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16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충청도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와 영남대로
한편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수안보온천 1) 은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난 곳이자 영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에 있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충청도 충주 안부역(安富驛) 큰길가에 온천이 있는데, 샘물이 미지근하고 별로 뜨겁지 않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이미 오래전부터 온천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수안보온천에 관한 설명이 『한국지명총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2백여 년 전의 일이다. 현재의 온천지대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을 때 피부병을 앓던 한 거지가 이 근처의 볏짚 속에 살면서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온천수를 발견했다고 한다. 거지가 그 온수를 항상 먹고 씻고 하더니 드디어 병이 완쾌되었고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시설도 없이 우물을 파서 목욕을 하다가 1885년에 비로소 소규모의 남녀 목욕장이 판자로 만들어졌고, 1931년에야 근대식 목욕탕이 들어섰다. 1963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종래의 120미터 광천(鑛泉)을 195미터로 더 파서 섭씨 42도의 온수를 뽑아내기 시작하였다. 이 온천은 단순 유황 라듐 온천으로 모든 피부와 위장질환에 좋다고 한다.
미륵리 석불입상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전체 높이가 10.6미터로, 모두 여섯 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보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수안보에서 영남대로 옛길을 가다가 만나는 역이 바로 안부역이고, 안부역에서 소조령(小鳥嶺)을 넘으면 영남대로상의 큰 고개인 문경새재다. 한백겸이 그가 지은 『동국지리지』에서 “계립령이 없어지면서 개통되었다”라고 하였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새재 길은 폭이 0.5 내지 1미터에 지나지 않고 경사도 급했다”라고 하였던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한국천주교 청주교구가 발간한 『연풍 순교 성지』에는 문경새재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영남의 관문이자 충청도, 경상도를 가르는 문경새재는 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찾아 나선 교우들에게는 한 많은 고개로 기억된다. 특히 제1관문 옆 수구문(水口門)은 오로지 신앙만을 위해 고향을 버린 선조들이 관원의 눈길을 피해 숨어 드나들던 가슴 벅찬 감회가 서린 곳이다.
미륵리 석불입상 후면이 불상은 목이 굵으며 3도(三道)가 간신히 표현되었고 어깨가 발끝까지 계속되어, 신체적인 입체감이 부족하다. 웅장한 규모의 석굴이 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충주 쪽으로 조금 가다가 만나는 수회리를 두고 조선시대의 문장가인 이행은 「자연대설(自然臺說)」이라는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을 지었다.
연풍에서 동북쪽으로 한참을 간 거리에 수회리(水回里)라는 마을이 있으니, 좌우로 오직 큰 산이다. 좌측 봉우리는 산기슭이 완만히 뻗어서 우측으로 돌아서는 깎아지른 벼랑이 되어 물 쪽 시냇물 속으로 빠져들고 시냇물은 콸콸 흘러서 벼랑을 따라서 휘감아 도니 이 마을의 이름은 여기서 얻어진 것이다. 이 벼랑도 모두 삼면이 바위이고 높이는 백여 척이며, 위는 평평하고 넓어서 백여 명이 앉을 수 있으며,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 그 그늘이 짙다.
동행한 산수(山水)의 벗 홍자청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하기에, 내가 자연대(自然臺)라고 명명하였다. 자청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글자를 새긴 다음 먹으로 채우겠으니 그 설(說)을 지어주십시오” 하기에 내가, “산이 우뚝함도 자연이요, 물이 흘러감도 자연이요, 벼랑이 산수의 형세를 점거하여 독차지하고 있음도 자연이요, 오늘 우리가 이곳을 만난 것도 자연이요, 내가 그 자연스러움을 따라서 자연이라 한 것 또한 자연이라 할 것이다. 이에 ‘자연대’로 삼노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