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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아시안컵의 준우승에도 슬슬 담담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보니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우리 대표팀과 슈틸리케 감독이 얻은 것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어떤 점을 배우느냐에 따라 앞으로 있을 월드컵과 다음 아시안컵에서는 더 큰 성공을 이룰 수도 있다. 바라기는 이번 대표팀의 선전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 전반에 대한 힘이 길러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 되겠지만. 2015년 아시안컵 준우승으로 컨페더레이션스컵 티켓은 놓쳤지만, 우리 대표팀과 슈틸리케 감독은 생각보다 큰 것들을 얻었다.
(△ 시상식. 우승컵은 다음 기회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1. 팬들의지지
아시안컵에서 얻은 최대의 소득은 바로 팬들의 지지일 것이다. 작년 여름 브라질에서 귀국하면서 엿을 받아야했던 대표팀은 이번 대회 후에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은 좋게 말해서 너무도 열정적이라, 잘하지 못하면 끔찍할 정도로 비판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잘했을 때엔 뜨겁게 환영해준다. 결국 축구라는 스포츠를 지탱하는 ‘팬’들의 뜨거운 지지는 앞으로 축구 대표팀이 얼마간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의 실패에도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 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앞으로 축구적 차원에서 중요한 대회는 당분간 없을 것이기에 비난 여론에 휘말릴 요소도 딱히 없다.
특히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대회를 통해 축구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물론 글쓴이 본인도 슈틸리케 감독이 좋은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슈틸리케 감독은 우리 축구팬들의 사랑을 받을만 했다. 선수 선발 과정이 무척 신선했고 선수의 기용 역시 훌륭했다. 여러 선수들을 두루 쓰기도 했고 같은 선수도 위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전술적 변화를 가져온 것도 좋았다. 특히 매 경기 선수들의 입장에 손을 부딪히며 힘을 불어넣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국인의 정서에 딱이었다. 외국인 감독으로서 축구협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동시에 축구협회의 비호는 바랄 수 없기에 성적 부진에는 그대로 ‘팽’ 당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폭적인 팬들의 지지는 슈틸리케 감독에게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슈틸리케 감독 역시 일종의 ‘용병’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감독님’이 되었다.
이런 호의적 여론 덕분에 분명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의 축구를 펼칠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우리가 보여주었던 약점은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만약 성적이 부진했다고 한다면 이번 대회 후 이어질 평가전과 월드컵 예선에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성과와 팬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정협처럼 잠재력이 있는 새로운 얼굴들을 발굴할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결승전의 무한 시프트와 같은 전술적 시도도 비교적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애초부터 시간 부족을 이유로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도 않았음에도, 정말 훌륭하게 대회를 치러낸 슈틸리케 감독에게 바야흐로 시간을 줄 수 있는 때가 된 것이다.
2. 팀 내 조직력의 비약적 향상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가장 중요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은 감독-선수 간의 신뢰 관계이다. 사실 본인이 엘리트 축구 선수코스를 밟지 못한 입장에서 함부로 국가대표팀 내부의 분위기까지 정확히 이해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다들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대회를 통해 슈틸리케는 본인이 이 팀의 ‘보스’임을 증명했다. 슈틸리케가 깜짝 발탁한 이정협은 맹활약을 펼쳤고, 경기 전날 기자회견에 동반한 선수마다 다음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슈틸리케의 선택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여건이 좋지 않을 때도 승리하면서 슈틸리케 감독의 축구는 ‘지지 않는 축구’라는 것을 팀원 전체가 몸소 체험하는 기회였다. 동시에 선수들이 감독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이제 와서 다시 꺼내고 싶진 않지만 최강희 감독 시절 대표팀 내에 잡음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슈틸리케 감독이 이번 대회를 통해 팀을 장악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회 전에 작성한 글에서 몇 차례 언급했듯, 짧은 기간 내에 사우디와의 평가전을 포함하여 총 7경기를 치르면서 선수들 간의 조직력을 맞출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해외파가 이제 팀의 절반 이상을 이루는 현 상황에서, 선수들이 손발을 맞추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슈틸리케 감독 부임 후 아예 새로운 체제에서 팀을 다시 만드는 과정이었기에 조직력 문제는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각 클럽들이 의무적으로 선수를 차출해주어야 하는 아시안컵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였다. 예선 탈락이나, 8강전 탈락이라면 갖지 못했을 기회다. 앞으로도 대표팀 명단에는 꾸준한 변화가 있겠지만, 이번 대회에서 핵심 멤버들이 다져놓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더 용이하게 조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수 간의 신뢰 관계도 분명히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번 대회는 특히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익히 알고 있듯 부상으로 중앙 공격수들이 이탈하여 이정협이라는 생소한 선수가 선발되었다. 대회가 시작한 이후에도 이청용과 구자철이 부상으로 이탈했는데, 두 선수가 국가대표팀 내에서 갖는 위상을 생각하건대 단순한 선수 두 명의 이탈은 아니었다. 이런 악재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27년만의 결승 진출을 이뤘다. 손흥민이나 기성용이 돋보이긴 했지만, 그들에게만 의존하는 팀은 분명 아니었다. 필드 내에서 믿을만한 동료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지만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대회를 무사히 마친 멤버들 사이의 신뢰관계는 돈독할 수밖에 없다. 이번 대회에서 특히 대단했던 점은 모든 선수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든 팬들이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울 때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들 한다. 함께한 전우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앞으로의 대표팀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3. 소중한 경험. 패배로부터도 배운다.
사실 우리 대표팀은 무척이나 어린 팀이다. 아시안컵에 참가한 23명의 선수 중 곽태휘, 차두리, 김창수, 이근호를 제외하면 30살을 넘은 선수가 없다. 김창수와 이근호 역시 만으로는 20대라고도 주장할 수 있는 29살이니 정말 어린 팀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렇게 어린 선수들이 아시안컵이라고 하는 큰 대회에서 토너먼트를 마지막 경기까지 진출하여 치러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국가대항전인 아시안컵의 결승이 주는 압박감을 경험해본 선수가 몇이나 있을까. 월드컵만한 긴장감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 우리 어린 선수들에겐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부상과 감기 등 여러 악재에도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자신감을 얻는 모습을 대회 전반에 걸쳐 볼 수 있었다. 예선 1,2차전에선 상대의 압박에 허둥대며 공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4강전부터는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한 듯 경기를 끝까지 안정적으로 주도했다. 공을 잡는 모습에서도 자신감이 느껴졌다.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점유율을 포기한 채 호주의 거센 공격을 수비의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한다면, 결승전에서는 맞불 작전을 놓으면서 훨씬 더 나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대회가 점점 진행될수록 경기력이 향상되었고 4강전, 결승전의 경기력이 가장 뛰어났다.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끝내는 이겨냈기에 소중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번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했다면 더 큰 자신감을 얻어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오히려 다른 정신적 자양분을 얻어가는 기회가 되었다. 눈앞에서 우승을 놓치는 아픔을 겪었으니, 승리의 무게감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패배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승리의 기쁨도 제대로 알지 못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인터넷 속도가 위대하다는 사실은, 밤새도록 컴퓨터를 켜놔야 예능 한편을 받을 수 있다는 사우디에서 더 절실히 느껴지는 법이다. 이번 준우승을 통해 우리의 어린 선수들은 다음 대회에선 분명 더 성숙한 선수들이 되어있을 것이고, 결승전에 올랐던 경험을 살려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것이다. 호주도 지난 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지만 준우승에 그쳤고, 결국 올해에는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4년 후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떨까.
4. 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 – 시간이 필요해
지금 슈틸리케 감독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유난히도 많이 하는 것 같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해가 될 일이다. 불과 4년 전 2011년 아시안컵이 또렷이 기억난다. 차두리의 마지막 A매치가 아시안컵 결승전이었듯, 2011년에는 박지성과 이영표의 마지막 A매치가 아시안컵 3,4위전에서 펼쳐졌다. 준결승에서는 일본과 명승부를 펼쳤고, 손흥민처럼 황재원이 일본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 이정협처럼 윤빛가람을 비롯한 어린 선수들이 조광래 감독의 지지 하에 맹활약하기도 했다. 대회 이후에 감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잇따른 것도 똑같다. 당시 조광래 감독의 축구는 우리가 생각했던 전형적 ‘한국 축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패스를 중심으로 예쁘게 공을 차는 축구였다. 하지만 아시안컵 이후 계속된 부진으로 여론의 역풍을 맞아야했고, 광복절 일본에게 3:0으로 완패하면서 사실 상 조광래 감독은 팬들의 신임을 잃었다.
슈틸리케 감독 역시 이번 아시안컵에서 새로운 스타가 되었고, 지금은 우리나라 축구에 딱 맞는 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찬사의 근거는 이번 대회의 과정이 아니라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다. 슈틸리케가 평가전을 통해 보여주었던 대한민국 축구의 새로운 모습은 이번 대회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선 두 번째 경기까지 슈틸리케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과정은 전혀 완벽하지는 않았다. 대회에서의 성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전술적 이상과 대표팀의 현 상태를 고려하여 이른바 ‘실리 축구’를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슈틸리케 식 축구로 승리하는 법을 팀에 불어넣어야 할 때이다.
슈틸리케는 확실한 결과를 얻어내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과정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결국 어떻게든 승리를 따내는 것도 분명히 중요하다. 그것이 특히 아시안컵처럼 중요한 대회라면 더더욱! 이번 대회의 성과를 생각해서라도 그에게는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평가전에서 엿볼 수 있었던 진정한 슈틸리케 감독의 색을 우리 대표팀에 입힐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대회에서 노출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수비-미드필더 간의 간격 조정 문제도 해결해야 하며, 공격진에서 템포 끌어올릴 필요가 있고, 이번 대회에서 큰 재미를 못본 세트피스 역시 가다듬어야 한다. 더불어 부상으로 이탈했던 선수들을 팀에 융화시킬 시간도 필요하고, 이정협처럼 숨어있는 자원들을 찾아서 시험해볼 시간도 필요하다.
슈틸리케 감독 역시 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부침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조광래 감독처럼 우리의 신임을 잃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과거를 거울로 삼아 감독을 쉽사리 경질하는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조광래 감독의 경질 이후 시한부 최강희 감독이 팀을 맡았고 이후엔 고작 1년의 시간을 남긴 채 홍명보 감독이 부임하면서 결국 우리는 악몽같은 2014년 월드컵을 치러야 했다. 슈틸리케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질까. 아니 우리 축구팬들은 슈틸리케 감독에게 얼마의 시간을 줄 수 있을까.
(△ 동점골 후 팬들의 곁으로 달려간 손흥민. 결승전에 보내줬던 응원처럼, 앞으로도 대표팀을 믿고 응원할 수 있길.)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과 슈틸리케 감독 덕분에 1월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3,4일에 한번 꼴로 국가대표팀 경기가 열리고 마지막날을 제외하곤 전부 이겼다. 퇴근을 기다리면서도 축구 볼 생각에 행복했고 주말에는 가족과 맥주 한 잔 나누며 함께 소리지르는 것에 행복했다. 하지만 앞으로 축구 대표팀과 슈틸리케 감독이 마냥 우리를 즐겁게 하진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평가전에서 개인 기량의 우위를 앞세워 따낸 여유있는 승리보다, 제대로 된 '팀'을 꾸려 월드컵에서 강호의 상대와 박빙의 승부 끝에 따낸 1승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우리 대표팀은 팬들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했고, 대표팀 스스로도 참 많은 것들을 얻었다. 이제 대표팀이 스스로 얻은 강점들을 살려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줄 타이밍이다. 어떤 성장기의 아이도 하루만에 10cm 씩 자랄 순 없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기다려줘야 한다. 이제 팬들이 대표팀의 선물에 보답하여 믿음을 보여줄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