스스로 그것을 얻고자 함이다. 스스로 얻으면 삶이 편안해지고, 삶이 편안해지면 자질이 깊어지고, 자질이 깊어지면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君子深造之爾 欲其自得之 自得之 則居之安 居之安 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孟子 離婁下篇)
2. 꾸준히 한마음으로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다. 자기가 드러낸 마음을 찾는 것일 따름이다(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己矣). (孟子 告子上篇) 이런저런 잡념과 딴마음으로 독서하는 태도를 맹자는 단호히 배격했다.
맹자는 천하에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혁추(奕秋)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사람과 사냥 따위에 마음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겠느냐며 "마음을 오로지하고 뜻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不專心致志 則不得也)."(孟子 告子上篇)고 강조한다.
공부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마음으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하며 "뭔가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길이나 파고도 물이 안 나온다고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맹자 진심상편)라며 공부나 독서를 견지하지 못하면 끝내 헛공부가 된다고 지적했다.
3. 다 차거든 나아가라
인간이 성장 단계를 건너뛸 수 없듯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 지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공부의 질과 양이 달라지지만 그 지력과 관심에는 단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성장 과정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부와 독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나아가지 못한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두어도 글을 이루지 못하면 다다를 수 없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맹자 진심하편)
4.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건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선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다. 마음음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曰耳目之官 不思而蔽於物 物交物 則引之而己矣 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맹자 고자상편)
5.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알라
맹자의 공부법에서는 작품, 특히 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띈다. "시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글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 않는다.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것이 시를 안다고 할 것이다(說詩者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以意逆志 是爲得之)." (孟子 萬章上篇)
맹자의 이의역지(以意逆志) 공부법은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우선 작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다른 작품을 참조해 그것을 근거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
이와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주관에 근거해 작품의 경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방법을 적절히 절충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6.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라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한다는 '지인론세(知人論世)'는 그 방법과 의미를 확장하면 독서나 공부의 최고 경지에 이르게 된다. 맹자는 이를 우선 작가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인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짜 독서이고, 제대로 된 공부다. 현자들이 한결같이 중시한 공부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맹자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의 '진심상편'에서 "부모 형제가 모두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재능 있는 인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이른바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것이다. 인재를 교육하는 것을 낙으로 안 맹자이기에 공부에서도 대단히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참 지혜는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나온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고 살아온 인생, 그리고 자연의 섭리를 하루하루 보고 느끼며 철이 든 인성에 사악한 기운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엄격하고 극성맞은 어머니 밑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한 맹자, 그래서 그도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엄하게 대했지만, 그가 시종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확신한 까닭은 공부의 본질을 안 어머니의 믿음 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이익(李瀷)의 의문과 메모의 독서법
1. 소득 없는 독서
찾는 것이 있어 책을 읽으면 읽더라도 얻을 것이 없다.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하는 자가 입술이 썩고 이가 문드러지도록 읽어봤자, 읽고 나면 아마득하기가 소경과 다름없다. 이는 흑백을 말하면서도 정작 희고 검은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말을 해도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데 불과하므로, 마치 실컷 먹고나서 토하는 것과 한 가지다. 살과 피부에 보탬도 되지 않고 뜻 또한 사납게 된다.
有求而讀書者, 雖讀無得. 故擧子業者, 至唇腐齒爛, 讀止則茫然如瞽師, 言白黑而無以知白黑, 其言之也, 不過入耳出口. 如飽食而嘔, 不惟肌膚無益, 而志亦戾矣.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유구독서(有求讀書)
독서는 순수한 몰입이다.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합목적적인 행위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전제로 하는 독서는 거둘 보람이 적다. 학생들이 시험을 위해 죽기 살기로 암기하고 문제 풀고 해서 안 틀리고 다 맞지만, 막상 시험만 끝나고 나면 그 공부한 내용이 내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딴 일이 되고 만다.
과거 시험 공부도 다를 게 없다. 그저 달달 외워 귀로 들어 갔다가 입으로 줄줄 나온다. 입만 열면 현하의 열변을 토하지만, 산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의 나열일 뿐이다. 내 머리 속에 꼭 박히지 않고, 내 가슴 속에 아로새겨지지 않고, 그저 거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부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학습능력과 인성 또는 덕성은 반대로 가기 일쑤다. 자발적 독서, 무목적의 몰입, 읽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독서만이 우리 삶을 들어올린다. 업그레이드 시켜준다.
2. 독서와 벼슬길
어려서 배우고 어른이 되어 행하려면 독서만한 것이 없다. 성현의 글을 읽고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보아 얻은 것이 없겠는가? 하지만 예로부터 현달하고서도 평생 배운 것을 베풀어 행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어째서 그런가? 막상 일을 할 때는 처음 나아갈 때와 같지 않고, 남의 마음이 내 마음만 못한 까닭에, 혹 위세나 지위에 눌리고, 혹 무리가 떠드는 데 유혹되며, 시세(時勢)에 내몰리거나 이욕에 이끌리게 된다. 이는 모두 이욕이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이기려 들면 마음이 옮겨간다. 마음이 옮겨지면 일도 따라서 옮겨간다. 비록 옛 성인께서 형세로 판단하고, 지난 역사가 증명했어도 그 가운데 얽히고 설키면, 일이 같지 않고 시대가 다른 것만 보는 까닭에 잠깐만에 생각의 방향이 바뀌고 속마음도 달라지고 만다. 이런 까닭에 큰 일에 당하여 시비를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작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야 능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요점이다.
幼而學之, 壯欲行之, 莫如讀書. 讀聖賢書, 推究義理人, 孰無多少見得? 然古來顯任, 未聞有以平生所學施措者. 何也? 做時不如就時, 人心不如我心故. 或爲威尊所壓, 或爲衆咻所誘, 或爲時勢所迫, 或爲利欲所導, 而都不過其利欲者爲之. 機栝欲勝, 則心遷, 心遷則事移. 雖古聖之所勢斷, 前史之所證明, 其中回互周羅, 但見其事有不同, 時有異宜處. 故俄而頭面易方, 腸肚剝換矣. 是以當大事, 判是非, 必也不貴爵祿者, 能之, 此其要也.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독서사환(讀書仕宦)
어려서부터 품었던 포부를 커서 실행에 옮기려면 무엇보다 독서의 든든한 뒷심이 있어야 한다. 성현의 글을 읽고 의리서를 읽었으니, 가야할 길이 대낮보다 훤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전날의 독서는 간 데가 없고, 저 놓인 처지의 딱한 형편이나, 그럴 수 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만 남는다.
어떤 사람은 윗 사람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뭇 사람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변명한다. 나만 손해 볼 수는 없지 않느냐고도 하고, 생기는 게 얼만데 그까짓거 눈 한번 질끈 감고 말지 하는 이도 있다.
책 읽어 비분강개하며 다잡던 그 마음은 어느새 간 데가 없다. 이 일은 그 일과는 다르고, 지금이 그때와는 같지 않다고 하며, 제멋대로 저 좋을대로 합리화시킨다. 큰 일을 앞에 두고 시비를 따져야 한다면 작록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독서는 그 힘을 기르기 위함인데, 사람들은 자꾸 반대로 한다.
3. 책 보관은 공경을 담아
옛 책은 읽으면 사람에게 뜻과 지혜를 보태주니 엄한 스승인 셈이다. 어찌 업신여겨 함부로 하겠는가? 판목에 새긴 뒤로 서적이 비록 많아지긴 했어도 가난한 선비가 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베껴 써서 전하는 것은 괴로울뿐 아니라 또한 잘못 되기도 한다. 선조의 해묵은 장서는 점점 헐어지고 훼손되게 마련인지라 자손이 비록 살펴보려 해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평소에 나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책을 아껴 손상되지 않도록 한다. 잘 아는 고을 수령에게 부탁해서 표지와 붙일 종이를 많이 얻어와 책이 헐면 바꾸었다. 남에게 책을 빌렸을 때도 책을 꿰맨 것이 끊어지거나 문드러진 것은 반드시 종이를 비벼 꼬아 기워 묶었다. 실을 마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옛날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은 책을 햇볕에 말릴 때 반드시 곁에 서서 마음을 쏟았고, 이동할 때는 반드시 네모난 판목에 보관했다. 책에 손의 땀이 젖을까 염려해서였다. 매번 책 한 장을 다 읽으면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가장자리에 대고, 집게 손가락으로 덮어 책면을 눌러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넘겼다. 사람들이 손톱으로 집는 것을 번번이 보게 되는데, 이는 책 아끼기를 재물 아끼는 것만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전 극선(郤詵)이 과거시험의 사책(射策)에서 1등으로 뽑히자 붓에게 두 번 절을 하며 말했다. "용수우(龍鬚友)가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했다." 어떤 사람이 금거북을 새긴 보배로운 비녀를 선물하자 제자에게 주며 말했다. "붓 3백 자루를 사오너라." 붓이 못 쓰게 되면 또한 글 주머니에 보관해 두고, 자손에게 좋은 향으로 예를 올리게 했다. 문방구를 아끼는 마음 또한 훌륭하다 하겠다.
古書者, 讀之益人意智, 乃嚴師也. 其可慢之耶? 板刻之後, 文籍雖繁, 非貧士所可易得. 手寫傳錄, 不但艱難, 又亦以訛誤. 先祖舊藏漸至殘缺, 子孫雖欲看閱, 何可得也? 故平余生敬以玩之, 無至傷損. 託於所識宰縣者, 多取粧褾貼紙, 隨缺隨易, 借人典籍, 其縫池斷爛者, 必撚紙補綴, 亦緣絲繩之難辦也. 昔范文正晒書, 必側立而暴其腦, 移動必永以方版, 恐手汗之漬. 每竟一板側, 右手大指, 面襯其沿, 而覆以次指, 面撚而挾過. 每見人以手指爪撮起, 卽是噯書不如愛貨貝也. 昔郤詵射策第一, 再拜其筆曰 : "龍鬚友使我至此." 有遣金龜寶簪者, 與弟子曰 : "市筆三百." 管退亦藏之文囊, 令子孫以名香禮之, 其愛惜文房意, 亦善矣.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경완서적(敬玩書籍)
책을 통해 의지가 강해지고 지혜가 늘어나니, 스승도 이렇듯 훌륭한 스승이 없다. 책을 간수하고 보존하는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책이 귀하기도 했거니와, 그 안에 담긴 가르침을 생각하면 책장을 넘길 때도 차마 손톱으로 집어 구기거나 침을 묻혀 넘기지 못했다.
심지어 손때가 묻기 쉬운 아래 쪽에 기름종이를 대어두기까지 했다. 책의 내용을 사랑하다 보니 그 외형까지 공경하는 것이다. 책을 아끼는 방법이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책 속에 담긴 내용이 워낙 소중하고 보배로우니 책 앞에 서는 마음가짐이 저도 몰래 이렇게 드러났다.
4. 보이지 않는 독서의 힘
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반도 못 보고는 땅에 던지며 말했다. "책만 덮으면 바로 잊어버리는데, 본들 무슨 소용인가?"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이 말했다. "사람이 밥을 먹어도 뱃속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네. 하지만 정채로운 기운은 또한 능히 신체를 윤택하게 하지 않는가. 책을 읽어 비록 잊는다 해도 절로 진보하는 보람이 있을 것일세." 말을 잘 했다고 할 만하다.
有一學士, 看書未半, 投地曰 : 掩卷輒忘, 看亦何益? 玄谷曰 : 人之喫飯, 不能恒留腹中, 然精英之氣, 亦能潤身澤體, 讀書雖忘, 自有長進之效. 可謂善於辭令.-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조현곡(趙玄谷)
밥을 먹으면 입을 거쳐 위장과 대장을 지나는 동안 영양분은 몸으로 스며들고 찌꺼기는 대변으로 배출된다. 책을 읽으면 눈과 입을 통해 머리와 가슴을 거치는 동안 그 의미를 곱씹고 되새기게 되고, 나머지는 기억의 창고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밥 먹은 효과는 피부의 윤택으로 드러나고, 책 읽은 보람은 사람의 교양으로 나타난다.
몇 끼 밥을 굶으면 얼굴이 수척해지고 기운을 못 쓰게 되어, 죽을 지경이 된다. 하지만 책은 읽지 않아도 겉으로는 아무런 표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밥을 위해서는 못 하는 짓이 없고, 안 하는 일이 없으면서, 책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육신의 기름기만 생각하고, 영혼의 허기는 돌아보지 않는다. 배고프면 아무데나 주둥이를 들이미는 것은 짐승도 다 그렇다.
5. 잊기 전에 메모하라
장횡거화상찬(張橫渠畵像贊)에 묘계질서(妙契疾書), 즉 오묘한 깨달음을 빨리 적었다고 했다. 묘계(妙契) 즉 오묘한 깨달음은 잘 하기가 어렵지만 그 즉시 써두는 질서(疾書)는 쉬운 일이다. 장횡거가 '정몽(正蒙)'을 지을 적에 가는 곳마다 붓과 벼루를 마련해 두었다. 또 밤중에라도 얻은 바가 있으면 일어나서 등불을 가져와 이를 써두곤 했다. 빨리 하지 않으면 금세 달아날까봐 염려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정자(程子)가 이를 기롱하여 '자후(子厚)는 이처럼 능숙하지 못했다'고 했던 것이다. 능숙했다면 굳이 빨리 쓰지 않더라도 절로 잊지 않았을 것이기에 한 말이다.
橫渠贊云, 妙契疾書. 妙契難能, 而疾書乃其所短也. 橫渠之作正蒙, 隨處置筆硯, 又或夜中有得, 起而取燭書之. 恐其不疾則旋遺也. 故程子譏之曰 : 子厚如此不熟. 蓋熟則不必疾其書而不自忘也.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묘계질서(妙契疾書)
책을 읽다가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즉시 메모해 두어야 한다. 묘계질서(妙契疾書)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메모야말로 공부에서 중요한 습관 중 하나다. 깨달음은 섬광처럼 왔다가 간데없이 사라진다. 이 짧은 순간을 붙들어, 이를 잘 확장시킬 때 큰 공부로 이어질 수 있다.
메모는 생각의 흔적이다. 공부는 생각 간수를 잘하는 데서 시작된다. 책을 읽을 때야 말로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이 가장 활발해지는 시간이다. 책 읽는 사람의 곁에 늘 메모지가 필요한 까닭이다.
다산의 독서 메모가 잔뜩 적힌 책을 본 일이 있다. 책의 여백 마다 한 구절 읽을 때마다 떠오른 생각들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책 한 권이 온통 메모로 가득 차 있었다. 각 메모 끝에는 날짜까지 적어 두었다. 책 한 권을 두루 살펴보니, 다산의 독서 또한 이 묘계질서법을 썼구나 하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6. 깊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라.
오늘날 사람들은 책을 존중하지만 그 정신은 잃었다. 글은 읽으면서도 그 뜻은 저버리고 있다. 깊이 생각하면 잘못이라 하고, 의문을 제기하면 주제넘다 하며, 부연 설명하면 쓸데없는 짓이라 한다. 곧이곧대로 규정하여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도 성역을 설정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 결과 둔한 사람과 총명한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옛사람이 뒷사람에게 기대하는 바이겠는가? 가령 사람이 백 리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수레와 말을 갖추고 하인과 마부가 앞장을 서서 하루 만에 당도하였고, 한 사람은 옆길로 찾아가다가 곤란을 겪은 뒤에 비로소 도달하였다고 하자. 만일 이들로 하여금 다시금 그 길을 가게 한다면 길을 찾아가며 다닌 사람은 정확히 알아, 길잡이를 앞세우고 간 사람처럼 갈림길이나 네거리에서 헤매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 주석만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其在于今, 尊其書而失其心, 誦其文而後其義. 思量則爲妄, 致疑則爲僭, 發揮則爲賸. 尺尺寸寸, 一切卑近, 勒爲禁網, 而愚與智無別. 此豈古昔人所望於後來哉? 比如人趨百里之程, 其一人則需以車騎, 導以傔騶, 一日便到, 其一人探搜旁蹊, 艱難而始達. 後使之更趨焉, 則其探搜者認得分明, 不比導行者之或迷於歧衢也. 以此知謹守訓誥之非心得者也. - 이익(李瀷), 논어질서서(論語疾書序)
시키는 대로 하고, 남 하는 대로만 하면 끝내 제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자기 목소리를 내 보자고 우리는 공부를 한다. 일가(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일가 중에서도 우뚝한 사람이 바로 대가(大家)다.
일가를 이루려면 이상한 것은 깊이 따져 보고, 모르는 것은 자꾸 묻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덩달아 하고 얼떨결에 해서는 깨달음의 안목이 열리지 않는다. 그런데 주입식에 익숙해진 공부는 따지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만 한다.
의문을 말하면 네 까짓 게 뭘 알아 하며 무시한다. 모든 것이 다 꽉 쫘여 있어 숨 쉴 틈이 없다. 그 결과 공부를 마치고 나면 각자 개성은 다 말살되고 모두 똑같은 사람만 남는다. 공부에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처음엔 돌아가도 그게 지름길인 줄을 알아야 한다. 시키는 대로 하고, 하던 대로만 하는 것은 공부에서 나를 배제하는 길이다. 세상에 주체가 없는 공부도 있는가?
7. 의문을 품어라
학문은 반드시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 의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얻어도 야물지가 않다. 의문이란 의심하고 머뭇대면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 옳은 줄 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울러 살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얻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혹 잘못된 것을 옳다고 우겨도 대응할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과일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 복숭아나 살구 같은 과일을 주면 살은 먹고 씨는 버린다. 살이 맛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씨 속에 다시 어떤 맛이 있을지 의심한다. 다른 날 개암이나 밤 따위를 주면 껍질은 벗겨 내고 씨만 먹는다. 맛이 씨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서 복숭아나 살구 씨의 맛이 개암이나 밤처럼 먹을 만한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만약 그때에 모두 먹어 보아서 분명하게 알아 두었더라면 어찌 다시 이 같은 근심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의문을 갖는 것은 의문을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저 먹기만 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비록 밤 껍질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또한 장차 이를 따를 것이다.
學必要致疑, 不致疑, 得亦不固. 所謂疑者, 非謂狐疑猶豫無所决擇也. 若知如是而是, 則必兼審如是而非, 方始是見得. 不然則人或以非爲是, 將無以應也. 比如食果子相似, 與之以桃杏之屬, 噉其肉而棄其仁, 美在肉也. 猶疑夫核中更有滋味在也. 佗日與之以榛栗之屬, 剝其皮而噉其仁, 美在仁也. 又安知向之仁之美, 不如榛栗之可噉乎? 若使當時都咬破知得分明, 豈復有此患? 故有疑所以無疑也. 彼食焉而不疑者, 雖爲栗房可嚼, 亦將從之矣. - 이익(李瀷), 중용질서후설(中庸疾書後說)
의문과 의심은 다르다. 공부는 의문을 일으키는 데서 시작된다. 저게 뭘까? 왜 그럴까? 어떻게 하나? 가늠해 보고 견주어 보며 흔들어 보아, 제대로 알고 똑바로 보고 분명히 살펴야 한다. 덮어놓고 읽지 말고, 따져 가며 읽어야 한다. 한쪽 면만 보고 전체로 알면 의심이 생긴다.
이것을 보고 저것도 그러려니 할 때 문제가 일어난다. 의문을 일으켜서 의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의심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앎은 의심으로 시작해서 의문을 통해 단단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문제의 본질에 도달한다. 시행착오 없이는 앎도 없고 나도 없다.
8. 역사책을 읽는 법
평소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늘 의심이 생기곤 한다.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고, 악한 자는 너무 못됐다. 그 당시에는 꼭 그렇지 만은 않았을 터. 역사책을 쓸 때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면하려는 지극한 뜻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이 그저 보아 넘길 때는 착한 사람이야 진실로 마땅하다 하겠지만, 저 악한 사람이 어찌 그토록 지독했겠는가? 실제로는 선함 속에 악이 있고, 악 가운데 선함이 있게 마련이다. 당시 사람이 실제 시비에 현혹되어, 버리고 취함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나무람을 받고 죄를 얻었던 것이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이러한 뜻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常時讀史, 每疑. 善者偏善, 惡者偏惡. 在當時, 未必然. 作史, 雖因懲惡勸善之至意. 今人平地上看過, 以爲善者固當, 彼惡者, 胡此至極. 其實, 善中有惡, 惡中有善. 當時之人, 實有是非之眩, 故有去取不審, 貽譏得罪者也. 讀史, 不可不知此意.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고사선악(古史善惡)
시비와 선악의 갈림에서 치란과 흥망의 역사가 나온다. 시시비비는 언뜻 분명해 보여도 두부 모 가르듯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 옳은 것도 없고 전부 그른 것도 없다. 시비와 선악은 서로 맞물려 있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은 쉬 드러나지 않는다. 그때는 모두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 조금 지나서 보면 어처구니 없을 때가 있다. 당시에 그렇게 분개하고 흥분했던 일도 돌이켜 보면 왜 그랬나 싶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 속에서 악인으로 낙인 찍은 사람도 당대에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고, 선인으로 추앙하는 사람이 반대로 무능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판단의 착오로 선악과 시비가 뒤바뀐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사건의 행간을 가늠하고 판단의 미묘한 저울질이 곁들여질 때 시비선악의 길이 비로소 훤해진다. 덩달아 흥분하고 얼떨결에 따라 읽어서는 역사책의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없다.
9. 역사책 속의 성공과 실패
천하의 일은 대개 열에 여덟 아홉은 요행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고금의 성공과 실패, 날카로움과 둔함은 그때의 우연에 따른 것이 워낙 많다. 선과 악, 어짊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반드시 그 실지를 얻은 것도 아니다.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보고 여러 책에서 증거를 찾아 참고 대조해서 비교해 보아야지 진실로 오로지 한 가지 책만 믿고서 단정할 수가 없다. 옛날 정자(程子)가 역사책을 읽을 때, 절반쯤 읽다가 문득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패를 가늠해 보곤 했다. 그런 뒤에 문득 보아 합치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더욱 곰곰이 생각했다. 그 사이에는 요행으로 성공하거나 불행으로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대개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고, 맞는 경우 또한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역사란 것은 성패가 이미 정해진 뒤에 쓴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꾸미게 마련이니, 이를 보면 마치 진실로 마땅한 것만 같다. 게다가 착한 사람은 허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그 장점을 없애 버린다. 그런 까닭에 어리석고 지혜로움에 대한 판단과 착하고 악함에 대한 보답을 징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아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당시에 훌륭한 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겠고, 졸렬한 계책이 어쩌다 맞아 떨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다. 그런데 천년 뒤에 무엇으로 옳고 그름의 진실을 안단 말인가? 이런 까닭에 역사책에 근거해서 성패를 가늠해보면 합치되는 것이 많고, 오늘날 눈으로 보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생각해 보면 열에 여덟 아홉은 맞지가 않는다. 이는 내 지혜가 밝지 않아서가 아니라 요행으로 이루어진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일이 어그러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또한 역사책이 진실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천하의 일은 놓여진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의 좋고 나쁨은 그 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가 된다."
天下事大抵八九是幸會也. 其史書所見, 古今成敗利鈍, 固多因時之偶. 然至於善惡賢不肖之別, 亦未必得其實也. 歷考前史, 旁證諸書, 參驗而較勘之, 誠未可以專信一書而爲已定也. 昔程子讀史, 到一半, 便掩卷思量, 料其成敗, 然後却看, 有不合處, 又更精思. 其間多有幸而成, 不幸而敗. 盖其不合處固多, 而合處亦未可準信. 史者作於成敗已定之後. 故隨其成與敗而粧點, 就之若固當然者. 且善多諉過, 惡必棄長. 故愚智之判, 善惡之報, 疑若有可徵, 殊不知. 當時自有嘉謀不成, 拙計偶逭, 善中有惡, 惡中有善也. 千載之下, 何從而知其是非之眞也? 是以據史書, 料其成敗, 則合處多, 從今日目擊顯見者而思量, 則八九是不合. 此非但吾智之不明, 卽幸會之占多也. 非但今事之多戾, 亦史書之難眞也. 余故曰 : 天下之事, 所置之勢爲上, 幸不幸次之, 是非爲下.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긴 자가 미화되고 진 자는 악하게 그려진다. 그러니 성패의 결과만으로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이긴 자가 늘 선하거나 옳은 것이 아니었고, 졌다 해서 그가 악했거나 옳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의 저울이 공정하다고 누가 말했나? 그 공정한 역사의 저울은 현실로 내려오면 번번히 맞지가 않는다. 왜 그럴까? 역사의 기록은 꾸며진 것이고, 눈 앞의 현실은 날 것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천하 일의 성패는 놓인 자리에 따라 갈리고, 운이 따라주느냐 따라주지 않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옳고 그름은 그 다음의 문제다.
그러니 역사책을 공부할 때는 한 가지 기록만 믿어서 그 성패의 결과로 시비선악마저 재단해 버리면 안 된다. 이런저런 자료를 함께 살펴 일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살피는 것이 옳다. 세상은 착한 사람이 복 받고, 악한 사람이 벌 받는 그런 공정한 곳이 아니다.
10. 공부의 바른 태도
나는 평소에 "가르치기가 어렵지만, 배우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경전을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옛 가르침을 법도로 삼게 할 뿐, 이렇다 저렇다 의논하는 뜻은 용납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남을 따라 덩달아 웃으면서 마침내 자기 견해는 없게 되지 싶다. 아니면 장차 다른 자료를 채집하고 널리 궁구해서 증명하는 데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낮은 처지에 함부로 따진다 하여 죄과에 빠지기가 쉽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져 밝히는 것이 더 낫다. 그런 까닭에 제자의 직분은 오로지 가르침을 받되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이르지 말고,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멋대로 바꾸는 데서 실수가 생겨서는 안 된다.
余嘗曰 : 敎旣難, 學亦不易. 使經生學子, 將尺寸古訓, 無容議意耶, 有似乎隨人嬉笑, 而卒無見解. 將旁採博究, 要歸證明耶, 有似乎處下橫議, 易陷罪過. 然與其昏也, 寧覈. 故弟子之職, 專聽受, 而不至於自欺, 發疑難, 而無傷於躐易. - 이익(李瀷), 중용질서후설(中庸疾書後說)
스승의 자리가 어렵고, 학생의 자리가 쉽지 않다. 배워도 제대로 배워야지, 잘못 배우면 안 배우느니만 못하다. 시키는 대로만 하고 책에 나온 대로만 하면 자기주장이 없어진다. 설익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 수가 생긴다. 무조건 맹종하는 것도 문제지만, 덮어놓고 의심하여 따지는 것은 더 문제다.
가르침에 의문이 생기면 묻고 찾아서 문제를 석연하게 풀어야 한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거야 하고 스스로를 속이면 문제는 언제고 해결되지 않는다.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부족한 줄을 알아 신중을 거듭해야지, 알팍한 식견으로 함부로 날뛰면 뒷감당이 안 된다. 무작정 그저 따라 하기보다는 제 주견을 갖기 위해 따져 보고 살펴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나친 과신과 과욕을 조심해야 한다.
▣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 바탕을 다지는 자득의 독서
○ 독서와 의문
독서는 모름지기 의문이 있어야 한다. 의문이 있은 뒤라야 학업에 나아갈 수가 있다. 주자께서는 "책을 읽을 때 의문이 크면 진보도 크다"고 하셨고, 또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의문이 없는 것 같더니, 그 다음부터 점점 의문이 생겨나서, 중간에는 말 한마디 마디마다 의문 투성이다. 이런 과정을 한 차례 거친 뒤에야 의문이 점차 풀려, 두루 꿰고 회통(會通)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배움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독서의 일대 단안(斷案)이니, 달리 다른 방법은 없다. 대저 성현의 말씀은 모두 평이하면서도 명백해서 굽은 길을 찾아 구하여 스스로를 의심으로 어지러운 가운데에다 얽어매는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퇴계(退溪) 선생이 말씀하셨다. "책을 읽으면서 굳이 다른 뜻을 깊이 구하면 안 되고, 마땅히 본문 속에서 겉으로 드러난 뜻만 구하라." 이 말씀은 꼭 알맞으면서도 쉬우니 시험삼아 따져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전의 글은 두 가지 뜻이 있게 마련이다. 뒷 사람이 해석할 때는 반드시 헤아려서 가장 가까운 쪽을 취해야 한다. 이제 그대가 독서할 때, 경전의 뜻풀이와 다른 것이 있거든, 그 같지 않은 곳에 나아가 경중을 찬찬히 따져보고 읊조리며 상세히 음미한다면 절로 분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나의 사사로운 뜻을 마음 속에 가로질러 놓고 도리어 선유(先儒)의 학설을 자기에게 맞추려 한다면 이는 절대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자기가 직접 한편의 글을 짓는 것이 낫지, 어찌 굳이 괴롭게 옛 책을 읽는단 말인가?
讀書須要有疑, 有疑而後, 可以進業. 朱子曰 : 讀書大疑則大進. 又曰 : 始讀未始有疑, 其次漸漸有疑, 中則節節是疑. 過了這一番後, 疑漸釋, 以至融貫會通, 方是學. 此爲讀書之一大斷案也, 更無別法. 而大抵聖賢言語, 皆平易明白, 不可探曲以求, 自致纏繞于疑亂之中矣. 退溪李子曰 : 讀書不必深求異意, 當於本文上, 求見在之義. 此語的當簡易, 試入思議也. 經文固有兩般義, 後人解釋時, 必量度而取其最近者. 今君讀書, 有與傳義不同者, 試就其不同處, 劑量輕重, 諷詠詳玩, 則自有可別之道矣. 我之私意, 橫在肚裏, 却以先儒之說, 求合於己, 是甚不可. 若然則我去自做一般文, 何必苦苦讀古書乎? - 안정복(安鼎福), 권철신의 별지에 답함(答權旣明哲身別紙)
제자 권철신에게 공부의 방법에 대해 설명한 편지글의 일부다. 학문은 의문을 품는데서 시작된다. 의문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일어나지, 아예 모르면 의문도 없다. 책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면, 공부가 서서히 제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처음엔 건성건성 넘어가고, 으레 그러려니 하다가,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말했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의문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한 줄도 그저 넘어갈 수 없게 된다. 한 걸음마다 족쇄가 채워져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그 고비를 조금 넘겨야 미운(迷雲)이 걷히면서 조금씩 앞길이 트인다. 계속 나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서 구름 한 점 없다. 발걸음이 경쾌하고 콧노래가 절로 난다.
하지만 공부는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일부러 의문을 만들려 들면 제 발에 걸려 넘어진다. 책 보다 제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공부의 중간 단계에서 생겨나는 아집과 아만(我慢)은 대단히 위험하다. 갑자기 선현들이 우습게 보이고, 저만도 못하게 여겨질 때를 조심해야 한다. 자신감이 넘칠 때 더욱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의 독서법
○ 모르면 물어라
독서란 일반적인 사람의 일에 대해 묻는 것과 같다. 저 일을 알려 하면 저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이제 문득 그 사람에게 묻지 않고 단지 자기 뜻으로 헤아려서 반드시 이럴 것이라고 말한다.
讀書如問人事一般, 欲知彼事, 須問彼人. 今却不問其人, 只以己意料度, 謂必是如此. -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中에서
세상일은 저마다 잘 하고 잘 아는 일이 있다. 모르는 것은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맞다. 독서도 이와 같다. 책을 읽다가 막히면 아는 이에게 물어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거나, 엉뚱하게 짐작으로 넘어가는 태도가 공부를 망치고 발전을 막는다.
○ 물러서서 살펴보라
배우는 사람이 책을 볼 때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물러서서 보려 하지 않는 데서 병통이 생긴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보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 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는 마치 송사를 처리할 때, 마음이 먼저 을의 견해를 주장함이 있으면 문득 갑이 옳지 않은 점만 찾고, 먼저 갑의 의사를 주장함이 있으면 을의 잘못을 보려고만 드는 것과 꼭 같다. 잠시 갑과 을의 주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야만 바야흐로 능히 그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다. 장횡거(張橫渠)는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이 말이 참으로 옳다. 만약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뜻을 얻겠는가?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두 종류의 병통이 있다. 하나는 사사로운 뜻을 주장함이고, 다른 하나는 전부터 먼저 들어앉은 견해가 있는 것이다. 비록 떨쳐 내던지려 해도 또한 그것이 저절로 찾아오고 만다.
學者觀書, 病在只要向前, 不肯退步看. 愈向前, 愈看得, 不分曉. 不若退步, 却看得審. 大槪病在執着, 不肯放下. 正如聽訟, 心先有主張乙底意思, 便只尋甲底不是, 先有主張甲底意思, 便只見乙底不是, 不若姑置甲乙之說. 徐徐觀之, 方能辨其曲直. 橫渠云: “濯去舊見, 以來新意,”此說甚當. 若不濯去舊見, 何處得新意來? 今學者有二種病, 一是主私意, 一是舊有先入之說. 雖擺脫, 亦被他自來相尋. -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中에서
선입견을 털어 내는 것이 공부의 출발이다. 제대로 판단하고 똑바로 살펴 나름대로 가야 한다. 하던 대로 생각하고 남 따라 쫓아가며 덩달아 휩쓸리면 묵은 생각에 휘둘려 새 판단을 못하게 된다. 지금을 버려야 새로워질 수가 있다. 지금만 고집하면 변화는 없다.
공연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을 세우는 것, 선입견에 붙들려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독서의 보람과 효과가 있다. 물러나서 살펴보라. 앞서려면 뒤쳐져라.
○ 의심하는 것이 공부다
독서는 모름지기 자세해야 한다. 구절 따라 글자마다 보아야만 한다. 노력이 거칠고, 정밀한 생각에 힘쓰지 않으면서 단지 의심할 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면, 의심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부족해서 의심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일 뿐이다. 독서는 의심이 없는 곳에서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이 있는 곳에서 의심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 이르러야만 큰 발전이 있다.
讀書須是仔細, 逐句逐字要見去着. 若用工麤鹵, 不務精思, 只道無可疑處, 非無可疑, 理會未到, 不知有疑爾. 讀書, 無疑者須敎有疑, 有疑者却要無疑. 到這裏方是長進. - 양응수(楊應秀)의 독서법 中에서
와 닿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와 닿으려면 꼼꼼히 보아야 한다. 대충 하고 다 안다고 하니, 알아서 안 것이 아니라, 제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러려니 하는 지점에서 '왜 그럴까?'하고, 다들 걸려 넘어지는 곳에서 통쾌하게 깨달아야 비로소 공부가 자리를 잡았다는 증좌다.
○ 공부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세 가지
무릇 글을 볼 때 적게 보며 숙독하는 것이 첫째다. 천착해서 주장을 세우지 않고 반복해서 체험하는 것이 둘째다. 몰두해서 이해하되 보람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이 셋째다.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한다.
凡看文字, 少看熟讀, 一也. 不要鑽硏立說, 但要反覆體驗, 二也. 埋頭理會, 不要求效, 三也. 三者, 學者所當守. - 양응수(楊應秀)의 독서법 中에서
조금씩 읽고 깊이 이해하라. 주장을 내세우기 전에 몸으로 느껴라. 몰두하되 써먹을 궁리를 버려라. 공부는 이렇게 하면 된다. 보통은 반대로 한다. 많이 보지만 건성으로 읽는다. 조금 알면 주장부터 내세운다. 깨닫기도 전에 결과를 거둘 생각이 앞선다. 열심히 하는데도 발전이 없다면 내 공부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 숙독과 정사(精思), 그리고 의문
독서는 우선 숙독해야 한다. 그 말이 모두 내 입에서 나온 것 같이 해야 한다. 계속해서 정밀하게 따져 보아 그 뜻이 죄다 내 마음에서 나온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얻었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숙독해서 깊이 생각하여 깨달아 얻은 뒤에도 또 이 정도에서 의문을 멈추면 안 된다. 그래야만 진전이 있다고 할 만하다. 만약 이쯤에서 그친다고 하면 끝내 다시는 진전이 없다.
大抵讀書, 先須熟讀, 便其言皆若出於吾之口, 繼以精思, 便其意皆若出於吾之心然後, 可以有得爾. 然熟讀精思旣曉得後, 又須疑不止如此, 庶幾有進. 若以爲止如此矣, 則終不復有進也. - 양응수(楊應秀)의 독서법 中에서
책에서 읽은 글이 내 말 같이 느껴지면 숙독했다고 할 수 있다. 글 속에 담긴 생각이 원래 내 생각과 똑같이 생각되면 정밀하게 생각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연 그럴까? 달리 볼 수는 없을까? 때로 의심하고 의문을 품어, 말을 흔들고 생각을 뒤집어 보는 점검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한 단계 더 나아갈 수가 있다. 앵무새 공부, 원숭이 공부가 안 되려면 점검이 필요하다.
▣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의 독서법
○ 읽은 책 다시 읽기
책을 읽을 때에는 대충 건성으로 보아 넘김을 면치 못한다. 매번 고요히 누워 예전에 읽은 것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수십 년 간 깨닫지 못했던 오묘한 뜻을 깨닫곤 한다. 배움이 넓은 선비가 마땅히 때때로 책을 덮고 예전 읽은 여러 책을 가슴속에서 오르내리게 하면 반드시 큰 보람이 있을 것이다. 배운 것이 적은 자는 다만 마땅히 노력하여 많이 읽을 뿐 여유롭게 한가히 앉아 에전 읽은 것을 생각하는 데 자신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讀書時不免泛然看去. 每靜臥念平昔所讀, 忽悟累十年未造之奧. 博學之士, 宜時時掩卷, 以舊讀諸書, 上下于胸中, 必大有功效. 所學謏寡者, 惟宜矻矻多讀, 不可悠悠閑坐, 自諉以思舊讀. - 홍길주(洪吉周)의 수여난필(睡餘瀾筆) 中에서
영화도 처음 볼 때는 스토리 따라가기 바빠 세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두 번째 보면 처음에 안 보이던 것들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책 읽기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내용 따라가기 바빠 그저 읽고 지난 책들을 돌이켜 음미해 보면 새록새록 의미가 새롭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마음을 쏟았던 대목은 사실 별 것 아닌 것일 때도 많다.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면 그 자취를 견줘 볼 수 있다. 안목이 트이고 식견이 열리면 자꾸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한 번씩 되돌아 살펴보는 것이 더 효괒거이다. 예전에 읽은 것이 사실은 안 읽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 생활의 습관, 독서의 발견
○ 모르면 찾아라
의심스런 일이나 의심나는 글자가 있거든 그 즉시 유서(類書)나 자서(字書)를 살펴 점검해 보아라.
有疑事疑字, 卽時考檢類書字書. - 이덕무(李德懋) 사소절(士小節) 교습(敎習) 中에서
모르면 묻고 알 때까지 찾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모르면서 묻지 않고 아는 척 넘어가면 영영 알 길이 없어 공부에 진전이 없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모르면서 알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끄럽다. 유서(類書)는 백과사전류의 책이고, 자서(字書)는 사전이다.
글자는 자서를 뒤져 보면 다양한 쓰임을 알 수 있고, 주제와 관련된 내용은 유서를 뒤져 봐야 앞뒤 맥락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은 인터넷을 잠깐만 뒤져도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는다. 그저 넘어가면 안 된다. 대충 건너뛰면 못쓴다. 찾아서 확인해라.
▣ 홍대용(洪大容) : 독서의 바른 태도와 방법
○ 뜬 생각과 의문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의문을 깨칠 수가 없는 것은 일반적인 병통이다. 하지만 병의 뿌리를 따져보면 뜬 생각을 쫓아 내달리느라 뜻이 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뜬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서 억지로 의문을 깨치려 들면, 에돌고 막히고 얕고 가볍게 되어, 참 의문을 깨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의문을 깨치려면 먼저 뜬 생각을 없애야만 한다. 하지만 뜬 생각은 또한 억지로 밀쳐낼 수가 없다. 억지로 밀쳐내려 들면 이것이 외려 한가지 생각을 덧보태게 해서 어지러히 뒤엉킴을 더하게 만든다. 다만 어깨와 등을 곧추 세워 뜻을 고무시켜 편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면 뜬 생각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금세 흩어지고 만다.
凡初學, 不能會疑, 人之通患. 然原其病根, 馳逐浮念, 志不專於書也. 故不去浮念, 强欲會疑, 迂滯淺率, 眞疑不會. 是故欲會疑, 先去浮念. 然浮念亦不可强排. 强排則卽此轉添一念, 適增攪繞. 惟竦直肩背, 鼓發意趣, 一字一句, 心口相應, 浮念倐散, 亦不自覺也. - 홍대용(洪大容), 여매헌서(與梅軒書) 중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모를 것 투성이다. 개념도 안 들어오고, 맥락도 잡히지 않는다. 이게 뭘까? 어떻게 해야지? 왜 하는 거야? 의문에 사로잡혀 혼란에 빠진다. 공부를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따로 논다. 범인은 뜬 생각이다.
생각에도 종류가 참 많다. 념(念)는 머리 속에 콕 박혀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쓸데 없는 생각이 콕 박히면 잡념(雜念)이요, 떠오른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상념(想念)이다. 공부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뜬 생각[浮念]이다. 뿌리도 없이 제멋대로 떠나니며 사람 마음을 이랬다저랬다 하게 만든다. 이래 가지고는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뜬 생각을 걷어내는 공부가 우선이다. 그런데 뜬 생각은 없애려 마음 먹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문제다. 어거지로 없애려 들면, 없애고 말겠다는 그 집착이 또 하나의 뜬 생각을 만든다. 나는 뜬 생각에 더 교란되고, 둘러싸여 어찌해 볼 수조차 없게 된다.
어찌 해야 할까? 역시 답은 바른 자세에서 출발한다. 등허리를 곧추 세워라. 척추는 정신이 지나가는 통로다. 통로가 열려야 길이 뚫린다. 그 길로 굳센 의지를 활보하게 한다. 한 글자 한 구절에 마음과 입을 온전하게 일치시킨다. 뜬 생각은 어느새 간 곳이 없다. 뜬 생각은 제풀에 꺾이고,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지, 거기에 휘둘리면 더 커져서 괴물이 된다.
○ 뜬생각을 다스리는 법
무릇 뜬생각은 하루 아침에 깨끗이 없앨 수가 없다. 다만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수시로 맑게 다스림을 보태야 한다. 혹 심기가 평온하지 않거나 옭죄인 생각이 떠나지 않거든, 즉시 묵묵히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에 집중시키다. 그러면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뜬 기운이 물러난다. 과연 이 도리를 능히 하여 나날이 다달이 공력을 쌓음이 점차 익숙해지고, 보람이 점점 커지면 글을 보는 식견이 날로 발전할 뿐 아니라 심기가 편안하고 화평해져서 일을 함에 몰두하여 정밀하게 된다. 위로 도달하는 배움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凡浮念不可一朝凈盡. 惟貴勿忘, 隨加澄治. 或値心氣不平, 纏縛不去, 卽默坐闔眼, 注心臍腹, 神明歸舍, 浮氣退聽. 果能此道, 時月之間, 用功漸熟, 責效漸長, 不惟文識日進, 心安氣和, 作事專精. 上達之學, 亦不外是. - 홍대용(洪大容), 여매헌서(與梅軒書) 중에서
뜬생각을 당장 어쩌겠다는 생각보다 뜬생각을 없애야 한다는 당위를 늘 기억하는 것이 더 요긴하고 중요하다. 염두에 두는데 그치지 않고, 징치(澄治) 즉 해맑게 다스리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흙탕물을 오래 가라앉히면 맑은 물이 된다. 처음엔 뿌옇게 흐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물도 오래 가라앉혀 맑게 하면 맑아진다.
뜬생각은 언제 어떻게 생길까? 본마음이 흔들려 헛생각에 마음을 빼앗길 때 생긴다. 이럴 때 해법은 묵좌(默坐)에 있다. 떠들며 돌아다니지 말고 한 자리에 묵직하게 앉아 입을 다무는 것이 중요하다. 합안(闔眼), 즉 두 눈도 감아라. 더 이상 입력하지 말고, 이미 입력된 것을 걷어내야 한다. 단전으로 마음을 끌어내려야 한다.
뱅글뱅글 머리 속을 바삐 돌던 생각이 겨우 제 자리를 찾아간다. 뜬기운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조금씩 차차로 익혀 내 것으로 만들면 식견이 늘고, 마음이 차분해지며, 일에 집중력이 몰라보게 향상된다.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공부는 모름지기 뜬생각을 처리하는 훈련에서 출발한다.
○ 의문의 중요성
의리(義理)는 다함이 없으니, 결코 망녕되이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글을 대충 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문이 없다. 이는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궁구하여 탐색한 것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문이 없던 데서 의문이 생기고, 아무 맛 없는 데서 맛이 생겨난 뒤라야 능히 독서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義理無窮, 切不可妄自滿足. 凡文字粗通者, 必無疑, 非無疑也, 究索之不到也. 疑生於無疑, 味生於無味, 然後可謂能讀書矣. - 홍대용(洪大容), 여매헌서(與梅軒書) 중에서
공부에 끝은 없다. 못난 사람은 조금 이루고 크게 만족한다. 하나를 익히면 공부가 끝난 줄 안다. 도랑을 벗어나야 강물과 만나고, 강물은 흘러 큰 바다로 든다. 우물 개구리의 소견으로 바다 고래의 배포를 어찌 짐작이나 할까?
공부의 적은 자만과 자족이다. 대충 어싯비싯 알면 의문도 없다. 다 쉬워 모를 게 없다. 이 정도 쯤이야 싶다. 막상 따져보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당황스럽다. 의문도 뭘 알아야 생긴다. 의문이 돋아나면 공부가 자랐다는 의미다.
공부가 더 커지면 온통 모두 모를 것 투성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모를 것 투성이라야 한다. 처음엔 당연하던 것이 왜 그럴까로 바뀌어야 한다. 무미건조하던 글이 가슴에 콕콕 맺혀 와야 한다. 절절하고 아프다. 그땐 왜 몰랐을까 싶다. 안타깝고 부끄럽다. 마음 속에서 이런 작용이 활발해지면 내 공부가 비로소 궤도를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도 좋다.
○ 의문을 깨치려면
무릇 독서는 절대로 서둘러 의문을 깨치려 들면 안 된다. 단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오로지 해서 읽고 또 읽는다. 의문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의문이 생기면 되풀이해서 살피고 탐구한다. 반드시 문자에만 집착할 일도 아니다. 혹 일에 응하는 가운데 이를 징험해보고, 혹 잠겨 노니는 중에 구해본다. 빨리 가거나 걸어가거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수시로 살피고 탐색한다. 쉬지 않고 이렇게 하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설령 통하지 않더라도, 이같은 탐색을 먼저한 뒤에 남에게 묻는다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凡讀書, 切不可徑要會疑. 只平心專志, 讀來讀去, 不患無疑, 有疑則反覆參究. 不必專靠文字, 或驗之應事之際, 或求之游泳之中, 凡行步坐臥, 隨時究索. 如是不已, 鮮有不通, 設有不通, 先此究索而後問於人, 乃可以言下領悟. - 홍대용(洪大容), 여매헌서(與梅軒書) 중에서
의심이 들고 의문이 생기면 석연하게 깨쳐야 시원스럽게 된다. 흐린 구름이 걷힐 때 그 너머 푸른 하늘이 환히 드러난다. 의심과 의문은 걷어내겠다는 의지만으로는 걷히지 않는다.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의문이 없는 것은 그냥 넘어간다. 걸리는 데가 있으면 해결하고 넘어간다. 이때 언어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단순하게 실제 생활 속에 적용해 보거나, 딴 일 하면서 가늠해 보기도 한다. 일거수일투족마다 살펴 헤아리다 보면 의문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없다. 끝내 몰라도 괜찮다. 이런 모색의 시간이 누적되어 있으면, 누가 곁에서 무심히 던지는 한 마디로도 마침내 통쾌하게 뚫린다. 내가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문 가능한 일이다.
▶️ 動(움직일 동)은 ❶형성문자로 动(동)은 통자(通字), 动(동)은 간자(簡字), 㣫(동)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힘 력(力; 팔의 모양,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重(중;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움직이거나 할 때의 반응, 무게, 동)이 합(合)하여 움직이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動자는 '움직이다'나 '옮기다', '흔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動자는 重(무거울 중)자와 力(힘 력)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重자는 보따리를 매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무겁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무거운 보따리를 맨 사람을 그린 重자에 力자가 결합한 動자는 보따리를 옮기기 위해 힘을 쓴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動(동)은 (1)움직임 (2)변함 등의 뜻으로 ①움직이다 ②옮기다 ③흔들리다 ④동요하다 ⑤떨리다 ⑥느끼다 ⑦감응하다 ⑧일하다 ⑨변하다 ⑩일어나다 ⑪시작하다 ⑫나오다 ⑬나타나다 ⑭어지럽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할 위(爲), 옮길 이(移), 다닐 행(行)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그칠 지(止), 고요할 정(靜)이다. 용례로는 전쟁이나 반란 등으로 사회가 질서없이 소란해지는 일을 동란(動亂), 원동기에 의해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변형이나 발생시킨 것을 동력(動力),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동작(動作), 마음의 움직임을 동향(動向), 움직이는 듯함 또는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동감(動感), 마음이 움직임을 동심(動心), 흔들려 움직임을 동요(動搖), 움직이는 일과 멈추는 일을 동지(動止), 움직이는 상태를 동태(動態), 생물계를 식물과 함께 둘로 구분한 생물의 하나를 동물(動物), 움직이고 있는 모양을 동적(動的), 심장에서 혈액을 몸의 각 부분에 원심적으로 보내는 혈관을 동맥(動脈), 사물의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품사를 동사(動詞), 사람의 움직이는 상황을 동정(動靜), 하늘을 움직이게 하고 땅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세상을 놀라게 함을 이르는 말을 동천경지(動天驚地), 무엇을 하려고만 하면 남에게 비난을 받음을 이르는 말을 동첩득방(動輒得謗), 곤란한 지경에 빠져서 꼼짝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동탄부득(動彈不得), 가볍고 망령되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도리나 사정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말을 경거망동(輕擧妄動),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몸을 사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복지부동(伏地不動), 하늘을 치켜들고 땅을 움직인다는 뜻으로 큰 소리로 온 세상을 뒤흔듦 또는 천지를 뒤흔들 만하게 큰 세력을 떨침을 이르는 말을 흔천동지(掀天動地), 확고하여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아니함을 일컫는 말을 확고부동(確固不動), 기운이 꺾이지 않고 본디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생생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생동생동(生動生動), 마음이 움직이면 신기가 피곤하니 마음이 불안하면 신기가 불편하다는 말을 심동신피(心動神疲), 열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게을러서 조금도 일을 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십지부동(十指不動) 등에 쓰인다.
▶️ 靜(고요할 정)은 ❶형성문자로 静(정)의 본자(本字), 静(정)은 통자(通字), 静(정)은 간자(簡字), 靖(정)과, 靖(정)은 동자(同字)이다. 爭(쟁)은 물건을 서로 끌어 당기는 일로, 여기에서 팽팽히 당겨져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을 나타낸다. 음(音)을 나타내는 靑(청)은 푸른 색깔로, 여기에서는 무성하다는 菁(청), 깨끗하다는 淸(청), 자세하다는 精(정), 편안하다는 靖(정) 따위에 공통되는 뜻을 이어 받고 있다. 靜(정)은 물건이 움직이지 않고 조용함, 편안함, 또 자세함, 장식(裝飾)함, 아름다움을 말한다. 물이 물결치지 않는 것을 淸(청) 또는 淨(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또 瀞(정)이라고도 쓴다. ❷회의문자로 靜자는 '고요하다'나 '깨끗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靜자는 靑(푸를 청)자와 爭(다툴 쟁)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爭자는 소뿔을 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다투다'라는 뜻이 있다. 靑자는 우물과 초목을 그린 것으로 '푸르다'나 '고요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 靜자는 상반된 뜻을 가진 글자가 결합한 셈이다. 사실 靜자는 '고요하다'를 표현하기 위해 왁자지껄했던 싸움이 끝난 이후의 소강상태를 그린 것이다. 그래서 다투는(爭) 모습에 푸르름(靑)을 더해 매우 고요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을 표현했다. 그래서 靜(정)은 (1)움직이지 아니하여 조용함 (2)고요하고 평화스러움 등의 뜻으로 ①고요하다(조용하고 잠잠하다) ②깨끗하게 하다 ③깨끗하다 ④쉬다, 휴식하다 ⑤조용하게 하다 ⑥조용하다 ⑦조용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고요할 적(寂), 고요할 막(寞), 고요할 요(窈), 고요할 밀(謐),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이다. 용례로는 고요하고 엄숙함을 정숙(靜肅), 고요하고 편안함을 정밀(靜謐), 고요하고 쓸쓸함을 정적(靜寂), 정지하고 있거나 균형이 잡히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정태(靜態), 조용히 사물을 관찰함을 정관(靜觀), 정지하고 있는 것을 정적(靜的), 조용히 생각함을 정려(靜慮),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 피로나 병을 요양함을 정양(靜養), 고요히 그침 또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를 정지(靜止), 명상에 잠김을 정상(靜想), 정지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는 물건을 정물(靜物),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을 바로 하여 조용히 앉음을 정좌(靜坐), 고요하고 평온함을 정온(靜穩), 태도가 조용하고 마음이 맑음을 정숙(靜淑), 조용하고 한가로움을 정한(靜閑), 시끄럽고 요란한 일이나 상태를 조용하게 가라앉히는 것을 진정(鎭靜), 정신이 편안하고 고요함을 안정(安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차분함을 냉정(冷靜), 사람의 움직이는 상황을 동정(動靜), 평안하고 고요함을 평정(平靜), 쓸쓸하고 고요함을 적정(寂靜), 한가하고 고요함을 한정(閑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물에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는 정신 상태를 허정(虛靜), 조용하고 엄숙함을 숙정(肅靜), 평안하고 고요함을 영정(寧靜), 성정이 차분히 가라앉고 조용함을 침정(沈靜),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하다는 말을 사해파정(四海波靜) 또는 사해정밀(四海靜謐), 성품이 고요하면 뜻이 편안하니 고요함은 천성이요 동작함은 인정이라는 말을 성정정일(性靜情逸), 산과 들이 텅 빈 것처럼 고요하고 괴괴하다는 말을 산공야정(山空野靜), 나이가 젊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마음이 올바르고 침착하다는 말을 요요정정(夭夭貞靜), 때로는 움직이고 때로는 조용히 한다는 말을 일동일정(一動一靜), 부녀가 인품이 높아 매우 얌전하고 점잖음을 일컫는 말을 유한정정(幽閑靜貞) 등에 쓰인다.
▶️ 疑(의심할 의, 안정할 응)는 ❶회의문자로 어린아이가 비수(匕)와 화살(矢)을 들고 있어 위험하여 걱정하니 의심하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疏자는 '소통하다'나 '트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疏자는 疋(발 소)자와 㐬(깃발 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㐬자는 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그린 것으로 본래 의미는 '떠내려 가다'나 '흐르다'이다. 여기에 발을 뜻하는 疋자가 더해진 疏자는 길을 가는데 막힘이 없다는 뜻이다. 즉 길을 걷는 것이 물 흐르듯이 매우 순조롭다는 의미인 것이다. ()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으로는 彳(조금 걸을 척)자가 있으니 이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헤매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疑자는 이렇게 길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으로 '헷갈리다'나 '주저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후에 '의심하다'나 '믿지 아니하다'와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疑(의, 응)는 경서 가운데서 의심이 날 만한 것의 글 뜻을 설명시키던, 과거(科擧)를 보일 때의 문제 종류의 한 가지의 뜻으로 ①의심하다 ②헛갈리다 ③믿지 아니하다 ④미혹되다, 미혹시키다 ⑤두려워하다 ⑥머뭇거리다, 주저하다 ⑦괴이하게 여기다 ⑧비기다(=擬) ⑨같다, 비슷하다 ⑩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⑪시샘하다 ⑫헤아리다, 짐작하다 ⑬의문(疑問) ⑭아마도 그리고 안정할 응의 경우는 ⓐ안정하다(응) ⓑ한데 뭉치다(응) ⓒ집결하다(응) ⓓ멈추다(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의심할 아(訝),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믿을 신(信)이다. 용례로는 의심하여 분별에 당혹함을 의혹(疑惑), 의심하여 물음을 의문(疑問), 마음에 미심하게 여기는 생각을 의심(疑心), 의심스러워 괴이쩍음을 의아(疑訝), 의심하여 두려워함을 의구(疑懼), 서로 의심하여 속 마음을 터 놓지 아니함을 의격(疑隔), 의심스러워 마음이 어지러움을 의란(疑亂), 의심하고 업신여김을 의모(疑侮), 반신반의 함을 의신(疑信), 의심하여 망설임을 의애(疑捱), 의심하여 어김을 의위(疑違), 의심하여 두려워함을 의파(疑怕), 의심하여 놀람을 의해(疑駭), 의심쩍고 명백하지 못함을 의회(疑晦), 의심하며 놀람을 의경(疑驚), 의심스러운 생각을 의념(疑念), 의심스러운 일의 실마리를 의단(疑端), 꺼리고 싫어함을 혐의(嫌疑), 의심나는 점을 물어서 밝힘을 질의(質疑), 마음속에 품은 의심을 회의(懷疑), 의심스러움이나 의심할 만함을 가의(可疑), 크게 의심함을 대의(大疑), 의혹을 풂을 결의(決疑), 어려워서 의문스러움을 난의(難疑), 의심이 많음을 다의(多疑), 괴상하고 의심스러움을 괴의(怪疑), 의심을 받음이나 혐의를 받음을 피의(被疑), 의심스러운 바를 환히 깨달음을 오의(悟疑), 시기하고 의심함을 제의(懠疑), 의심쩍은 생각을 가짐을 지의(持疑), 의심이 생기면 귀신이 생긴다는 뜻으로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서 불안해 함을 이르는 말을 의심암귀(疑心暗鬼), 의심을 품는 일을 행하여 성공하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의사무공(疑事無功), 의심이 나는 일은 억지로 자세히 캘 필요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의자궐지(疑者闕之),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함 또는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함을 이르는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 많은 사람이 다 의심을 품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군의만복(群疑滿腹), 믿음직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차신차의(且信且疑),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을 호의불결(狐疑不決),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서로 묻고 대답함을 일컫는 말을 난의문답(難疑問答), 여름의 벌레는 얼음을 안 믿는다는 뜻으로 견식이 좁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하충의빙(夏蟲疑氷),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을 호의미결(狐疑未決), 죄상이 분명하지 않아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가볍게 처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죄의유경(罪疑惟輕) 등에 쓰인다.
▶️ 悟(깨달을 오)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㣺;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분명하다의 뜻을 가진 吾(오)로 이루어졌다. 마음 속에 분명하여지다, 깨닫다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悟자는 '깨달다'나 '깨우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悟자는 心(마음 심)자와 吾(나 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吾자는 '나'라는 뜻이 있는 글자로 여기에 心자가 더해진 悟자는 '(내가) 깨달다'나 '(내가) 깨우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悟자가 말하는 것은 '깨달다'라는 것은 나 스스로가 마음 깊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유기의 손오공(孫悟空)이란 이름에 悟자가 쓰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悟(오)는 ①깨닫다 ②깨우쳐 주다 ③슬기롭다 ④총명하다 ⑤계발하다 ⑥눈 뜨다 ⑦깨달음,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중생계의 사고를 해탈하고 진리를 깨달은 세계를 오계(悟界), 완전히 깨달음을 오달(悟達), 불교의 도를 깨달음을 오도(悟道), 깨달아 앎을 오득(悟得), 완전히 깨달음을 오료(悟了),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을 오성(悟性), 깨달아 희열을 느낌을 오열(悟悅), 도를 깨달아 실상의 세계에 들어감을 오입(悟入), 철저하게 깨달음을 오철(悟徹),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오회(悟悔), 부처의 지혜를 깨달아서 의심하지 않는 마음의 오인(悟忍), 앞으로 닥쳐 올 일을 미리 깨달아 마음을 작정함이나 결심함을 각오(覺悟), 지혜가 열리어 도를 깨달음을 개오(開悟), 갑자기 깨달음이나 별안간 깨달음을 돈오(頓悟), 지혜가 밝아서 깨달음이 빠름을 낭오(朗悟), 잘못을 뉘우쳐 깨달음을 개오(改悟), 사물에 대하여 밝게 깨달음 또는 그러한 힘을 명오(明悟),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회오(悔悟), 깊이 느껴 깨달음을 감오(感悟), 도리를 깨달음을 해오(解悟), 무엇을 알아서 깨달음을 회오(會悟), 재빠르게 잘 깨달음을 경오(警悟), 미혹과 깨달음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미오(迷悟), 여러 사람보다 뛰어나 현명함을 초오(超悟), 사물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영리함을 총오(聰悟), 남보다 뛰어나게 영리하고 슬기로움을 영오(穎悟), 크게 깨달아서 번뇌나 의혹이 다 없어짐을 일컫는 말을 대오각성(大悟覺醒) 또는 대오대철(大悟大徹), 모르던 것을 문득 깨달음을 이르는 말을 번연개오(幡然開悟), 마음이 활짝 열리듯이 크게 깨달음을 얻는 일을 이르는 말을 활연대오(豁然大悟), 남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도를 깨달음을 이르는 말을 자연오도(自然悟道)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