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思陵) 가을 소나무 숲길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陵)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산65-1번지에 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됨에 따라 왕후도 부인으로 신분이 바뀌어 졌다.
이때 나이는 18세였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 송(宋)씨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연미정동(燕尾亭洞) 청룡사(靑龍寺)절 앞에 초막을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는 아침저녁 이 산봉우리에 소복(素服)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다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들이 같이 땅을 치며 우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단종이 유배간 영월이 있는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동망봉(東望峰)에는 영조대왕이 친필로 “동망봉(東望峰)” 이라고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이곳 바위산이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를 깨뜨려버려 아쉽게도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는 왕후가 아닌 대군부인(大君夫人)의 예로 장례를 지냈고 양주(楊州, 현재의 남양주시) 남쪽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사릉리)에 모셔졌다.
자식이 없어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경기도 양주군의 시가(媤家) 묘역에 묘를 만들었다.
지금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 나오는 경혜공주다.
그 후 후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올려져, 종묘에 신위(神位)가 모셔지고 능호는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이라 했다.
사릉(思陵)은 단종을 그리워 한다는 뜻으로 생각되는 능호(陵號)로 생각된다.
그리운 사람은 많이 생각한다는 사량(思量)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무덤 사릉(思陵)은 너무나 소박하다.
사릉에는 보통 왕후들의 능에서 볼 수 있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상석 1좌와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1쌍이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다.
그 아랫단에는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각 1쌍 그리고 장명등(長明燈)이 있을 뿐이다.
마치 정승들의 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동대문 밖 동관묘(東關廟)의 남서쪽 청계천 하류에 영미교(永尾橋)가 있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갈 때 정순왕후 송씨와 청룡사(靑龍寺)에 있는 “꽃비가 휘날린다는 는 뜻”의 우화루(雨花樓)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고 이별했다는 다리이다.
이 다리를 두고 영원히 이별했다 하여 “영이별다리” 또는 영도교(永渡橋)로도 불린 다리다.
영미교(永尾橋)에서 청계천 지류를 따라 오르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이 있다. 이곳이 정순왕후가 단종과 이별 후 이절에 출가해 머리깎고 세 궁녀와 더불어 초막을 짓고 어렵게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마련해 주었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통곡을 했다고 하는데 동망봉에서 보문동으로 나있는 개천이 정순왕후의 피눈물로 자주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동망봉뒤 청룡사에 온 뒤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기도하는 한편 절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의 옷감에 자주(紫朱)물을 들여서 내다 팔았다.
자주물을 들일 때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그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며 또 그 마을이름을 “자주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양의 아낙네들은 정순왕후의 염색천을 팔아 주기 위해 일부러 저고리에 자주끝동을 달아 입었다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가 동냥으로 산다는 소문이 성안에 퍼지자 뜻있는 아낙들은 앞 다투어 푸성귀라도 주고 싶어 채소다발을 이고 영이별다리로 몰려들었으며 관가에서는 불만이 반란으로 이어질까 이 영이별다리 나들이를 통제했다고 전한다.
청룡사(靑龍寺)와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동망봉 뒤에 청룡사(靑龍寺)란 조그마한 절이 있다.
조선시대의 과부의 운명은 참으로 슬픈 인생을 살아가야 했다.
개가도 할 수 없고 연애를 할 수도 없었다.
특히 왕을 모시던 여성들은 더욱 그랬다.
늙은 왕에 젊은 후궁이 많아 왕이 늙어 죽은 후에는 청춘인 후궁들이 많았다.
이들은 수절과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모여 있던 절이 바로 청룡사(靑龍寺)의 정업원(淨業院)인 것이다.
정업원(淨業院) 최초의 주지는 공민왕의 후비 안씨였다. 공민왕 후비 안씨는 대비로서 고려말 왕실을 대표하였는데 태조 이성계는 형식적으로나마 공양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 모든 절차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안씨가 해 주었다.
안씨는 조선이 개국함과 동시에 왕족에서 평민으로 바뀌었다.
이때 안씨가 택한 길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스님이 된 안씨를 정업원 주지로 삼아 노비와 토지를 주어 도성 안에서 살게 하였다.
공민왕비 안씨의 뒤를 이어 정업원의 주지가 된 여성은 조선 최초의 세자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형 이방원에게 참살당한 의안대군 방석의 부인 심씨였다.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또한 이런 한 많은 여성중 한 분 으로 이곳 정업원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 후 역사는 흘러 영조는 1771년(영조 47)에 정순왕후 송씨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도 건립했다.
비각 현판 글씨는 영조의 친필로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과, 정업원구기세신묘 9월 6일 음체서(淨業院舊基歲辛卯 九月六日 飮涕書)라고 씌어 있다.
“앞산의 봉우리와 뒷 바위여 오! 천만년이나 가소서” 라는 의미이다.
가을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다.
능원에는 곱게 관리한 황금색의 가을잔디와 청청이 서있는 곧고 굽은 소나무들이 정순왕후의 애환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듯했다.
비록 구부정한 소나무지만 얼마나 당당하냐.
시비(是非)의 인걸들은 가고 없지만
저 푸른 소나무는 비록 역사에 늙었지만 충절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