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를 각오하여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 강론>
(2026. 7. 5.)(마태 10,17-22)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17-22).”
1)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는, “박해자들을 조심하여라.”이고,
이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굴복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조심하여라.”는 “피하여라.”가 아닙니다.
박해자들이든지 적대자들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은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선교활동을 할 때 처음부터 우호적인 사람들만
찾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우호적인 사람들도 만나고
적대적인 사람들도 만나게 되는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 전부터 사람들을 분류할 수는 없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전해 주는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전해들은 사람 쪽이 선택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활동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는데(사도 13,48-49),
일부 유대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믿지 않고 반박했습니다(사도 13,45).
그때 바오로 사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사도 13,46).”
복음을 전해 주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안 믿은 그들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박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처음부터 복음 선포를 아예
포기해버리고, 복음을 전해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은 쪽의 책임입니다.
18절의 “증언할 것이다.”는, “증언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는 상황이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된다는 뜻이고, 박해를 받더라도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을 중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2) 순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순교자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또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순교자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순교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한 점을 가지고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다 보면 그 생활이 순교로 완성됩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그렇다. 부활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려면...”
그러나 꼭 순교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참고 견디면서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옛날과 같은 박해가 없는 오늘날에는
신앙생활이 옛날보다는 덜 힘든 생활이 된 것은 사실인데,
옛날보다 덜 힘들다는 바로 그 점이
사실은 옛날보다 더 어려운 점입니다.
박해 때에는 “신앙을 지키느냐, 버리느냐? 죽느냐, 사느냐?”
라는 단순한 상황이었는데, 박해가 없는 오늘날에는
단순한 상황은 없고,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이 많습니다.
박해 때에는, 배교자는 있었어도
냉담자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인’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열성이 식을 때가 있고,
그러다가 다시 또 열심히 하기도 하고...
자신이 ‘어떤 신앙인’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고...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희망’이 무척 중요합니다.
무엇을 희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크게 달라집니다.
순교자와 배교자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도
‘희망의 차이’일 것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