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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子의 경우에 우선, 한문은 5천년 전의글자인데 반해, 漢나라는 2천년전의 나라(BC 202)이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에서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때가 AC 285년인데, 세계사 시간에
지나는 천자문이 양나라 무제 때(AC 6세기) 작성되었다
한자의 음은 동한(東漢)의 허신이 <설문>에서 540부수 9353자를 설명하면서 확정지은 것에 기초하는데, 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처음에 만든 자와 후에 사용하는 자가 서로 다르다고 추측할 수 있다.
故임승국 교수의말에 따라 이를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즉, 한자는 원래가 일자 일음이면서 반절음인 반해, 지나인의 발음은 그와 틀리며 일자이음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漢子는 우리 글이다 - 재야 역사학자이자 농부인 朴文基
(1).
예를 들면 날숨을 뜻하는 '호(呼)'와 들숨을 뜻하는 '흡(吸)'의 경우 우리의 발음은 소리가 나가고 들어오는 느낌이 분명한
반면 중국은 각각 '호(呼)'가 [후]와 '흡(吸)'이 [시]로 발음돼 소리가 모두 밖으로 나가버리게 된다는 것.
또 사람의 입이 하나가 되는 소리를 형상화한 글자 '합(合)'은 우리 발음으로하면 입이 닫혀 하나가 되지만
중국 발음으로는 '합(合)'이 [허]가 돼 오히려 입이 열리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출입(出入)'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발음은 소리의 나가고 들어옴이분명한 데 반해 중국은 '출입(出入)' [츄루]라고
발음해 소리가 모두 밖으로 나가버린다.
저들은 활이나 총 등을 쏜다는 사(射)자를 ‘써’로 발음하는데, 우리가 발음하는 ‘사’처럼 앞으로 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들어오는 소리에 가깝다. 또한 우리는 사(射)자를 ‘석’으로도 발음하는데, 역시 앞으로 나가는 소리다. 그러나 저들은 아예 ‘석’이라는 발음조차 없다.
또 ‘내외(內外)’ 할 때 내(內)자를 ‘네’로 발음하는데, 우리처럼 혀가 안으로 꼬부라들며 들어가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소리에 가까운 발음이다. 그 글자가 안을 상징하고 속을 뜻하는 글자인데도 말이다.
저자는 이같은 음운학적 증거외에도
(2).
우리 문화에도 다양한 증거가 있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집 '가(家)'에 돼지 '시(豕)'가 들어있는 것은 집안에서 돼지를 키웠던우리 고유의 풍습을 나타낸 것으로
이는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풍습은 오늘날 전라도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논’을 형상하거나 뜻할 만한 문자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처럼 ‘논’이라는 뜻의 답(沓)자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논을 ‘수이티엔(水田)’이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인삼(人蔘)을 재배하는 기법 또한 근래에 배워서 다량으로 생산해 내고 있다
'날일(日)'자는 해 모양을 상징한 문자이다. 그렇다면 해와 같이 둥글게 그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해 안에 까마귀 그림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 문자를 만든 민족은 금까마귀 신화를 가진 민족이다. '날일(日)'자가 만들어지기 이전 수만년 전부터 그러한 신화를 전하여 오는 민족은 한민족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날일(日)'자 역시 우리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지나에서는 종자를 나타낼 때 '씨(氏)'라고 쓰지 않는다. '씨(氏)'는 그런 의미도 아니다. 오직 성씨만을 '씨(氏)'라고 한다.
그런데도 성씨를 나타낼 때 쓰는 '씨(氏)'자는 씨앗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트는 모습에서 나왔다. 지나족이 이 문자를 만들었다면 종자를 '씨(氏)'라고 표현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씨(氏)'는 종자와 성씨 모두에 사용된다. 따라서 '씨(氏)'자 역시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3).
중국은 말과 문자가 엄연히 다르다. 중국말을 문자로 써 놓은 것을 백화문(白話文)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사람들만이 통하는
것일 뿐 우리 나라나 일본, 대만의 원주민들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건(物件), 걸인(乞人) 등의 말을 문자로 쓰면 글이 곧 말이고, 말이 곧 글인데
중국인들은 물건을 뚱시(東西), 걸인을 훠쯔(花子) 등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그 말을 배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박문기]
대만의 원주민들은 본시 유구인(琉球人)으로서[옛백제,왜-대륙의 동이왜,고조선땅] 우리와 어순이 똑같고 풍속이 비슷하여 노랫가락, 타령 등의 박자가 우리와 똑같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어른이 상투를 틀고 아이들이 머리를 땋는 방식이 우리와 똑같았으며, 이 문자를 해독하는 방법까지도 우리와 똑같아 중국민족과는 영 다른 민족이다
삼위태백
옛날 하늘나라에는 어른 환인이 있었는데 그 아들 환웅이 누차 하늘 아래에 뜻을 두었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환인)는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 즉 세 사람이 차례로 제단 앞에 단정히 앉아 콩을 바치고 고하는 데가 있어 가히 크게 인간을 도울만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보내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사람들이 콩을 천신께 바치고 고했던 산마루 신단수(神檀樹)아래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름했는데 이가 바로 환웅천왕이시다.
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炳),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의 장을 지휘하여 무릇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세상에 머물면서 이치로써 다스렸다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위(危)자는 홀로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결코 위태롭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자가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배울 때의 자세를 ‘위좌(危坐)’라 했던 것이다.
대략 그러한 뜻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삼위(三危)란 세 사람이 차례로 무릎을 꿇고서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즉 제사의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태백(太白)이란 바로 콩을 제수(祭需)로 삼아 천신께 고했다는 말이다.
위글은 박문기 著 『한자는 우리글이다』
대개 태(太)자를 ‘크다’, ‘심하다’, ‘맨 처음이다’는 뜻으로 훈독(訓讀)하는데, 우리는 ‘콩’이라는 뜻으로도 훈독해 왔다. 지금까지 태(太)자를 콩이라는 뜻으로도 훈독하는 나라는 오직 우리 나라뿐이다.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역사 이래로 콩을 뜻하는 글자로 훈독한 적이 없다.
이어서 백(白)자는 존전에 ‘고한다’, ‘사뢴다’, ‘아뢴다’ 는 뜻으로 훈독하는 글자이다. 그러므로 백(白)자를 여기서 흰색을 상징하는 글자로 훈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태백(太白)이라는 산의 이름이나 지명은 바로 콩을 천신(薦神)한 데서 유래된 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콩은 최초로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사람을 연결 시켜준 곡물이었다. 그러한 의미는 환웅천왕이 태백산 마루 신단(神壇)의 나무 아래 내려왔다는 수(樹)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신단수(神檀樹)라는 수(樹)자는 나무를 형상한 목(木)자에 땅을 상징하는 부호 -와 하늘을 상징하는 부호 | 가 합해진 十자 아래 콩을 뜻하는 두(豆)자를 쓰고 법을 상징하는 촌(寸)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삼위태백은 명사로 읽을 것이 아니라 형용사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마을에 있는 노거수(老巨樹) 즉 큰 나무를 ‘당산(堂山)’이라는 신목(神木)으로 정하고 정성을 드렸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매년 정월이면 온 동네가 합심하여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데가 있다. 거기에 마을을 수호하는 신이 머물러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사상에 반드시 콩나물을 올리고 있다. 당산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어떠한 제사에도 콩나물이 빠져서는 아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누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았고 기록으로 전하는 바도 없지만 가히 불문율(不文律)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태초부터 콩을 제수로 삼아 제사지냈던 풍속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4).
한자의 반절음은 우리민족 중심이다.
한자는 자형(字形)& #8226;자음(字音)& #8226;자의(字義)의 3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자음을 표기하는 발음부호를 반절음(反切音)이라 한다.
반절음은 한자(漢字)로써 한자의 자음(字音)을 표기한 일자일음(一字一音)의 발음부호로써 한자를 창제한 민족의
발음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깝게 발음하는 민족이 한자의 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나족의 발음과 우리민족의 발음 가운데 어느 민족의 발음이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까운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백두산(白頭山)을 예로 들면, 백(白)의 반절음은 박맥절(薄陌切)로서 원음이 '백'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바이(bai)'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백'이다. 두(頭)의 반절음은 도후절(徒侯切)로서 원음이 '두'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또우(tou)'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두'이다. 산(山)의 반절음은 사한절(師閒切)로서 원음이 '산'이다. 지나족의 발음도 '산(shan)'인데, 우리민족의 발음도 '산'이다.
또 밖을 뜻하는 외(外)자는 ‘우아이’하고 복음으로 발음하는데, 우리의 단음절인 ‘외’라는 발음처럼 자연스럽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밖을 뜻하는 발음이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일치하고, 지나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틀리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한자의 발음은 원래 일자일음(一字一音)인데 지나족의 발음은 일자이음(一字二音)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임승국은 한자 53,525자의 발음부호인 반음절이 모두 우리말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이계가 황하문명의 주인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보아도 한자의 기원이 우리민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약 4만 3천여 자가 옥편 속에 있는데, 글자 하나 하나마다 대개 발음기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學(학)'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우리는 '학'이라는 발음기호를 적었을테고,
지나인은 지나인은 (우리민족의 발음)한글을 모르니까 자기네 발음기호를 적었습니다.
즉 '할각절(轄覺切)'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절切'은 '할각절轄覺切'이 발음기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읽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첫글자에서는 자음(ㅎ)만 취하고
두번째 글자에서는 모음(ㅏ)과 받침(ㄱ)을 취해 읽으라는 뜻입니다.
(할의 ㅎ + 각의 악 = ㅎ+악 = 학)
이렇게 '할각절轄覺切'로 중국옥편에는 2000년동안 적혀 내려오고 있는데,
지나인은 '學'을 학으로 발음을 못하고 '쉬에'라고 합니다. 지나인은 四聲 중 입성을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경(北京)이라는 중국의 수도를 중국인들은 "베이징"이라고 읽습니다.
일본인들도 글자대로 읽는다면 역시 "호꾸교"이라고 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은 글자대로 읽어보면 "북경"이라고 읽습니다. 이처럼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글자는 두자를 써놓고
이렇게 3음절로 읽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바로 발음상으로나 구조상으로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한문자(漢文字)는 지나인들이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것이고, 한민족의 발음으로서만이 완벽히 소리낼 수 있는 것입니다. 100% 우리말로 적혀있는 것이 지나인의 옥편이고, 따라서 우리가 표준어를 쓰고 있는 한문자의 주인공입니다.
박문기는 "조(朝) 자와 우리역사"란 타이틀에서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舊唐書)」 <헌종기(憲宗紀)>에 '조(朝)는 천자가 다스리는 곳이다' ,
후한(後漢) 시대의 채옹(蔡邕)이 <독단(獨斷)>에서 '천자라는 이름이 동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풍속이 아비를 하늘이라 하고 어미를 땅이라 한다. 그러므로 천자라 하였다(天子之各號 始於東夷 其俗 父天母地 故曰天子<獨斷>)한 대목을 들이대고,
천자가 있는 궁실을 조궁(朝宮), 천자의 명령을 조명(朝命), 천자의 위엄을 조위(朝威), 천자가 정사를 살피는 곳을 조정(朝廷), 관리들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을 조복(朝服)이라 하였으며,
제후가 조선의 천자를 뵙는 일을 조근(朝覲)이라 하였고, 제후의 신하가 조선의 천자를 뵙는 일을 조빙(朝聘)이라 했으며, 천자국인 조선에 공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朝貢)이라 했다고 한다.
사당 (廟 묘) : 제후국의 군주가 집(엄, 광 广)을 짓고 조선(朝)을 향해 제사를 지낸 곳
중국인들은 ‘논’을 형상하거나 뜻할 만한 문자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처럼 ‘논’이라는 뜻의 답(沓)자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논을 ‘수이티엔(水田)’이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인삼(人蔘)을 재배하는 기법 또한 근래에 배워서 다량으로 생산해 내고 있다.
저자는 먼저 "한자(漢子)"라는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 우리는 "한자"를 한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한자"니 "한문"이니 하는 말은 일본인들이 이 땅을 무단통치하면서 만들어 낸 말이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참글"이라는 뜻에서 진서(眞書)라 일컬었고, 조선시대에 한문이라는 말이 간혹 있는 것은
한나라 선비들이 지은 문장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결코 이 문자 자체를 한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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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家)자의 뜻
인간(人間)은 ‘사람’의 뜻이지만, 원래 ‘사람[人]과 사람 사이[間]의 관계’ 즉 ‘사람 사는 세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사람 사는 세상’의 중심은 집[家]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기대는 언덕이지요.
우리 말글로 새기는 뜻 즉 훈(訓)이 ‘집’이고, 읽는 음(音)이 ‘가’인 가(家)라는 문자가 한국·중국·일본·베트남 등 동아시아 역사를 통틀어 ‘세상’의 중심을 기리는 개념(槪念)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배울 때는 ‘집 가’ 하고 소리 내어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家庭) 가족(家族) 가옥(家屋) 가사(家事) 가문(家門) 등으로 다른 단어와 합쳐서 우리 생활에서 쓰임새가 큽니다.
이 집 가(家)자의 얼개 즉 구조(構造)를 봅시다. ‘가정’의 뜻보다는, ‘가족이 사는 건물’의 뜻에 더 가까운 단어인 집 면( )자 아래에 돼지 시(豕)자가 있군요. 마치 직소퍼즐 또는 레고놀이처럼 2개의 글자를 위아래로 붙여 다른 글자 하나를 만들었네요.
‘그 안에서 돼지 꿀꿀거리는 곳’이 집이라는 뜻이 됩니다. 집 안에서 축산(畜産)을 하였던 것일까요, 애완용으로 돼지를 키웠을까요? 한자사전은 집안에서 조상님이나 신(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상 위에 올리는 제물(祭物) 즉 희생물(犧牲物)인 돼지와 이 글자가 관계가 있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물을 뜻하는 희생물은 글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 대표적인 것이 소였습니다. 소 우(牛)자가 두 글자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집 면( )자와 돼지 시(豕)자, 두 글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똑 부러지는 설명을 문자학자(文字學者)들은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한자(漢字)라고 부르는 동아시아 전통 문자(文字) 체계 [system]의 맨 처음 형태, 즉 ‘한자의 뿌리’인 갑골문(甲骨文)에서부터 등장하는 단어이니만큼, 문자 중에서도 역사가 아주 오랜 문자인데도 여태 그 뿌리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대만과 홍콩에서 문자학을 연구한 진태하 박사(명지대 명예교수)는 “뱀의 천적(天敵)인 돼지를 집 안에 들여 가족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한 생활의 모습이 문자에 반영된 것이다”라고 주장해 중국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뱀은 돼지에게 꼼짝 못합니다. 독(毒)이빨로 물어도 돼지는 꿈쩍도 하지 않지요. 비곗살이 발달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무서운 뱀을 물리치기 위해 집 안에 돼지를 끌어들인 이유(理由)이겠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서 사람이 돼지와 함께 지낸 흔적이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 유독 많이 남아 있는 점을 진 교수는 주목했습니다.
요즘 흑(黑)돼지라고 살짝 이름을 비튼 제주특산 돼지는 원래 똥돼지입니다. 똥 누는 틀 바로 아래 돼지가 꿀꿀거리는 변소(所)를 제주도뿐만 아니라 남해안 일대 농촌에서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걱정을 덜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곳[所], 해우소(解憂所)의 즐거운 돼지들 모습을 상상해 보시지요. 전남 곡성의 석곡과 같이 지금도 돼지고기 맛나기로 유명한 지역이 대표적인 곳이지요. 便은 똥오줌을 얘기할 때는 ‘변’, 쉽고 편리하다는 뜻으로는 ‘편’으로 대충 구분해 읽습니다.
인간의 똥을 깨끗이 먹어치우는 돼지의 고기가 맛나고, 그 돼지의 똥은 잡초와 함께 퇴비(堆肥)로 만들어져 농작물을 살찌우는 절묘한 순환(循環) 고리의 이치(理致)군요.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에코사이클(eco-cycle)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여기서도 봅니다. 옛사람들의 생활방식, 비록 지금과 다르지만 충분히 슬기로웠던 것임을 새삼 느끼지요.
글자가 생활의 모습 즉 습성(習性) 또는 문화(文化)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진 박사는 집 가(家)자가 동이족(東夷族)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글자뿐만이 아니라 우리 조상일 것으로 생각되는 동이족이
만든 문자가 한자 중에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주장을 담은 논문을 중국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자를 ‘중국문자’가 아닌 ‘동아시아 공동의 문자 체계(體系)’로 새롭게 이해해야 옳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한자가 초기 생성(生成)과정부터 중국만의 몫이 아니었다는 것, 또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에 못지않게 한자로 활발하게 문명(文明)을 지어온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면( )자가 왜 ‘집’인지, 돼지의 어떤 모습이 세월을 지나면서 시(豕)자가 됐는지 상상해 봅니다. 모양[形]을 본뜬[象] 글자라는 상형문자(象形文字)의 뜻을 글자들은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글자들은 하나하나 글자마다 뜻을 가집니다.
소리글자 즉 표음문자(表音文字)인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발음기호인 것과 달리, 한자는 뜻[意]을 표시[表]하는 뜻글자 즉 표의(表意)문자인 것입니다. 소리글자인 우리말은 이 뜻글자를 너끈히 보듬을 수 있게 고안됐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위대함 중 하나일 터입니다.
[토막해설]가(家)의 부수자 가 은 `갓머리'가 아니라 `집 면'
부수자 집 면( ) 아래 돼지 시(豕)를 두어 집·가족·가정·문중(門中) 등의 뜻으로 두루 쓰인다. 전문가(專門家) 학파(學派) 등의 의미로도 뜻이 확대된다. 3획의 , 7획의 豕 합쳐 10획의 家를 이뤘다. 두 글자를 합쳐 새로운 글자를 빚은 회의(會意)문자다.
부수(部首) 또는 부수자는 한자의 분류(分類) 기호이면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글자의 뜻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글자다. 수많은 글자를 분류(分類)하는 기본이며, 자전(한자사전)에서 모르는 글자를 찾을 때 활용하는 기본 글자다. 한 무더기[부(部)]의 머리[수(首)]가 되는 글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 부수자 을 ‘갓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예전의 마을 교육기구인 서당(書堂)의 선생인 훈장(訓長)이 아이들 알기 쉬우라고, 글자 모양이 갓의 머리와 비슷하다는 점을 떠올려 만든 속칭(俗稱)이 굳어진 것이다.
원래 명칭보다 더 많이 알려져 다소간 문제가 있는 이름이다. ‘집’을 의미하는 이 글자의 실제 뜻과 달라 혼동을 부를 소지가 있는 것이다. 굴뚝까지 제대로 갖춘 집 지붕을 본떠 만든 글자다. 그래서 앞으로는 집 면( )이라는 바른 훈(訓)과 음(音)을 쓰는 것이 좋겠다. 같은 집 면( ) 부수자를 쓰는 뜻이 비슷한 낱말들로 우(宇) 택(宅) 궁(宮) 실(室) 당(堂) 등이 있다. 다른 글자에서 자주 보는 부수자 중 (엄·한) (엄) (멱)도 과 비슷하게 집의 뜻을 갖고 다른 글자를 짓는 데 활용된다.
<강상헌 칼럼니스트·예지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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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유집 천부경발견으로 보는 갑골문
< 특종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발견,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
민족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역사(歷史)는
존재의 정체성과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자리매김하는 가장 분명한 준거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역사는 자주적인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주변의 중국역사에 비해 열등한 모습으로,
그리고 일본의 강점이라는 치부를 지닌 왜소화된 이미지로 투영돼왔다.
이러한 데는 우리 역사의 실체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의식의 결여,
여기에 편입한 강단사학(講壇史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古代史)는 그러한 역사 관행의 피해를 본 대표적인 분야.
이로인해 찬란한 고대사를 증거해주는 사료(史料)는 위서(僞書)로 치부됐고,
재야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고대사의 실제 모습을 증거해줄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발견돼
향후 국내의 학계는 물론 역사의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
이에 따라 본지는 "농은유집 천부경"의 의미와
박대종씨의 연구 성과가 갖는 의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기로 한다.
< 갑골문과 천부경 >
갑골(甲骨)문은
속칭 한자(漢子)라 불리우는 동방문자의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로 알려진 문자이다.
갑골문이란 명칭은
그 문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등에 칼로 새긴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은왕조(B.C 3400~3100)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환국(桓國)에서 비롯,
구전되어 오던중 환웅(桓雄)의 명에 의해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新誌, 단군시대의 천황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의 임무를 전담하다가 혁덕이후 기록을 담당했던 벼슬의 이름,
앞의 신지혁덕과는 다른 사람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것이다.
단군숭배를 기초로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따르면
배달겨레의 거룩한 3대 경전으로
- 조화경인 "천부경"과
- 치화경인 "참전계경"이 있는데
- 총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환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 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때 묻히게 됐다.
그러던중 1916년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1917년 인편으로 탑본을 대종교에 전하게 되어 비로서 다시 맥을 잇게 됐다.
< 농은유집 천부경의 발견 >
앞서 언급했듯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중 청나라 말기인 광서 25년(1899)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일대 사건에 비유될만한 충격적인 일이다.
하나는
갑골문 하면 오직 중국대륙 내부에서만 발견되는 종래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전의 인물인 민안부가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에 다수 발견, 확인됐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도은 이숭인,
- 야은 길재,
-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발견된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또 주목할점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중
발해 문왕인 지은 "삼일신고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의 한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그림문자로 돌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 子)가 부여의 법학지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한 이로 알려져있는데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으로 은허 갑골문 시기와 일치한다.
이를 종합할 때
민안부의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 및 지시하에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농은일 가능성이 많음)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년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모사본으로,
왕수긍이 쓴 당시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즉 단군 나아가 환웅시대의 천부경까지 고려 하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소급된다.
< 중국갑골문의 한계 >
중국한자의 근원은 갑골문과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주나라 때 청동에 새긴 문자,金文)이다.
시기적으로는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나라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은문에 비해 발전적인 형태가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금문은 은문으로 칭해도 무방하다.
농은유집 천부경문에는 은문이나 금문에서 발견되지 않는 글자가 있고,
은문, 금문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있어
천부경이 갑골문에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구체적으로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기록되어 있는 중복을 제외한 총 46개의 문자중
은허갑골문에서 이미 발견된 글자들은 총 32자(69.6%)이다.
이중 갑골학을 지금껏 주도해오고 있는 중국학계에서도 정확히 해독하지 못하거나
불명(不明)으로 취급한 문자들이 있다.
지(地), 환(環), 동(動), 태(太), 등이 그것이다.
동(動)자 안에 포함된 중(重)까지 합칠 경우
천부경문에 포함된 글자 중 미해독 글자는 총 다섯 글자가 된다.
특히
지(地)나 환(環)과 같은 고자(古字)의 발견은
기존 갑골학계의 연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은허문에(
)와 같은 글자가 발견됐지만 중궁의 갑골문 권위자들은 (
)을 지(地)가 아닌 다른 글자로 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곽말약은 그의 저서 "복사통찬(卜辭通簒)"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모양을 그린 ‘떨어질 타(墮)’는 본 글자라고 고찰하였다.
서중서도 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에서 무너질‘휴’자로 곽말약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天一一地一二人一三’에서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표현한 천부경문이 천지인이 아닌 천타인(天墮人) 일리 없다.
또한 환(環)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미해독문자 또는 '그물견자’로 풀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설명이다.
금문(金文)에서도 농은유집 천부경 내에 포함된 글자들중
五, 六, 七, 八, 九를 제외한 41자중 11자(26.8%)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미해독문자로 분류된 환(環)자는 농은유집 천부경문으로 해독되고 있다.
< 천부경 - 사진자료 >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더불어
오은(五隱)중에 한사람인 농은(農隱)의 유집에서 발견된 천부경문
< 기존 천부경과의 차이 >
"농은유집 천부경"을 발견.해독하기까지 알려진 천부경은 모두 네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연수가 발견한 묘향산 석벽본,
둘째는 최문창전집 ‘고운(孤雲, 최치원)선생, 사적’ 편에 나오는 최고운 사적본이며,
셋째는 노사(盧沙) 기정진(1798~1876)으로 전유하여 내려오던 노사전본이고 ,
넷째는 조선조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실려있는 태백일사본이 그것이다.
이중 태백일사본 또는 묘향산 석벽본은
한 자도 어긋남이 없이 전문이 일치하여 현재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잇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 化三
일적십거무궤화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大三合六生七八九運
대삼합육생칠팔구운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그러나
태백일사본과 묘향산 석벽본은 농은유집 천부경과 네 군데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석삼극(析三極이 아니라 新(새로울 신)자를 쓴 신삼극(新三極)이었으며,
두 번째는
대삼합(大三合)이 아니라 氣(기운 기)자를 쓴 대기합(大氣合)이었고,
세 번째는
무궤화삼(無 化三)이 아니라
종(從, 좇을 / 나아갈 종)자를 쓴 무궤종삼(無 從三)이었고 ,
네 번째는
衷(가운데 / 통할 충)자를 쓴 칠팔구충(七八九衷)이었다.
< 비교표 >
< 농은유집 천부경>
< 앞으로의 과제 >
"농은유집 천부경"은
농은 민안부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2000년초 문중인 민홍규씨가 송호수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민씨는 이같은 사실을 "뉴스피플"(2000년 1월17일)
"민홍규의 우리문화일기 - 나무에 뿌리가 없다" 는 글에서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전해진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당사학계에 의해 위.개작(僞.改作)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고 밝힌 바 있다.
민씨로부터
농은유집을 접한 송호수 박사는 유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당시 송박사는 농은유집의 천부경문에 대한 해석은 하지 못하였다.
농은유집은
언어학자 박대종씨에 의해 비로서 가치를 발현하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홍규씨가 소장해온 고본을 찾는것이다.
민씨는 고본에 대해 일본 전문감정서로부터 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고본이 공개돼 농은유집 천부경문이
고증학적 절차를 거쳐 역사적, 민족사적인 가치를 담게되기를 기대해 본다
< 일요시사 기사원문 >
첫댓글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주적인 중국에서 한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