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2)
고후 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설 교 >
약할 때 강함의 신비
고후 12:1-10 / 이기복목사
오늘은 “약할 때 강함의 신비”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약할 때 강해지는 신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의 전장인 고후 11장에서 자기의 자랑거리를 낱낱이 열거하였습니다. 먼저 그의 민족성을 자랑하였습니다(11:22). 이것은 강한 선민의식과 하나님의 약속의 주체가 된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의 축복을 독점하였다는 자랑입니다. 이어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누구보다 수고와 고난을 겪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자랑하였습니다(11:23). 뿐만 아니라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으며, 학문적으로는 당대의 최고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헬라적 학문의 명문대학인 다소대학에서 학문을 터득하였고, 당시에 세계를 움직이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고 그리스도의 종이요 일꾼이 된 다음에는 그동안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마치 분토(糞土:썩은 흙)와 배설물(排泄物)과 같이 버렸습니다.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스스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보면 바보같은 행동이었으나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고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바울의 자랑거리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는 뜻은 사도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주의 환상과 계시”입니다(1절). 여기 환상(幻像, Vision)은 시각(視覺)을 통하여 보는 것이고 계시(啓示, Revelation)란 시각을 통하지 않고도 지각(知覺)을 통하여 보는 진리입니다. 즉 꿈이나 착시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늘 즉 삼층 천(三層天)에 이끌려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4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하고 놀랍고 거룩한 체험을 한 영적인 바울 자신으로서는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으나 육신적인 차원의 바울 자신으로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5-6절).
셋째, 육체의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7-10절). 7절에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육체의 가시(헬: 스코롭스 테 사르키)는 “육체를 찌르는 뾰족한, 날카로운 조각 또는 가시”를 뜻합니다. 즉 “고통스러운 육체의 질병(ailment: 우환, 만성질병)”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사도 바울을 심히 괴롭히던 고통거리 또는 질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가시를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절)”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기고만장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가시가 떠나기를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8절)’고 고백합니다. 이는 숫자적으로 세 번이라기보다는 여러 번 또는 계속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결론은 자기의 뜻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바울은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는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기도의 결론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하나의 역설이면서 진리입니다. 약함과 강함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약할 때 나의 힘은 최고로 강하다(My power is strongest when I am weak)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진리와 교훈을 세 가지로 요약을 합니다.
1.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약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에서 약함은 자랑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는 이와는 정 반대입니다. 당대에는 최강자 중의 강자였던 사도 바울은 왕족인 혈통을 위시하여 학문적인 실력, 젊은이로서 출세한 지위,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생활 등 모든 면에서 강한 것을 과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신앙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약점이나 연약함을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자랑스럽게 여기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됩니다. 육체적인 자기 자랑과 과시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오히려 육체적인 가시가 자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2.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로 승화시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한 놀라운 신비체험을 한 이후에는 인생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고, 그렇게 인생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던 가시가 오히려 은총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그러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상에는 이러한 믿음과 진리를 통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자신이 가진 육체의 가시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큰 별과 같이 빛을 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은 삼하 16:5-14에서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치는 다윗에게 신하였던 시므이가 돌을 던지면서 자주하고 악담을 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의 군대장관인 아비새가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이기를 간청했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통함이 변하여 화가 될 수도 있고, 당장은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가시도 잘 참고 믿음으로 이기면 은혜와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은총의 기회로 삼아 주십니다. 자꾸 인간적인 생각과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지 말고 우리의 가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도록 인내하며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3. 악할 때 곧 강함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의 각종 병을 낫게 해 주었고 기적을 많이 베풀었으나 자기의 육체적 가시는 뽑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을 불러 큰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26-29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고백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역설적인 것이 많습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리라(막8:35)”,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7, 10:44)”,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에 임합니다. 교만하고 높은 자리에는 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고 받아 드릴 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약함의 축복
고후12장 1~10절 / 배영진목사
오늘은 약함의 축복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격적인 약점이 아니고,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안주신 것,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내게 없는 것, 있어도 좀 많이 부족한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해봅니다. 가난이나 질병이나, 열악한 환경, 이러한 연약함을 유식한 말로 한계상황이라고 말합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 문제들이 있어요. 한계상황입니다. 내가 해결하기 힘든 상황들이 불쑥 터지고 그것 때문에 마음을 많이 쓰고,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도통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제목, 그 연약함이 사실상 큰 유익이 있고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축복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오늘, 약함에 유익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건 역설입니다. 약함에 유익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이 많습니다. 세상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많습니다. 세상에서의 상식은 뭔가요? 약한 것은 도움이 안되는 것! 세상은 강해야 살아남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생존경쟁이 심한 사회이기 때문에 강한 것이 좋다, 약한 것은 나쁘다, 이 인식이 강력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약한 것이 좋은 것이 있다, 매우 유익이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늘 10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정리를 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이 들을 때 그렇게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고 해도 그걸 아직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지 모릅니다. 사도바울도 이 약함의 유익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단번에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냥 말씀 들으시면서 가슴에 담아두세요. 그리고 살다가보면 깨달음이 옵니다. 아 그 말씀이었구나! 오늘 사도바울 인생에 찾아온 가장 큰 연약함은 뭔가? 그것은 몸의 질병입니다. 내 몸에 육체의 가시가 박혔다 그래요. 이 가시가 얼마나 미치도록 괴롭혔는지 ‘사탄의 하수인‘이다 라고 말합니다. 왜 나에게 이게 왔는지 이해가 안되었어요. 하나님의 뜻이 잘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큰 혼란은 항상 이겁니다. 성경의 역설입니다. 나를 하나님께서 멋지게 쓰시려면 건강하게 만들어주시고, 자 그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나의 일을 하거라 알겠지? 하실 수는 없었는가? 왜? 이렇게 나를 몹쓸 몸상태로 만드시고 주님의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인가? 이건 아니다! 이 자기 연약한 문제를 갖고 씨름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왜 이것이 내 삶에 찾아왔는지 그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어요. 오늘 각자 자기 연약함, 자신의 열악한 상황을 갖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자기가 원치않는 방식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크게 깨닫게 하신 비밀이 있었습니다. 아 바로 그거였구나! 내 연약함속에 이런 유익이 있었구나!
첫째, 연약함은 겸손하게 한다.
다같이 7절 읽겠습니다.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 몸에 가시를 주신 뜻이 뭡니까? 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이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제가 볼 때, 이것을 깨닫고 나서 사도바울은 참으로 속이 시원했을 것이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거 깨닫고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 사도바울은 이 연약함을 얘기하기 전에 1절부터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강력한 것을 말합니다. 그에게 강한 것은 엄청난 체험입니다. 바울은 말할 수 없는 환상 신비한 체험, 셋째하늘 낙원에 가는 체험을 합니다. 2절 보면 14년전에 있었던 계시를 말합니다. 얼마나 놀랍고 강력한 체험이었는지 그는 자기가 몸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말합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은사였습니다. 저는 오늘 바울의 신비한 체험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이 체험이 사도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가장 강한 것,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이걸 말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안주시는 강점을 주십니다. 이게 은사이기도 하고 체험이기도 하고 재능이기도 하고, 우리가 자란 가정배경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도 주시고, 높은 지능 아이큐도 주시고, 좋은 성격도 주십니다. 강점을 안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으로 주님의 일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이 강점을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내게는 이런 은사를 주셨어, 이걸 잘 활용하여 내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강점과 은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이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주신 것은 바울로 하여금 세계만방에 확신을 가지고 복음전파를 힘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뜻을 정확히 잘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강점을 부어주신 뜻은, 이걸로 하나님의 일을 잘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바울사도에게 아주 약한 것 하나를 주신 것입니다. 그게 사도바울에게는 몸의 질병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게 내 몸에 가시이다, 이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다, 너무 심하게 자기를 괴롭히는 질병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설명했습니다만, 그 질병은 심한 안질이었다는 설도 있고, 혹 정신질환 즉 간질병이었다고 말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왜 질병이 내게 왔는지 이해가 안되고, 이게 복음전파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인생과 그 사역에서 최고로 큰 깨달음 중 하나가 이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이 연약함, 왜 이 한계상황, 왜 이렇게 심한 몸의 연약한 질병이 내게 붙어있게 하셨는가? 바울의 의문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왜 이 상황을 바꾸어주시지 않는가? 여러분 우리가 나의 연약함을 갖고 씨름하고 몸부림칠 때, 돈이 없어 궁핍할 때, 몸이 약해 맘대로 일할 수 없을 때, 가시같은 이웃과 함께 있어야만 하는 상황속에 처했을 때, 그래서 답답하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해본다는 것 무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기도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깨달음이 왔어요. 만약에 내게 강점만 있었다면, 내게 놀라운 은사만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다 내 손에 다 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그때 무슨 깨달음이 와요? 아 그랬다면 난 하나님앞에 교만한 사람이었겠구나! 하나님은 이걸 아시고 그렇게 나를 낮추셨구나! 내 연약함은 나를 겸손케 한다! 이게 깨달아졌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내가 원하는대로 된다면, 내 모든 조건이 내가 원하는대로 다 갖추어졌다면 내가 지금보다 교만했을까? 집안 좋고 얼굴되고 돈많고 머리 좋고 서울대 수석졸업에 하버드 수석졸업하고 연봉높고, 아픈 데 하나 없고, 시댁 처가 모두 내노라 하며, 모든 것이 다 ok! 다 갖췄다면 내 마음상태가 어땠을까요? 우리는 엄청 교만해지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내 삶에 이 중 어떤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고속도로 속도제한 팻말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대개 110으로 되어있습니다. 빨리 달리는 차는 속도제한 팻말이 싫어요. 그러나 고속도로 달리다가 속도측정 무인카메라를 보면 속도를 약하게 줄입니다. CCTV는 우리로 하여금 속도를 줄이게 만듭니다. 너무 과속으로 달리지 마! 그게 운전속도를 약하게 합니다. 왜요? 사고나고 망가지면 생명을 잃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연약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나를 겸손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계상황을 주십니다. 이것을 바울사도가 처음부터 이해한 게 아닙니다. 바울도 이몸의 질병, 아주 유익도 없고 아무 쓸모없습니다. 떼어내고 싶습니다. 아니 내가 복음사역 열심히 하는데, 왜 그리 방해가 많고 왜 이리 박해가 많고 심한지, 죽을 것 같아 하나님께 물어요. 하나님, 이런 박해가 정말 필요합니까? 그러다가 깨달음이 옵니다. 고린도후서 1장, 도대체 왜 좋은 일 하는데 이렇게 박해와 핍박이 심한가? 자기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거 같이 죽을 것 같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깨달음이 왔어요. 아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의뢰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이것을 정리합니다. 큰 것을 깨달았어요. 내 앞에 방해가 많은 이유를 알았다.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여러분 교만은 뭔가요? 하나님앞에서 내가 알아서 하겠다! 나는 하나님 도움 하나 없이도 뭐든지 잘 할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 교만이 우리 인생에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 고속주행입니다. 교만은 인생패망으로 가는 고속도로입니다.
바울사도는 정말 자기 몸의 연약함을 가지고 왜 이것이 찾아왔는가 몸부림치며 씨름했습니다. 기도도 해보고 이것만 없애주시면, 해결해주시면, 더 잘해볼께요! 그랬는데, 그것은 떠나가지 않았고 놀랍게도 그 대신 깨달음이 왔어요. 아, 이것이야말로 나를 겸손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내가 교만하면 패망으로 갈 것이 틀림없다고 여기셨구나 나를 버리시지 않으려는 장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터에서 우리는 정말 가시같은 이웃을 만납니다. 날마다 내 몸을 찌르는 것처럼 그를 우리 옆에 두십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바울사도의 깨달음이 여러분에게 오기 바랍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사람들을 내 곁에 두심으로 하나님은 나를 교만치 않게 하십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을 깨닫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둘째, 연약함은 하나님을 드러낸다.
8절 다같이 읽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의 가시같은 연약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담즙질입니다. 일이 잘 돼야 직성이 풀려요. 하나님, 일 잘 하고 싶어요. 일좀 잘하게 제 몸 건강하게 만들어주시면 안됩니까? 그 문제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의 가시, 자기 몸의 연약함갖고 세 번이나 없애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왔는데 N0!로 왔어요. 9절입니다. 기도응답은 세가지로 옵니다. 즉답, 연답, 거절! 즉답은 즉시 들어주시는 겁니다. 그래 알았다! 이것 필요하지? 연답은 연체되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 이루어주겠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시간이 흘러서 보니 다 들어주셨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은 하나님께서 NO! 하시는 겁니다. 오늘 바울 기도, 연약함 없애주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 그 책 읽어보셨죠? 거기 보면, 제리 싯처가 하나님께 울부짖은 기도가 뭐냐면, 하나님 왜 데려가셨나요? 내 아내, 내 딸, 믿음도 좋고 경건하며 사랑스럽고 아주 괜찮은 내 사랑, 도대체 왜 데려가셨죠? 여러분 이 문제는 어느 누가 몇마디로 위로해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리 싯처, 그의 한계상황은 뭡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데려가신 것이예요.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너무나 감당이 안되는 한계상황이 그에게 온 겁니다. 저도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그 인생에 너무나 큰 한계상황입니다. 부모님이 일찍 잃으면, 그게 우리 인생을 얼마나 약하게 만들어버리는지 몰라요. 제 가장 친한 친구 남경훈, 마흔 하나에 하늘나라 보냈습니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그 사실이 마치 가시처럼 저를 찔렀어요.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 연약함은 이런 겁니다. 상실, 질병, 부도, 파산, 모두 다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크고 작게 다 이런 상실의 아픔이 있는 줄 압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봅니다. 왜 데려가셨어요? 다 잃었어요. 다시 돌아올 수 없을까요? 죽음이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절망적인 일이 없죠. 내가 죽으면 천국가면 되는데 문제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날 죽는 거죠. 그것이 고통인 이유가 뭘까요?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건강을 잃은 상태로 삽니다. 가시같은 고통이 날마다 붙어다녔습니다. 가족 중 중증장애가 있거나, 뇌사상태로 중환자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호자에게 이 무력감이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도박중독 알콜중독으로 사채를 뒤집어쓰고 병으로 돌아가시면 남은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만 남겨지게 됩니다. 그때 가족모두에게 연약함이 몰려와 안물러갑니다. 그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즉각 그 문제가 해결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항상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주십니다. 바로 그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주시는! 그 은혜가 사도바울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바울아 아니다, 이 연약함이 네게 있는 것이 더 유익해! 내 은혜가 네게 부족하지 않아! 왜 그럴까요?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이 뭘까요? 세 번 기도중에 아마 깨닫지 못했을지 몰라요, 기도한 후 상당히 시간이 흐르고 그 이후 깨달았을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해진다! 라고 덧붙여주십니다. 마침내 바울이 깨닫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 이렇게 약함에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시구나! 이 고백이 터져나오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이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삶에 가장 힘든 그것이 뭔가요? 가장 연약하게 여겨지는 그것이 뭔가요? 가장 폼이 안나는 것, 어디다 대놓고 자랑하기 힘든 그것이 뭔가요? 바울의 몸에 가시와 같은 연약함, 날마다 내 삶에 자존심을 뭉개는 것이 뭔가요? 한가지 비밀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걸 깨닫고나면 여러분이 말할 수 없이 자유로워집니다.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시려는 것이구나! 그리하여 바울사도는 마침내 자기 약한 것을 자랑하는 믿음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강점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그 강점을 가지고 일하십시오. 그것을 갖고 마음껏 섬기십시오. 은사는 그걸로 섬기라고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집을 주셨거나 건강을 주셨거나 언변을 주셨거나 좋은 성격을 주셨거나, 풍부한 물질을 주셨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부어주신 은사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약점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연약함을 정리합시다. 만약에 내게 강점과 신비한 체험과 재능만 가득하고 약점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난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강점만 있었다면 교만해졌을 것이다 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여러분, 제가 제 인생에 만약에, 아주 건강한 부모님과 아주 유복한 가정환경, 돈도 많고, 얼굴과 키와 몸집이 190쯤 되고, 고생이 뭔지 모르고, 공부잘해서 엘리트코스만 밟고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따고 목사가 되어 목회했다면, 연약함을 하나도 모르고 여러분의 목사로 산다면, 저는 어땠을까요? 아마 여러분이 호소하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거의 헤아리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전혀 그런 코스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배고픔이 뭔지 알고, 상실감과 소외감과 고독감과 열등감과 실패감이 뭔지 제가 그 맛을 보았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의 고통, 부모로 인하여 겪는 고통을 들을 때 제가 이해가 되요. 하나님은 연약함을 통하여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약할 때에 강하다고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이 진리입니다. 이번 한주간,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온 연약함을 정리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오늘 두가지로 우리 연약함의 축복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약한 것을 주신 것은 나로 교만치 않고 겸손케 하려함입니다. 내가 이런 연약함을 지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에 도움이 됩니다. 10절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자기 약한 모든 것, 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곤고함을 기뻐하며 자랑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합니다. 약할 때 주님이 연약한 나를 통하여 더욱 강하게 일하신다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연약함의 축복입니다. 나의 연약함으로 주의 강하심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복음의 역설: 약할 때 강함
고린도후서 12:1-13 / 김형익 목사
말씀내용
이제 고린도후서는 절정에 왔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중심 메시지가 오늘 이 본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놀라운 역설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비밀을 제대로 깨닫기까지는 결코 복음을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바로 이 복음의 역설이 경험되고 경험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11:1에서 시작한 바보 연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끝나는 12:13까지 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리석은 자랑을 계속합니다. 그가 이제 자랑하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지극히 큰 계시 체험에 관한 것입니다.
1. 바울 사도가 환상과 계시 체험을 자랑하다(1~6).
바울 사도는 머뭇 머뭇하면서 굉장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환상과 계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A. 체험을 자랑하기를 주저함: 삼인칭 사용…
그런데 많은 성경 독자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표현이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마치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삼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절). 그리고 이제그의 체험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바로 바울 사도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고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왜 이렇게 3인칭을 써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바울 사도가 얼마나 지금 이 체험에 대한 자랑(?)을 주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1절에서도 말하기를, ‘부득불’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결코 유익을 주는 것을 없을텐데 해야만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거짓 사도들이 주로 했던 것이 자기들이 가진 입신이라든지 무아경과 같은 신앙체험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자랑으로 자신들을 보통 교인들과 구별하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사도됨을 확증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들에 대하여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는 과정에서 이 일을 굳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른 생각하는 것 처럼 사도가 자기 사도됨의 증거로서 이런 체험을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체험은 14년 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 바울의 연대를 추적해보면 아마 그가 고향인 다소에 있거나 아니면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 안디옥에 있었을 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한 번도 이 체험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에도 처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말하는데, 보통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우주관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하늘을 삼층 구조로 이해하여 첫째 하늘은 대기권이고, 둘째 하늘은 별들의 장소 그리고 세째이자 마지막 하늘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이해입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이곳은 다른 말로 낙원이라고 4절에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2,3절). 말하자면, 에녹이나 엘리사가 하늘로 올려간 것 처럼 육체를 가지고 올라간 것인지 아니면 영혼만 그렇게 올려간 것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체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체험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 외에는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쓰라고 했기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지만, 바울 사도의 경우, 이 엄청난 체험을 표현할 수도 없고 또 말하도록 허락받지 않은 것들을 들은 것입니다(4절). 즉, 이런 체험을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였지 그로 하여금 자랑함으로써 자신의 경건을 증명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을 하면서 겪게되는 수많은 환난과 핍박을 내다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으로 그런 체험을 주셨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이 체험을 그저 개인적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B. 체험은 판단의 기준인 가르침과 행위(삶)를 대신할 수 없다(6절).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이 하는 것처럼 자랑을 하고자 했으면 이 체험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사도됨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주고자 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사도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르지 않은 틀을 사용하게 된다면 고린도 교회는 언제라도 다시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즉, 그가 참 사도냐 거짓 사도냐 하는 것, 혹 그가 참 영적 지도자냐, 거짓 영적 지도자냐 하는 것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체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6절에서 말합니다.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즉, 너희가 나를 보는 것과 나로부터 듣는 것으로 나를 판단하여야지, 나의 체험으로 나를 판단하는 것은 바른 잣대가 아니고 바른 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체험이 진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진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바울 사도가 앞에서 11장 전체를 통하여 강조하였던 바, 가르침과 삶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상고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적 지도자들이 자기가 가진 체험을 통해서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고 또 무분별한 사람들은 그 체험으로 지도자들의 경건을 측정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각한 무지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체험담은 가르침과 삶(행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2.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자랑하다(7)
바울 사도가 사실 이런 엄청난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그와 너무나도 대조되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체험담을 통해서 거짓 사도들을 단번에 쓰러뜨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그렇게 할 의도였다면 바울 사도 자신이 위에 언급한 원칙과 잣대를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는 이미 복음의 역설이 아닌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일테니 말입니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계시가 엄청났던 것 만큼이나 그와는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한 가지?자기의 육신의 가시를 충격적으로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시 체험을 말하는 1~6절에서 3인칭을 씀으로써 자신을 조금이라도 숨기려고 했던 바울 사도는 이제 7절부터 1인칭으로 화법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A. 지극히 큰 계시에 따라왔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육체의 가시는 지극히 큰 계시와 함께 왔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는 그 계시 때문에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계시의 체험이 육체의 가시의 원인이고, 육체의 가시는 계시 체험의 결과인 셈입니다. 말하자면 그 ‘계시와 가시’는 하나의 패키지로 주어진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 사도에게 주어진 것은 그 엄청난 계시 체험으로 인하여 바울 사도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B. 사단의 사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셨다.
또 이 육체의 가시를 설명하면서 바울 사도는 사단의 사자(messenger)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사단이 바울 사도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낙심케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보낸 가시이지만, 그것을 바울에게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당장 내 삶에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나쁜 것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라는 인식처럼 나이브한 것이 없습니다. 욥이 이해하였던 것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라는 것이 성경적 신앙의 내용인 것입니다. 물론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 열심히 욥을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 좋은 일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는 일입니까? 일부는 하나님의 손에, 일부는 마귀의 손에 있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겠습니까? 성경은 그런 사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C. 육체의 가시의 정체: ‘바울을 낮추고 교만할 수 없게 만드는 힘’
그러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육체의 가시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분명치가 않습니다. 학자마다 다들 다양한 의견들을 개진하였습니다. 혹자는 고린도교회의 대적들이 바로 육체의 가시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 메신저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11:15에서 그 대적들을 ‘사단의 일군’이라고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입니다. 또 혹자는 더 일반적으로 해석해서 바울 사도를 계속 쫓아다니며 핍박했던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고도 보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육체의’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육체적 연약함이나 질병의 차원에서 해석을 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생했다고 알려진 ‘안질’이 아닌가, 혹은 ‘간질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식으로도 추측을 합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여기서 은유적으로 표현을 했기에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언급하는 육체의 가시는 ‘바울 자신을 낮추고 교만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을 스스로 겸손해지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결코 교만해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지극히 큰 계시를 체험한 바울 사도에게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계시 체험이 너무나 놀라워서 누구라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없을만한 일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에게 육체의 가시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지 않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엄청난 계시의 체험이 주어진 것이 사실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논지는 건강과 부의 복음을 전하고 질병과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증거라고 가르치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뒤집는 말인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8~9절)
A.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를 즐거워하지 않았다!(8절)
바울 사도는 결코 육체의 가시를 즐거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떠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없애달라고 구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메조키스트(masochist)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인내’의 미덕을 통하여 수양을 쌓는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는 고난 자체를 절대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을 주세요. 나는 그것이 좋습니다’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없애달라고 구했습니다.
바울의 이 기도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세 번을 기도하셨고, 예수님의 원하시는 바가 응낙하심을 얻지 못한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잔을 피하기를 일차적으로 원하셨다는 점에서만 그런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거절에 대한 설명: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다.’(9절)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의 이 기도에 대하여 ‘no’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그냥 들어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설명의 형태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9절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의 간구에 대하여 주신 이 응답의 말씀이 바로 고린도후서 전체의 절정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약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환난이 그치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1:6~9; 4:8~11; 7:5; 11:30; 12:5). 그는 성품적으로도 약한 사람이어서 비난을 많이 받아야 했습니다(10:1,10; 11:6). 육체적 시련도 물론 많았습니다(4:7,16; 5:1; 11:24~27; 6:4~5, 8~10). 몸은 맞아서 약해졌고 명성은 갈가리 찢기었으며 메시지는 거부되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끼여있는 포로로 자신을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 그림이야말로 그 자신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적절한 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건강을 얻고 행복한 가정을 누리고 물질적인 부요함을 가질 수 있다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 실감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복음의 역설은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잃었는데, 남들이 말하는 행복한 가정도 이루지 못했는데, 물질과 소유의 면에서도 가진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나 고난을 당하는 자는 겸손한 자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 반대로 겸손한 자는 다 고난을 당하는 자다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할만큼 인생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내 삶에서 이것만 없으면 되겠는데’ 라고 생각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서 우리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있어서’가 아니라 ‘없어도’ 그리고 ‘없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깊이 뼈저리게 경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은 정말 무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지금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지극히 큰 계시 체험이 아니라 그 계시 체험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가시인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떠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족하고 족하고 족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이 내가 약한데서 비로서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함은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고 그 능력을 온전하게 드러내시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 바울 사도가 약함을 자랑하다(9b~10).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입니다(9b절).
A. 약함을 기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10절).
바울 사도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여전히 그를 괴롭히지만, 그는 기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합니다. 여기 있는 약함의 목록들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에 걸리는 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고 나타나도록 사용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서 더 이상 그의 계시 체험을 꺼낼 때처럼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아무런 주저함이나 망설임없이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B.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하여(9b절)
그가 그렇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자기의 약함을 제대로 인식했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한 존재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 언제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능력을 믿거나 그것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약했기에 늘 그리스도의 능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 ‘머물게’란 말은 하나님께서 장막(성막)을 치고 거기 거하신다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신학적 용어입니다(요 1:14; 계 7:15; 21:3).
그리스도의 능력이 언제나 내게 머물게! 자기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약함 속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게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C. 내가 약함이 곧 강함이기 때문에(10절).
바울 사도가 자기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이유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경험하셨습니까? 깨달으셨습니까?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깨닫고 경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알려진 유명한 목사나 전도자나 선교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명의 그리고 고난받는, 가난하고 병약한 하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오셔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
5. 약함이 곧 사도됨의 증거이다(11~13절): 어느 한인교회의 목사 청빙 조건
바울 사도는 자신이 소위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 11~13절에서 말하면서 유명한 ‘바보연설’을 마칩니다. 자신이 거짓사도들인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은 것은 그가 경험한 지극히 큰 계시 체험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나게 만드는 그의 약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는 자기가 그들이 주장하는 강함의 관점에서 그들과 비교하고 키재기를 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여전히 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 약함이야말로 그가 그리스도의 참 사도임을 증명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바울 사도가 제시하는 원칙과 기준이 아닌 세상이 주는 원칙과 기준에 의해서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유명한 자나 성공한 자, 혹은 승자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유형이라면 여러분은 절대로 바울 사도를 좇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한 이민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서 인터넷 기독교 사이트에 올린 광고를 좀 소개하고 싶습니다.
? ***한인교회 담임목사 청빙광고
*** 한인교회는 " 세계에게 가장 모범된 교회가 되게 하소서 " 란 표어를 가지고 세계 선교와 전도에 힘쓰며 아름답게 성장해온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13 에이커 대지에 아름다운 자체성전을 가지고 있으며, 256에이커 ( 35만평 ) 대지에 기도원을 세웠으며, Youth Vision Center ( 체육관/교육관 ) 건축을 준비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본 교회 당회장 *** 목사님께서 정년이 되셔서 원로목사님으로 추대됨에 따라 말씀, 능력, 성령 충만하신 담임목사님을 다음과 같이 청빙합니다.
1. 기도에 영적 능력이 있으신 분
2. 설교에 은사가 있으시며 성경에 깊은 이해가 있으신 분
3. *** 한인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정통 신앙을
가지고 계시는 분
4. 영력, 인격, 지력, 체력을 갖추시고 도덕적이며 교회의 영적질서
를 지키시는 분
5. 큰 Scale의 Vision을 갖으시고 포용력이 있으신 분
6. 담당 교회를 부흥 성장 시키셨던 분
7. 미주지역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5년이상 목회 경험이 있으신 분
8. 보수 신학 교육을 받으시고 박사학위를 소지 하신 분
9.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소유하신 분
10. 가정이 성경적으로 모범이 되시는 분
여기 이 조건은 바울 사도를 대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극히 큰 사도들’인 거짓 사도들을 대변하는 조건들입니까? 조금 심하다 싶긴 하지만 이것은 많은 교회에게 이미 보편적인 조건들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 사도는 물론 이런 조건 하에서는 그 교회에 서류를 낼 조건도 되지 못하였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랬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성경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해가는 단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A.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은 더 ‘센’ 체험을 중독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결국 ‘거짓’의 위기로 데려갈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체험이 신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암시를 줍니다. 체험은 신앙을 재는 척도가 아닙니다. 더우기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 형태는 체험을 신앙의 잣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더 강하고 더 자극적인 체험을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중독적일 정도로 나타납니다. 결국 이런 신앙 형태는 사람을 거짓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더 나은 체험을 가지지 못하게 될 때, 더 나은 체험을 모방하고 만들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체험을 추구하는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체험을 설명하면서 조금도 이런 입장을 지지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거짓 사도들이 가르쳤던 신앙의 내용이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B. 하나님은 다 주시지 않는다. 지극히 큰 은혜와 가시를 함께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족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큰 은혜를 주시면 가시도 함께 주십니다. 이것은 거의 패키지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인생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지’라는 인식을 할 수 있는 ‘약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런 인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정직하게 없으십니까? 하나님께 약함의 은혜를 진정으로 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족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란 사실을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C. 약함을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자아 중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자기 연민과 자기 과시).
우리는 자기 중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신앙도, 하나님도 다 자기 또는 자아를 중심으로 설명되고 해석되고 이해됩니다. 거짓 복음은 언제나 자아를 부추깁니다. 자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자기 연민이나 자기 과시의 두 극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수준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엔 ‘약함’이 자리할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질 수 있는 가능성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는 것도, 약할 때 강해지는 것도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즉,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 복음입니다. 이 거짓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비교하고, 경쟁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 보면 기분 나쁘고, 못난 사람 보면 살아나고 하는 끝없는 되풀이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함을 자랑하게 하는 복음은 우리를 자아 중심으로부터 자유하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연민이나 자기 과시의 두 점 사이에 묶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약함을 자랑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D.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제1호 전시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인정해 줄 만한 능력을 가질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조건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우리가 의존하는 것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고난, 우리의 부적당함, 우리의 무능함, 우리의 실패, 우리의 두려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제1호 전시관이 되는 장애가 아니라 바로 조건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1등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 1등이냐 꼴등이냐를 넘어서서 내가 무엇을 의지하여 살며,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하는가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 세상의 사람이 되는가를 가늠하는 분깃점이 되는 것입니다.
E. 십자가가 하나님의 약함이다.
약할 때 강함이란 말은 십자가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우리의 약함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셨고(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죽으셨으며(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여러분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기준은 십자가에 달리신 약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냅니까, 아니면 세상의 성공과 강함과 잘남을 대변합니까?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숫자의 자손을 가진 족장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불임의 사라와 그 남편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성한 이집트 민족을 부르시지 않고 노예들인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잘 알려진 학식있는 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무명의 무학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선교사로 이방인을 부르시지 않고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유대인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는 조건이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머물게 하는 발판이며, 약할 그때에 강함을 알게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주셔서 여러분과 저와 그리고 우리 교회 가운데 이 복음의 역설, 약한 것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은혜를 알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 족한 것입니다. 아멘.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삽시다
고후 12:1-10 / 조정헌목사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의 영향으로 겸양지덕의 가르침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을 굉장히 쑥스러운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제가 뭐 자랑할 게 있나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나를 알리는 시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이 잘하는 부분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하고 자랑을 합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뭘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가 잘 되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을 만큼 아주 형편없는 것들을 '자랑거리'로 들고 나와서 자랑하는 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신비한 체험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삼층천 즉 천국을 체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지식적으로도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혈통이나 가문도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바울은 그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지식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내세울만한 것들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음거리밖에 안되는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면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가짜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도 목격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절대로 사도가 될 수 없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오직 사도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참된 복음이라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을 결코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럴 때에 바울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는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혀 다른 자랑거리를 주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자랑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핵심이 되는 신앙고백이 뭘까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도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곳에서 바울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미워하고 핍박했던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이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4에 보시면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사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과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내 삶 속에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 뭘까요? 바로 내 삶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즉 지금도 내 삶에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신앙은 삶의 현장에서, 즉 삶의 구석구석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때도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은혜를 받았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설교를 들을 때에 그 말씀이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졌다는 말입니다. 내가 찬송을 부를 때에 그 찬송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경험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확신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알고 늘 확신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이고,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삶이고,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 확신이 바울로 하여금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7:23-25에 보시면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에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배가 거의 침몰하기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기 위해 배에 있는 화물도 다 버리고, 식량도 다 버리고, 14일 동안이나 절망가운데 있을 때에 바울이 했던 고백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전능자이심을 믿었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바울과 모든 일행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입니다. 저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가를 곰곰히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만한 심성도 아니었고 자격도 전혀 되지 못했습니다. 구원이 뭔지.... 천국이 뭔지도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해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숨기고 싶은 부분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특히 약점은 자랑할 만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은 것이 통례입니다. 바울에게도 숨기고 싶은 약점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떨쳐내 버리고 싶은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을 너무 힘들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이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의 그런 기도를 들으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진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은 평생 그 질병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연약한 삶을 살았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연약한 바울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억지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강한 것을 자랑하지만, 강한 것이 오히려 나에게 약점이 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생각하고 조금만 달라도 거부하고, 공격해야 될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미워하고 탄압하고 증오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랬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썩은 나무토막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노자가 제자들에게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것이 얌체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사람들은 모두 강한 것을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자는 "강하면 부러진다, 하지만 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설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부드러운 나무는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나무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히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한 사람들이 오히려 건강하게 장수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병을 앓아본 사람들이 병에 대한 충격이 훨씬 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왜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라고 고백했을까요? 바로 거기에 진리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라]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돌려 대라]라고 했습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를 택해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없는 자 같으나 남을 부요하게 하는 자로다]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축복을 받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진리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진리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시면 "약한 자 같으나 실상은 강한 자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모든 것이 신비 그 자체입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고난이 고난일 뿐이요, 실패가 실패일 뿐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이 오히려 축복이 되고, 실패가 오히려 성공이 됩니다. 질병이 오히려 나에게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사야 40:29에 보시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해주신다."라고 했습니다. 또 이사야 35:3에서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해주신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연약한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이고... 그 연약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람이 더 많은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짐승은 약한 새끼들은 도태를 시킵니다. 강한 것들만 살려서 키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에게 더 큰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오래 전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은행대출금을 갚기 위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학생을 납치해서 금품을 빼앗고 몸값을 요구했다가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찰조사 결과 그 학생이 평소에 자기 집에 돈이 많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돈을 자랑한 그것이 결국 무서운 범행을 불러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허탄한 것들을 자랑하면 그것을 하나님이 언제 가져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시편 36편에도 보면 [악인들은 자신의 죄악을 자랑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보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합니다. 목욕탕에 가보면 몸에 그려진 문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웅담을 늘어놓으면서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한 번 엎드러지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능력도 없고... 한마디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도 보면 우리와 똑같은 성품, 똑같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오히려 더 바라보고 의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날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보통 뭘 자랑합니까? 자신의 건강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외모를 자랑합니다. 자신이 잘나고 똑똑한 것을 자랑합니다. 단점보다 장점을 자랑합니다. 약점은 될 수 있으면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약한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기도응답도 없고... 고통은 계속되고...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바울은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10절 말씀입니다. 10절에 보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좋지 않은 부분들만 골라가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것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누구를 위해서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나의 연약한 부분을 자랑하고 감사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은혜이고, 그런 은혜를 알고 누리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 찾고 의지하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가 그 약점으로 인해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 때문에 고난당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오늘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성도들은 지금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이 더 값지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금보다도 더 빛나고...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강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바울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복음을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는 바울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더 편하게 누리면서 살 수도 있는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목숨을 걸게 하고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복음에 생명이 들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위해 순교도 각오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자존심이고, 더 나아가 성도들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이런 놀라운 역사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말라.’라고 협박할 때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매 맞는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갇히면 오히려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도 보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매인 바울이 두 팔을 들고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왕의 신분이고 한 사람은 죄수의 신분입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쇠고랑을 찬 죄수 바울이 "나는 당신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소. 오히려 당신들이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소."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누구를 만나든지 "당신들도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라고 하면서 세상의 권력을 부러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하게 살았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헐벗고, 배고프게 살았지만,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만 했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는 것이 더 귀하다고 믿었던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보면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라고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이것이 빠져버리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연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연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함께 해주시고, 바울을 강하게 해주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우리를 강하게 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점점 식어가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희생하고, 헌신하고, 손해보고, 고난 받기를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볼 각오를 하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고난 당할 각오도 하십시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나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세도 내가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에게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항상 자신감 있게 살아갑니다. 시편 46:1-3에 보시면 그러한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얼마나 확실한 고백입니까? 이것을 우리는 확신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머리로만이 아니라, 내 영혼 저 밑에서부터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이나 시련이 와도 [올 테면 한 번 와 봐라!] 하는 식으로 더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우리를 더 진실하게 만들어주고, 더 겸손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야 우리가 오늘 바울처럼 "내 약함이 곧 강함이라."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바울처럼, 또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으로 인해... 복음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난이 오히려 기쁨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평온교회 안에도 쇠고랑을 차고 외로이 복음을 전했던 바울과 같은 성도들이 많아져서 다시 세상에 들어가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축복의 통로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이동휘목사 / 고후 12:1-10
1. 사람마다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학벌, 최고의 명문가, 최고의 경력 등 남부러워할 만한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즈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자나 손녀 자랑하려면 돈내고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내고서라도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입니다. 자기 손자에 대해 좀 성장이 떨어진다든가, 좀 못생겼다든가 등의 표정이나 표현을 하면 못내 서운해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세상에 내놓을만한 자기 장점이나 강점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두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15:8)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학벌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통 히브리인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정통 유대교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명문 가말리엘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로 최고의 학위를 가졌습니다. 더구나 그는 당시 경건파였던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12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로는 다른 제자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신령한 은혜, 환상과 계시 등을 체험하여 영적으로도 우위를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후12:1-4)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된 후, 무려 14년 동안 침묵했던 신비스러운 영적 경험을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 신비스러운 경험은 셋째 하늘, 즉 삼층천에 이끌려 간 경험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다른 사도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부득불 이러한 신비스러운 경험을 말하게 된 이유는, 베드로 등 12제자들만을 정통 사도라 할 수 있다며, 바울이 정통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도의 정통성을 의심하며 자기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학벌과 가문과 그리고 체험들을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고,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장점을 자랑한다면, 바울도 인간적인 장점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펙으로 말하면 바울은 대부분 어부와 세리 등 천민 출신들인 12제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결론은 고린도 후서 11:30 말씀과 같이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했습니다. 사실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약점과 단점 등을 감추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어떻게 약한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어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사도 바울이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혹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어 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영육간에 많이 있다할지라도,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는 은혜와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당당한 율법사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의 지도자로서 세도가 굉장했고, 사회적으로도 강자, 요즈음 흔히 하는 말로 ‘갑’으로 살아갈 수 있는 로마의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후로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장점들은 걸레조각, 쓰레기 같았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율법박사로 존경받았던 바울의 의(義), 바울이 내세우는 의는 찬란한 태양 아래 있는 촛불처럼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자신이 가장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꽃같이 타오르는 공의의 주님 앞에 설 때, 사도 바울 자신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설 때 바울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자랑할 수 없었고, 또 사실은 무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육체를 자랑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신의 의나 율법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의 은혜를 안 후에는, 자랑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만 죄사함을 받아 온전히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랑할지라도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전서1:25-31을 보겠습니다.
(고전1:25-31)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서만 영광스러운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것밖에는 자랑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약한 것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한다면 우리의 약한 부분이 도리어 자랑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랑과 자기의 장점을 붙들고 거기서 인생의 재미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자기의 자랑 거리와 자기 장점에 삶의 긍지를 느끼며 살고자 하는 사람은, 십자가 사랑의 깊이와 높이, 그 너비와 길이가 어떠함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의 껍질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엡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장애 요인이 되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다가 실패한 정치가들도 많고, 자기 자랑을 하다가 실패한 학자들도 많습니다. 자기의 미모, 학벌, 가문, 돈을 자랑하다가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자기 자랑하다가 실패한 교역자들도 많고, 늘 자기 자랑을 하다가 시험에 든 성도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을 포기하고 그것을 분토처럼 버릴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의를 경험하고 깨닫고 난 후, 그때까지 자랑하던 모든 인간적인 장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버렸습니다. 빌립보서3:7-9입니다.
(빌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장점을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 앞에 설 때,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 앞에 설 때, 그에게는 약한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약한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함으로써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슴 속 깊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죄의 통증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魁首)라고 했고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다.” 고 했습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은 날마다 자신의 약한 모습들을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날마다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갔습니다. 다윗 왕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며,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하며 사죄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시편51:1-17입니다.
(시51:1-17)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회개할 때 눈보다 더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회개할 때 참된 즐거움이 가지게 됩니다. 회개할 때 깨끗한 마음으로,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멸시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존귀한 성도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상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생활을 통해, 항상 영육간에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가장 존귀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겸손해지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니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전부가 약한 것 투성입니다. 성격적으로 볼 때도 언제나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어서 늘 실수를 잘 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참지 못해서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상처를 잘 주는 약점도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자기는 잘 한다고 한 말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 사랑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도무지 자기 마음을 열지 않고 항상 감추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의 실수가 많은 약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의 약점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위선의 약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약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몸도 어떤 부분은 강하지만 어떤 부분은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약하고 어떤 사람은 위장이 약해서 일생 동안 고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폐가 약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심장이 약합니다. 그와 같이 인간은 다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약한 것을 깨닫고, 약한 것들을 자랑해야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찾게 되며 성령의 도우심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약한 인격과 성품 등이 새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영광된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할 때, 하나님만이 영광을 거두시며, 나의 약점이 드러나서 오직 예수만을 자랑하고 은혜 받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연약을 자랑함으로써, 주 안에서 자랑하게 되고(고전 1:31),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게 하고(빌 3:3), 낮아짐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게 되고(시 20:7), 복음을 전할지라도 내 자신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고전 9:16).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약한 것을 자랑하기는커녕, 그것을 위장하거나, 우리의 약한 것을 갈등 곧 컴플렉스(complex)로 갖고 있기 쉽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장점은 과대 포장하고, 약한 부분은 고의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자기의 약점 때문에 한평생 낙심하고 고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한 부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로워지고 변화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약한 것을 예수님 앞에 내놓을 때, 소망을 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고, 낙심했던 사람들이 삶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약한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상 강해질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여, 나는 할 수 없는 죄인이요, 주여 나는 섰다고 하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요, 주여, 나는 주의 일을 한다고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못했나이다. 나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나이다.”(렘 17:9) 라고 고백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또 우리의 육체 가운데 있는 약한 것으로 인해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그 약한 것 때문에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고 그 약한 것 때문에 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약한 것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칼빈(John Calvin)은 육체적으로 참으로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질병인 기관지 천식으로 일생 동안 기침을 했고, 고질적인 위장병으로 한평생 식사를 잘못 했고, 신경통으로 일생 동안 시달렸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그를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연약한 육체가 주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 그는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신구약 66권을 거의 다 주석했고, 기독교 강요를 비롯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한평생 종교 개혁자로서, 설교자로서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육간에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부터는 약한 것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능력이 약한 데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약할 때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할 때가 실상은 강할 때입니다. 자신의 약한 것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약한 것 때문에 찬송하고, 약한 것 때문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약하다고 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면, 예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주 안에서 강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약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히 회개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어 인격과 성품, 그리고 삶이 온전해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머물러 있는 능력있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약함과 그리고 역경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심지어 궁핍과 박해가 따른다해도 오히려 그것들을 기뻐하는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강함이 항상 함께 하시어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시와 영광
고후12장 1~10절 / 이정익목사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생각하지도 않았던 어려움이 일어나고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고난을 사람들은 시험이라 말하고 십자가라 말하고 가시라고도 말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 고난을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이 가시가 다 있습니다. 이 가시는 삶이 주기도 하고 환경이 주기도 하고 이웃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자식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천재지변이 제공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끊임없는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이 대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도성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사도이지 예수 사후 제자된 사람이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느냐고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서신서를 기록하면서 첫머리에 반드시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썼습니다. 그것은 사도성에 대한 시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단들의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이단은 두 가지 부류였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였습니다. 이 유대주의는 부활의 복음이 이미 주어져서 은혜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익숙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고 또 그 율법주의가 복음을 희석시키는 일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강력하게 견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신비주의자들이나 거짓 사도들이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신비적인 황홀경에 자꾸만 유혹을 받았고 그래서 신비주의에 쏠리게 되고 유혹을 받았습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황홀경도 있고 환상도 계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신비주의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건전한 신앙에서 이탈하게 되고 그래서 이단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 두 문제를 풀기 위해서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러 갔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셋째 하늘이라는 말은 낙원을 말하고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경험하는 엄청난 영적체험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고도 바울은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그것을 말하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으니까 혹 오해해서 신비주의자로 몰아붙일 염려도 있어서 일체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나서 신비와 계시와 황홀경을 강조하니까 신자들이 현혹되고 유혹받는 일이 발생하자 부득불 이야기 안할 수 없어서 14년 만에 입을 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참 우둔합니다. 조금만 이상한 말을 하거나 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면 그냥 좇아갑니다. 그리고 집에서 집회하고 안수하고 계시 받는다고 야단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그 후에는 일반적인 신앙생활이 무료해져서 자꾸만 산으로 기도원으로 은사집회를 찾아다니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 이상한 신앙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 가시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몸에 가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가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가시는 반대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안질, 편두통, 간질일 것이라고도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계속되는 반대파들의 박해라고 해석하였고 또 성적본능을 억누르는 육신적인 고통일 것이라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만성적인 질병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을 주신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가시에 대해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은 자신이 너무 신비한 내용들을 목격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혹시 교만할까 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가시가 너무 괴로웠던지 세 번 없애달라고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상태로 만족하라는 계시를 받고는 다시는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몸이 괴로울 때 마다 더 감사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가시에 찔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시가 주어져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가시가 나쁜 것만 아닙니다. 그 가시가 때로 많이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고 눈을 뜨게 하는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자기 우상을 깨트리는 일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이 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 이 우상이 들어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것도 “하늘까지 쌓아 우리의 이름 내자“는 동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14를 보면 사탄 루시퍼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하고 호언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자기우상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때로 교만하고 자만하기도 하고 우쭐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때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그 우상이 깨지고 눈이 뜨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나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것이 가시가 주는 은혜입니다.
가시는 욕망을 깨트리는 역할을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 가시가 많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남편이 가시일 때가 있습니다. 남편들이 술에 취하고 중독되어서 깐죽거리고 빈정대고 때로는 사탄노릇도 합니다. 그래서 함께 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웃에 사는 교우가 가시일 때가 있습니다. 또 친척이 가시일 때가 있고 자식이 가시일 때가 있습니다. 그 가시들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을 통해서 뭔가 또 새로운 유익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해서 유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불면 바다를 정화시키고 자연을 존중하게 하고 인간의 무력함을 실감하게 하는 교훈이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암이 무서운 것이지만 그러기에 모두 조심하고 만용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유익도 있습니다. 실패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한사람의 실패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그래서 가시는 때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자기 우상을 깨트리게 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하나님 찾음
가시에 찔리면 참 아픕니다. 마음도 아프고 정신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인생도 아픕니다. 그런데 이 아픔이 참 좋은 것입니다. 그 아픔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바울이 몸에 있는 그 가시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기도를 안 하게 됩니다. 아침잠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시가 생기면 어디라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런 면에서 아침잠이 많은 분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사업이 기우뚱 합니다. 아이들이 사고를 쳤습니다. 회사에서 자리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어떻게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내 몸에 가시가 있어서 없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상태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서운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그 일로 하나님께 더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련 없는 평안은 참 위험한 삶입니다. 가시는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줍니다.
교만하지 않게 하심
실패나 가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게 합니다. 일찍이 실패를 경험하고 시련을 겪어본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실패 없이 승승장구한 사람, 일찍 성공한 사람,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 평생 병원 한번 가보지 않았다고 호언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위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때로 자만하기 쉽고 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한번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은 그렇게 자만하지 않습니다. 쉽게 성공한 사람은 세상의 깊이를 모릅니다. 인생의 심오함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만하고 만용을 부리고 하나님의 경륜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만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러시아까지 진격하려고 했습니다. 전날 밤 사람들을 모아놓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자신감이 넘쳐 과신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귀부인이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나폴레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인, 전쟁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깁니다.” 이것이 자만이고 교만입니다. 아주 지독한 자기 과신입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들도 싫어하지만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모세가 그렇게 오만한 자세로 공사장에 나갔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무술로 연단된 주먹으로 한번 치니까 그만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동족들로부터 칭찬을 기대했는데 그만 고발을 당해서 도망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지 않았습니까. 골리앗이 그렇게 거드름을 떨다가 망했습니다. 세상에 누가 나를 당할 것이냐 하고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렇게 실패한 후 광야생활 하는 동안 자신을 발견하고 비로소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심으로 지도자로 나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경거망동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먼저 그 자만함과 교만함과 우쭐대는 것부터 꺾고 부수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달나라 탐사위해 아폴로 11호에 탑승시킬 우주 비행사를 선발할 때 먼저 1단계로 경력과 이력을 보고 2단계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심각한 위기를 겪은 경험이나 실패를 경험했는가를 본다고 합니다. 이 경험이 없으면 우주 비행 중 돌발 상황 때에 대처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인류문명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눈을 뜨게 되고 발견하고 길을 찾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시 90:5절을 보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버리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시 127: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것도 헛수고요 성을 지키는 자의 수고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형통만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아픔도 주시고 고난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고 가시라고 부릅니다. 바울에게도 그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몸속에 그를 괴롭게 하는 질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9)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서운해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또 몸이 아플 때는 그 아픔을 오히려 기뻐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유를 알고 나니까 그 깊은 섭리와 뜻이 너무 고마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가 약할 때 그때가 내가 강해지는 때”(1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건강하고 복되고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알고 웃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주어진 가시에 찔려 철저하게 약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 깊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건강하고 자신이 강할 때 일의 성과가 나타나고 힘이 솟았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강해지고 힘이 솟을 때는 나에게 가까이 오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한없이 약해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경험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바울 역시 가시로 인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약한데서 오고 주어지고 나타나는 비밀을 체험하고 고백하기를 “내가 약할 때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고백합니다.
때로 태풍이 유익하듯이, 소낙비가 유익하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가시도, 질병도, 실패도 다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또 다른 유익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발견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허점을 활용하십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서 말을 타고 이웃 마을까지 의사를 부르러 갔습니다. 마음은 급한데 말이 잘 뛰지를 못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았습니다. 다급하게 가서 간신히 의사를 모시고 와 보니까 그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면서 세상에 이런 불행한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 보다 더 빠른 수단이 없을까 하고 연구하다가 자동차를 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경험이 새로운 질서를 발명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실 때 이렇게 축복하시고 길을 여십니다.
1950년 미국 사업가 프랭크 맥나마라라는 사람이 주요 고객들을 초청하여 뉴욕에 있는 큰 음식점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만찬이 종료되고 계산하려고 하는데 지갑을 안 가져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생각하기를 선 결재 후 지불방법이 없을까 하고 연구하다 고안해 낸 것이 세계 최초의 신용카드인 다이너스 카드라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와 실수를 인생의 교훈으로 삼습니다. 12제자들도 보면 모두 실수투성이의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허점투성이의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유익을 줍니다. 내게 원치 않는 가시가 주어지고 고난이 주어져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또 뭔가를 계획하시고 합동해서 유익하게 일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그분의 뜻에 내 인생을 맡기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그렇게 외칩니다. “내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아주 성숙한 신앙의 해석과 신앙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찌르는 가시의 의미
고후12장 1~10절 / 김흥규목사
1. '지극히 큰 계시' VS '찌르는 가시'
바울 사도는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가문이 좋았고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신비 체험도 많이 했습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명문가의 엘리트로서 지성과 영성을 두루 갖춘 거인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바울 서신을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탁월한 영성과 지성을 갖춘 대학자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체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자신의 신비 체험을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환상과 계시를 언급합니다. 14년 전에 그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알려진 삼층천까지 올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이 몸 밖으로 나오는 입신(入神)의 경지까지 갔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놀라운 신비 체험을 하게 되면 대개 입이 근질거립니다. 자랑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교만 중에 제일 큰 교만은 영적 교만이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자기는 경험했다는 자부심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신비 체험을 소개하는 바울의 방법이 좀 특이합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 남의 일처럼 3인칭 단수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소개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바울이 말하는 그 사람은 바울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제 3자가 그런 체험을 한 것처럼 남의 일처럼 소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7절부터 10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6절에 보면 바울은 이처럼 놀라운 신비 체험을 자랑하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바울을 평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행여나 바울을 신격화할까봐 두렵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7-9절에 참으로 역설적이고 아이러니컬한 고백을 합니다. 7-9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2. 육체에 가시를 주셔서 찌르시니
여기 '육체에 가시'는 바울이 체험한 '지극히 큰 계시'와는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사탄의 사자, 즉 사탄이 보낸 하수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치를 떤 육체에 가시를 떠나게 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라는 숫자가 완전 숫자일 뿐 아니라 바울같은 대사도가 세 번 씩 기도했다는 말은 40일 금식 기도를 세 번씩이나 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히 자기의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겠지요.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있을 때 하나님께 제거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있을 때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렇다면 바울을 그토록 괴롭힌 가시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바울을 괴롭힌 육체적인 지병과 대적자들, 즉 원수들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질병으로 해석할 경우 간질병과 안질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일평생 지병에 시달린 것 같습니다. 간질과 안질을 다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찌르는 가시'는 육체적인 질병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사자', 즉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인격적인 표현을 쓴 것으로 볼 때 바울의 사도권에 시비를 걸거나 사사건건 바울을 괴롭혔던 대적자로 보는 것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육체에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언급을 안 한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종류의 고통거리를 '육체에 가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에게도 갖가지 가시가 있습니다. 먼저 질병의 가시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몸에 한 가지라고 이상이 없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평생 따라 다니는 지병을 안고 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암에 걸렸다가 비록 완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늘 조심해야 하는 가시를 품고 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손이나 발과 같이 신체 일부에 장애가 생겨서 일평생 장애의 가시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죄책감의 가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 양심에 고통을 주는 가시이지요. 바울 사도는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심지어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가담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바울이 예수를 믿은 뒤, 이와 같은 전력이 바울을 두고두고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과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떳떳한 과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가족이나 남에게 해를 끼치고 아픔을 주어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남길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는 받겠지만 죄책감이라는 상처는 남습니다. 베드로는 새벽 닭 소리를 들을 때마다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기억이 죄책감의 가시가 되어 찔러왔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우리의 신앙을 항상 견고케 하는 데에는 필요합니다. 항상 겸손하게 주님만 붙들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가시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가 찔린 가시는 대부분 사람들을 통하여 오는 사탄의 가시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능욕을 당했고, 모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가운데에도 항상 가시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이 없어지면 만사가 시원할 것 같은데 막상 그 사람이 떠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또 가시 노릇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는 곳에 가든지 '사람 가시' 없는 세상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사라에게는 하갈이 눈엣 가시였지요. 야곱에게는 에서가 가시였고, 다윗에게는 사울이 가시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조차 가룟 유다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시 노릇을 했습니다.
3. 가시를 품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이와 같은 질병의 가시, 죄책감의 가시, 인간관계의 가시 외에도 수많은 가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중요한 것은 찌르는 가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 가시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우리의 반응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무도 힘이 들어서 40일 금식 기도를 세 번씩이나 하면서 그 찌르는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거절이었습니다. 당장 가시를 빼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품고 살라는 것이 주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거절도 응답입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거절도 기도 응답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바울로 하여금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찌르는 가시를 주셨습니다.
7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바울 사도만큼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가 다녀왔다는 삼층천의 신비체험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체험이지요. 바울이 아무리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할 위험성이 다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는 바울이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효과적인 방비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받은 은혜가 많을수록 교만의 위험은 커집니다. 맡은 직분이 중요해질수록 높은 마음을 품기가 쉬워집니다. 복을 많이 받을수록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게 되는 위험이 많아집니다. 찌르는 가시가 있을 때 겸손해지라는 하나님의 표시로 알고 달게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그 가시 때문에 오히려 더 튼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지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로, 약할 때 강하다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바울이 찌르는 가시를 품고 사는 것은 약한 일이지요. 강해지기 위해서는 가시를 빨리 빼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가시를 품고 사는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 족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이 약한 그 순간에 항상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강할 때 아무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약할 때에는 뭔가에 의지합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지팡이를 잡든지 휠체어를 타든지 자기보다 강한 것에 의지합니다. 사람이 어느 때에 하나님을 가장 강하게 의지합니까? 심신이 약할 때이지요. 아무 지혜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받은 환상과 계시나 지식만 자랑하면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늘 교만해지기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일생 동안 찌르는 가시를 품고 살라는 응답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지요.
사람은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잘되는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늘 자기를 괴롭히는 찌르는 가시가 있을 때 항상 하나님께 붙어 있게 됩니다. 내가 약하니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 스스로 강하다는 착각을 할 때 사실상 나는 가장 약합니다. 하지만 내가 찌르는 가시로 아주 약해질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하나님의 손을 붙들 때 나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서 괴로워할 때「천로역정」을 썼습니다. 밀턴은 장님이 되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을 때 상상의 눈을 뜨고서는「실낙원」이라는 장편시를 썼습니다. 「레미제라블」역시 빅톨 위고가 국외로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 집필한 소설입니다. 베토벤은 청각 장애가 와서 음악을 들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작곡을 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 중증 장애인으로서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강해지도록 역사하십니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쓴 러시아의 대문호 어려서 부터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간질병까지 생겼습니다. 심지어 사형수로서 처형되기 몇 분 전에 극적으로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약점을「거룩한 병」이라고 간증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세계도 마찬가지이지요. 몸집이 아주 작은 딱정벌레는 지금도 생존하지만,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던 맘모스는 이미 지구상에서 멸종하지 않았습니까? 약한 것이 강한 법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상하게도 물질과 명예와 건강과 승리를 한 손에 쥐면 변합니다. 교만해집니다. 세속적이 되고 향락적이 됩니다. 교만해지고 방종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실로 사랑하는 자에게 육체의 가시를 줍니다. 자고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배려하시는 특별한 섭리입니다. 찌르는 가시는 변장된 축복입니다. 약할 때 강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도록 만드십니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지요. 만일 가시가 없다면 꽃이 예쁘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막 와서 꺾기 때문에 쉬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선인장에도 가시가 있습니다. 목이 마른 들짐승들이 수분기를 머금은 선인장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구책으로 가시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오신 적이 있는 서울 연동교회를 섬기는 이성희 목사님의 아버지 이상근 목사님이 16살 때 발에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대구 달성공원 느티나무 밑에서 40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병은 낫지를 않고 더 깊어만 갔습니다. 3년 동안 출입을 못하니까 학교에 갈 나이에 학교도 못가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한방약을 붙인 것이 덧나가지고 그만 대학 진학도 못하고 검정고시로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근 목사님은 이렇게 바깥출입을 못 하니까 집안에서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때 방안에서 3년 동안 열심히 성경만 읽은 것이 후에 성서 대학자가 되어서 신구약 성경 전체에 대한 주석을 쓰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장장 60년 동안 발의 통증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1993년 이 목사님이 은퇴하면서 존경하는 외과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발뒤꿈치에서 1cm의 머리카락 굵기의 철사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맨발로 다니다가 철사에 찔린 것이 발속에 들어가서 일평생 찌르는 가시가 된 것이지요. 이상근 목사님이 발 수술을 받은 후 철사를 들고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철사가 나의 가시가 되어 60년 동안 나를 찔렀으나 내가 대성서 학자가 되게 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게 족하도다."
조개에서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참 신비합니다. 조개가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바닷물이 철렁거리면서 모래가 조개 속으로 들어갑니다. 거친 모래가 들어가면 조개는 아프니까 진액을 내서 감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면 그것이 바로 진주가 되는 것 입니다. 날카로운 모래일수록 진주가 더 강하고 빛나는 진주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여 강하게 만드는 통로가 됩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바울 사도의 결론인 10절 말씀을 읽음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아멘.
가시의 은혜
고후12장 1~10절 / 연제원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종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특별한 권면을 하면서 자기가 14년전에 엄청난 계시와 환상- 낙원체험을 조심스럽게 간증을 하면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찌르는 가시가 있어서 그 가시로 인해 순간 순간 고통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가시' 는 원문을 보면 '스콜로프스' 인데 그 뜻은 말뚝, 뾰족한 창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몸에 말뚝 흑은 뾰족한 창과 같은 가시가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해결해주고 질병은 고쳐주었지만 자신에게는 가시가 있어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있고, 그 가시를 믿음으로 극복하여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에게 있는 가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가를 바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본문속에 바울의 가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을 괴롭힌 가시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론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세가지만 보면,
1) 육체의 질병입니다.
육체의 질병에도 여러 주장이 있는데 어떤 이는 눈병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회심할 때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빛을 체험한 이후에 눈이 나빠졌다는 것입니다.(갈4:15,6:11) 또 간질병이라고도 하고(갈4:14) 또 말라리아 병이라고도 하고, 두통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병이든지 간에 바울은 육체의 질병의 가시로 인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2) 사람 때문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10절에 보면 "능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아서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괴롭힘 당하고, 반대를 받고, 공격을 받고 능욕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인 모독을 수없이 당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돌에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교인들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고 따라다니면서 반대하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때론 순진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바울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 포기하고 복음을 위하여 사는데 그 중심도 모르고 사탄에게 이용되어서 자신을 괴롭히니 그 가시가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3)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육적인 욕망과 갈등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전생애를 바쳤습니다. 평생 전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바울을 사탄은 넘어뜨리기 위하여 유혹을 수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큰 가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가시를 통해 깨닳은 것이 무엇입니까?
1) 가시는 나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7절말씀을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오히려 신앙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오히려 가시는 겸손하라고 주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려고 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분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부러워하는 몇가지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 가말리엘같은 휼륭한 율법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율법을 공부하는 것,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들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또 헬라철학을 공부하여서 당시 최고 엘리트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된 후에 기도하면 병자가 일어납니다. 귀신이 도망을 갑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기도하다가 천국에 갔다오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바울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정도 되면 자기를 내세우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교만하면 그날로 은혜는 사라지고 말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바울에게 가시를 주셔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시 때문에 늘 자기를 낮출 수 있었습니다.
2) 가시를 통해 자신은 약한자이며 무력한 자이며 방법이 없는자라고 여겼으며 또한 그 무력감으로 인해 기뻐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8절을 보면 바울은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9절에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기도하고 기도한 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시가 없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가시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시는 것을 알고 가시가 있는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더욱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베풀고,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는 능력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결론 /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가시의 은혜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가시가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가시로 인해 자신이 약한자, 무력한자라고 여기는 은혜를 누렸던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가시의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점도 강점이 될 수 있다
고후12장 1~10절 / 조상호목사
옛날 우화 중에 다섯 손가락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섯 손가락이 함께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첫째 손가락이 “얘들아, 내가 엄지니까 최고야.”라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 손가락이 이에 질세라 ”무슨 말이야, 무언가를 가리킬 때는 내가 제일 많이 사용된다고.“하며 자랑을 합니다. 셋째 손가락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손가락들을 쳐다보며 ”너희들 웃기는 구나? 한번 키를 재보자. 누가 제일 크니? 우리 중에 나보다 큰 손가락이 어디 있니? 내가 제일 크다.”라고 하며 으스댔습니다. 넷째 손가락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 너희들 말을 내가 다 인정한다. 그러나 약혼이나 결혼 같은 귀중한 사랑을 서약할 때 내 손가락이 사용되는 거 알지?”라고 하며 잘난 체했습니다. 손가락들은 모두 다 자기 자랑을 한 가지씩 내놓았지만, 마지막 남은 다섯째 손가락은 내놓을 자랑거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손가락이 당당히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나 없으면 병신이다.”
저는 이 <다섯 손가락 이야기>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를 ‘자기 PR(Public Relations)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홍보하고 자기를 선전하고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자기의 학식을 자랑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힘을 자랑합니다. 물론 복잡한 현대에서 개인이나 기업이나 나라나 한결같이 ‘자기 PR’은 중요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소비자나, 사람들에게 자기를 기억하게 하는 ‘자기 PR’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기 PR’의 특징은 대부분 자기의 특기나 취미, 그리고 자기가 이루어놓은 업적, 등과 같은 장점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단점을 PR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만약 자기의 단점이나 부족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의 단점이 아닌 장점을, 자기의 핸디캡이 아닌 특기를 자랑하며 자기 PR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활동하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반상식을 뛰어넘어 장점이 아닌 단점을, 자기의 특기가 아닌 핸디캡을 자랑했습니다. 원래 그에게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출생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만큼 유대전통을 어릴 때부터 지켰던 사람입니다. 혈통으로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을 배출한 베냐민지파 출신입니다. 또 율법을 철저히 배우고 그 율법대로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또 당시에 어디에 가서도 당당할 수 있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가문과 학벌과 신분 등의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자랑거리가 바뀌었습니다. 자기의 장점은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히려 일반상식과 반대로 자기의 약점을 자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9부터 30절을 보면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라고 하며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강점은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만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9절에서 또 다시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하며,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마음속으로 자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약한 것들’은 본문 7절에 의하면 ‘육체의 가시’를 의미합니다. '가시'라는 헬라어는 장미송이에 붙어있는 가시 정도가 아니라 말뚝이나 혹은, 뾰족한 창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육체에 말뚝이 박혀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손끝에 조그마한 가시 하나가 들어가도 견딜 수가 없는데, 살 속에 말뚝이 박혀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이 육체의 가시가 어떤 것인지를 성경에서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두통이나 간질이나 말라리아 또는 안질 등의 질병 중에 하나라고 추측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통당하던 질병이 무슨 질병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탄의 사자"라고 할 만큼 큰 고통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의 입장에서 보면 큰 핸디캡입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그 자신 스스로도 실망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바울은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만을 자랑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놓고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오히려 자랑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에게 자랑할만한 장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상식과 전혀 맞지 않게 자신의 콤플렉스를 자랑했을까요? 왜 사도 바울은 장점이 아닌 단점을 자랑했을까요? 다시 말해서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약점은 기도하게 한다
첫째로 약점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었던 바울은 그 약점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약점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만약 기도할 수 있는 약점이라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반대로 풍요와 번영이 나에게서 기도를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저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이 주는 유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당한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한다면 그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유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약점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한다면, 그 약점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요즘 40일 특별새벽기도 시간에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 미국에서 가장 부흥하는 교회 중의 하나인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입니다. 사진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릭 워렌 목사님은 평범하게 생겼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뚱뚱합니다. 어떻게 보면 도무지 2만 명 이상의 큰 교회를 감당할 분 같지 않고, 베스트 셀러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쓰고 계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한 가지 이유는 그의 약점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간질 증세가 있었습니다. 자주 기절을 했습니다. 간질병은 아닌데, 간질병 비슷한 희귀병이었습니다. 미국에 16명만이 이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병은 아드레날린이 몸속에서 분비가 되면 그것이 몸속에서 소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괴롭히고 나중에는 시력마저 가물거리게 하고 심하면 정신을 잃게 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그가 절대로 선택해서는 안 되는 직업은 목사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할 때 설교자의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아드레날린은 일반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는 물질이지만, 릭 워렌 목사님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는 물질이었습니다. 온 몸이 얼마나 괴로운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끝에 손가락 하나를 걸고 매달려 있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진 고통을 참으며 매 주일에 한 번씩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할 때마다 "하나님, 제발 한번 만으로 족합니다. 더 이상 못합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부흥해서 두 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두 번 만으로 족합니다. 더 이상 못합니다." 얼마 있지 않아 세 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세 번 만으로 족합니다. 더 이상 못합니다." 지금은 네 번 설교를 하고, 2만 여명의 교인들을 섬기는 큰 교회의 목사님이 되었고, 전 세계에 영향력 미치는 귀한 분이 되었습니다.
릭 워렌 목사님의 신체적인 약점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의 육체적인 가시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은 영국의 스펄전(Spurgeon)목사님이나 미국의 무디(Moody) 목사님 같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된 비결은 자기의 무능과 부족함을 깊이 절감하고 죽도록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린 데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난을 싫어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렇게 싫어하는 약점과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 기도합니까? 잘 나갈 때 입니까? 고난당할 때 입니까? 고난당할 때입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는 교만함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비벼댈 언덕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고 그 어디에서도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할 때는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해결되지 않는 가시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어떠한 약점이 지금 여러분들 가정에 있습니까?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연약함을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겸손 하라는 하나님의 싸인 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구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곤고한 때에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형통한 때에도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형편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약점은 겸손하게 한다
둘째로 약점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바울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체엄했습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만큼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 이후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했고 또 큰일도 했던 사람입니다. 2절부터 4절까지 다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는 14년 전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천사의 인도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었는지,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를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낙원에 이끌려 가서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에 따라, 성경을 쓴 것이 바로 바울 서신들입니다. 또한 그에게 있는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2절에 보면 바울이 직접 안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가서 병자 위에 얹기만 해도 병자가 벌떡벌떡 일어나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 정도의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의 능력으로 이러한 일을 일으킨다고 하며 자기 자랑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교만에 까지 이르지 않겠습니까? 자랑과 교만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교만은 외적인 자기 과시이며 자랑은 안에서 터져 나오는 감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랑이 심하면 교만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에게 가시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 가시 때문에 바울은 교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종으로 하나님 앞에 끝까지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가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뿔이 잘 생긴 숫사슴 한 마리가 연못으로 내려와 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슴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뿔을 보고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피골이 상접한 가냘픈 네 다리를 보고 이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늦은 오후, 들에서 풀을 뜯어먹던 사슴은 무성한 숲에서 자신을 향해 사자 한 마리가 살금살금 접근해 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슴은 날렵하고 빠른 다리를 이용하여 사자를 여유 있게 피해서 안전한 곳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하지만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뿔이 그만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뒤쫓아 오던 사자는 무시무시한 발톱과 이빨로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사슴을 덮쳤습니다. 결국 사자의 밥이 된 사슴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럴 수가? 내가 부끄러워한 이 다리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내 뿔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구나!”
이처럼 사람은 고통 때문에 넘어지기보다, 너무 교만해서 넘어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쿠테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 생긴 얼굴에 도취되어, 머리를 길게 길렀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노새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그가 그렇게 자랑하던 긴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에 그는 요압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그것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은 항상 교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에 여러분들에게 약점이 있습니까? 겸손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의 장점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면, 우리의 약점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고 겸손히 설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연약함이 있습니까? 건강의 문제입니까? 인간관계의 문제입니까? 물질의 문제입니까? 자녀의 문제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괜히 우리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약점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고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가 됩니다. 경마장의 주로를 힘차게 달리는 말의 입에는 자갈이 물려져 있고, 그 자갈은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은 아무리 힘 있게 달리다가도 기수가 줄을 힘껏 잡아당기면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자갈이 말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약점을 주셨습니다. 그 약점을 통해서 우리를 제어하십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그 약점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게 하십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약점이 있다면, 교만하여 제멋대로 날 뛰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제어장치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으십니까?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약점과 가시들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드는 은혜의 장치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에, 겸손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결국에는 복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약점은 능력을 경험하게 한다
셋째로 약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의 약점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와 겸손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약점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계속 머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 속에 하나님이 은혜가 있습니다. 골이 깊으면 길을수록 산이 큰 것처럼,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속에 담긴 축복도 큽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약점을 극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주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환자였습니다. 그에게는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세계전쟁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음악가 베토벤은 청각 장애자입니다. 음악인 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청각장애는 음악가에게 있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작곡가가 된 것입니다. 링컨은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습니다. 사실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학벌이 변변치 않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약점입니까? 그러나 무학력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숱한 인물들은 실패가 없었고, 고통이 없었고, 약점이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부끄러운 약점이 있었고, 피하고 싶은 고난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고난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도 마차가지였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수많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약할 때에 그가 강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점을 기뻐하고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장애와 질병이 여러분들의 약점입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의 가시입니까? 제대로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경제력 없는 남편이 여러분들의 가시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썽을 일으켜서 부모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는 자녀가 여러분들의 가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입만 열었다 하면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가슴에 못질하는 이웃이 여러분들의 가시입니까?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육체적인 질병이 여러분들의 가시입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의 약점이며 가시입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가시보다도, 가시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약점이 문제가 아니라, 약점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똑같은 고난가운데서도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고난 속에서, 어떤 사람은 좌절하여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 고난을 디딤돌로 삼아서 더 성장하고 더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요즘 세계 최고의 스포츠 스타 중 한 사람으로 단연 미국 출신의 랜스 암스트롱을 꼽고 있습니다. 그가 지난 7월26일 ‘투르 드’라고 불리 우는 <프랑스 도로일주 사이클 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입니다. 이 경기는 섭씨 35도의 폭염과 빗줄기 속에서 해발 2,000m 이상의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 구간을 포함해 총거리 3,400㎞에 이르는 코스를 23일간 일주하는 인간 한계의 시험장입니다. 그런데 그는 대회 101년 역사상 처음으로 6차례, 그것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계최고의 스포츠스타로 꼽히는 이유는 단지 자전거를 잘 탄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1996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생존율 50%의 고환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 쪽 고환과 뇌의 일부를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고, 눈물겨운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패달을 밟기 시작하여 마침내 재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기라고 부르는 ‘투르 드’에 출전하여 지난 99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6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언론은 그를 가리켜 ‘인간 승리의 대명사’이자 ‘전 세계 암 환자들의 희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거의 죽었다 살아난 남자, 그래서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남자, 1%의 우승확률을 식지 않은 열정으로 극복한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미국에 암스트롱 암 연구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타임지에 의해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가시가 문제가 아니라, 가시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문제가 아니라, 약점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 ‘가시’가 저주가 될 수 있고, ‘가시’가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십자가’를 ‘가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불신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무능력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시가 불신자들에게는 저주로 생각이 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가시가 아니라, 가시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약점이 아니라, 약점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그 때가 곧 강할 때입니다. 약함이 있습니까? 그 때가 곧 강할 때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 만나는 것을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들 가정에서 사용하는 숯과, 귀금속중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이 탄소 ‘C'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탄소 원소에서 하나는 아름다움의 최고의 상징인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보잘 것 없는 검은 숯 덩어리가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인생에 똑같은 것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다이아몬드로 만드느냐, 숯으로 만드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벽난로에 던져지는 시꺼먼 숯덩이 같은 인생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같이 번쩍번쩍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처럼 여러분에게 있는 고통과 고난과 약점을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가시는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저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약점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부끄러운 것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고난과 가시와 약점 앞에서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해결되지 않는 약함 때문에 고민하기보다, 바울처럼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약함 중에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고난과 약점을 장애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그 고난과 약점을, 빛나는 인생을 살기 위한 디딤돌로 삼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약점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강점으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랑하고 축복받자
고후12장 1~10 / 엄기호목사
네 개의 강이 서로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나일강이 긴 목을 빼고 거만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4000마일 이상을 여행한단다. 나보다 더 긴 강은 없을 걸.” 그러자 다뉴브강이 입을 삐죽였습니다. “나는 매일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지. 내 품에 안긴 저 수많은 배들을 좀 보렴.”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갠지스강이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이 어리석은 친구들아. 나를 좀 보라구. 사람들은 이 거룩한 물에 몸을 씻기 위해 몰려들고 있어.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는 내가 최고의 강이 아닌가.” 이때 세 강의 다툼을 지켜보던 작은 개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자랑할 것이 없어요. 다만 저는 비가 오면 그것을 저장했다가 논밭으로 흘려보 내지요. 그것으로 논밭에는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굶주린 사람들을 돕는 답니다. 저는 단지 물을 흘려보내는 작은 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 려 함이라”(9절)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인이었고 당시 최고 의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자랑할 것은 자신의 나약함뿐 이며, 그 나약함을 강하게 하시는 그 리스도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1. 자기의 부족을 자랑하자.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처럼 자기의 부족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말씀하셨습니다 .
자기 부족과 허물을 아는 사람은 타인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 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 했듯이 자기의 부족을 자랑하는 사람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갑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영을 분별하게 되고(고전 2:14), 거짓 영에 미혹되지 않으며(요일 4:1), 하나님의 숨을 비밀을 받았던 노아와 같이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됩 니다. 뿐만 아니라 돌아온 탕자와 같이 잃은 신분을 회복하는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됩 니다(눅 15:22).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 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 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부족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그 은혜 가운데서 기쁨이 넘치는 삶,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는 삶, 은혜 주심을 감사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2.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 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하기위해 자아가 날마다 죽었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무엇이 죽어야 합니까? 우리의 혈기가 죽고, 고집이 죽으며, 인간성이 죽고, 죄악성이 죽어야 합니다(골 3:5-6). 이렇게 우리의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갈 5:24).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며, 주님이 원하시는 수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계 6:11),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롬 8: 13-14).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 면 산다고 말했습니다(롬 8:13). 따라서 우리의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을 날마다 영으로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잠잠히 바라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시 37:7).
3. 십자가를 자랑하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십자가를 자랑했을 때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 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할 때, 말씀의 능력, 기도의 능력, 찬송의 능력이 생깁니 다. (행 3:1-10, 히 4:12, 수 6:1-7)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할 때 은혜가 지속됩니다(행 3:11). 항상 기쁘고, 감사하며, 늘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삶에 은혜 받은 증거가 나타납니다(시 34:1-4). 이세상의 것들은 자랑을 할수록 공허하며, 헛될 뿐이지만 십자가는 자랑할수록 은혜가 더하며, 마음에 사랑과 평안과 찬송이 넘쳐납니다. 따라서 날마다 십자가를 자랑함으로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4. 열매 맺는 것을 자랑하자
사도 바울은 성경을 집필하고, 선교를 통해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 사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목숨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며 풍성한 신앙 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 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 이라”(고후 1:14)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랑할 것은 밀알이 썩어지듯 복음 안에서 썩어짐으로 얻은 열매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주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 듯이 우리 역시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합니다(요 15:1).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의 양분을 받고, 그 안에서 성장할 때(엡 4:13) 풍성한 열 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겔 34:26) 한편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에는, 천국 곡간에 들어가는 알곡의 축복(마 3:12), 주님 께 영광을 돌리는 삶(요 15:8), 주님께서 예하신 상급을 받는(딤후 4:8) 축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 맺지 못한 자는 과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심판의 메시 지를 선포하셨듯이(마 3:12), 쭉정이가 불에 던져지듯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 니다(마 13:30). 또한 열매 없는 무화가나무가 저주를 받았듯(마 21:19) 열매를 맺지 못한 성도에게는 저주가 예비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날 마다 자아를 죽이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삶 속에서 예수님만을 나타내는 성도가 되어 야겠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 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을 나의 자랑으로 삼아 하늘의 예비된 상급과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바울의 체험들
고후 12장 1~10절 / 김윤기목사
바울은 본문에서 셋째 하늘에 올라간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놀라운 신비 체험입니다. 그러나 이런 높은 영적인 신비 체험과는 반비례로 그의 육체는 사단이 주는 가시로 고통을 느끼었습니다. 이런 영육의 불균형에서 그는 오직 주를 자랑하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이 부분은 그의 영적 신비체험과 거기에 반비례되는 육적 약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세 가지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놀라운 신비의 체험을 통해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1-6절).
고린도 교회의 바울을 반대하던 유대주의자들은 존경을 받기를 열망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천거서'(3:1)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으로부터 존경 받는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여겨 주실 것을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귀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존귀하게 여겨 주셨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바울은 환상과 계시를 보여 주심으로써 그를 존귀케 하셨습니다.(7회)
바울은 회심하던 바로 그 날에 영광스런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행9:3). 또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와서 섬기는 환상을 보았고(행9:12), 바울을 세게 선교사역을 위해 두 번째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만 성령님이 막으시고 유럽으로 인도해 주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행16:9). 바울이 동양과 서양의 분기점인 에게해를 건너 유럽의 첫 대륙인 헬라의 마게도냐 빌립보에 가서 선교를 한 것은 환상에 의해서였습니다.
또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시 고린도에서 개척을 할 때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환상으로서 바울을 위로 하였습니다. 행18:9-10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주께서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행22:17-21).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바울은 다시 환상으로써 감옥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행23:11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행27:23에서는 천사가 풍랑 가운데 나타나, 그와 함께 행선한 자들이 무사할 것을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소명과 사역에 관계된 이러한 특별한 환상과 더불어, 거룩한 진리의 신령한 계시 또한 바울에게 주어졌습니다(엡3: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현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깊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환상의 사람이 되어 존귀케 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하늘로 이끌어 올리시고 다시 땅으로 보내주시는 체험을 함으로 존귀케 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체험은 이 서신을 쓰기 14년 전에 이루어진 일인데, 대략 주후 43년경으로 추정합니다(갈2:1).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를 그가 라고 말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에 있는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이 체험을 들려주기 위하여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체험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을 하늘에 이끄셨는지, 아니면 몸은 남고 영혼만 이끄셨는지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천국이 실제로 있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곳으로 이끄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째 하늘에 까지 올라갔다 왔다는 것입니다. '세째 하늘'이란 무엇입니까? 그 곳은 낙원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하늘 중의 하늘입니다.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객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낙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데이손'은 페르시아어로 '동산'을 뜻했는데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차용했습니다. 바울은 실제의 하늘나라를 갔다 온 체험으로 존귀케 했습니다.
3) 바울은 낙원에 있는 동안에 '말할 수 없는 말'을 듣는 체험을 했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신적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낙원에 갔다 왔다는 영광의 체험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그를 매우 교만하게 만듭니다. 보통 사람들은 14년 동안 침묵하기보다 그것을 곧 세상에 퍼뜨려 유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단지 진리만을 말했을 따름입니다. 여기서 몇 번이나 그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자랑하게 되어 교만하거나 자고할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이렇게 큰 체험을 했음에도 바울이 어떻게 계속 겸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부여하신 두번째 체험 인 육체의 가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여 쓰시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예레미야. 바울 등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어떤 신적인 능력을 부여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선택으로 생애 속에 11번 정도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적인 체험을 합니다.(①창12:1 ②12:7 ③13:14 ④15:1 ⑤15:12 ⑥17:1 ⑦17:9 ⑧17:15 ⑨ 18:1 ⑩21:12; ⑪22:1)
또 하나님은 모세를 위하여 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에게 민12:6-8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 하나님을 만나고 신비의 체험을 하여 존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육체의 가시를 갖는 체험을 통해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7-8).
본문인 고후12:7-8에서 바울에게 주어진 이 특수한 은총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바울이 그런식으로 실족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속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를 주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이 가시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간질, 두통, 그리고 안질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질이나 간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안질일 가능성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빛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갈 4:13-15) 간질일 가능성은 바울 자신이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로 재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밖에 참고로 '언어의 장애'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근거로 바울이 편지로는 유창하지만 첫 인상이 나쁘고(갈 4:13) 외모나 언변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 가시가 그의 삶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서 성도의 보존을 위해 사용됨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 가시가 물러가기 위해서 세 번 주께 간구했습니다. 바울은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 시킨 이유는 고난을 통해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민족으로 쓰시기를 원하여서입니다. 그러나 후에 저들은 하나님을 져버리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불순종 하다가 끝내 멸망을 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해서 우리에게 고난의 가시를 허락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겸손 하라는 뜻으로 받아 드리어 더욱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약 할 때 강하여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9-10).
바울에게 가시는 사단의 멧세지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의 멧세지였습니다. 그 가시는 강하게 하시는 은혜의 멧세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약해지는 것을 허락 하십니다. 그래서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약하며,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강한 것입니다.
모세는 약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었습니다.
(출4:10-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예레미야도 약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었습니다.
(렘1:4-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베드로도 불학무식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었습니다.
(행4:8-13)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적인 고통이 주의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는데 반드시 장애가 되리라는 법도 없으며, 모든 질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고난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 약할 때 강해진다는 진리의 말씀대로 사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